일반적으로 후퇴하는 군대는 비록 작전상 후퇴라고 할지라도 사기가 매우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자국 내에서 영토를 내주며 후퇴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1808년 말 자국 영토도 아닌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코루냐 항구로 후퇴하던 존 무어 경(Sir John Moore)의 영국군이 추위와 와인 속에서 그야말로 녹아내리던 것을 상기해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 후퇴할 때는 사기 뿐만 아니라 부상자와 환자, 쌓아놓았던 각종 보급품의 처분 등 온갖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당장 후방 걱정은 하지 않고 날랜 부대들로 쫓아가기만 하면 되는 추격군의 입장과, 부상병과 보급품을 수습해서 움직여야 하는 후퇴군의 입장은 다를 수 밖에 없고, 보통 그런 문제들 때문에 결국은 후퇴하는 군대는 추격하는 군대에게 따라잡히기 마련입니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후퇴하는 군대의 사기는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에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1812년, 유럽 사상 최강의 군대였던 그랑다르메에게 쫓기는 러시아군의 후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랑다르메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유럽 사상, 아니 지금도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하나라는 나폴레옹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1808년 말~1809년 초의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의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서 후퇴하는 영국군의 후위부대였던 제95 라이플 연대의 후퇴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영국에서 그린 것이니 그나마 꽤 질서정연하게 나옵니다만, 실제 벌어졌던 아비규환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nasica/6862633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의외로 빌나에서 후퇴하던 러시아군의 사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먼저 여기에는 제1군 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의 유능함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번 후퇴의 의미와 목적을 잊지 않았고 빠른 후퇴보다는 군의 응집과 규율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행정가였던 그는 각 부대의 후퇴 순서와 경로 등을 세심하게 지휘하며 질서있는 후퇴를 위해 안간힘을 다 했고, 덕분에 러시아 제1군의 후퇴는 놀라울 정도로 순조로왔습니다.  바클레이는 몰랐지만 여기에는 나폴레옹의 실책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제1군과 제2군 중 더 약한 제2군을 먼저 요격하려 했고, 제2군의 앞길을 막는 역할에 축지법의 대가 다부를 투입했었습니다.  거기까지는 매우 좋은 판단이었지만 그 뒤를 추격하는 임무를 자기 동생 철부지 제롬에게 맡기는 바람에 모든 것이 망쳐진 것이지요.

아무튼 제1군의 뒤를 쫓는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후퇴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연히 러시아군이 후퇴하는 길 위에 많은 수의 마차와 군수품을 버리고 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그 수가 매우 적었습니다.  애초에 욕심부리지 않고 가지고 갈 군수품과 버리고 갈 군수품을 철저하게 나누었고, 버리고 가는 군수품은 일찌감치 불을 질러 적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건 100% 바클레이의 공적이었습니다.  덕분에 후퇴하는 러시아군보다 추격하는 프랑스군이 버리고 가는 짐마차가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또 러시아군 사병들의 탈영률이 허겁지겁 이루어지는 후퇴치고는 매우 낮았습니다.  이는 당시 그들이 있던 곳이 러시아 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러시아 본토라기 보다는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땅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 사병들에게는 낯선 외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대신 바클레이가 현지에서 새로 징집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계 병사들 약 1만 명 정도가 후퇴 과정 중에 탈영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그랑다르메 소속 폴란드군에게 합류했지만 많은 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러시아군 고위층은 매우 태평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7월 4일 스웨덴 왕세자 베르나도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볼가 강변에서 싸우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난 이 전쟁을 몇 년간 끌고 갈 작정이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러시아군 수뇌부는 (불과 십여 일 전까지만 해도 전진하여 공세로 나가자고 아우성 치던 사람들이었는데도) 후퇴를 당연하게 생각했고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러시아 장교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고 주로 외국 출신 고위층들이 특히 태평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외교관으로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짜르를 따라다니던 궁정 인사 중 하나였던 네슬로더는 후퇴 길에 다음과 같은 태평한 편지를 아내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편지는 프랑스어로 씌여졌는데, 독일계 귀족이 러시아 짜르를 위해 일하면서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당시 사회상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후퇴에 대해 걱정하지 마시오.  On n'a recoulé que pour mieux sauter.  (후퇴하는 것은 더 잘 뛰어오르기 위해서라오.)"



(네슬로더 Karl Robert Reichsgraf von Nesselrode-Ehreshoven 입니다.  그는 원래 신성로마제국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아버지가 주 포르투갈 러시아 대사로 부임하느라 리스본 항구 인근 바다 위에서 출생하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속 러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고, 1807년 아일라우 전투 때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1812년 당시 32세의 젊은 나이였던 그는 1816년 러시아 외무장관이 되어 비엔나 체제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쯤에서 도저히 빠질 수가 없는 명짤입니다...  존경합니다 김성모 화백님.)

 



짜르는 오히려 기분이 좋은 편에 속했습니다.  그때 즈음해서 러시아군 진영에 프로이센 장교 하나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레오폴트 폰 뤼초프(Leopold Wichard Heinrich von Lützow)로서 훗날 독일 해군 순양함에도 이름이 붙여진 그 유명한 다른 뤼초프와는 또 다른 인물이었고,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참패한 이후 군에서 강제 예편된 불만 많은 젊은 장교였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여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싸웠으나 결국 바그람 전투에서 또 패배했는데, 그에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유일하게 나폴레옹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페인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1812년 1월 스페인 남부 발렌시아에서 결국 프랑스군에게 포로가 되어 남부 프랑스로 끌려갔는데, 뤼초프는 거기서 탈출하여 걸어서 스위스-독일-폴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넘어온 것입니다.  바그람 전투 때만 해도 소위에 불과했던 당시 26세의 이 프로이센 청년은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는 유럽 문명 사회의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짜르에게 대환영을 받았고, 당장 러시아군 육군 중령의 계급이 부여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뤼초프는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다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프로이센군에 입대하여 리뉘(Ligny)와 워털루에서 또 나폴레옹과 싸우는 근성을 보여주었고, 결국 프로이센군 고위 장성이 됩니다.



(위 사진은 Leopold von ützow가 아니라 Ludwig Adolf Wilhelm Freiherr von Lützow 입니다.  일반적으로 뤼초프라고 하면 레오폴트 폰 뤼초프가 아니라 위 초상화의 주인공인 루드비히 아돌프 폰 뤼초프를 말합니다.  이 유명한 뤼초프도 프로이센 출신 장교로서, 뤼초프 자유군단(Lützow Freikorps)이라는 유격부대를 만들어 나폴레옹에게 저항한 군인입니다.  훗날 이 분의 이름을 따서 독일 해군 순양함이 만들어졌는데, 불행히도 그 순양함은 1916년 유틀란트 해전에서 대파되어 자침되었습니다.)



사실 러시아 군영 내에는 나폴레옹을 미워하는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이 그렇잖아도 차고 넘쳤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후퇴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렇게 나폴레옹을 미워한다는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데 괜히 러시아군으로부터 급여만 타 먹는 프로이센 장교 하나가 더 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를 포함한 러시아군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퓰의 기획안 하에 드리사(Drissa)에 구축되고 있던 든든한 방어기지였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제9권에서도 자세히 묘사되었듯이, 1812년 6~7월 당시 러시아군 전체 작전 계획의 사실상의 총기획자인 퓰에 대해서는 러시아군 내부에서 반목과 불신이 팽배해있었고, 드리사 요새의 쓸모 여부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습니다.  짜르는 드리사로 향하면서도 믿을 만한 기술적 전문 지식을 가진 참모 하나를 먼저 보내 드리사 요새의 완성도 여부를 평가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장교들 중에서는 그런 평가 작업을 수행할 정도의 권위 있는 군사 전문가가 없었는지, 결국 그런 임무를 맡게 된 사람은 또 다른 프로이센 출신 장교이자 훗날 전쟁론을 써서 불후의 명성을 얻은 클라우제비츠(Carl Philipp Gottfried von Clausewitz)였습니다.  34세의 젊은 클라우제비츠는 당시 소령 계급을 달고 있었는데, 사실 퓰의 가까운 친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클라우제비츠를 보냈다는 것은 알렉산드르가 어떤 평가 결과물을 받고 싶어하는지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행위였지요.  그런데 젊은 클라우제비츠의 평가 수행은 처음부터 생각치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de.wikipedia.org/wiki/Leopold_von_L%C3%BCtzow
https://en.wikipedia.org/wiki/Karl_Nesselrode
https://en.wikipedia.org/wiki/Carl_von_Clausew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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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2.30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운칠기삼이라더니 러시아군에 바클레이가 없었다면 십중팔구 존 무어경 꼴이 됐을 텐데ㅎㅎㅎ한 인물이 역사의 물줄기를 틀었군요.

  2. reinhardt1000 2019.12.30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동안 주7일 근무하느라고 바빠서 확인도 못했네요.

    '불가 강변에서도 전쟁한다.' 이런 방식은 독소전쟁에서도 그대로 나오죠. 독소전쟁 초기 소련이 한창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하루에 사단이 몇개씩 날아가던 상황에서 미국 특사가 모스크바를 찾아갔는습니다. 누가 봐도 당시 나치 독일의 거센 공세 앞에 '소련이 8월 말까지 버티냐?' 질문하면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대답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이 딱 한마디로 미국 특사를 안심시킵니다.

    '모스크바가 점령되면 우랄 산맥을 넘어서라도 끝까지 싸웁니다.'

    이 말을 들은 미국 특사는 곧장 본국으로 가서 소련에 대한 원조가 '미국이 전쟁준비를 완료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F. 루즈벨트에게 강조하고 곧바로 랜드리스가 소련에도 전달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줍니다.

    실제로 17세기 폴란드-모스크바 전쟁 이후, 러시아군 혹은 소련군은 항상 거대한 공간을 내주면서 주력을 보전하는 방식으로 전쟁 수행을 하였습니다. 다만, 상대적인 국력 차이가 벌어지지 않아야 러시아군의 전쟁 수행에서 '주력 보전'이 가능했는데 양 세계대전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에는 '주력 보전'에 꽤 성공한 축에 들어갑니다.

    2019넌도 다 가고 2020년 경자년 신년인데 나시카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 푸른 2019.12.31 1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디선가 들어본 인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네요! 다음편 빨리... 현기증납니다ㅋㅋㅋ

  4. 흠흠흠 2020.01.02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같은 프로이센 장군들이 지휘하는데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 싸웠다 하면 졸전 끝에 참패하고, 러시아는 피터지는 영혼의 맞짱 끝에 최소 무승부까지는 가는 이유가 뭘까요. 러시아 병사들이 훨씬 더 용맹해서?


최근에 조선일보에서 조선일보답게 유명 와인 브랜드인 Moët & Chandon 관련된 기사를 냈더군요.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방의 에페르네(Épernay) 현지 취재 기사였는데, 그냥 Moët & Chandon 사의 광고 이하도 이상도 아닌 그런 기사였습니다.

https://m.chosun.com/news/article.amp.html?sname=news&contid=2019122000173

제가 이 기사를 클릭한 것은 어떤 포털에서 '나폴레옹이 사랑한 술, 승리의 순간마다 삼켰다'라는 제목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나폴레옹이 진짜 좋아해서 항상 챙겼던 와인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샹베르텡(Chambertin) 와인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 와인 이야기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Moët & Chandon 이야기더라고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나왔습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 15세가 이곳 와인을 마셨고, 1801년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곳에 직접 와서 모엣&샹동 창립자의 손자인 장 레미 모엣에게서 샴페인을 사갔다. 이후 황제가 된 보나파르트는 전쟁에서 이기거나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때마다 모엣의 샴페인을 사들였다. 부인 조제핀 황후가 대관식을 치를 때도 이곳 술을 사용했다."

솔까말 나폴레옹이 뭐 동네 아저씨도 아니고 자신이 직접 와인 쇼핑이나 하러 다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폴레옹 대관식이면 나폴레옹 대관식이지 조제핀 황후가 대관식을 치른다는 이야기도 좀 이상하고요.  저는 나폴레옹 관련 책이나 블로그 등을 꽤 많이 본 사람 중 하나라고 자부하는데, 나폴레옹이 Moët & Chandon을 좋아했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거든요.  

근데 어차피 확인할 방법도 없는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제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모엣&샹동이라는 표기였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제2 외국어로 불어를 택했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 내세울 것이 없는 저로서는 여태까지 Moët et Chandon을 모에-떼-샹동이라고 읽어왔었거든요.  (원래 불어에서는 거의 대부분 끝부분의 s나 t는 발음하지 않으니 모에-에-샹동이 되겠습니다만, 연음법칙에 의해 끝부분의 t가 그 다음 단어 et와 연음되어 모에-떼-샹동이라고 읽습니다.)  이걸 저 기사를 쓴 기자분이 프랑스어를 몰라서 저렇게 적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현지에서 취재한 건데 저 상표의 발음을 몰라서 저렇게 적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와인을 즐기지 않으시는 분들이라도 (저도 와인 안 좋아합니다, 저는 서민답게 맥주 좋아합니다) 팝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모에-떼-샹동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만한 와인 브랜드입니다.  영국 락그룹 퀸(Queen)의 초기 명곡 중 하나인 Killer Queen의 첫부분에도 나오는 와인이거든요.

She keeps her Moet et Chandon
In her pretty cabinet
"Let them eat cake", she says
Just like Marie Antoinette

그녀는 모에-에-샹동을 따로 보관한다네
예쁜 캐비넷에 말이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고 해" 라고 말하지
정말 마리 앙투아네뜨 같다니까

 

 

 



저는 이 기사의 모엣&샹동이라는 표기를 보고 Killer Queen 가사가 생각났는데, 생각해보니 이 노래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Moet et Chandon을 뭐라고 발음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더군요.  저는 막연히 모에-에-샹동으로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원래는 모에-떼-샹동이라고 읽어야 하거든요.  다시 두번 세번 들어보니,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모엣-에-샹동' 이라고도 들리는데 제가 영어 리스닝에 서툴러서 잘 모르겠더라고요.

 

미국인들이나 영국인들도 프랑스어로 된 이름들은 발음하기가 고민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영국과 프랑스는 교류가 잦다보니 편지나 신문, 책 등이 서로 오가면서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데 프랑스어 스펠링으로 된 것이 영국식 발음으로 굳어진 것들이 꽤 많습니다.  가령 Nicolas는 프랑스에서는 니꼴라지만 영국에서는 니콜라스입니다.  Bourbon은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가의 이름이지만 미국에서는 버번 위스키입니다.  모에-떼-샹동은 샴페인(Champagne)의 일종인데, 샴페인이라는 것도 영국식 발음일 뿐이고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상파뉴라고 읽습니다.  이건 프랑스 이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독일 이름이나 이탈리아 이름 등에도 영어식 표기와 영어식 발음이 따로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하고 고민도 됩니다.  가령 프랑스 이름 Louis(루이)가 영국으로 건너오면서 루이스로 읽히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스펠링까지 Lewis로 바뀌었는데, 동일한 이 이름을 독일에서는 루드비히(Ludwig)라고 부릅니다.  더 헷갈리는 것은 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는 아예 자기식으로 스펠링까지 바꿔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 (Francois I)를 표기할 때는 아예 프랜시스 1세 (Francis I)로 해버리는 식이지요.  우리가 류페이를 '유비'로, 또요또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로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극장에서 본 영화가 있는데 대니얼 크레이그 주연의 '나이브즈 아웃'(Knives Out)이라는 추리물이었습니다.  크리스 에반스와 크리스토퍼 플럼머 등 유명한 배우들이 잔뜩 출연하는 이 영화에서 대니얼 크레이그는 사설 탐정으로 나오는데, 극중 이름이 Benoit Blanc 입니다.  이걸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베누아 블랑'(사실은 블랑보다는 블롱에 가까운 발음이 납니다)이고 영어식으로 읽으면 '벤노잇 블랑크'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 대사를 유심히 들어보면 대략 '비누와 블랑(ㅋ)'라고 Blanc의 끝에 붙은 c를 완전히 묵음 처리하지 않고 약간 k 발음을 내는 것이 들립니다.  등장 인물 중 하나는 아예 이 이름을 '블랭크(Blank)'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러자 대니얼 크레이그가 다소 곤란하다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블랑(ㅋ)'라고 읽어달라고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결국 프랑스 이름이지만 미국식으로 읽긴 하는데, 완전히 미국식도 아닌 셈입니다.  아래의 짧은 비디오 클립을 보면 '미스터 블랑(ㅋ)'이라는 발음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KnivesOutOfficial/videos/422982011707870/

왜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의 미국인 탐정이 프랑스식 이름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영화 속에서는 설명이 없지만,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라이언 존슨(Rian Johnson)이 어떤 매체와 인터뷰를 한 것을 보면 정답이 나옵니다.  

질문) 이 영화 속 등장 인물 이름 중에는 아주 굉장한 것들이 있더군요.  그 중 어느 것이 가장 자랑스러우신지요 ?

답) 음, 비누와 블랑은 확실히 괜찮다고 생각해요.  예전 프랑스어 강사의 이름이 베누와였는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거기에 미국인들이 좀 골치 아파할 성을 붙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포와로(Poirot :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 소설 속 벨기에 국적의 탐정 이름)처럼요.

 

 

 

Rachel Weisz라는 정말 우아하게 아름다운 여배우가 있습니다.  이 배우의 남편이 대니얼 크레이그더라고요.  대니얼 크레이그처럼 레이첼도 영국 사람입니다.  저는 처음 미이라 시리즈와 콘스탄틴에서 이 여배우를 봤을 때만 해도, 이 배우 이름이 레이첼 와이즈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스펠링이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고요.  그런데, 최근에서야 이 사람의 이름은 와이즈가 아니라 바이스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 알고 있던 것이 저 뿐만은 아니고 미국인들도 많이 그렇게 잘못 알고 있었더군요.  다들 스펠링을 보고, 또 이 배우가 영국 출신이니까 그냥 영어식으로 '와이즈'라고 읽은 것이지요.  많은 경우, 외국식 스펠링을 가진 가문에서도 미국이든 프랑스든 타국에 정착했을 때 해당 타국식 발음으로 아예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연예계 기자들이 저걸 독일어식으로는 '바이스'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와이즈'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는 오로지 본인의 선택입니다.  레이첼 바이스도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는 사람들이 '미즈 와이즈'라고 부를 때 예의상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합니다.  무려 8년 동안이나요.  그러다가 이제 좀 정착한 뒤에는 자기 이름을 되찾아야겠다면서 사람들에게 '와이즈'가 아니라 '바이스'라고 그때그때 수정을 해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다시 Moët & Chandon의 발음 문제로 돌리지요.  비록 저 기사를 쓴 기자분이 프랑스 현지 샤또에 가서 취재를 했다고 해도, 아마 저 취재는 영어로 했을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온 기자들을 위해 언론 담당 직원이 프랑스어를 고집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제 처음 짐작으로는 저 기자분은 현지 직원이 영어식 발음인 모엣-앤-샹동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듣고 쓴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모엣-샹동이라는 한글 표기와 모에-샹동이라는 한글 표기가 모두 사용됩니다.  프랑스식으로 읽어야만 유식하고 영어식으로 읽으면 무식한 것은 아닐테니 어떤 표기이건 둘 다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도 글자만 보고는 고유한 이름의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령 레미제라블의 주요 등장 인물인 Enjolras를 '앙졸라스'라고 읽어야 하는지 '앙졸라'라고 읽어야 하는지는 오래된 논쟁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그 이름의 주인에게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니 물을 수 없지만 Moët & Chandon은 번창하는 회사이니 당연히 한글 홈페이지가 있을 것입니다.  찾아보니... 좋아해야 할 일인지 자존심 상해야 할 일인지 한글판 페이지는 없더군요 !  그런데 일본어 홈페이지는 있습니다 !

https://www.lvmh.co.jp/%E3%83%A1%E3%82%BE%E3%83%B3/%e3%83%af%e3%82%a4%e3%83%b3-%e3%82%b9%e3%83%94%e3%83%aa%e3%83%83%e3%83%84/moet-chandon/

 


보시다시피 일본어 표기는 '모에-에-샨돈'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 뒤져보니 프랑스 국가 홍보 웹 사이트에서 Moët & Chandon에 대해 한글로 표기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또 '모엣샹동' 이라고 표기하더군요.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다음과 같이 모엣샹동이라고 표기하면서도 사람 이름은 '모에'라고 프랑스식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모엣샹동의 설립자들인 모에와 샹동, 메르시에를 만든 유진 메르시에 등, 거리 이름마저 샴페인 명인들의 이름으로 가득한 에페르네의 땅 밑은 또 다른 샴페인 왕국이다."

어쩌면 여기서도 한국에서는 워낙 모엣샹동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니 그냥 모엣샹동이라고 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설명이 있습니다.  모에(Moët)는 분명히 프랑스 국적의 가문이지만 원래 이 가문은 프랑스가 아니라 네덜란드 출신 가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 이름을 모에가 아니라 모웻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Moët 가문 사람을 직접 인터뷰한 기사에서 읽은 것은 아니고, Moët & Chandon 뉴질랜드 지사의 PR 담당자인 Helen Vause라는 분과 인터뷰한 기사에 나온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또 프랑스인들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모에라고 읽는 것이 현실인 모양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많은 경우 프랑스에 정착한 외국인들이 가문 이름의 발음을 그냥 프랑스식 발음으로 택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본인입니다.  원래 이탈리아식 이름인 부오나파르떼(Buonaparte)를 프랑스식 보나빠르뜨로 바꿨지요.  나폴레옹의 근위 기병대를 이끌었던 Frédéric Henri Walther 장군은 독일계인 알사스 지방 사람이었지만 발터가 아니라 왈더라고 불렸습니다.  

 

결론적으로... 모에-샹동인지 모에-떼-샹동인지 모엣-샹동인지 그냥 내키시는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뭐라고 불러도 프랑스인이든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다 알아들을 것이 틀림없거든요.  중요한 것은 남이 뭐라고 읽든 간에 함부로 지적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처럼 달랑 고등학교 때 배운 불어로 아는 척 하면 큰일나겠습니다.


P.S.  모에-떼-샹동과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찾아보느라고 이것저것 웹사이트를 뒤지다 읽은 나폴레옹의 명언이 있습니다.  정말 나폴레옹이 한 말인지는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만, 말이 그럴싸해서 여기에 옮깁니다.

“Champagne! In victory one deserves it, in defeat one needs it.”
샴페인이라 !  승자에겐 마실 자격이 있고, 패자에겐 마실 필요가 있지.

 

 






Source : 
https://kr.france.fr/ko/champagne/article/118417
https://www.winemonopole.com/blogs/newsletter/7129320-napoleon-and-chambertin#
https://vinepair.com/booze-news/pronounce-moet-chandon-complicated/
https://en.m.wikipedia.org/wiki/Knives_Out_(film)
https://vinepair.com/articles/napoleon-moet-a-secret-history/
https://screencrush.com/rian-johnson-knives-out-interview/    

http://socialvignerons.com/2019/06/17/how-to-pronounce-moet-chandon-explained/

http://nymag.com/intelligencer/2009/05/rachel_weisz_is_going_to_star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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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뚝 2019.12.26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휴일 내내 자료를 찾고 글을 다듬으셨을 글쓴이를 생각하니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덕분에 즐겁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명언?도 재밌네요~

  2. ㅇㅇ 2019.12.26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어요 ㅋㅋ

  3. 카오스크 2019.12.26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Zendaya 라는 성을 가진 여배우가 있는데 스스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설명해주더군요 대부분 젠다야라고 발음 하는데 젠-데이-아라고 불러 달라고 하더군요

  4. keiway 2019.12.27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한가한 김에 나폴레옹 시대사를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보고 있는데요, Daum 블로그 글은 순서대로 보기가 쉬운데, Tistory 블로그는 예전 글을 분류별로 보는 게 굉장히 불편하군요... 제가 기능을 잘 모르는 건지?

    예전 글을 보다보니 제가 그때부터 댓글을 하나씩 꽤나 많이 남겼었네요. 오랜 기간 꾸준히 좋은 글 써주시는 Nasica 님께 새삼스럽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내년도 좋은 한 해가 되시길.

  5. 삐숑 랄롱드 2019.12.28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견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소재도 맛깔나게 글로 써내시는 필력이 부럽습니다~^^

  6. agintiger 2019.12.28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잘 보고 있습니다.

  7. MADRUSH 2019.12.29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려주시는 글들 늘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 드리겠습니다.

  8. 지식센터 2019.12.29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나폴레옹의 명언이 너무 기가막힌 표현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9. 2/28 입대 2019.12.29 2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재치있는 글 감사드립니다! 벌써 몇년째 '재치와 상식'에서 큰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올해 마무리 잘 하시고, 내년에는 '들숨에 재물이, 날숨에 행복이' 넘치는 한 해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10. durandal 2020.01.03 0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웠기에 어떤 글을 읽을 때나 프랑스어 표기에 관심이 가더군요.
    댓글에 분탕질 치는 종자 때문에 한 동안 댓글 안 읽고 안 썼는데 새해 좋은 일만 있으시기 바라며 글 남깁니다.
    올 한해 기쁜 일로만 모에 떼 샹동이나 돔 페리뇽 따는 일만 생기세요.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는 누구나 인정하는 명작 고전입니다.  여기에는 역사상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며, 많은 역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퓰과 그가 기안했던 드리사 방어 진지에 대해서도 꽤 자세히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빌나에서 후퇴한 이후 원래 계획대로 드리사 방어 기지로 후퇴한 러시아군의 내부 상황에 대해서 무척 생생한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제가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다운받은 영문판 전쟁과 평화를 제 나름대로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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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권 1812년

제9장

안드레이 대공이 러시아군 총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6월 말이었다.  짜르가 함께 하고 있던 제1군은 드리사(Drissa)의 요새화된 병영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2군은 프랑스의 대군에 의해 제1군과 단절된 채 퇴각 중이었는데 들리는 말로는 제1군과 합류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고 했다.  모두들 러시아군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정작 아무도 러시아 본토가 침공받을 위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들 이 전쟁이 러시아의 서부 지방, 즉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역을 넘어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안드레이 대공이 자신이 배속된 상관인 바클레이 드 톨리를 찾아낸 것은 드리사(Drissa) 강둑에서였다.  기지 근처에는 읍내는 커녕 큰 마을조차 없었으므로 제1군에 종군 중인 엄청난 수의 장군들과 궁정 인물들은 강 양안 반경 6마일 내에 있는 마을들에 있는 가장 좋은 집들에 기거하고 있었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짜르가 있는 곳에서 거의 3마일 떨어진 곳에 숙영 중이었다.  그는 딱딱하고 차가운 태도로 볼콘스키(안드레이 대공)를 맞이했고 외국 억양이 섞인 어투로 그에게 어떤 보직을 맡길 지에 대해 짜르에게 진언을 해두겠지만 발령이 날 때까지는 그의 참모진에 남아주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대공이 제1군 내에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아나톨리 쿠라긴은 거기에 없었다.  그는 페체르부르크로 가버렸지만, 안드레이 대공은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뻤다.  그는 거대한 전쟁을 수행 중인 중심부의 이해 관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쿠라긴 생각으로 집중이 안되던 상태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처음 나흘 동안은 그에게 별 보직이 없었는데, 이 동안 그는 요새화된 전체 기지 주변을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자기 자신의 지식 및 전문가들과의 대화로부터 이 병영에 대한 명확한 평가를 내려보려 했다.  하지만 기지가 쓸 만한지 아닌지에 대해 그는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다.  그의 군사 경험과 오스트리아 원정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를 뜻함 : 역주) 때 보았던 것을 통해서 이미 그는 깊은 심사숙고를 거친 작전 계획도 실제로는 별 쓸모가 없으며 모든 것은 원래 예측이 불가능한 적의 움직임에 어떤 식으로 부딪히느냐, 그리고 누가 어떻게 이 모든 문제들을 다루느냐에 달려있다고 결정을 내린 뒤였다.  이 마지막 점을 스스로 분명히 하고자 안드레이 대공은 그의 지위와 인맥을 활용하여 군의 지휘권과 거기에 얽힌 사람들과 당파의 성격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가 파악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짜르가 아직 빌나에 있는 동안, 야전군은 크게 3개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바클레이 드 톨리 지휘하에 있는 제1군과, 바그라티온 밑의 제2군, 그리고 토르마소프의 제3군이었다.  짜르는 제1군과 함께 있었지만,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발행된 명령서에는 짜르가 지휘를 맡는다는 내용은 없고 그냥 군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짜르는 총사령관 참모진이 아니라 황실 사령부 참모질을 데리고 있었다.  황실 수석 참모이자 병참감인 볼콘스키 대공과 장군들, 황실 시종무관들, 외무부 관료들, 그리고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짜르를 보좌하고 있었지만 그 중 군 참모들은 없었다.  이들 외에도 뚜렷한 보직 없이 그냥 짜르와 동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임 국방장관인 아락체예프, 고위 장성인 베니히센 백작, 짜르의 동생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총리인 루미안체프, 전임 프로이센 장관인 슈타인(예나 패전 이후 프로이센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나폴레옹에 의해 축출된 그 슈타인 맞습니다 : 역주), 스웨덴 장군 아름펠트, 전체 작전의 주요 기안자인 퓰(후퇴 작전을 기획하고 드리사 요새 구축을 주장한 프로이센 출신 장군입니다 : 역주), 부관이자 사르데냐 망명 귀족인 파울루치, 볼초겐, 기타 많은 이들이 있었다.  



(아름펠트 Gustaf Mauritz Armfelt 입니다.  그는 1809년 구스타프 4세에 대한 쿠데타에 반발하여 스웨덴을 버리고 러시아로 망명한 스웨덴 귀족입니다.  그는 나중에 짜르 알렉산드르에 대해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핀란드의 자치 및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지배에서 벗어나 스웨덴에 병합되는 것을 지지하는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지금도 핀란드의 독립에 기여한 인물로 존경받는다고 합니다.)


(파울루치 Filippo Paulucci delle Roncole 입니다.  그는 원래 이탈리아 모데냐 출신인 사르데냐 왕국의 귀족이자 군 장교였습니다.  '전쟁과 평화'에서는 망명 귀족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사실 그는 망명이라기보다는 커리어를 찾아 러시아에 온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에서도 잠깐 복무했던 그는 1807년 경에 그는 처가의 연줄을 이용하여 러시아군으로 이직에 성공하여 거기서 대령으로 승진했고 이후 투르크 및 페르시아 등 남쪽 전선에서 주로 싸웠습니다.  1812년 전쟁 직전에는 군 참모총장까지 임명되었으나 바클레이 드 톨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밀려나 리보니아 행정관이라는 이름 뿐인 보직으로 짜르를 보좌했습니다.  나중에는 사르데냐 왕국으로 되돌아가서 군 생활을 하다가 니스에서 평화롭게 죽었습니다.)  


(볼초겐 Ludwig von Wolzogen 입니다.  그는 원래 뷔르템베르크 출신인데,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발 때문에 제1차 대불동맹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프로이센군 소위로 입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시 뷔르템베르크로 돌아와 군에 있었고, 결국 원래 의도와는 달리 제3차 대불동맹전쟁에서 프랑스군 측에서 싸워야 했고 1806년 제롬 보나파르트와 뷔르템베르크 공주 카타리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의 협력이 싫었던 그는 1807년 패전한 프로이센군에 재입대하려 했으나 프로이센에서는 기존 장교들도 퇴역시켜야 하는 판국이라서 그를 받아들일 형편이 안 되었고, 결국 그는 연줄을 이용해 러시아군에 자리를 얻었습니다.  1812년 전쟁 발발 당시 그는 대령 계급으로 바클레이 드 톨리의 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들은 군 내에서 보직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그들의 지위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군단 지휘관은 물론 총사령관조차도 자신이 어떤 이유로 베니히센이나 콘스탄틴 대공, 아락체예프 또는 볼콘스키 대공으로부터의 질문에 답을 해야하거나 이런 저런 조언을 받아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또 그런 인물들이나 짜르로부터 '조언'이라는 형태로 명령을 받았을 때 그걸 수행해야 하는지 무시해야 하는지 난처했다.  하지만 이건 그저 겉에서 보이는 상태일 뿐이었다.  짜르와 그 주변 인물들의 존재 자체의 근본적인 의미는 궁정인물의 관점으로 보자면 (짜르 근처에 있으면 모든 인물이 궁정인물이 되는 법이었다) 모두에게 분명했다.  그건 '짜르가 비록 총사령관의 직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군의 통솔권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짜르 주변 인물들은 그의 조력자들이었다.  아락체예프는 규율을 잡는 충직한 관리인이었고 짜르의 경호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베니히센은 빌나 지방의 대지주로서 짜르가 방문했을 때 그 지방 귀족이 수행해야 할 명예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그는 유능한 장군이자 쓸모 있는 조언자였고, 언제든 바클레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준비가 된 인물이었다.  콘스탄틴 대공이 거기 있는 이유는 그게 어울려 보였기 때문일 뿐이었다.  전직 프로이센 장관인 슈타인이 거기 있는 이유는 그의 조언이 꽤 유용했고 짜르 알렉산드르가 개인적으로 그를 매우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아름펠트는 나폴레옹을 악의적으로 혐오했고 아주 자신감 넘치는 장군이었는데, 알렉산드르는 그런 자신감에 항상 이끌리는 편이었다.  파울루치는 용감하고 아주 단호하게 말을 하다는 점 때문에 거기 나와 있었다.  그 외 부관들은 그냥 항상 짜르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거기에 있었고,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인 퓰은 나폴레옹에 저항하는 작전 계획의 입안자이자 알렉산드르가 그 작전 계획을 신뢰하도록 만든 사람으로서 전쟁의 전반 사항 모두를 감독하고 있었다.  퓰에게는 볼초겐이 따라 다녔는데, 그의 역할은 퓰의 생각을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퓰은 성격이 좋지 않은 책벌레 이론가로서 어찌나 자신감이 넘치는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경멸할 지경에 이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러시아인들 및 외국인들은 매일같이 새로울 뿐만 아니라 전혀 예상 밖의 아이디어들을 매일같이 쏟아냈는데, 특히 외국인들이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이는 자국이 아닌 나라에 고용된 사람들이 흔히 보여주는 그런 대담함 떄문이었다.  이들 외에도 그들의 상관이 군에 있었기 때문에 군을 따라다니는 부차적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이 거대하고 불안하지만 화려하고 거만한 분위기 속의 의견과 목소리들 중에서 안드레이 대공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경향들과 파벌들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첫번째 파벌은 퓰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는데, 이들은 군사 과학을 신봉하는 군사 이론가들로서 사선 이동, 측면 우회 등의 법칙 등을 절대불변의 법칙으로 믿었다.  퓰과 그의 추종자들은 전쟁의 가설에 의해 정의된 정밀한 법칙에 따라 영토 깊숙한 곳으로의 후퇴를 요구했고, 그 이론에 대한 어떤 이탈이든 모두 야만성이나 무지 혹은 악의로 간주했다.  이 파벌에 속하는 사람들은 외국 귀족들로서 볼초겐, 빈칭거로더 등 주로 독일인들이었다.

두번째 파벌은 첫번째 파벌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주의는 항상 그렇듯이 반대쪽으로 치우친 극단주의와 맞부딪히는 법이다.  이 파벌에 속하는 사람들은 빌나에서 폴란드로의 진격과 모든 기존 계획의 파기를 요구했다.  과감한 전투의 옹호 외에도 이 파벌은 민족주의를 대표했기 때문에 이들은 논쟁에서 그만큼 더 일방적이었다.  그들은 주로 러시아인들로서 바그라티온(사실 바그라티온은 그루지아 귀족입니다...: 역주)과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하고 있던 에르몰로프 등이 있었다.  한때 에르몰로프의 유명한 농담이 회자된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짜르에게 자신을 독일인으로 만드는 황은을 베풀어달라고 간청드렸다는 것이었다.  이 파벌 사람들은 수보로프(제2차 대불동맹전쟁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린 러시아의 명장입니다 : 역주)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론을 세우거나 지도에 핀을 꽂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적을 쳐부수고 러시아에서 쫓아내는 것이며 군의 사기가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세번째 파벌이 짜르의 가장 큰 신뢰를 받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첫번째 파벌과 두번째 파벌 사이에서 합의를 끌어내려는 궁정인사들이 속해 있었다.  이 파벌 사람들은 주로 민간인들로서 아락체예프도 그들 중 하나였고, 실제로 확신은 없지만 마치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내용을 떠들고 다녔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에는, 특히 보나파르트(이제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이 아니라 보나파르트라고들 불렀다)와 같은 천재를 상대로 하는 전쟁에는 정교하게 짜여진 계획과 심오한 학문적 지식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퓰은 천재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론가들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들을 절대적으로 믿어서는 안되고 퓰에 대한 반대론자들과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의 말도 들어본 뒤 그 중간 어딘가를 택해야 했다.  그들은 퓰의 작전 계획에 따라 제1군이 드리사 기지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제2군과 제3군에게는 퓰의 계획괴는 다른 동선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계획은 어느 파벌의 목적도 달성할 수 없는 어정쩡한 것이었지만 이 세번째 파벌의 추종자들에게는 그 주장이 가장 그럴싸 해보였다.  

네번째 파벌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자는 짜르의 동생(원문에는 Tsarévich라고 나오는데, 이는 짜르의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알렉산드르의 동생인 콘스탄틴 대공을 말합니다 : 역주)였다.  이 사람은 자신이 마치 사열을 하는 것과 같이 투구와 기병 제복을 차려 입고 프랑스군을 용감히 무찌르는 상상을 하며 근위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가, 본의 아니게 정말 맨 앞 줄에 서게 되자 엉망진창이 된 혼전 속에서 간신히 탈출해야 했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좌절감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이 파벌 사람들의 주장에는 솔직함이라는 것에 따르는 장점과 단점이 고스란히 있었다.  이들은 나폴레옹을 두려워했다.  적군의 강대함과 아군의 취약성을 잘 알고 있었고 솔직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이 모든 것에서 나올 결과라고는 슬픔과 치욕, 폐허 밖에 없다 !  우리는 이미 빌나와 비텝스크를 포기했고 이젠 드리사도 버리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유일한 이성적 선택은 페체르부르그까지 빼앗기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평화 협상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이 관점은 군 고위층 내에 팽배해 있었고 페체르부르크에서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며, 다른 이유에서긴 하지만 총리인 루미얀체프도 평화 교섭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다섯번째 파벌은 대단한 남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국방부 장관이자 총사령관인 바클레이 드 톨리의 지지자들이었다.  (사실 바클레이는 총사령관이 아니었고 제1군 사령관에 불과했습니다 : 역주)  "비록 그가 대단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클레이는 정직하고 실용적인 사람인데다 더 나은 사람도 없다.  그에게 실권을 주어야 한다.  지휘권의 통일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권이 주어지면 그는 핀란드 전쟁 때 했던 것처럼 그의 실력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 군은 조직이 잘 되어 있고 강력한데다 어떤 패배도 겪지 않고 드리사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는데, 이건 전적으로 바클레이의 공로이다.  바클레이가 베니히센으로 교체된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베니히센은 이미 1807년에 자신의 무능함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1807년 6월 프리틀란드 전투의 패배를 뜻합니다. : 역주)

여섯번째 파벌은 베니히센파로서 반대의 말을 했다.  즉 어떻게 보더라도 베니히센보다 더 활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비틀어 보아도, 결국은 베니히센에게 지휘권이 돌아갈 수 밖에 없어.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실수를 하도록 내버려 두라구 !"  그들은 드리사로의 후퇴가 매우 부끄러운 일이며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실수연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더 많은 실수가 벌어질 수록 좋아.  그럴 수록 더 빨리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바클레이나 뭐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베니히센 같은 남자야.  베니히센은 1807년에 공적을 남겼고 나폴레옹에게 본때를 보여줬지.  (1807년 2월의 아일라우 전투를 뜻합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베니히센에게 사실상 패배했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 역주)  군 내에서 제대로 영이 서는 사람이 필요한데 베니히센만이 바로 그런 사람이야."

일곱번쨰 파벌은 특히 젊은 군주 옆에 언제나 있기 마련인 사람들로서 짜르 알렉산드르 주변에 특히 이런 사람들이 많았는데, 알렉산드르에게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장군들과 황실 시종무관들이었다.  알렉산드르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그저 군주에 대한 의무에서가 아니라, 마치 1805년 로스토프가 그랬던 것처럼 진심으로 아무 사심없이 인간으로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었고, 이들은 알렉산드르가 모든 미덕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출중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짜르가 군의 총사령관직을 겸손히 사양한 것에 감탄했지만 그런 지나친 겸양은 좋지 않다며 짜르를 탓했다.  그들의 소원은 사랑하는 짜르께서 그런 수줍음을 버리고 스스로 군 총수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하고 총사령관 참모진을 구성하여 필요에 따라 경험많은 이론가들과 실무적인 군인들의 조언을 받아가며 군을 지휘해서, 군의 사기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여덟번째이자 가장 큰 파벌은 다른 파벌들을 99대1 정도의 비율로 압도하는 수를 자랑했는데, 이들은 전쟁도 평화도 원치 않고 전진도 드리사 기지에서의 방어도 원치 않으며, 바클레이도 짜르도, 또는 퓰도 베니히센도 원치 않았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딱 하나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서 그저 이익과 쾌락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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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를대공 2019.12.23 2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과 평화는 어릴적 읽다 말았는데 알렉산드르1세가 대패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은게 생각나네요.주인공이 그걸 위로해줄 기회를 놓쳐 아쉬워하죠ㅎㅎ

    • nasica 2019.12.24 1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데헷, 전쟁과 평화 좀 읽으셨다고 자랑하시는 겁니까 ?

      사실 자랑하실만 합니다. 저는 애초에 책 첫페이지 열 생각조차 못했거든요.

  2. 루나미아 2019.12.25 0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란하네요...;;
    뇌피셜 열정피셜 중간 비관 괜찮음 베닉빠 알렉빠 아몰랑

  3. 웃자웃어 2019.12.26 1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있는데 지난번 러시아군의 내부사정 편에서 러시아가 징집률을 크게 끌어 올렸다고 했는데
    -러시아는 전시에 바로 투입할수 있는 예비군이 없었나요?
    -당시의 예비군 제도를 갖춘 나라가 어느정도 되나요?

    • 까까님 2019.12.31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비군이라기 보다는 사람을 가축처럼 몰아댈 수 있는 농노제가 있었죠
      물론 가축을 끌어가면 주인들이 반발하듯이 농노는 대지주=대귀족의 소유물이라 일사불란하게 징집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는 점에서 예비군보다는 확실히 전근대적이고 고라타분한 제도였지요

 


최근에 열심히 보는 웹툰이 있습니다.  '호랑이 형님'이라고 네이버에서 토요일에 연재하는 웹툰인데, 우리 전통 설화와 판타지와 조선 초기의 역사를 오밀조밀 짜맞춘 액션+귀요미+무협+의리 계열의 웹툰입니다.  제가 볼 때 정말 대단한 명작입니다.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650305&weekday=sat


나름대로 줄거리가 복잡한 만화라서 여기에서 설명을 하기는 좀 그렇고, 최근 줄거리를 요약하면 곰 일족의 수장이 일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일족의 새끼 중에서 가장 강한 새끼곰을 골라 끔찍한 고통을 겪을 용병으로 요괴들에게 보내는 사연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 우연히 끼어들게된 그런 용병 출신의 다른 짐승이 그런 현실에 대해 아래와 같이 분노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제게는 참 인상적이더군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을 저는 안 읽었고 제 와이프가 읽었는데, 제 와이프의 이 책 한줄 요약은 '실존하지 않는 개념상의 존재를 믿게 만든 것이 인간이 번성하게 된 이유'라고 하더군요.  꽤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이지요.  국가나 민족, 이념 따위는 사람들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일 뿐 사실 자연적으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허깨비같은 것을 위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아무 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만나 본 적도 없는 상대편 젊은이들을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마구 죽이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도 팔다리 혹은 목숨까지 잃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것에 뛰어들게 만들지요.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데, 그런 것을 잘 하는 국가나 민족, 이념이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기 새끼 뿐만 아니라 직접 관계가 없는 동족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집단 생활을 하는 동물에게만 있는 일입니다.  저는 사람이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개미나 꿀벌처럼 유전자에 코딩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기계적인 현상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그건 명예와 이타주의적인 희생 정신에 의한 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런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그저 자신의 권력과 금전적 이익을 위해 남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정말 분명히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추악한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범죄를 규탄하는 것이 바로 반전 운동가들입니다.  반전 운동가들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시선도 많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이 언제나 꼭 옳다고만 주장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흔히 월남이 패망한 이유가 북베트남군이 잘 싸웠다기보다는 남베트남의 부패와 미국내 히피들의 반전 운동 때문에 졌다고 하지요.  글쎄요, 여기서는 일단 판단은 보류하시지요.  

 



제가 좋아하는 가수인 존 바에즈도 그런 반전 노래를 많이 불렀을 뿐만 아니라 반전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잠시 투옥된 경험도 있습니다.  그런 존 바에즈가 'Brothers in Arms'라는, 제목만 보면 전우애를 찬양하는 것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하면 깜짝 놀랄 일입니다.  적어도 저는 흠칫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가사는 왜 바에즈가 이 노래를 불렀는지 쉽게 납득이 가는 내용입니다.  원래 이 노래는 (주로 커버 송을 많이 부른 바에즈답게) 바에즈의 오리지널 송이 아니라 영국 록그룹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의 노래입니다.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리더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가 작사 작곡한 1985년 곡인데, 연도를 보면 짐작하시겠지만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Falkland)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크 노플러는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로 고통받는 병사들을 위해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특히 전사한 병사들을 위해서는 열렬한 찬양을 늘어놓고 부상병들에게도 찬양과 함께 약간의 금전적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전투 경험이 주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병사들에 대해서는 별로 영광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명예를 기리지도 않고 그 보상과 치료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이어 스트레이츠가 이 곡을 만든 것도 존 바에즈가 이 노래를 부른 것도 모두 그 때문인 모양입니다.

 

병사들의 희생은 숭고하지만 전쟁은 추악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쟁보다 더 추악한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신께서 그들을 단죄하기를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프랑스제 엑조세 미사일 한 방에 영국 구축함 HMS Sheffield가 격침된 뉴스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저 사건 이후 전세계가 엑조세 미사일 구매에 열을 올렸었지요.  당시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던 영국 구축함들은 비싸기는 해도 가벼워서 빠르고 녹도 슬지 않고 유지정비 비용도 적게 들어서 평상시에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답니다.  그러나 정작 실전에 투입시켜보니 강철로 만든 군함과 달리 열에 약해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바람에 미사일 한방이나 폭탄 한방에도 곧장 침몰해버렸다는 기사를 당시 신문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공연 모습입니다.)

 

 


웹툰을 보다가 생각난 이 노래의 오리지널 다이어 스트레이츠 버전은 아래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Dire Straits - Brothers In Arms  
https://youtu.be/zKhTBltFwto

그러나 제게는 역시 존 바에즈 버전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Joan Baez - Brothers in Arms
https://youtu.be/yjxNZH0qIe0



These mist covered mountains
Are a home now for me
But my home is the lowlands
And always will be

안개로 뒤덮힌 이 산들
이제 내겐 집이나 다름없다네
하지만 내 고향은 저지대
내 고향은 항상 거기일 뿐

Someday you'll return to
Your valleys and your farms
And you'll no longer burn to be
Brothers in arms

언젠가 그대들도 돌아가겠지
고향의 계곡과 농장으로 
그리고 더 이상
전우애로 불타지 않을 거라네

Through these fields of destruction
Baptisms of fire
I've witnessed your suffering
As the battle raged high

그 살육의 전장
불의 세례 속 
난 그대들의 고통을 두 눈으로 보았다네
전투의 광기가 달아오르던 그 현장에서 

And though they did hurt me so bad
In the fear and alarm
You did not desert me
My brothers in arms

난 지독한 상처를 입었지
공포와 충격 속에서  
그래도 그대들은 날 저버리지 않았네
나의 전우들여

There's so many different worlds
So many different suns
And we have just one world
But we live in different ones

다양한 세계가 많이 있겠지 
태양들도 그만큼 다양할걸세 
우리에게 있는 건 단 하나의 세계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사나봐

Now the sun's gone to hell and
The moon's riding high
Let me bid you farewell
Every man has to die

태양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달은 차올라가지
그대들에게 작별을 고하겠네
모든 사람은 결국 죽어야 하니까

But it's written in the starlight
And every line in your palm
We're fools to make war
On our brothers in arms

하지만 별빛 속에 씌여있다네
그대들의 손금에도 말일세
전쟁을 벌이는 우리는 바보라고 
바로 우리 전우들을 상대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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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뱀장수 2019.12.19 1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의 주제와는 관련없지만...
    42형 구축함은... 선체가 강철제 아니였던가요?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요.

    • nasica 2019.12.19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그때 중학생이었던가 고등학생이었든가... 암튼 저도 신문에서 읽었던 기억만 있는지라 잘 기억은 안납니다.

  2. 나삼 2019.12.20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대 구축함들은 철이건 알미늄이건 대함 미사일에 대한 방호력은 없습니다. 함대 대공으로 커버쳐야 하는데 당시 영해군의 구축함들은 경제상황악화로 저가형 함대방공이 취약한 함급으로 편제되어 잇기에 엑조세에 큰피해를 입엇다죠

  3. 최홍락 2019.12.20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2형 구축함까지는 선체가 강철제였고, 후속함인 45형부터가 알루미늄 선체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쟁중에 침몰된 영국 군함 7척중 4척이 알루미늄 상부구조물인것은 맞는데 언급된 셰필드함은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더욱이 알루미늄의 경우 열전도율이 높아서 피격이 될 경우 알루미늄 구조물의 열에너지는 빠른 속도로 강철의 하부 선체로 전도가 되어 버림으로써 생각보다 열에 취약하지 않게 되고요.

    셰필드함의 문제라면 엑조세 미사일이 스틱스와 달리 수면을 스치고 날아오는 최초의 시스키밍 방식의 대함미사일이었다는거죠. 셰필드함이나 동급 구축함의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대함미사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먼저 만난것이 셰필드함의 불운이라고 할 밖에요

  4. 퍁로스 2019.12.21 0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랑이 형님 좋죠.
    저한테는 새끼곰을 보내려던 이유가 나름 큰 반전이었어요.
    좀 거창한 야망이 있을 줄 알았는데;;

  5. pms6710 2019.12.21 1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주인장님도 호형 팬이시군요! 항상 좋은 글 보고 갑니다!

  6. 유애경 2019.12.23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앙리코 마샤스의 ‘녹슨총’이 반전에 관한 가사로선 참 마음에 와 닿는것 같아요.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Napoléon Bonaparte)는 1784년 생으로서 나폴레옹에게는 15살 어린 정말 아들 같은 막내 동생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3년 툴롱(Toulon) 포위전을 통해 중위에서 장군까지 일사천리의 승진 가도를 달리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9살이었습니다.  이 툴롱 포위전이 한창일 때만 해도 보나파르트 일가는 고향 코르시카에서 쫓겨나 집도 절도 없이 마르세이유의 월세방을 전전하던 신세였지만 나폴레옹의 출세 덕분에 그 이후로는 생활에 기름칠이 잘 된 편이었습니다.  즉, 제롬은 형의 후광에 힘입어 아주 어릴 때 빼고는 그다지 세상살이가 어려운 줄 모르고 자라났다는 이야기지요.


(베스트팔렌 국왕 제롬 보나파르트 전하이십니다.  가만히 보면 이목구비가 확실히 나폴레옹의 동생처럼 생겼네요.)



그는 역시 위대한 형을 배경으로 해서 프랑스 해군에 이름만 올려놓고 경력을 쌓다가, 청소년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자유로운 미국 물을 먹게 되었습니다.  조기 미국 유학이 적어도 제롬에게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는지, 1803년 당시 19살이던 제롬은 부유한 가문의 18살짜리 미국 아가씨 엘리자베스 '벳시' 패터슨(Elizabeth "Betsy" Patterson)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자기 마음대로 결혼까지 해버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이미 프랑스에서 절대 권력자의 위치를 공고히 했던 나폴레옹은 노발대발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이혼이 쉽지 않은 지라, 나폴레옹은 애꿎은 교황 비오 7세(Pius VII)를 윽박질러 미국에 있는 제롬의 결혼을 무효화 하려 애썼으나 고지식한 비오 7세가 굽히지 않자 황제로 즉위한 다음 해인 1805년 3월에 칙령을 내려 자기 멋대로 동생의 결혼을 무효화 시켜버렸습니다.  마침 그때 제롬은 프랑스 황제가 된 형에게 이 결혼을 인정 받겠다고 당시 임신 중이던 와이프 벳시를 데리고 유럽행 항해길에 올라 있었습니다.  당시 중립국이던 포르투갈에 상륙한 제롬이 먼저 형을 만나 설득을 시도하는 동안, 그 벳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입항하려고 했습니다.  이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 어떻게든 빨리 프랑스 땅에 들어가서 아이를 낳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막으려는 비정한 형 나폴레옹은 아예 그 미국 선박의 암스테르담 입항을 금지해버렸습니다.  결국 벳시는 적국인 영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고, 제롬의 첫아들은 영국 땅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제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Jérôme Napoléon Bonaparte)라는 으리으리한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결국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 부유한 미국 지주가 되었습니다.  결국 제롬도 지엄한 형의 명령에 굴복하여 이혼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모르긴 해도 이때부터 형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를 사로잡았던 미국 아가씨 엘리자베스 '벳시' 패터슨입니다.  1804년에 그려진 것이니 19살 때의 모습이네요.)



그래도 자신의 여자를 버리고 형을 따른 대가는 짭짤했습니다.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공주님 카타리나(Catharina Frederica)를 새신부로 맞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왕이 되었거든요.  1806년 프로이센을 격파한 나폴레옹은 다음해인 1807년 프로이센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와 이런저런 독일 소공국들을 모아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을 새로 만들었고, 그 왕으로는 제롬을 임명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새로 왕이 된 막내 동생 제롬에게 선물로 매우 모범적인 헌법과 근대적인 관료 체계를 내려주며 베스트팔렌 왕국이 자신이 유럽에 제시할 새 질서의 모범이 되기를 바랬습니다만, 제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롬은 자기 여자를 버리고 얻은 왕국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려운 것 모르고 커서 그랬는지 아무튼 다소 흥청망청 돈을 써대며 겉멋을 부리는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스트팔렌 왕국의 수도는 카셀(Kassel)이었는데, 제롬이 국왕으로서 위풍당당하게 입성한 카셀은 원래 작은 도시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이 휩쓸고 간 모든 곳이 그랬듯이 역시 탈탈 약탈을 당한 뒤라서 꽤 황폐해진 상태였습니다.  제롬은 패전 직후 새로운 왕국으로 편성된 영토의 흉흉한 민심을 보살필 생각보다는 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왕궁을 멋지게 꾸며 보겠다는 의욕이 앞섰습니다.  그는 기존의 빌헬름궁(Wilhelmshöhe)을 나폴레옹궁(Napoleonshöhe)으로 개명하고 이런저런 개보수 공사와 화려한 은식기 사치스러운 가구 값비싼 그림 등을 주문하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덕분에 그 일대의 예술가들과 장인들은 때 아닌 호황을 맞이했지만 신생 베스트팔렌 왕국은 곧장 재정난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전과 비슷한 규모의 비용을 제롬이 써댔으니까요.  돈이 떨어지자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제롬은 형에게 손을 벌렸지만 동생의 철없는 방탕질에 화가 난 나폴레옹은 그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고, 그렇잖아도 빗나가기 시작한 형제 사이는 더욱 비틀어졌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여전히 막내 동생 제롬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시작하면서 진지하게 폴란드 왕국의 재건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는데, 당장 떠오른 문제는 누구를 폴란드 왕으로 삼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적임자로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활동했고 또 폴란드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다부 원수를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자마자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려버린 베르나도트의 경우를 보고, 나폴레옹은 역시 누가 뭐래도 믿을 것은 핏줄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폴란드 왕국을 재건한다면 그 왕으로는 제롬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회고록을 구술하던 나폴레옹은 그때서야 '생각해보면 폴란드 왕으로는 누구보다도 폴란드 왕족 출신이자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포니아토프스키(Józef Antoni Poniatowski)가 적입자였는데, 당시엔 그럴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라며 후회했습니다만, 아무튼 일이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혈기왕성한 폴란드인들 위에 자기 동생을 왕으로 세우자면 자기 동생에게 뭔가 그럴 싸한 공을 세우도록 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이제 곧 폴란드인들의 원수인 러시아로 쳐들어가는 마당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카셀에서 왕놀이에 열중하고 있던 제롬을 소환하여 무려 3개 군단의 지휘권을 주며 왕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은 뛰어난 전공을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형의 소환을 받은 제롬은 베스트팔렌군을 이끌고 바르샤바에 화려하게 입성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동생을 구경하러 몰려든 폴란드인들에게 '폴란드를 러시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피를 흘리겠다'라며 연설을 했으나, 정작 그의 거만하고 사치스러운 행동은 폴란드인들의 경멸과 증오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나중에는 바르샤바의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는 제롬에 대해 '매일 저녁마다 럼주와 우유로 목욕을 한다'라는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가 끌고 온 베스트팔렌군은 당연히 독일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는데, 이들도 폴란드인들을 마구 대하며 폴란드인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나폴레옹은 어쩌자고 그랬는지 몰라도 하필 제롬에게 방담(Dominique-Joseph René Vandamme) 장군을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붙여주었는데, 방담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프라첸(Pratzen) 고지를 점령하는데 선봉을 서는 등 전투 지휘에는 무척 용감했지만 난폭한 성질머리와 함께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약탈 행위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프랑스 장군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방담은 제롬보다 더 폴란드인들의 원성을 살 뿐이었습니다.  훨씬 이전의 일이기는 합니다만, 오죽 했으면 나폴레옹이 방담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

"자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네가 2명 있는 걸세.  그랬다면 방담 2명 중 1명에게 다른 방담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을 거야."


(방담입니다.  그는 1813년 쿨름(Kulm) 전투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는 짜르 알렉산드르 앞으로 압송되어 그의 약탈 행위에 대해 추궁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범하게도 알렉산드르에게 '최소한 나는 내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 라고 외쳐 파벨 1세의 암살에 공모했다고 의심받던 알렉산드르의 안색을 변하게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는 포로 생활 당시 장군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혹한 대접을 받으며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 러시아군 등을 연파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천재성이 빛났기 떄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상대인 적군 지휘관들이 프랑스군처럼 실력이 아니라 신분에 의해 지휘권을 얻은 무능한 인간들이었다는 점도 크게 기여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국의 운명이 달린 이 중요한 러시아 원정에, 그의 적들이 발목을 잡았던 바로 그 약점을 스스로 만들어서 달고 간 것은 정말 나폴레옹도 예전의 나폴레옹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가 믿고 쓰는 다부에게 '제롬을 잘 보필하라'라고 지시해두긴 했지만, 문제는 역시 제롬이었습니다.  이 철없는 28살짜리 청년 왕은 '내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3개 군단 지휘관인데 누구 명령을 따르라는 말이냐'라며 정말 자기가 엄청난 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누구의 말도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  이 모든 것이 막내 동생을 버르장머리 없이 키운 나폴레옹 본인의 책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체감한 것은 바그라티온의 제2군을 함정에 빠뜨린 뒤 그 포위망을 좁히는 작전에 제롬의 군대를 투입한 뒤에, 제롬으로부터 그 첫 보고서를 받아보았을 때였습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군 작전 보고서에 당연히 있어야 할 내용들, 즉 적의 위치와 군세, 이동 방향 등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심지어 아군의 위치와 상황에 대한 정보조차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주절주절 두서 없이 쓴 보고서의 내용은 주로 제롬 본인이 겪고 있는 온갖 어려움에 대한 불평불만 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직감했습니다.  "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롬은 밤잠을 자지 않고 강행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내가 왕인데 숙소가 이게 뭐냐' 따위의 불평불만과 투정만 일삼으며 전군의 추격 속도를 떨어뜨렸고, 결국 다부가 애써 가로 막은 바그라티온의 러시아 제2군을 제때 덮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바그라티온은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이때 탈출한 러시아군은 보로디노 전투를 사실상 무승부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수렁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대노했습니다.  자기 동생이 그렇게 무능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는 다부에게 이제 제롬의 지휘권을 박탈하여 다부의 지휘권 아래 두라고 뒤늦게 명했습니다.  이렇게 껄끄러운 명령을 받은 다부는 무척 난처해하며 이 소식을 제롬에게 전했습니다.  아마 다부로서도 무능할 뿐만 아니라 부담만 되는 부하를 거느리게 된 것이 굉장히 난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부의 전언을 받은 제롬은 이 원정 내내 내린 결정 중 프랑스군을 위해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립니다.  "내가 국왕인데 한낱 원수 따위의 지휘를 받으라는 말인가 ?"라며 벌컥 화를 내고는 직속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냥 베스트팔렌 카셀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다부는 물론 아무도 제롬의 이탈을 아쉬워하지 않았고 비로소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악화된 뒤였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J%C3%A9r%C3%B4me_Bonaparte
https://en.wikipedia.org/wiki/Dominique_Vanda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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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2.16 0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서고금 막론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초를 치는 철부지 높으신 분들이 있네요. 뭐 어릴 때부터 고생을 안 겪은 사람이 갑자기 잘할 수도 없긴 하지만 분통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근데 사회생활 좀 해보니 왜 전근대 왕들이 무능력을 감수하고 가족들을 우선시했는지 알겠더군요. 세상 일 추진하는데 능력도 필요하지만 그보단 신뢰가 더 중요한데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은...필요관계에 의해 만났으니 위험부담이 예상외로 크더군요.

  2. ㅇㅇ 2019.12.16 0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러시아 원정이 시작부터 너무나 삐걱거리네요. 요즘 나시카님 연재글을 2회차 정주행하던 중 이탈리아 원정으로 접어들었는데, 그때 나폴레옹에게 있었던 건 원투펀치 오주로와 마세나, 겨우 4만의 훈련 덜 된 프랑스군이었지만 이탈리아군을 탈탈 털었는데...극명하고 안타까운 대조네요.

  3. keiway 2019.12.16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죠. 자신의 성공에 대한 자만과 얻은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만, 그리고 성공으로 이끌어준 (오래된) 방식 에 대한 고집 때문에. 그런데 기존 성공 방식조차도 지키지 못했으니 졸부 나폴레옹의 몰락은 그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페인 내전과 러시아 원정은 그걸 명확하게 보여준 거고요. 이런 식이라면 두 전쟁이 성공했어도 결국 몰락은 필연이 아니었을까요.

  4. 까까님 2019.12.16 1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스토이의 전쟁과평화에 잘 나오는 부분이네요
    그 책을 읽을 때는 배경상황을 몰라서 '킹왕짱쎈 나파륜' 때문에 러시아군이 패닉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분전하면서 어려운 후퇴를 성공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5. 에휴 2019.12.16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니아토프스키 ㅋㅋ 깜빡한척 하기 ㅋㅋㅋ 나폴레옹 진짜 망하려고 별 수를 다쓰는거 같아요

  6. 페미나치란? 2019.12.16 1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여가부 페미들 국가 주요요직에 앉히는게 수십명의 제롬을 양상하는 것인데 그런 제롬은 객관적으로 보실 줄 아시면서 ♩♫♪♫들에겐 찬성하시는 주인장님의 뇌구조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직접 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할때쯤엔 후회해도 늦으실건데 좌파란 참으로 신기하군요

    • 아스날면도기 2019.12.16 1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쯧쯧쯧......

    • JS Choi 2019.12.16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의 개인블로그 들어와서는 (등장인물 이름 빼놓고는) 본문 내용과 아무 상관없이 여가부 페미 댓글 달면서 개인적인 의견에 딴죽걸고 있는 사람이 더 이해가 안됩니다.
      게다가 고생해서 글 올려주신 주인장께 뇌구조가 어쩌고... 무례하기도 짝이 없군요.

    • keiway 2019.12.17 1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ㅉㅉㅉ...
      관종에겐 먹이를 주면 안됩니다.

    • Franken 2019.12.17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데서 하세요. 알타리무씨ㅡㅡ

    • 더마 2019.12.19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가 주세요.

    • 정암 2019.12.27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잊어버린듯한 님의 뇌구조가 전 더 신비롭습니다 ㅎㅎ 좌파 좌파 하는데 그럼 우파는 뭐 그리 잘났나요? ㅋㅋ (우파도 아닌 수구꼴통이지만)

  7. 하이텔슈리 2019.12.17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제프도 뤼시앵도 루이도 나름대로의 생각과 그에 의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제롬은 진짜 답이 없었네요...

  8. 나삼 2019.12.18 1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롬은 나폴레옹 연재 초기 오스트리아 왕족 처럼 초치는 역할을 하네요.

  9. 루나미아 2019.12.18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이는 네덜란드에서 선정을 펼쳤기에 말할 것도 없고, 조제프도 스페인에서 중요할 때 이런저런 결정들을 잘 내렸다고 알고 있어요.
    근데 제롬은 참...

    그리고 폴란드 군주감은 당연히 포니아토프스키인데 다부가 나와서 띠용했네요.
    나폴레옹이 몰랐을 리가 없죠. 원래부터 제대로 해 줄 생각 없다가, 자기가 몰락할 때도 끝까지 남아줬다가 전사한 거 보고 그제서야 정신차린 거겠죠.후...

  10. 알키비아데스 2019.12.18 2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인트 헬레나에서 모든 결과를 다 알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폴레옹 개털되는 상황에서도 본인한테 헌신적이라는걸 알았으니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왕 시켜줬어야 했다고 한탄하는거지 1812년 이전에 그런 판단을 못한건 나폴레옹의 한계였을 뿐

  11. 알키비아데스 2019.12.18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빌어먹을 형제 누이들은 마치 내가 아버지한테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거 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여기서 제롬, 캐롤라인은 무조건 포함될거 같은데 뤼지앵과 앨리자도 들어갈까요?

  12. 웃자웃어 2019.12.20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있는데요, 당시에 병사 1명을 유지하는데 얼마만큼의 돈이 드나요?

    • nasica 2019.12.21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죄송합니다.

    • 웃자웃어 2019.12.21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면 질문의 일부 항목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머스켓 소총의 이야기 편에서 당시에 화약값이 비쌌다고 했는데 어느정도로 비쌌나요?

    • nasica 2019.12.22 2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대략 1파운드에 0.5실링 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 돈으로는 대략 6~7천원 정도입니다. 그리고 브라운베스 머스켓 소총 1발에는 대략 0.09 파운드의 화약이 필요했으니, 1파운드의 화약으로 11발 정도의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발에 대략 500~600원인 셈이네요.

      http://forums.sjgames.com/showthread.php?t=31920


바클레이는 엉망진창이었던 러시아군 지휘 체계 안에서 그래도 거의 유일하게 냉정한 두뇌를 유지하고 있던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6월 26일 허둥지둥 빌나 철수를 하는 와중에도 잔뜩 쌓인 군수품에 불을 질렀을 뿐만 아니라 저멀리 떨어져있던 고집불통 제2군 지휘관 바그라티온에게도 전령을 보내어 후퇴하여 자신의 제1군과 합류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잠깐, '부탁'이라고요 ?  군대에서 군사작전을 벌이면서 '부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  어쨌든 바클레이는 그래야 했습니다.  이 어이없는 일은 모두 알렉산드르의 책임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바클레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짜르가 바그라티온으로부터 보고를 직접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바클레이를 싫어하던 바그라티온은 바클레이를 자신의 상관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클레이가 아니나 다를까 어이없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 바그라티온은 지시에 따르기는 커녕 폭발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드디어 네만 강을 건너 신성한 러시아의 영토를 침공했다는데 날아온 편지 내용이 고작 '후퇴하라'라니 !  바그라티온의 생각에 알렉산드르의 가장 큰 실책은 역시 바클레이에게 제1군을 맡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루지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에게는 오직 전진이 있을 뿐 후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그라티온과 함께 러시아군에서 복무하던 프랑스 망명귀족 랑제론에 따르면 바그라티온은 '시커멓고 못생긴 촌뜨기'였습니다.)

 



그런데 남자라면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초반의 분노가 김이 빠지자, 아무리 바그라티온이 고집불통이라고 해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자신의 6만 정도 되는 제2군은 삽시간에 프랑스군에게 포위당해 압살당하기 딱 좋다는 것이 훤히 보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공격은 역시 날카로왔습니다.  그는 이미 러시아 제1군과 제2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네만 강을 건너자마자 바클레이와 바그라티온 사이에 프랑스군을 쐐기처럼 박아넣어 그 둘을 분리시켰던 것입니다.  병법의 기본인 각개격파를 시전하려 했던 것이지요.  바그라티온이 바클레이 보기를 뭣같이 본다고 해서 그가 무능한 지휘관이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의도를 눈치채고 곧 철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바그라티온도 그동안 수비가 아니라 공격을 하겠다고 설치기는 했지만 당장은 공격할 준비도, 수비할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저기 장기 주둔을 위해 흩어져 있던 그의 제2군도 철수를 하려면 재집결하는 등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그렇게 바그라티온이 짐을 쌀 시간을 충분히 줄 리가 없었습니다.

인생은 뜻하지 않은 놀라움의 연속이고 전쟁은 특히 그런 법입니다.  바그라티온은 나폴레옹이 빌나에 입성하던 6월 28일에야 철수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랑다르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2군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과연 전격적의 프랑스군이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바그라티온은 무척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아무튼 다행이라고 여기고 바클레이의 제1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북서로 방향을 잡고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곧 프랑스군이 그렇게 제2군을 내버려 두었던 이유가 밝혀지는 듯 했습니다.  철수를 시작한지 6일 후인 7월 4일, 바그라티온은 그의 앞 길을 가로막고 있는 프랑스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명성이 자자한 프랑스군의 명장 다부가 직접 거느리는 군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바그라티온이 바클레이와 합류하기 위해 북북서로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하고 미리 거기에 다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결국 바그라티온은 나폴레옹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럼 그렇지,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어'라고 생각한 바그라티온은 서둘러 방향을 틀어 남서쪽의 민스크(Minsk)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민스크의 전경입니다.  현재 민스크는 과거 우리가 백(白)러시아라고 부르던 벨라루스의 수도입니다만,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소속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폴란드와 러시아, 심지어 스웨덴 등이 번갈아가며 점령하다가 폴란드 왕국 소속으로 있었는데, 결국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영토가 됩니다.  민스크가 도시로 발전한 것은 19세기 중반 경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상남자 바그라티온조차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다부를 피해 허둥지둥 남서쪽으로 방향을 휙 틀어 전속력으로 민스크를 향해 달렸는데, 정작 민스크 인근의 니에쉬비에즈(Nieshviezh)까지 와보니 그를 기다리는 것은 민스크를 이미 다부가 점령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  과연 '축지법을 쓰시는 원수님'이라는 다부의 명성은 고스톱을 쳐서 딴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  이제 바그라티온에게는 그의 뒤를 맹렬히 추격하는 그랑다르메의 대군과 앞을 가로 막은 다부의 군단 사이에서 박살이 나는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그라티온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인생과 전쟁은 알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다부에게 가로막혀 멈춰선 바그라티온의 뒤를 곧 따라잡을 줄 알았던 후방의 그랑다르메 대군이 신기하게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 뒤를 프랑스군이 추격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 싶을 정도의 속도였습니다.  바그라티온은 기회를 놓치는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한참 뒤에야 근처의 미르(Mir)에서 그랑다르메 소속 폴란드 창기병들이 나타나서 러시아군의 카자흐 기병들과 교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는 이미 바그라티온은 다시 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탈출한 뒤였습니다.  그랑다르메가 바그라티온을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탈출에 성공한 바그라티온의 제2군은 스몰렌스크에서 바클레이와 합류할 수 있었고, 결국 이들은 보로디노 전투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냅니다.  만약 이때 바그라티온과 그의 제2군이 민스크 앞에서 요격 궤멸되었다면, 어쩌면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침공 전체의 판도가 약간 바뀔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바그라티온의 뒤를 추격하던 그랑다르메가 예전과 달리 꾸물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동력 하나로 온 유럽을 제패했던 그랑다르메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  분명히 바그라티온의 뒤를 추격하던 그랑다르메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다름아닌 나폴레옹 본인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막내 동생 제롬이었습니다.  

 

 

** PS : 최근에 제가 좀 바빠서 목요일의 잡상편은 이번주에는 못 올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음주 월요일의 제롬 이야기는 어떻게든 올려보겠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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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항상 2019.12.09 0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어떻게
    해도 이기는 운명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

  2. 흠흠흠 2019.12.09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칸나에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패한 것도, 저렇게 2군 사령관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 말을 안 들어서인데, 바그라티온 정말 나라 말아먹으려고 옹졸하고 졸렬하네요.

    설마 2차 세계대전 당시 그 유명한 바그라티온 작전이 저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것은 아니겠지요. 바클레이 작전이라고 할 것이지.

    • 하이텔슈리 2019.12.09 2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기서 뻘짓을 하고 있기는 한데, 바그라티온은 분명히 유능하고 용감한 지휘관이죠. 아마 당시 러시아군 상층부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걸요.

  3. 푸른 2019.12.09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그라티온의 기묘한 모험...

    그와중에 다부는 어떻게 바그라티온보다 먼저 민스크로 갈 수 있었을까요?

  4. 깜구 2019.12.09 1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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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하이텔슈리 2019.12.09 2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롬이 원정 초기에 놓친 러시아군이 바그라티온의 2군이였군요.

  6. 루나미아 2019.12.09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 진짜;;; 대단하네요
    그리고 제롬은 예전부터 왜 사령관직을 갖고 있었는지 의문이였는데 역시 제역할 못했나 보네요

  7. 웃자웃어 2019.12.11 0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당시에 러시아에서 귀족들은 사병이 있었나요?

  8. ㅇㅇ 2019.12.12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롬이 재롱이라도 부려서 늦은건가요


서양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를 '꿈의 나라'라고 하며 동경합니다.  서양의 문화적 토대가 처음으로 이루어졌고, 또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가 그런 꿈의 나라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화장실이 어땠을까 ?  간단히 말하면 이나영이나 한예슬도 화장실에 갈까 정도의 생각이지요.

 



답부터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 중 그래도 가장 화려하고, 또 가장 잘 발굴된 도시인 아테네에도, 공중 화장실은 없었습니다.  또 집집마다 화장실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용변을 보았을까요 ?  뭐, 뻔하지 않습니까 ?  요강을 썼습니다.  영어로는 chamber pot 이라고 하지요.  헬라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요강이라는 편리한 휴대용 변기는 19세기까지도 유럽 전역에서 매우 편리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도 아테네에서는 18세기 유럽처럼, 간밤에 요강에 쌓인 내용물(영어로는 night soil이라고 하더군요)을 길바닥에다가 마구 내다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것을 수거해다가 정해진 곳에 내다버리는 노예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아용으로 썼던 요강 겸 좌변기랍니다.  측면의 저 넓은 구멍으로 아이의 다리를 내놓은 듯 해요.)

 



사실 화장실이라는 문화는 상하수도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테네에는 상하수도 시스템은 없었습니다.  대신 우물보다는 훨씬 세련된, 그러니까 멋진 조각으로 장식된 공공 수도꼭지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물을 암포라 같은 토기 항아리에 길어서 집집마다 가져가는 것은 (물 항아리가 무척 무거울텐데도) 여자 노예의 몫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서민층은 주부가 직접 길었겠지요.  남자들이요 ?  남자들은 그런 거 안했답니다.  아고라나 장터에 가서 토론이라는 미명하에 수다를 떨었지요.  희안하게도 장보는 것은 또 남자들의 몫이었다고 하네요.  남자들이 시장에 가서 동료 시민들과 만나 실컷 수다를 떨고나서, 손에 생선이나 올리브 같은 것을 들고 오는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요.  우습나요 ?  전 사실 부럽습니다.

시대가 좀더 흘러 로마시대가 되면, 로마 뿐만 아니라, 웬만한 대도시에는 상하수도 시스템이 생기면서, 수세식 공공 화장실이 생깁니다.  아래 것은 폼페이에서 발견된 공공 화장실인데, 좌변기 아래에 물이 흐르게 되어있어 '투하물'이 흐르는 물에 쓸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터키 해안지방인 사르디스나 에페소스 등에서도 이런 로마식 공중 화장실이 발견됩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는 용변 보는 모습이 서로에게 흉이 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칸막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게 원래 서양의 풍습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대 미국의 공공 화장실은 칸막이가 상당히 개방적입니다.  즉 옆자리와 칸막이가 있기는 있으나, 발목이 다 보이도록 아래 쪽이 뻥 뚫려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사용하면,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듣기로는 화장실 칸 안에서의 범죄를 막기 위해서라고도 하더군요.  저도 폼페이에 관광 가서 저 공중 화장실을 봤던 것을 기억나는데, '유로 자전거나라'의 여성 가이드분께서 설명하시길 여기에는 남녀 화장실 구분이 없었고, 시민들의 쾌적한 볼 일을 위해 화장실 가운데에서는 시에서 고용한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고 설명하시더군요.  

각 가정에서는 어땠을까요 ?  물론 부자집과 가난한 집이 사정이 틀렸습니다.  부자집에서는 공공 화장실에서 처럼, 좌변기 아래에 흐르는 물이 있어서 수세식이었고, 그냥 중산층 가정에서는 '투하물'이 웅덩이에 그냥 모이게 했다가 정기적으로 퍼내갔다고 합니다.  비용은 집주인이 부담해야 했다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푸세식'이었던 것이지요.

퀴즈 하나.  로마 가정집에서 화장실의 위치는 어디였을까요 ?  다소 충격적입니다.  주방입니다.  주방에 좌변기가 떡 하니 있었습니다.  물과 화장실이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주방의 허드렛물로 '투하물'을 쓸어내리곤 했답니다.  그래도 옆에서 음식을 하고 있는 하녀 옆에서 칸막이도 없는 좌변기에 앉아 응아를 하는 모습은 그리 청결해보이지는 않습니다....

퀴즈 둘.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난 뒤, 휴지는 뭘 썼을까요 ?  고대 아테네의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로마에서는 스폰지, 즉 해면을 썼습니다.  한 30cm 길이의 막대기 끝에 둥근 해면을 달아놓았는데, 공공 화장실에서는 이걸로 뒤를 닦고 소금물이나 식초물이 든 양동이에 다시 넣어놓았다고 합니다.  그걸 다른 사람이 물로 대충 행궈서 또 뒤를 닦고... 으윽.

 



참고로, 최초의 종이는 AD 105년인가에 한나라에서 발명되었습니다.  또 최초의 종이로 된 화장지도 중국에서 썼다고 합니다.  598년인가에 어떤 중국인 학자가, '성현의 말씀이 적힌 종이는 도저히 화장지로 쓸 수가 없다'라고 적어놓은 것이, 최초의 종이 화장지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하는군요.  또 9세기 당나라를 찾은 이슬람 학자가 써놓은 기록에 보면, '중국인들은 위생관념이 없다.  용변을 보고나서 손과 물로 깨끗이 닦지않고, 종이로 쓰윽 닦고 만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는 어떤 걸 화장실 대용으로 썼을까요 ?  16세기경에 이미 종이를 화장지로 썼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보다는 주로 삼, 헝겊조각, 양털, 짚, 나뭇잎, 풀, 나무껍질, 모래, 물, 눈, 돌, 조개껍질 등등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다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개껍질은 대체....??? 

실베스터 스탤론과 웨슬리 스나입스, 그리고 산드라 블록이 나온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도 이 조개껍질 이야기가 나옵니다.  냉동되었다가 100년 후인가의 미래에서 깨어난 실베스터 스탤론이 화장실에 가는데, 휴지는 없고 대신 "three sea shell"이라고 하는 조개 모양의 물건 세개가 나란히 놓인 것을 보고 난감해하는 장면이 있지요.  그 사용법은 저도 정말 궁금했는데, 영화 맨 마지막 장면이 바로 스탤론이 산드라 블록에게 "대체 그 조개는 어떻게 사용하는거냐" 라고 묻는 것이었지요.

 



일본은 전통적으로 새끼줄을 앞뒤로 잡고 쓱쓱 했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롱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뭐 그리 우아하지는 않았답니다.  껍질을 벗긴, 얇은 나무 막대기로 뒤처리를 하고 씻어서 뒷간 한쪽에 세워놓았다는데요 ?

로마 제국이 망한 뒤, 중세 암흑기를 거친 유럽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면서 비로소 요즘 나오는 '뽀스'를 좀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경우 "짐이 곧 국가니라. (L'ete, c'est moi.)"라고 말했다는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세우면서 예술과 문화의 나라로서의 행보가 본격화됩니다.  자,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장실은 또 어땠을까요 ? 

이건 다들 아실 겁니다.  역시 정답은 한마디로 '그런거 없다' 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화장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지요.  다만 요강, 즉 chamber pot이 있었습니다.   뭐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거기 정원에 있는 덤불 숲이 원래 화장실이다 뭐다 그런 말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과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요강'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루이 14세가 왕권 강화를 위해 매일 밤 무도회를 열었다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요강을 들고 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요강을 들고 왔다고 하더라도, 하인들이 그 내용물을 집에 들고 갔을 것 같지는 않고, 결국 정원 덤불 숲에 버렸을테니, 결국은 그게 그거 같기도 하군요.

 

(이런 예쁜 여성용 요강을 bourdaloue '부르달루'라고 부른답니다.   영어에는 없는 표현이라서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보니 '드문 남자 이름' 이라는 설명과 함께 '요강'이라는 뜻이 있더군요.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Louis Bourdaloue라는 이름의 유명한 예수회 신부가 하도 설교를 오래 하는 바람에 숙녀분들이 옆 방에서 잠시 용변을 해결할 수 있도록 이런 물건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물건을 사용하는 모습을 그린 바로크 양식의 유화가 있긴 한데... 너무 노골적이라 전재하지 않습니다.  꼭 보고 싶으신 분은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11/10/what-was-a-bourdaloue/ 클릭.)

 



방 안에서 요강에다 응아나 쉬를 하면 당연히 악취가 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요강에는 뚜껑이 달려있었고, 또 뚜껑을 덮기 전에 천을 덮어서 악취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님이 응아나 쉬를 하고 나면 하인이 곧장 내용물을 내다 버렸습니다.

영국이 나폴레옹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꾸려나갈 때, 그 전쟁 자금을 대주었다는 로스차일드의 집무실에도, 따로 화장실이 없었던 것이 확실한 모양입니다.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로스차일드 집무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집사가 거만한 표정으로 요강을 들고 나오자, 그 앞에 진을 치고 앉아있던 많은 청원자들이 마치 성물이라도 본 것처럼 경외하는 눈빛으로 그 요강을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군함이나 상선의 경우, 난간에 간단한 구멍뚫린 좌석이 있었고, 그게 화장실이었습니다.  영어로는 그런 화장실을 'head'라고 불렀습니다.  왜 화장실을 하필 head라고 불렀는지는 간단히 설명됩니다.  당시 범선의 원리상, 당연히 바람은 배의 뒤쪽에서 불어왔으므로 선원들이 응아한 것이 배의 측면에 불러붙는 끔찍한 사태를 피하려면 화장실이 이물, 즉 배의 앞쪽에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냥 '뱃머리에 간다'라는 말이 화장실 간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면서 화장실을 head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선장실에는 따로 화장실이 있었는데, 역시 '투하물'은 그대로 바다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환자들을 위한 방에는 역시 화장실이 따로 있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추운 밤에 환자보고 난간에 매달려 용변을 보라는 건 좀 잔인했기 때문이었지요.  일반 여객선의 경우, 대개 '난간 화장실'을 쓰지 않고 역시 요강을 썼습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선원들 앞에서 용변을 볼 수는 없었겠지요.  남자 승객들도 파도가 심한 날에 '난간 화장실'을 쓰는 경우 바다에 추락할 위험이 많았습니다.

위와 같이 선박인 경우는 드넓은 바다가 '투하물'을 처리해주었으니 차라리 위생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대도시인 경우, 요강의 '내용물'을 어디다 버리느냐입니다.  답은 다들 아시지요 ?  그냥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1807년, 나폴레옹 전쟁의 복잡한 국제 관계로 인해, 영국은 엉뚱하게도 나폴레옹과 대립하던 덴마크 왕국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덴마크 왕국에게는 아담한 규모의 멋진 함대가 있었는데, 트라팔가 해전에서 함대를 모두 말아드신 나폴레옹께서 그 함대를 탐냈습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힘없는 덴마크가 나폴레옹에게 함대를 빼앗길 것 같다는 판단을 한 영국은, 덴마크에게 매우 거만한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 함대를 내놓아라.  그러면 우리가 잘 보관했다가 좋은 시절이 오면 되돌려주마.'

덴마크도 엄연한 주권국가인데, '예, 그러시지요' 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를 거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 육해군이 코펜하겐을 포위하고는 바다와 육지에서 곡사포로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소위 '자위적 선제 공격'으로도 유명하고, 또 백인들끼리의 전쟁에서 최초로 민간인 거주 지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최초의 사건으로도 유명한 일입니다.

 



이때 코펜하겐에는 Eckersberg라는 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집에도 곡사포에서 발사된 폭탄 하나가 지붕을 뚫고 날아들어왔습니다.  이 화가는 급한 김에 요강을 들어 그 내용물로 폭탄의 도화선에 붙은 불을 껐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화가는 1807년의 코펜하겐 폭격 사건을 목판화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위의 그림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나폴레옹 블로그인데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화장실 일화가 하나는 있어야겠지요 ?  나폴레옹이 퐁텐블로에서 퇴위 조서에 서명한 뒤 1차로 폐위되어 엘바 섬에 유폐되었지요.  사실 거기에 간 형태는 엘바 섬에 죄수로 간 것은 아니고 엘바 섬의 군주로 봉해져서 것이었습니다.  20년 넘게 파리에서 권좌를 누리다가 간 나폴레옹의 눈에 엘바 섬과 같은 촌동네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습니까 ?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도착해서 배에 내린 뒤 처음 내린 명령이 '이 동네에 화장실을 만들라, 악취가 난다'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만, 저는 그게 사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럽 대도시는 어디나 다 요강 내용물의 냄새가 났을테니까요. 

 

 

 

Source :  https://eaglesanddragonspublishing.com/tag/sponge-on-a-stick/

https://www.pinterest.jp/pin/535717318145424968/

https://en.wikipedia.org/wiki/Chamber_pot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11/10/what-was-a-bourdal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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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강여호 2019.12.05 0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장실 이야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2. Nasca 2019.12.05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헬레스폰트 연재 다시 해주세요

  3. j 2019.12.05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먹는것만큼 중요한게 싸는(!)일이죠ㅎㅎㅎ 재밌게 읽고 갑니다!

  4. Kulnev 2019.12.06 1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 글이지만 언제 읽어도 유익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5. 이타카 2019.12.06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하인들은 어디에 용무를 봤을까요..?

  6. spitfire 2019.12.10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소한 고대에는 서서쏴는 아니었네요~ 문제는 근세로 넘어오면서 (남녀 구분없이) 서서쏴가...


네만 강을 건너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Vilna, Wilna, Vilnius)에 입성하기까지 총 한 방 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빌나에 입성할 때, 빌나 주민들의 반응을 봐도 그랬습니다.  당시 빌나는 러시아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간지 약 20년이 채 안 된 상태였었는데, 러시아계 관료들이나 러시아 측에 붙었던 폴란드계 귀족들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그 뒤를 따라 함께 피난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해방군으로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 폴란드 창기병 부대를 이끌고 빌나에 거의 처음으로 입성했던 로만 솔틱(Roman Soltyk) 백작의 목격담에 따르면 거리와 광장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고 창문들에는 여인들이 상반신을 내밀고 손수건을 흔들며 기뻐했습니다.  꽃다발과 함성이 난무했고요.

 

(1812년 당시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 보아르네 휘하 참모진에 있던 알브레히트 아담(Albrecht Adam)이라는 종군화가가 스케치한 그랑다르메 보병들의 행군 모습입니다.  알브레히트 아담은 바이에른 출신의 독일인으로서, 1809년 전쟁 때 보아르네에게 종군 화가로 채용되어 이후 계속 바이에른 궁정 화가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분은 스케치 뿐만 아니라, 나중에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스케치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여러 석판화와 유화도 그려 꽤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그 그림 중 일부는 지금도 유럽 곳곳의 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사진은 제가 요즘 거의 베끼다시피 하고 있는 아담 자모이스키의 책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그림입니다.  당시 알브레히트 아담은 주로 이탈리아인들로 편성된 제4군을 따라다녔다고 하니까 저 그림 속 병사들도 아마 이탈리아군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군이 빌나에서 찾아낸 것은 다 타버린 러시아 군수품의 잿더미 뿐이었습니다.  빌나와 그 인근 지대는 러시아군이 이미 수개월에 걸쳐 장기 주둔하며 먹을 것을 박박 긁어먹고 간 뒤였기 떄문에 식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박박 긁어모았던 식량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용의주도한 바클레이가 모두 불태워 버렸고요.  그런 상황은 원래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후방지대에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잔뜩 쟁여놓았습니다.  그러나 네만 강을 건너자마자, 정확히 이야기하면 네만 강을 건너기 전부터도 말들이 사료 부족과 형편없는 도로에서 기진맥진하여 빠르게 죽어쓰러지기 시작했고, 특히 네만 강을 건넌지 얼마 안되어 불어닥친 폭풍우 속에서 수만 마리의 말이 죽어버린 것이 상황을 정말 악화시켰습니다.  진흙구덩이와 물웅덩이 속에서 말들이 허우적거리다 죽어버리자, 식량을 후방에서 새로 실어오기는 커녕 그나마 이미 싣고 오던 것조차도 버리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버려야 했던 짐 중에는 말들의 먹이인 귀리도 잔뜩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곧 더 많은 말들이 영양 실조로 죽게 되었고 상황은 기하급수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랑다르메를 덮친 폭풍우로 인해 진흙탕이 된 도로에서 고생하는 포병대를 그린 모습입니다.  이 그림도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것입니다.  Christian Wilhelm von Faber du Faur라는 분이 그린 석판화입니다.  이 분도 남부 독일인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화가인데,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에 배속된 종군 화가였습니다.)

 



그렇게 빌나로 반입되는 식량은 전혀 없던 반면, 먹여살려야 하는 입들은 삽시간에 깜짝 놀랄 정도로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후방 뿐만 아니라 전방에서도 많은 그랑다르메 병사들이 절뚝거리며 빌나로 몰려든 것입니다.  낙오병과 환자, 부상병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40만 그랑다르메 중 상당수는 단련된 병사들이 아니라 단시간에 긁어모은 어린 신병들이 많았는데, 특히 그런 신병들은 부족한 식량과 열악한 도로 및 위생 환경에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총상이 아닌 강행군에 의해 발과 다리에 생긴 부상과 함께 온갖 질병으로 인해 빌나에 차려진 야전 병원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네만 강을 건넌지 1주일 만에, 아무 전투가 없었는데도 놀랍게도 이들의 숫자는 3만 명에 달했습니다.  전체 병력의 7~8%에 해당하는 인원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빌나 및 인근 지역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기쁨도 삽시간에 식어버렸습니다.  주민들은 나폴레옹이 과거 영광을 누리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복원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어렵더라도 최소한 러시아의 농노제라는 신분의 예속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곧 나폴레옹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령 7월 3일, 나폴레옹은 리투아니아 정부 수립을 발표했는데, 이는 바르샤바 공국과의 합병을 원천 봉쇄하고 그저 리투아니아 지역에서의 징병과 식량 징발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열의에 찬 빌나 대학의 학생들이 일종의 정치 모임을 만들어 프랑스군 점령 지역은 물론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서도 농민들에게 러시아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선전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나폴레옹은 '사회 정치적 소요를 원치 않는다'며 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또 빌나 대학의 학장인 얀 스나이데츠키(Jan Sniadecki)와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이야기가 나오자 '그 사람은 굉장히 뛰어난 황제요 !' 라며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의 편을 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에서 일단의 폴란드 애국자들이 먼 길을 찾아와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건의하자 '내 통치 하에는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많은 집단이 있고 나는 그들의 충돌을 조절해야 한다'라며 그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 전쟁이 벌어진 주요 원인은 크게 2가지, 영국-러시아 간의 무역 그리고 폴란드 왕국의 부활에 대한 러시아의 반발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항구를 영국으로부터 닫아야 했고 또 폴란드인들의 충성이 꼭 필요했습니다.  애초에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은 도저히 상존할 수 없는 서로의 이해 관계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어떻게든 러시아와의 동맹을 다시 끌어내려 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이 전쟁에서 바라는 것은 알렉산드르와의 화해였고, 그 때문에라도 나폴레옹은 끝끝내 농노 해방령이나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민심을 이반시킨 것은 그런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픈 병사들은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해야 했고, 당연히 곳곳에서 난폭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의 제1진은 언제나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지만, 그들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다 훑어먹으며 지나가자, 제2진을 맞이하는 것은 텅빈 마을들과 버려진 농토 뿐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그랑다르메를 산적떼로 인식하게 되었고, 프랑스군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농민들은 얼마 안되는 식량과 가축을 몰고 깊은 숲 속으로 피난을 떠나버렸습니다.  농민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프랑스놈들은 우리의 족쇄를 풀어주러 왔다는데, 우리 신발까지 벗겨가더라."

그랑다르메의 병사들도 그에 대응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을 사실상 적으로 대했습니다.  요제프 에즈몬트(Jozef Eysmont)라는 시골 신사는 빌나 인근에 있던 자기 장원으로 들어오는 프랑스 기병대를 전통에 따라 빵과 소금으로 환대하려 했으나, 그들은 곧 그의 창고와 마굿간을 탈탈 털더니 더 나아가 아직 익지도 않은 밀과 보리를 다 베어버리고 집안까지 쳐들어와 구석구석을 뒤집어 귀중품을 빼앗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들고가지 못하는 모든 가구를 아무 의미 없이 때려부수고 창문도 하나하나 다 깨어버렸습니다.  그의 마을 전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물론 무덤까지도 프랑스군의 약탈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한 폴란드 장교는 그에게 빵 한조각을 구걸하며 다가오는 거지를 밀어내려다 그 거지가 그의 친구이던 폴란드계 귀족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런 약탈에 대한 보고를 당연히 들었고 대노했습니다.  그는 약탈자들에 대해서 일체의 관용을 베풀지 말고 즉결 처분에 처하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는 군대는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굶어죽으나 총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절망과 체념이 섞인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병사들이 취할 행동은 딱 하나였습니다.  탈영이었지요.  탈영은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특히 고향에서 너무나 먼 리투아니아 현지에서 탈영병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떼를 지어 산적떼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현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장교나 관료들까지 습격했는데, 이들 때문에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전달하는 파발마들의 활동이 제약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탈영병들의 숫자는 최소 3만에서 최대 9만까지 되었다고 하는데, 탈영병의 숫자가 이렇게 너무 많다보니 이들을 체포하는 대로 다 처형할 수도 없었습니다.  간혹 이들을 잡아들일 경우 일부만 처형하고 대부분은 다시 부대에 편입시켰는데, 이들은 대부분 다시 탈영했습니다.

결국 네만 강을 건넌 뒤 나폴레옹에게 들어오는 것은 온통 나쁜 소식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불시에 네만 강을 건너 빌나를 들어친 것은 확실히 기습 효과가 있었고, 그로 인해 러시아군을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lbrecht_Adam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ian_Wilhelm_von_Faber_du_Fa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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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2.02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군에서 군복무한 병사들이 하나같이 하소연하는 게 행군이 생각이상으로 힘들고 부실한 전투화 땜에 발바닥 및 발목에 물집,상처까지 생겨 이중으로 힘들었다는 건데 인프라가 없다시피한 당시엔 3만여명의 부상자는 평범한 수준이었겠죠. 군납비리가 한국군 이상으로 만연해서 군화 재질도 좋지 못했던 것도 감안하면 선방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매사 꼼꼼했던 나폴레옹이 이걸 몰랐을 리는 없으니 이런 낙오병도 계산에 넣어 대군을 꾸린 거겠죠.

    • reinhardt100 2019.12.02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화문제 이거 꽤나 중요합니다.

      독소전 당시 소련군이 심각하게 직면한 문제 중 하나가 군화문제입니다. 가장 심각했던 공업용 소금과 비타민 섭취보다 후순위이긴 하지만 군화가 없어서 병력충원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걸 해결해준게 미국의 랜드리스인데 최소 1500만 켤레의 군화가 소련에 급송됩니다.

      냉전기 소련군이 기계화에 집착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군화문제입니다. 소련식 발싸개나 우샨카 같은 신발 아니면 인민군이 쓰는 지하족 같은 운동화로 진격하다간 며칠만에 발이 아작나니 최대한 기계화해야 후유증이 덜할 거니까요. 농담으로 들으실지 모르지만 이게 현실이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군이 발싸개 퇴출한게 2010년대였으니까요.

    • 기리스 2019.12.02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발싸개를 자신들의 전통, 자존심 같은 걸로 여기면서 옹호하는 러시아인들이 꽤 되더군요. 것도 신발 나름이고, 민간이나 군에서도 해군 같이 구두 많이 신는 곳은 옛날부터 양말이 보급되었죠.

    • 카를대공 2019.12.02 1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대에서 인상 깊게 읽은 책의 구절 중 하나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베트남 군인들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베트남 군인들은 폐타이어로 된 신발을 신고 행군을 했다"
      그당시에도 기겁을 했는데 나시카님 이번주 글을 보니 그때가 떠오르네요.

    • [][] R.F.[][] 2019.12.06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reinhardt100: 러시아식 전통 펠트 방한화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우샨카가 아니라 '발렌끼' 입니다.
      우샨카는 소련 및 러시아군 특유의 방한모죠 ^^

    • reinhardt100 2019.12.06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가 잘못 적었네요. ^^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흠흠흠 2019.12.02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있네요. 약탈행위를 전혀 못 잡는 것으로 보아 나폴레옹이 대노했다는 것도 그냥 연기인 것 같습니다. 진짜 잡으려고 마음 먹었으면 웰링턴처럼 약탈행위 잡았겠죠. 저렇게 본국에서 멀리 떨어질 수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소속 군부대 밖에 없을텐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현지에서 산적떼를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죠? 못 배운 사람들이라서 그러나.

    • ㅇㅇ 2019.12.02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멀어서 돌아가기에도 막막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싶습니다. 빌뉴스에서 바이에른까지 1000km, 파리나 북이탈리아까진 1500km에 가까우니까요

  3. 리순센 2019.12.02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정신이 아득해지네요.

  4. 장웅진 2019.12.02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째 <알기 쉬운 제2차 세계대전사 제3권 - 대초원의 불꽃>을 다시 읽는 기분입니다. 나치독일군을 해방군이라며 환영했던, 스탈린에 의한 인공대기근을 겪어야 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독일군이 집단농장을 해체하기는커녕 그걸 계속 이용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자 파르티잔으로 변해갔더라는...

    • reinhardt100 2019.12.02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크라이나나 백러시아, 발트 3국, 심지어 폴란드조차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환영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일단 제국의 괴뢰국이긴 해도 독립을 약속했던 것도 있습니다. 하나 더 1917년 이후 철도 전격전 당시 약 150만 독일 동방 점령군이 제정 러시아보다 훨씬 공정한 점령통치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에 대한 환상이 있던 이들 지역 주민들이 모두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볼 수 밖에 없었죠. 심지어 우크라이나에서는 나시카님이 쓰신대로 빵과 소금을 뿌리면서 열렬히 환영했죠.

    • Franken 2019.12.02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일 나치독일이 점령지 주민들을 인간 대우 해주었다면 독소전쟁의 향방 자체가 달라졌을 겁니다. 파르티잔 퇴치하는 데만 30여만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니 일개 야전군 수준의 이 병력이 소비에트 전선에 투입되고 주민의 협조까지 얻으면 소련으로썬 매우 난감한 상황이 되었을 테죠.

    • reinhardt100 2019.12.03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독소 전쟁 당시 독일군이 투입한 후방 치안 병력만 30만이 넘었지만 실제로는 더 투입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선, 상당수 동맹국 병력이 고려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특히 루마니아나 헝가리군의 경우, 심하면 1/4 이상이 자국 근처의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던 군정통치용 병력이라 막상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죠. 루마니아가 대표적인데 80만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는데도 전선에 전개한 병력은 약 50만 선에서 왔다갔다 했습니다.

      하나 더 고려한다면 각 지역의 민병대 병력이나 독일 본토에서 급파된 경찰 출신 혹은 무장친위대 제8사단 플로리안 가이거 같은 병력도 꽤 됩니다.

      이런 병력들까지 고려한다면 최소 40만은 넘어가야 한다고 전 봅니다.

  5. keiway 2019.12.02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수록 당시의 생활/기술 수준으로는 러시아 원정 실패는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폴레옹도 그걸 모르지는 않아서 러시아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화평을 맺으려 했지요... 그래도 결국은 '내가 한방 쎄게 빡 치면 나한테 항복하겠지' 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나폴레옹의 실책과 그로인한 몰락이 참 아쉽게 느껴집니다.

    • 카를대공 2019.12.02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술 수준이라는 말씀이 딱인거 같습니다.
      뭐랄까 대자연이 "하지마라"고 강요하는 느낌?
      사실 나폴레옹과 당시 프랑스니까 당시 수준으로 모스크바까지라도 갔다고 생각합니다.

  6. 카를대공 2019.12.02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당시 비전투 손실이야 유명하지만 네만강 건너자마자 꼴이 무척 심각했네요.정말 상상 이상입니다.
    항상 좋은 정보로 재미난 글 써주셔서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7. 웃자웃어 2019.12.03 2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있는데 당시의 기병과 포병은 모병인가요? 아니면 강제징집 인가요?

    • nasica 2019.12.04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질문인데 답을 잘 모르겠군요. 그러나 기병과 특히 포병이 보병보다 급료가 좀더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자원병들로 충원되었을 것 같습니다.

    • Franken 2019.12.05 14: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은 말을 다루어야 한다는 특성상 아무나 못하여 어렸을 때부터 타본 경험 있는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지원했고 군에서도 선호했습니다. 포병 역시 당시 대포가 직접사격 위주였다지만 그래도 탄도학 같은 산수능력은 있어야 명중율이 나왔기에 학식을 갖춘 중산층 이상 자제를 선호했지만 뽀대가 기병보다 안 나고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단점 때문에 지원자가 적어 급하면 일반 서민도 받는 등 상대적으로 문이 열려 있었죠.

    • 웃자웃어 2019.12.05 2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과 포병이 숙련도를 요구하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일반 보병과 비교했을때 복무기간은 어느정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