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년 마지막 날에 영국 상품의 입항을 허용하고 반대로 프랑스 상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를 부가하는 짜르 알렉산드르의 칙령(ukaz)이 내려지자, 이제 전쟁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유럽 전체가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폴란드 문제로 1810년 중반부터 아웅다웅하고 있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말로만 툭탁거리지 않았고, 서로 병력을 바르샤바 공국 접경 지역으로 증강 배치하면서 상호간의 긴장감을 키워나갔습니다.  나폴레옹은 1806년 전쟁 때 점령한 뒤 계속 움켜쥐고 있던 슈테틴(Stettin)과 단치히(Danzig) 등 프로이센의 주요 요새들에 병력을 추가 배치하고, 더 나아가 프랑스 내의 병력들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등 동부 지대로 조금씩 이동시켰습니다.  

 

(오늘날 폴란드 영토가 된 슈테틴, 폴란드어로는 슈체친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하고 있는 도시로서, 베를린으로부터는 140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이며 원래 프로이센 영토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게 동부 영토를 빼앗긴 폴란드에게 보상 형식으로 주어졌지요.)

 



1811년에 접어들자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811년 4월에는 긴 꼬리가 달린 혜성이 관측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혜성은 큰 전쟁과 기아, 전염병 등 좋지 않은 대사건의 전조로 받아들여졌는데, 모스크바부터 마르세이유까지 유럽 전역에서 이 불길한 혜성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알렉산드르 본인도 이 혜성에 대해 '어디까지나 과학에 대한 흥미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미국 대사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혜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 나폴레옹은 정말 바빴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기존의 전쟁과는 규모와 성격면에서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남긴 편지를 보면, 나폴레옹은 연대 번호만 들어도 그 부대의 지휘관이 누구고 어디에 배치되어있으며 편성된 전력이 어떤 수준인지 또 그 과거 전적이 어땠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세세한 점까지 신경을 쓰면서 새로 병력을 뽑고 새 부대를 편성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로 무척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준비한 병력은 대략 68만, 그 중에서 실제로 네만(Nieman) 강을 건너 러시아로 동진할 인원은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분분합니다만) 대략 40만에 달헸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준비를 하면서 러시아군을 무찌를 신무기나 새로운 전술 등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군사 기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가 이번 전쟁 준비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둔 것은 바로 병참이었습니다.  그는 1807년 삭막한 폴란드 땅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동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는 확연하게 다른 곳이라서 기존처럼 현지 조달에 의존해서 싸우다가는 굶어죽기 딱 좋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역대급의 보급망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1811년부터 1812년까지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비스툴라(Vistula, 폴란드어로는 Wisła 비스와) 강을 따라 대규모의 보급창을 건설했습니다.   비스툴라 강은 바르샤바는 물론 모들린(Modlin)과 토른(Thorn) 등의 주요 요새 및 도시를 거쳐 항구 도시 단치히(Danzig, 현재의 그단스크 Gdansk)에서 발트 해로 흘러가는 폴란드의 대표적 수로였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영토와 직접 맞닿아 있는 라인 강과 이 비스툴라 강 사이에 총 5개의 수송로를 설정하고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서 긁어모은 물자를 실어날랐습니다.  

 

(유럽 대륙의 주요 하천입니다.  템즈 강 같은 것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지만, 비스툴라 강은 당당히 표시될 정도로 꽤 중요한 강입니다.)

 

(브레슬라우, 즉 보르츠와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한 도시입니다.)

 

 

 

그 결과, 1812년 1월까지 나폴레옹은 단치히에만 40만 명의 병사들과 5만 마리의 말이 50일 간 먹을 식량과 사료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40만 명 x 50일 = 2000만 명분의 식량을 쌓아놓은 것이지요.  이 외에도 오데르(Oder) 강에 접한 프로이센의 도시 퀴스트린(Küstrin, 폴란드어로는 Kostrzyn 코스트신)과 슈테틴(Stettin, 폴란드어로는 Szczecin 슈체친)에도 별도로 수백만 명분의 식량을 축적했습니다.  역시 오데르 강에 접한 프로이센 도시 브레슬라우(Breslau, 폴란드어로는 Wrocław 브로츠와프)와 비스툴라 강에 면한 프오츠크(Płock) 및 비소그루트(Wyszogród) 등에는 거대한 곡물 창고와 제분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생산된 밀가루는 비스툴라 강을 통해 배 편으로 토른에 보내져 하루에 6만개씩의 큼직한 야전용 건빵이 구워졌습니다.   그 외에도 각 부대의 뒤를 따라 가도록 걸어다니는 푸줏간인 가축떼를 5만마리나 모아두었습니다.  

 

(베를린과 슈테틴, 즉 슈체친과의 거리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원래 슈테틴은 독일 영토일 때 베를린의 외항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비스툴라 강변을 따라 늘어선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과의 거리를 봐두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의 주요 물자 수송로 역할을 한 비스툴라 강, 즉 비스와 강입니다.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은 이 강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잔뜩 쌓아만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을 쾌속으로 진군하는 부대들의 속도에 맞춰 러시아 내륙으로 수송을 해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이를 위해 치중대대(train battalion) 20개를 편성했습니다.  여기에는 7,848대의 마차가 배속되어 배고픈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실어나르도록 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하면, 스페인 전역을 위해 나폴레옹이 조직한 치중대대의 규모를 보시면 됩니다.  1810년 10월, 나폴레옹은 총 12개 치중대대를 편성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마차의 수가 1,700대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 스페인 방면군에는 5개 대대를, 포르투갈 방면군에는 2개 대대를, 그리고 프랑스 국내에서 5개 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1810년 당시에는 스페인에 배치된 프랑스군의 수가 20만을 훌쩍 넘었는데, 거기에 고작 5개 대대 약 710대의 마차가 할당된 것입니다.  그런데 40만의 러시아 방면군을 위해 10배가 넘는 수의 마차를 준비한 것을 보면, 확실히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각오를 가지고 수송에도 매우 신경을 쓴 것입니다.  

 

 

(한번도 하일라이트를 받지 못한 부대가 바로 치중대이지요.  하지만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은 보병과 포병, 기병일지 몰라도, 전쟁을 이기는 것은 바로 이 치중대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평소에 등한시하던 식량 문제에도 이렇게 신경을 썼으니 탄약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더욱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지 조달을 중시하던 나폴레옹조차도 무기와 탄약은 항상 본국으로부터의 수송에 의존했었거든요.  바르샤바에는 큼직한 무기고가 건설되어 각종 탄약과 무기가 집적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주요 식량 집적소인 단치히, 슈테틴, 퀴스트린 등에는 식량 뿐만 아니라 각종 야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제3차 대불동맹전쟁 때 동원된 나폴레옹의 7개 군단이 보유했던 대포의 수는 총 300문을 넘지 않았고,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당일날은 훨씬 더 적은 수의 대포가 동원되었습니다.  러시아 원정 이전까지는 유럽 최대의 전투였다는 바그람 전투에 동원된 프랑스군의 전체 대포 수는 488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의 마그데부르크(Madeburg)에 집결시킨 탄약과 포병대의 규모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이 곳의 무기고에는 135톤의 화약과 함꼐 2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가 축적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포 462문과 공성용 중포 100문이 집결되어 있었습니다.  슈테틴에는 263문의 야포, 1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 90톤의 화약을, 퀴스트린에는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를, 그리고 글로가우(Glogau)에도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 45톤의 화약을 축적해놓았습니다.  1812년 5월,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806문의 야포와 761,801발의 포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야포 1문당 거의 1,000발에 가까운 포탄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사상 최대이기도 하고 또 유례없이 격렬한 포병전이었던 바그람 전투 40시간 동안 프랑스군 포병대의 488문은 약 10만발을 발사했는데,  이는 1문당 200발 정도를 쏘아댄 것이었습니다.  이런 격렬하고 대규모였던 전투는 나폴레옹 인생 전체에서도 흔치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정말 충분한 양의 탄약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준비를 했지만,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결국 병참 문제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어제 페이스북에서 재미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새로 영국 총리가 된 보리스 존슨의 우스꽝스러운 사진들이었지요.   그 중에서 하나는 먹을 것과 관계되어 있어 특히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보리스 존슨이 손에 훈제 청어(kipper)를 들고 뭔가 떠들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정치인이 대중 앞에서 손에 훈제 청어를 들고 연설을 했을까요 ?

 



관련 뉴스를 뒤져보니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두 우습게 여기고 놀리는 보리스 존슨이 더욱 우습게 보일만 한 사건이 있었더군요.

보리스 존슨이 훈제 청어에 관해 연설을 한 것은 보수파 정치 모임에서였습니다.  보리스 존슨의 주장에 따르면 맨(Man) 섬의 훈제 청어 상인이 훈제 청어를 얼음팩(ice pillow)으로 포장해야 했는데, 이는 '무의미하고 비용만 높이는데다 환경 파괴적'인 일이며, 이 모든 것은 EU의 비합리적 규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규정이 존재한다면 그건 정말 보리스 존슨의 주장대로 무의미한 규정일 것입니다.  훈제 청어는 대표적인 장기 보전 식품이므로 그걸 얼음으로 포장하는 것은 통조림을 얼음 포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비합리적인 EU 규제에 대해서는 어느 영국 신문사 편집인으로부터 들었다고 언급하면서, 이런 비합리적인 규제나 남발하는 EU로부터 영국이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체 어느 신문사 편집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전형적인 가짜 뉴스였습니다.  보리스 존슨의 연설 내용에 발끈한 EU 측에서 밝혔는데 EU에는 그런 규정이 없으며, 영국에 그런 규제가 있다면 그건 순수하게 영국 국내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지적하는 리투아니아의 EU 감독관인 안드리우카이티스(Vytenis Andriukaitis)는 트위터에 이렇게 쓰며 보리스 존슨을 조롱했습니다.

"생선은 머리부터 먼저 상합니다.  유력한 총리 후보로서, 보리스 당신은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실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결국 그 얼음팩이 완전히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닐 겁니다."

보리스 존슨은 영국에서 모든 이들이 조롱거리로 즐겨삼는 인물이긴 한데, 이 뉴스를 전한 기사의 제목도 의미심장했습니다.  아래와 같았거든요.

"Boris Johnson’s kipper claim is red herring, says EU"
보리스 존슨의 훈제 청어 주장은 붉은 청어(사실을 왜곡하는 것)라고 EU가 말했다.

여기서 red herring, 즉 붉은 청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  원래 청어는 등푸른 생선인데, 이걸 훈제하면 좀 붉은 색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붉은 청어란 곧 훈제 청어를 뜻하는데, 이는 관용어로서 '사실을 오도하는 것, 잘못된 실마리' 등을 뜻합니다.  왜 훈체 청어가 그런 불명예스러운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

 

 


여기에는 몇가지 설이 있습니다.  주로 통용되는 이야기는 영국에서 여우나 토끼 등을 쫓는 사냥개를 훈련시킬 때, 일부러 그 추격로를 가로질러 훈체 청어를 문질러 둠으로써 사냥개를 혼란에 빠뜨리는 함정을 놓는다고 합니다.  미숙한 사냥개는 처음에는 강렬한 훈제 청어의 냄새에 이끌려 원래 쫓던 사냥감을 놓치게 되지만 점차 익숙해지면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는 사냥개를 훈련시킬 때 훈제 청어를 이용한 그런 함정을 쓰는 관행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당시인 1807년 2월 14일, 정기 간행물인 Political Register에서 영국 언론인인 윌리엄 코벳(William Cobbett)이 아래와 같은 기사를 내놓으면서 붉은 청어라는 것이 뭔가 사실을 오도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거의 굳어져 버렸습니다.  거기서 코벳은 자신이 어릴 때 사냥개 훈련에서 훈제 청어를 썼다고 언급하면서, 제4차 대불 동맹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했다고 잘못 보도한 영국 언론을 비판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It was a mere transitory effect of the political red-herring; for, on the Saturday, the scent became as cold as a stone."

"그건 정치적 사실의 왜곡(붉은 청어)에 의한 그저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었다.  토요일이 되자 그 냄새는 마치 돌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Red herring이라는 단어를 영국 사전에 올리는데 큰 공헌을 한 윌리엄 코벳입니다.  가짜 뉴스를 전한 언론들을 비판하면서 쓴 red herring이란 단어 자체가 알고 보면 잘못된 정보에서 나온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이렇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강한 인상을 남기면 정치인이나 언론인이나 원하는 바를 이룬 셈이지요.  아무리 터무니 없는 가짜 뉴스라고 해도, 일단 유력 정치인 또는 유력 일간지가 언급을 하면 그 사실 자체가 뉴스가 되어 대중에게 인식되니까요.  사실 그런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것은 굳이 일부 정치인이나 언론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뉴스를 그냥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점이 가짜 뉴스 전성시대를 이끄는 주된 요인 아닌가 싶습니다.    

 

그나저나 저 신임 영국 총리는 왜 하필이면 왜곡의 상징인 훈제 청어에 대해 왜곡된 주장을 펼쳤던 것일까요 ?  그냥 재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었던 것일까요 ?






Source : https://www.ft.com/content/1ba5b9c4-a954-11e9-b6ee-3cdf3174eb89
https://english.stackexchange.com/questions/30239/where-does-the-phrase-red-herring-come-from
https://en.wikipedia.org/wiki/Red_herring


어떻게 보면 온 유럽이 휩쓸리게 되는 1812년 러시아 침공이라는 난리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벌어지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한발짝 물러나는 얌체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두들겨 패는 동안 떨어지는 콩고물, 즉 발칸 반도 분할에서 좀더 많은 땅을 땅을 주워먹으려 했을 뿐 뭔가 숭고하고 원대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것은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주사위 놀음이라서, 제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프랑스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체는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측에 가담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의 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한 실제 이유, 즉 영토 문제도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좋든싫든 프랑스측에 가담하도록 압박했습니다.  당장 흑해로 흘러가는 도나우강 하류 지역, 그러니까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중에서 오스트리아가 자기 것이라고 침을 발라놓았던 몰도바-루마니아 방면으로 러시아군이 진격해오자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무척 초조해졌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편성하는 야전군의 규모가 무려 40만이 넘는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자, 그 정도라면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보고 오스트리아도 1812년 3월 나폴레옹 진영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끝까지 얌체처럼 그야말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정도인 3만의 병력을 제공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스웨덴도 끝까지 어느 쪽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며 눈치를 보던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어찌 보면 북구의 스웨덴은 프랑스의 진격로와는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지리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꽤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장 러시아령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제든지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였거든요.  게다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해협, 즉 외레순(Öresund, 영어로는 The Sound) 해협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이미 프랑스 측에 붙은 덴마크의 헬싱고르(Helsingor) 요새와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 요새 사이의 해협은 특히 좁았는데, 거리가 10km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해안포로 사용되던 36파운드 대포의 최대 사거리가 3.7km 정도였고, 유효 사거리는 고작 600~700m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요새 사이를 통과하는 영국 수송선이나 전열함이 크게 손상을 입을 염려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시 범선들의 열악한 항행 능력을 생각하면, 특히 스웨덴 군함들이 이 해협을 가로막기라도 한다면 영국 선박들로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덴마크 측의 헬싱보르그와 스웨덴 측의 헬싱보리 위치입니다.   저 해협만 틀어막으면 발트해는 사실상 호수가 됩니다.  코펜하겐이 위치한 덴마크의 큰 섬인 젤란트의 반대쪽 해협도 물론 항행은 가능합니다만, 그 쪽은 얕은 바다 등이 많아서 훨씬 항행에 불리하다고 하네요.)

 

(이건 함포로 사용되는 36 파운더 포이긴 합니다만, 해안 요새에서도 주로 이 36 파운드 포를 해안포로 썼습니다.  해안 요새에서는 좀 높은 위치인 성벽 위에 이런 대포를 놓았기 때문에 해수면에 위치한 전열함보다는 조금 더 멀리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1812년을 앞두고 스웨덴의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노르웨이를 주겠다며 스웨덴을 유혹했고, 나폴레옹은 핀란드를 주겠다며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우스운 점은 이 모든 땅들이 결국 남의 땅이라는 점이었지요.  당시 노르웨이는 프랑스의 굳건한 동맹국인 덴마크의 영토였고, 핀란드는 바로 몇 년 전에 알렉산드르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르나 나폴레옹이나 자기 것은 내주기 싫고 상대편의 땅을 내주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한 셈이었으므로, 스웨덴은 국제 외교전에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무척 냉철하게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스웨덴은 딱 적임자를 실권자로 두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국왕 카알 13세(Karl XIII)도 아니요 뿌리 깊은 스웨덴의 귀족 세력 연합체인 의회도 아닌, 바로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친척이자 전직 프랑스군 원수, 현직 스웨덴 왕세자였던 베르나도트(Bernadotte)였습니다.  

 

 

(오늘날 스웨덴 왕가의 시조이신 베르나도트, 아니 카알 15세 전하이십니다.)

 



애초에 스웨덴이 프랑스 장군이자 나폴레옹의 친척인 베르나도트를 굳이 모셔와서 왕세자로 삼은 것은 러시아에게 상실한 옛 영토 핀란드를 나폴레옹의 위세를 등에 업고 되찾아보려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만 몰랐을 뿐, 베르나도트는 애초에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냉철한 두뇌로 주변 정세를 정확히 분석 파악해서인지 스웨덴의 살 길은 러시아와 넓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쪽 핀란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서쪽 노르웨이를 손에 넣는 것이라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 붙느냐 러시아 측에 붙느냐는 고민은 베르나도트로서도 다시 한번 전체 상황을 되짚어 보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때 어느 쪽에 붙느냐 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판가름지을 도박이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에 프랑스도 러시아도 애간장이 탔고,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인기가 급상승한 스웨덴의 위치를 한참 동안이나 즐겼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너무 질질 끌어서였는지 아니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스웨덴의 협조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서였는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별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엘베(Elbe) 강 일대의 프랑스 동맹군을 지휘하던 다부(Davout)가 러시아 침공을 위한 사전 작전의 일환으로, 1812년 1월 발트해 남쪽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침공해버린 것입니다.  애초에 스웨덴은 이 지역을 방어할 능력도 의지도 전혀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무혈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르나도트는 운명이라는 듯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런 외교전에서 막차를 탄 것은 오스만 투르크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로에서 멀리 떨어진, 겉으로 봐서는 직접 개입할 여지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야말로 프랑스와 연합할 이유가 충분한 나라였고 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까지 러시아와 계속 전쟁을 벌어고 있는 교전 국가였거든요.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나 아일라우 전투를 치를 때에도 러시아군 주력 부대의 상당수는 저 남쪽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장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비록 지리적 위치 때문에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공동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의 남쪽 국경의 전선을 계속 유지하기만 해도 나폴레옹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투르크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더라도 러시아로서는 그 넓은 전선에 적어도 수 만의 병력을 유지시키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러시아로서는 나폴레옹과의 일전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 오스만 투르크와의 교전 상태를 종식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라는 뻘짓으로 한동안 프랑스와의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프랑스편이었고 또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오스만 투르크는 마지막까지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가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동안 오스만 투르크가 잃었던 많은 것들, 즉 이집트와 발칸 반도 등의 영토를 모두 회복시켜주겠다며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망해가던 오스만 투르크에게 10만군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이 얼마나 허세가 가득한 인간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나폴레옹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약속보다는 당장 코 앞에서 대포를 들이대고 협박을 해대는 러시아와 영국이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영국 지중해 함대는 러시아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이스탄불을 폭격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고,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집결한 러시아군은 몰도바를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1812년 5월, 오스만 투르크는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인 프루트(Prut) 강을 경계로 하는 평화 협정을 러시아와 맺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와의 남쪽 국경에 묶여있던 대군을 북쪽으로 불러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루트 강의 위치입니다.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외교전에서는 나폴레옹의 완승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온 유럽이 나폴레옹 편에 선 것에 비해, 러시아 편에서 함께 싸워줄 국가는 유럽 전체에서 영국과 스웨덴 정도 밖에 없었는데, 사실 스웨덴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고 영국도 유럽의 반대편인 스페인에서의 공세로도 숨을 헐떡이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결코 쉽게 보지 않았습니다.  1807년 폴란드 지역에서의 작전을 통해 광활하고 삭막한 동구의 평원을 침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 뼈저리게 잘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보급 문제에 있어 기존에 없던 규모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rut
https://en.wikipedia.org/wiki/36-pounder_long_gu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체중 감량 - 콩이 답입니다

잡상 2019.07.18 06:30 Posted by nasica

오늘은 매우 신변잡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바로 체중 감량을 위한 식단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제가 체중을 꽤 많이 줄였습니다.  결혼 이후로 조금씩 꾸준히 늘어서 86kg까지 갔다가, 최근 4개월 동안 10kg 정도를 줄여서 요즘은 75~76kg을 왔다갔다 합니다.  그 상태로 2개월 정도 지났으니, 아직은 요요 현상이 없지만 곧 요요 현상이 올 수도 있지요.  

 

회사 동료들, 특히 여성 동지분들께서 비결이 뭐냐고 물으시는데, 간단합니다.  쌀 대신 콩을 드시면 됩니다.  제가 아침과 점심으로 아래 사진과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이게 체중을 줄이기 위해 맛도 없는 것을 억지로 먹는 것이 아닙니다.  맛이 꽤 괜찮고, 또 절대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다만 저녁은 그냥 정상적으로 쌀밥을 먹기도 하고, 치킨을 먹기도 하며, 심지어 라면을 먹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녁까지 저 사진 속의 콩을 먹었다면 아예 마른 체형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과체중의 진짜 원인은 기름진 고기가 아니라 탄수화물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녁으로 (밥은 먹지 않고) 치킨이나 삼겹살을 먹은 다음 날보다, 저녁으로 쌀밥이나 라면, 또는 떡볶이를 먹은 다음 날이 더 체중이 늘어있더라고요.

 

이 식단의 핵심은 과일, 채소와 콩, 그리고 치즈와 달걀입니다.  보통 도시락에 비해서 빠진 것이 탄수화물이지요.  원래 저는 아침으로는 빵이나 시리얼을 먹었고, 점심은 그냥 식당에서 사먹었습니다.  저도 전부터 '저탄고지'가 답이라는 소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솔직히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실제로 해보니 정말 신기할 정도로 체중이 막 줄더라고요.

 

저 사진 속 음식들은 대부분 불을 안 쓰고 그냥 칼로 썰어놓은 것 뿐이라서, 레시피를 적을 만한 것은 딱 하나 콩 뿐인데, 그나마 요리라고 하기엔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원래 저 콩은 코스트코에서 파는 이집트콩(chickpea, 병아리콩)을 삶은 것입니다.  4.5kg에 대략 1만2천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굉장히 쌉니다 !  대신 바싹 말린 것이라서, 삶기 전에 몇 시간 동안 물에 불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냥 30분 정도 삶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삶은 콩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을 만큼 꺼내어 (보통 밥공기로 1/4 정도 하시면 1인분으로 충분) 차가운 상태 그대로 발사믹 식초(또는 그냥 식초나 레몬즙, 깔라만시즙 등도 나쁘지 않습니다), 올리브유, 소금과 후추를 약간씩 넣고 그 위에 파머잔 치즈 가루를 약간 뿌리면 됩니다.  

 

맛있고 간편하고, 무엇보다 조금만 먹어도 매우 든든합니다.  전에 황제 다이어트 하시는 분들은 고기만 드셔야 했다는데, 그에 비하면 비용도 적게 들고 건강에도 훨씬 좋습니다.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까먹을 때 음식 냄새가 많이 나면 주변에 민폐가 될 수도 있는데, 저런 도시락은 음식 냄새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민폐 위험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런 식으로 먹으면 일반 한식을 먹는 것에 비해 확실히 소금을 적게 먹게 되므로 각종 성인병 예방에도... 아마 좋지 않을까 합니다.  

 

한가지 안 좋은 점이 있다면 주말마다 제가 그동안 굶주렸던 탄수화물 사냥에 나선다는 점입니다.  주로 빵과 국수 종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달째 아직 저 정도의 체중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콩을 주식으로 삼는 것이 꽤 괜찮은 식단 같습니다.

 

* 콩에 대한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는 지난 번에 올렸던 "다니엘과 장발장과 나폴레옹의 콩 이야기"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최근 야후 파이낸스에 눈길을 끄는 기사 하나가 떴습니다.  한줄 요약할 필요도 없이, 제목이 곧 한줄 요약이더라고요.  

Why low interest rates could cause a ‘colossal reckoning’  
"저금리가 거대한 파국을 야기할 수 있다"  (reckoning은 계산, 정산의 뜻도 있지만 심판이라는 뜻도 있는데, 여기서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https://finance.yahoo.com/news/why-low-interest-rates-could-cause-a-colossal-reckoning-151351867.html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지난 10년 동안의 엄청난 규모의 부채가 가계와 기업 양쪽에 쌓이게 되었는데, 이건 연방준비위원회가 너무 장기간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는 바람에 '빚을 내는 것이 이익'인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그에 대해 크게 대가를 치르게 되는 날이 머지 않았다.  
. 10년 전 금융위기 때 기업 부채 규모는 5조 달러 정도였다.  오늘날 그 규모는 10조 달러에 가까와졌는데, 그 중 상당수가 정크 본드 수준의 위험등급 부채이다.  
. 현재 BBB 등급의 회사채가 1조 달러 이상 쌓여있다.  경제에 약간의 문제만 생겨도 그 많은 BBB 회사채는 정크 본드로 전락한다.  원금 손실이 클 것이다.

 

(아... 이 표를 보니 약간 겁이 나는군요.)

 

비슷한 기사는 이 뿐만 아닙니다.   아래 기사도 연준이 저금리를 전가의 보도처럼 조심성 없이 써대는 것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The Fed Is Spiking the Punch Bowl. It May Not End Pretty.
연방준비위원회가 파티 음료에 술을 더 넣고 있다.  이런 식이면 끝판이 안 좋을 수 있다.   

 

https://www.barrons.com/articles/the-fed-is-spiking-the-punch-bowl-it-may-not-end-pretty-51562977914?siteid=yhoof2&yptr=yahoo

 

(Punch bowl은 파티에 흔히 있는 저런 대형 음료 그릇인데, 보통은 과일 쥬스에 술을 넣은 펀치주를 넣어 둡니다.  Spike라는 단어는 못으로 고정하다는 뜻 외에도 음식이나 음료에 술 또는 독 같은 것을 타는 행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Spike the punch bowl이라는 표현은 파티의 흥을 돋우려고 펀치주에 보드카 같은 독한 술을 더 넣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 기사에서 펀치주 그릇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1951년~1970년 기간 중 연준의장이었던 윌리엄 마틴(William McChesney Martin)의 언급 때문입니다.  그는 중앙은행의 역할은 '파티가 한창일 때 펀치주 그릇을 치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파티가 잘 끝나려면 술 공급을 도중에 끊어야 한다는 비유인데, 이 기사는 펀치 그릇을 치워야 하는 상황에서 연준이 오히려 펀치 그릇에 술을 더 넣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사는 저금리가 당장 경기를 살리는 것에 효과가 좋기는 해도, 부적절한 저금리 정책은 항상 문제를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가령 1920년대 중앙은행의 실질적인 보스였던 뉴욕 연준 의장 벤자민 스트롱(Benjamin Strong)은 1927년 금본위 고수 때문에 약세이던 영국 파운드화를 지원한답시고 "증시에 위스키를 좀 넣어주겠다" (coup de whiskey for the stock exchange)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시작된 강세장은 1929년 대공황으로 이어졌습니다.  1998년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은 러시아 국채 위기와 유명한 헷지펀드인 롱텀캐피털(Long-Term Capital Management) 파산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금리를 인하했는데, 그건 결국 닷컴 버블로 이어졌고 그 버블은 2000년에 터지고 말았습니다.

 

 

(유명한 롱텀캐피탈의 수익곡선입니다.  물론 LTCM은 Long Term Capital Management의 약자입니다.)

 

 


이 기사는 현재 미국 경기가 상반기 2.3% 성장으로 건실하고 실업률은 50년 이래 최저치인 3.7%인 현황에서, 단지 인플레가 목표치보다 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금리 정책을 쓰는 것이 맞느냐라고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근원 소비자 물가지수(core consumer-price index, 식품과 에너지 비용을 제외한 물가지수)는 연간 2.1%로 오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기사는 '그러니 마치 지금이 1990년대인 것처럼 파티를 즐기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다만 '1990년대의 끝이 어땠는지는 잊지말라'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식의 '심판의 날이 머지 않았다'라는 예언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었으니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되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빚이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지요.  특히 어떤 물건이든 투기가 일어나는데 그 투기 자금이 대부분 빚을 내어 조달되는 것이라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게 바로 전형적인 거품 현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게 거품인지 적정 가격인지 사실상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특히 전세계적으로 저금리 상황인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일본에 비하면) 국가부채가 꽤 건실한 수준인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문제는 가계부채라고 하지요.  작년 초 뉴스이긴 합니다만 아래와 같은 뉴스가 있었지요.

https://www.yna.co.kr/view/AKR20180219156800072

"WSJ은 국제결제은행(BIS)과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자료를 인용, 모두 10개국을 가계부채 위험 국가로 분류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홍콩, 태국, 핀란드 등이다."

또 올해 초 뉴스에도 이 상황은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보도되엇습니다.

https://www.yna.co.kr/view/GYH20190407000300044

"19년 4월 7일 국제금융협회(IIF)가 발표한 '글로벌 부채 모니터' 보고서를 보면 작년 4분기 말 기준 한국 가계부채의 GDP 대비 비율은 97.9%로, IIF가 국가별 수치를 제시한 34개 선진·신흥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OECD 국가들 중에서 보면 우리나라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Household debt Total, % of net disposable income, 2008 – 2018)가 과거부터 꽤 높았는데, 2015년 이후에 특히 상승하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표 원본 : https://www.oecd-ilibrary.org/economics/household-debt/indicator/english_f03b6469-en )

 

이 별로 영광스럽지 못한 표를 보면 우리나라 저 위쪽에 있는 나라들은 노르웨이나 덴마크 등 북구의 잘사는 복지국가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를 그런 복지국가들과 직접 비교를 하는 건 부적절해보입니다.  특이하게도 호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트렌드를 보이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한국과 함께 호주가 가계부채 위험성이 크다는 기사가 최근에 나왔습니다.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90712000588

"13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경제·금융 분석기관 ‘컨티뉴엄 이코노믹스’(Continuum Economics)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은 가계부채가 이미 높은 수준이며, 금리인하 사이클 돌입에 따른 금융불균형 리스크 확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CE는 미국과 일부 유럽 국가와 달리 아시아 지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신용 비율이 지난 10년 간 꾸준히 상승했다는 점을 문제로 들었다. 가계부채 증가의 원인으로는 부동산시장 호황, 저금리 기조, 일부 포퓰리즘적 정부 정책 등을 지목했다.  특히 한국과 호주의 가계부채 리스크가 크다고 CE는 평가했다. 금리인하 사이클 돌입은 단기 디폴트 위험을 줄이는 요인이지만, 장기적으론 지속 가능성 이슈를 촉발한다는 지적이다."

왜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인가를 생각해보면 위의 신문 보도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실거주이든 투자이든 부동산 매입 또는 전세를 위한 대출이 큰 부분을 차지한 것 같습니다.  호주도 중국 자본 유입 등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부동산 가격이 대폭 상승한 나라지요.  아래 e-나라지표 자료 해설에서도 주택담보대출을 지목하고 있네요.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076

"최근 가계부채의 빠른 증가세는 기본적으로 주택시장 정상화, 금리 인하에 따른 대출수요 확대 등 복합적 요인에 기인
 ° 특히 활발한 주택거래 및 아파트 신규분양, 저금리 등으로 주택담보대출이 크게 증가하고, 인터넷 전문은행 출범 등으로 인한 기타대출의 증가도 가계대출 확대의 주요 요인임"

이하는 뉴스 인용이 아닌 그냥 제 생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인 제롬 파월이 7월 중 금리인하를 강력하게 시사하면서 다우존스 지수 등 국내외 주식 시장이 크게 뛰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금리를 인하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금리가 내려가면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이 적어지고 시중에 돈이 풀려 주식시장이 활황을 띠게 되므로 일반적으로 좋은 뉴스입니다.  그러나 항상 좋은 뉴스만은 아닙니다.  금리가 내려가는 것은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소리이므로, 현금과 예금을 손에 쥐고 있는 유복하신 분들은 당연히 손에 준 돈으로 뭔가 실물을 사려고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부동산 불패의 전설이 살아있는 나라이고, 그 중에서도 서울 아파트가 항상 진리인 사회이므로 결국 다시 아파트를 중심으로 주택 가격이 오르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저는 1주택자라서 시장 중립적인 입장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파트를 2채 3채 가지고 계신 분들을 부동산 투기꾼이라고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으로 금지되지 않은 것은 당연히 하셔도 됩니다.  지난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전세계적인 저금리 상황에서는 은행에서 돈을 빌려 부동산이나 주식을 사는 것이 현명한 투자이지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주식시장과는 달리 부동산, 특히 주택시장은 좋든싫든 온 국민의 일상과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주식이야 안 하시는 분도 많고, 주식시장에서 누군가 떼돈을 벌든 전재산을 날리든 그거야 그 분들 개인의 판단에 따른 개인의 사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3차원 공간에 사는 인간이란 존재는 반드시 어딘가에 몸을 눕혀야 하고, 그러자면 돈을 내고 집을 사든가 하다못해 월세라도 누군가에게 상납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택이란 기본적인 공기나 물처럼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하는 일종의 공공재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누구나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주택시장은 확실하고 수지맞는 투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돈이 몰리니 당연히 가격은 뛰었고, 그 결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서민들입니다.  그래서 부동산 투기를 해서 돈을 버신 분들은 부러움과 함께 비난도 받곤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현재와 같은 규칙이 정해진 시장에서 규칙을 제대로 지키며 돈을 버는 행위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 규칙대로 플레이를 했는데 서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건 규칙을 만든 운영진이 잘못한 것이지 플레이어들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준 금리를 올리면 주택시장이야 어느 정도 안정될지 몰라도, 기업과 가계의 이자 부담이 커져서 경제가 망가집니다.  그렇게 되면 집값이 떨어져도 서민들의 소득이 더 큰 폭으로 떨어질 것이므로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기준 금리는 건드리지 않고 각종 세금과 규제 등을 통해서 집값을 잡으려고 정부는 노력합니다만, 복잡오묘하기 없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그런 인위적이고 투박한 노력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내는 것은 아니라서 어찌 될지 예상은 못 하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정부가 그런 위험 관리 노력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기술 개발과 사업에 돈을 투자하는 것보다 그냥 땅과 아파트를 사두고 묵혀두는 것이 훨씬 더 돈이 되는 사회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흔히 우파에서는 '지나친 복지가 국민들의 근로의욕을 저하시킨다'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해로운 것이 '부동산 사놓으면 돈이 된다'라는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부동산 부자들은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든 당장 자신의 이익을 더 크게 만들어줄 보수우파 정당을 열심히 지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번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현대 민주주의에서 선거제도란 결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줄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제도입니다.  

 

만약 최저임금 받으며 일하는 분들이나 하위 70%에게 주어지는 기초노령연금 받으시는 노인분들이 재벌들과 부동산 부자들의 이익을 위하는 정당에 표를 던지신다면 상당히 이상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그런 현상, 즉 저소득 저학력 계층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이견이 많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이유 중 주된 것은 정치권이 (이건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진보 쪽도 자유롭지 못한 일이긴 한데) 증오의 정치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익 계산은 골치 아프고 복잡하지만 증오는 매우 이해하기도 쉽고 단순하거든요.  미국 같은 경우는 멕시칸, 흑인 등 소수인종과 외국에서 유입되는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부추깁니다.   유럽도 해외 난민과 외국인들에 대한 반감을 기초로 극우정당이 급부상하고 있지요.  우리나라 보수정당이라고 자처하는 정당은 80년대식 빨갱이 타령을 주로 이용합니다.  

 

제가 주장하는 바는 딱 하나입니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동산 가격을 안정화시키고 복지확대 정책을 펼치는 정당이 저와 제 가족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당이 그런 정당인가라는 것에서는 또 갑론을박이 있겠습니다만, 부동산 부자들이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지 보시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PS.  혹시 저도 그래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 들고 있는 사람인데 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를 바라냐고 물으신다면, 간단합니다.  제게는 아이가 있고, 아파트 한 채를 더 사서 아이에게 물려줄 정도로 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까지는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어찌어찌 이익을 본다고 하더라도, 제 아이가 나중에 희망이 없을 정도로 높아진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평생 고생한다면 그건 제 이익에 반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아파트 한 채씩 사주실 정도로 부유하신 분들은 부자들을 위한 정당을 지지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최근 제가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는 (다른 교회도 다 마찬가지겠습니다만) 맥추절을 기념하는 설교가 있었습니다.  맥추절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이 (안식일만 빼고) 매일 뿌려주시던 만나와 메추리를 먹고 살던 유대인들이 드디어 가나안에 정착하여 뿌린 첫 곡식을 거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다음날부터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지 않기 시작했다고 하니 무상급식이 중단된 슬픈 날이기도 하네요.

그날 목사님의 설교 주제는 더 이상 농경사회도 아닌 현대인들이 여전히 맥추절을 지켜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냥 짧게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지키라고 하셨기 때문' 이었지요.  저는 이 목사님의 설교는 매우 좋아하는 편입니다만, 그 부분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솔직히 현대 한국 개신교에서 굳이 수천년 전 유대인들의 절기인 맥추절을 지켜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보거든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다 지키자면 돼지고기도 먹어서는 안 되고 선지국도 먹어서는 안 되며, 토지의 소유권은 영구적으로 매매되어서는 안 되고 그냥 최대 50년 동안의 사용권만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내용이 하나님께서 직접 지키라고 명하신 내용입니다.  


레위기 25장 
23절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8절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우리 사회의 부동산 부자들이 들으면 "빨갱이들이냐 !" 라며 벌컥 화를 낼 이야기입니다만, 엄연히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신 내용입니다.  악성 부채탕감과 토지공개념은 알고 보면 성경에 적혀있는 사상인 셈이지요.)

 



그러나 제가 이 목사님 설교는 무척 좋아하는 이유는, 이 목사님께서는 설교 준비를 참 많이 하시는지 매번 설교를 들을 때마다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번에도 맥추절 관련 구절인 출애급기 23장을 언급하셨는데, 덕분에 저도 간만에 출애급기 23장을 한번 정독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좋은 내용이 많더군요.


1절 너희는 헛된 소문을 퍼뜨리지 말며 허위 증언을 하여 악한 사람을 돕지 말아라.
5절 또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이 짐을 실은 채 쓰러져 있는 나귀를 일으키려고 애쓰는 것을 보거든 그냥 지나가지 말고 그를 도와주어라.
8절 너희는 뇌물을 받지 말아라. 뇌물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의로운 사람의 진술을 묵살시킨다.
9절 너희는 외국인을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에서 외국인이었으므로 너희는 외국인의 심정이 어떠한지 알고 있다.
11절 7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갈지 말고 묵혀 두어라. 거기서 저절로 자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하라. 그리고 너희 포도원과 감람원에도 그렇게 하라.


현대적인 도덕 관념이나 사회 정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정말 꼭 지켜야 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교회를 건성건성 다녀서 그런지 몰라도 지난 20년 넘게 교회 생활을 하면서, 제가 이 출애급기 23장 중에서 교회 설교를 통해 들은 내용은 아래의 딱 하나 뿐이었습니다.  저 위의 정말 훌륭한 계율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목사님은 (저 개인적으로는) 한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15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온 1월의 정한 때에 무교절을 지켜라. 너희는 7일 동안의 이 명절 기간에 누룩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하며 나에게 경배하러 올 때에는 빈손으로 오는 자가 없어야 한다.


이번 목사님은 그러지 않으셨지만, 예전 목사님들 중에는 특히 저 마지막 구절,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경배하러 오지 말라'라는 부분을 강조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맥추절 감사헌금 봉투는 따로 만들어서 주보 속에 끼워두셨지요.  

일부 개신교 성직자분들은 북한 공산당에게서 박해받은 개신교의 역사 때문인지 상당히 강경한 보수 우파를 자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도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성도들일텐데, 하나님께서 엄격히 금지하신 가짜 뉴스 유포에 적극적으로 열을 올리시는 것은 무척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원수지간이라고 할지라도, 어려움에 처한 원수를 못 본 척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말씀도 그렇고,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주기적으로 베풀며 살라는 말씀의 취지를 이해한다면, 사실 기독교인이라면 복지 확대와 평화 정착에 찬성할 수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받은 느낌은 이런 것이었어요.  성경에 뭐라고 씌여 있건 간에, 결국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동성애자들은 쳐죽이라고 나오지만 그건 선지국 먹은 사람들은 자손까지 쓸어버리겠다는 말씀과 동격이므로 현대에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동성애자도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든 사람들인데, 동성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핍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한글자 한글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꽤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조차 정말 한글자 한글자 그대로 지키는 분들은 본 적이 없고, 그 분들도 그냥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들만 골라서 지키는 것 같습니다.  가령 위에서 인용한 출애급기 23장 15절에는 분명히 무교절 1주일 간에는 누룩 넣지 않은 빵 즉 무교병을 먹어야 하는데, 아마 그 분들조차도 1주일 동안 그런 무교병을 먹으며 지내지는 않으실 거에요.  

사람이 종교를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인간은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간조차 하기 힘든 미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저 또한 같은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만) 그렇게 자신의 미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에고가 너무 강해서 결국 자신의 뜻을 신의 뜻이라고 포장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종교는 선거에 의해 권력이 창출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상당히 강한 영향력을 가지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성직자들의 말을 맹신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성서를 읽고 공부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것이, 원래 신학이라는 것이 여러가지 언어에 통달해야 하는 등 상당히 고차원적인 학문이라서, 성경 한권 붙잡고 자기 혼자 해석을 하다가는 이단이라는 소리 듣기 딱 좋습니다.  실제로 지식이 부족해서 엉뚱한 결론을 나름대로 내기도 쉽고요.  자신의 생각에 저 분의 말씀이 옳다라고 생각되는 성직자 분이 있다면 그런 존경할 만한 분의 말씀을 참고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제가 '성직자의 해석에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도, 그 말씀에 복종할 필요도 없다' 라고 하면 아마 화를 내실 목사님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목사님들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은 흠이 많을 수 밖에 없는 미천한 존재입니다.  무엇보다, 개신교 자체가 바로 똑같은 이유로 바티칸 교황청이 성서의 해석을 독점하는 권위에 반발하여 생겨난 종단이라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유럽 각국은 이 세기의 대결을 놓고 어느 편에 붙을 것인지 판단하느라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굳이 힘센 제국들끼리 싸움질을 하는데 굳이 다른 나라들이 꼭 끼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더 낫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건 편하게 후방에서 입으로 떠들 때나 통하는 거부감입니다.  당장 바로 옆의 전우들이 내장을 쏟아내며 고꾸라지고 나도 바로 다음 순간 언제든지 팔다리가 끊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특히 그런 희생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 손자일 경우에는  누구나 어떻게든 당장 휴전 조약을 바라는 법입니다.  물론, 1812년 당시 유럽 각국에서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자기나 자기의 아들이 적의 대포알에 노출될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건 현대에서도 대부분 마찬가지네요.

 

애초에 나폴레옹 덕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주도권 하에서 벗어나 땅도 넓히고 왕국이 될 수 있었던 라인연방(Confédération du Rhin, 독일어로는 Rheinbund) 소속의 독일 소국들은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이들 국가 소속의 독일 시민들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의 대결, 좀더 근본적으로 보면 프랑스의 부르조아 계급과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간의 투쟁에 끼어들어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지배하던 왕과 대공(Fürsten, 영어로는 Prince)들 중 상당수는 나폴레옹 못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러시아 원정에 협조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이 미개한 독일인들에게 프랑스식 입헌 군주국의 모델을 보여주겠다며 만든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의 국왕은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Jerome)이었습니다.  또 베르크(Berg) 공국의 지배자는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나폴리 왕국 국왕인 뮈라(Murat)였고요.  이런 친인척들 외에도 나폴레옹에게 진정으로 협조적인 독일 소국왕들은 생각보다 꽤 많았습니다.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세 등의 국왕들과 대공들은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에게 굴복한 군주들이 아니라, 스스로 프랑스 계몽주의가 근대화를 위한 옳은 방향이라고 믿고 나폴레옹과의 협력을 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믿음의 배경에는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가 가진 무력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1812년 당시 라인연방의 소속 국가들입니다.  라인연방의 주요국가는 지도에서의 영토 크기로만 보면 베스트팔렌과 작센, 그리고 바이에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온나라가 친프랑스-친나폴레옹 정서를 가진 진짜 동맹국은 바이에른과 바덴, 뷔르템베르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두 남부 독일의 카톨릭 국가들이군요.)

 



영국의 경우는 뭐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당연히 러시아와 함께 반프랑스 전선의 최선봉에 나설 의지가 충만했습니다.  원래 영국은 자신은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입만 털면서 지갑이나 여는 것으로 전쟁을 대신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로부터 원망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812년 당시에는 영국도 꽤 당당하게 자신도 피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전선에 당시 영국으로서는 꽤 큰 야전군인 3만 정도의 병력을 파견하여 그야말로 혈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만이라고 하면 프랑스 그랑다르메(Grande Armee)로서는 고작 1개 군단에 해당하는 소규모 병력이었겠지만, 인구가 많지 않고 육군이 미약했던 영국으로서는 동원 가능한 전체 야전군을 다 동원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은 이 소중한 병력을 아끼느라 당장 온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던 스페인 현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얌체처럼 몸을 사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1814년 전쟁이 끝난 뒤에 집계를 해보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총 3만5천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스페인-포르투갈 전장은 부족했던 영국 육군의 인원과 물자를 끊임없이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 중에서 2만5천은 전투가 아닌 각종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만 이건 당시 위생 상황으로서는 정상적인 수치로서 다른 전장 다른 나라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12년 바다호스 요새 포위전입니다.  이 전투에서 4천5백의 프랑스군이 지키는 바다호스 요새를 2만7천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3주간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은 1천5백의 사상자를 냈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포로로 잡혔는데, 영국-포르투갈 연합군도 거의 5천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함락 후에 영국군은 바다호스 시내를 잔혹하게 약탈하여, 최소 2백명에서 최대 4천명의 스페인 민간인 사상자를 냈습니다.  스페인이 영국의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1812년은 영국군이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고 비난하던 스페인 사람들이 입을 다물 정도로 영국군도 공세적으로 나온 첫 해였습니다.  이 해 1월, 웰링턴은 드디어 군수품 창고 및 물자 집적 등을 끝내고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의 진군을 개시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쳐들어갈 통로가 뻔했던 것처럼, 역방향의 침공도 루트가 뻔했습니다.  웰링턴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도 1810년 프랑스의 포르투갈 침공 때 마세나가 밟았던 경로를 정확하게 역순으로 밟아야 했습니다.  1812년 1월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 요새부터 함락시킨 웰링턴은 이어서 4월에는 바다호스(Badajoz)를 엄청난 혈투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이 두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이제 스페인으로의 진격로가 활짝 열린 셈이 된 것이지요.

이때 놀랍게도 나폴레옹으로부터 영국 측에게 평화 협상을 하자는 제안이 날아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영국과의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공언하던 나폴레옹으로서는 굉장히 놀라운 입장 변화를 취한 것이었는데, 그만큼 당시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앞두고 후방 정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원래 러시아 침공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이 영국과의 전쟁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어떻게 보면 본말이 전도된 셈이었지요.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평화 협상 조건은 영국으로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미 영국군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던 포르투갈 왕국을 원래의 왕가인 브라간사(Braganza) 왕정에게 반환하는 대신 스페인은 조제프를 국왕으로 하는 보나파르트 왕가 소유임을 인정해달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거든요.  그 외에 시실리 섬은 부르봉 왕가 출신의 사르데냐 국왕 페르디낭이 계속 보유하되, 나폴리 왕국의 소유권은 현행대로 나폴레옹의 매제 뮈라(Murat)가 계속 유지하게 해달라는 것이 딸려 있었습니다.  혹시 웰링턴이 시우다드 로드리고와 바다호스를 함락시키기 전에 이런 조건의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면 영국이 받아들였을까요 ?  아마 영국은 그래도 거부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제 스페인으로의 침공길이 활짝 열린 마당에 그런 조건을 수용할 이유가 없었지요.  영국은 단칼에 나폴레옹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고 스페인으로의 침공 작전을 계속 했습니다.  웰링턴은 7월에 살라망카(Salamanca) 전투에서 마르몽(Marmont)의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8월에 조제프는 수도 마드리드를 내주고 피난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살라망카 전투에서 프랑스 보병들을 공격하는 영국군의 모습입니다.   한창 이기고 있는데 휴전하자고 하면 통할 리가 없지요.) 

 



초지일관 당당했던 영국과는 달리, 프로이센의 입장은 좀 딱했습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처음부터 푸대접을 당하던 프로이센은 당연히 처음에는 러시아 측에 붙으려 했습니다.  심지어 전운이 감돌던 1811년에는 국왕 빌헬름이 러시아 자르 알렉산드르에게 밀사를 보내 10만의 프로이센군을 보태줄테니 선제 공격에 나서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러시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막강 프랑스군과 같은 조건으로 정면 충돌해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선제 공격 요청을 거절하고, 프랑스군을 러시아 국내로 깊숙이 끌어들여 방어전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건 프로이센처럼 조그마한 나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략이었지요.  러시아가 저렇게 후퇴 일변도의 희한한 전략을 택한다는 것은, 프로이센으로서는 전국이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게 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게다가 1812년 들어 오스트리아까지 프랑스군에 가담하기로 결정을 내리자, 이제 대세는 기울었다는 체념으로 뒤늦게 프랑스측에 가담하기로 합니다.  사실 이미 때늦은 결정이었습니다.  훨씬 더 일찍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했어도 프로이센에 대한 대접은 신통치 않았을텐데, 이렇게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난 뒤에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담한 프로이센에 대해 나폴레옹이 보내는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은 2만의 야전군을 러시아 침공에 동원해야 했고, 그 외에도 4만2천의 추가 병력을 후방 수비 임무를 위해 프랑스군에 제공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자국 영토를 프랑스군 및 그 동맹군이 자유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 행군길에 프랑스군이 먹고 마시는데 소비하는 물자는 프로이센 국민들로부터 징발하여 충당했는데, 그 비용은 1806년 패전 당시 부과되었다가 아직 갚지 못하고 있던 전쟁 배상금을 상각해주는 형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공짜로 다 털렸다는 말이지요.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eninsular_War#Allied_campaign_in_Spain
https://en.wikipedia.org/wiki/Confederation_of_the_Rhine

 

 


제가 고딩, 아니 대딩 때만 해도 서양의 모든 것은 다 우수한 것이라는 환상이 온 사회에 팽배해있었습니다.  (실은 여전히 그런 경향이 있지요.)  가령 우리는 굉장히 좋은 경치를 보면 '꼭 외국같다' 라는 말을 하지요.  잘 생긴 사람을 보면 '꼭 외국인처럼 생겼다' 라고 하고요.  그에 비해서 가령 영국인들은 잘 생긴 외국인을 보면 '꼭 영국인처럼 생겼다' 라고 말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제가 근 50년 가까이 천하를 주유하며 (닭살 돋지만 꼭 써먹어 보고 싶은 표현이었습니다...) 느낀 바는, 어떤 사회든 잘 생긴 사람은 잘 생겼고 못 생긴 사람은 못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UN인가에서 정의를 내렸다는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다음 표현이 정말 잘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집단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특정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집단의 차이는 개인의 차이보다 크지 않다"

아무튼, 그런 서양 우월주의 사상을 주입받으며 자란 저는, 서양 (그러니까 미국과 서유럽) 사람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모두 독립해서 대학도 자기 힘으로 벌어서 다니고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알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해외에 나가볼 기회가 많아지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그런 것이 다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젠 알게 되었지요.  가령 서양 학생들도 자기 힘으로 벌어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서, 가난한 애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고 부자집 애들은 부모님 장학금을 받아서 다니는 것이더군요.  또 의외로 고등학교 졸업은 커녕 대학 졸업 이후에도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애들이 많은 것은 물론, 반대로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중장년 층도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본 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레딧 포스팅 중에 그와 관련된 것이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본문보다도 댓글이 서구 사람들이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 잘 엿볼 수 있게 해주더군요.  주요 부문만 발췌해서 번역해보았습니다.

https://www.reddit.com/r/financialindependence/comments/c5evfa/parents_want_to_live_with_us_help/

내 in-law(결혼으로 맺어진 친척을 뜻하는 말로서 시부모나 시동생, 장인장모와 처제 등이 모두 in-law임 : 역주)들은 모두 괜찮은 분들이야.  아주 친절하고 인내심도 많고 자상해.  일평생 아주 열심히 일하셨고 60~65세 경에 은퇴를 해서 지금은 어느 섬에서 근사한 집과 4채의 단기 임대 부동산(short term rental properties, 아마도 콘도 같은 것을 말하는 듯 : 역주)을 소유하고 살고 계셔.

조만간 그 분들은 그런 부동산을 모두 팔아서 장기 임대 부동산(long term rentals, 아마도 일반 거주용 주택을 말하는 듯 : 역주)을 우리 거주 지역 근처에 매입하려고 하셔.  그 섬에서 운영하고 있는 단기 휴가용 임대 부동산보다는 장기 임대 부동산이 훨씬 수고가 덜 들어가기를 (less demanding) 바라시는 거지.  더 나아가 그 분들은 지금 살고 계신 주택도 팔아서 그 매각대금(약 $350k, 약 4억)을 우리 돈과 합쳐서 우리가 더 큰 주택을 사서 거기서 함께 살기를 바라셔.  주택담보대출과 전기수도세 등은 우리가 내고, 그 분들은 임대수익금으로 개인비용을 충당하면서 사시려는 거야. 

그 계획에 대해 내가 고려하는 점들은 이런 거야 :

조건이 달렸다는 점 (Strings attached) - 부모님들이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진짜일까 ?  우리가 그래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니거든.  오해는 마.  나 그 분들과 시간 보내는 거 좋아해.  하지만 그건 가끔씩 같이 지냈던거고, 기껏해야 2주간 그랬었던 거야.  그 분들은 이제 우리와 같은 집으로 이사해서 우리 일상 생활에 개입하기를 원하시는데, 특히 우리가 1~2년 안에 아이를 가질 계획이라서 그래.

사생활과 자율성의 상실 - 이게 허영심일까 자부심일까 ?  난 내 집에서 내가 원하는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계약금을 그 분들 돈으로 낸다는 것은 그 집이 "진짜" 내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해.  마치 공유 시설처럼 느껴진달까 ?

재정 - 계약금을 그 분들 돈으로 해결한다면 우린 매월 돈이 좀 남게 되니까 그걸로 결국 우리 소유가 될 집에 대한 담보 대출을 좀더 빨리 갚아나갈 수 있어.  그 분들이 없어도 집이야 결국 살 수 있겠지만 더 작은 집만 살 수 있을 거야.

재정에 대한 생각 더 - 특히 어머니(mother-in-law)가 정말 친절한 분이고 또 우리가 애를 가지게 되면 애를 100% 봐주실 것이기 때문에 보육 비용에 있어서 엄청난 절약을 할 수 있게 될 거야.  그 분은 누구든 남을 돕는데 정말 열성을 보이시니까, 몸이 허락하는 한 우리 애 봐주시는데 있어 열과 성을 다 하실거야.  60세가 넘은 여성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  그 분은 정말 정력이 넘치신다니까.  하지만 내 아이가 뭘 배우는 지에 대해 내가 통제권을 가질 수 있을까 ?  그냥 어린이집(daycare)에 보내는 것보다는 더 확실한 통제권을 가질 것 같기는 해.  잘 모르겠군.

수동적 수입 - 내 남편(아... 저도 이 부분을 읽고서야 이 글을 쓴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직전까지는 당연히 남자가 쓴 것이라고 생각했고, 저 위의 in-law들이란 당연히 장인장모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어쩔 수 없는 한국남자라서 이런 FIRE 사이트에서 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다 남자라고 생각했네요... 반성합니다. : 역주)과 나는 부동산에 투자를 하고 싶어.  시부모님이 함께 산다면 이 방면에 좀 경험이 있는 누군가와 함께 탐색을 시작할 수 있는 셈이야.  시부모님은 고등 교육을 받으셨고 부동산을 사고, 소유하고, 임대하고, 유지보수하고, 매각하는데 있어 아주 능수능란하시거든.

근데 내가 이런 고려 사항들에 대해 시부모님들과 차근차근 의논해가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통제권에 집착하는 여자(control-freak)로 안 보일 수 있을까 ?

그러니까 분명히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네.  내가 뭐 놓친 부분이 있을까 ?  이 생각 하다보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야.  난 이런 거 해본 적이 없어서 시부모님들이 우리 집으로 이사해 들어오기 전에 기대치를 맞춰두고 싶거든.  그런데 우리나 시부모님들이 서로 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뒤늦게 드러나면 헬게이트 오픈(all hell brakes lose)인 거겠지.  난 가정적인 사람이니까, 난 주로 집에 있을 거야.  내 시부모님 발등을 밟을까봐 내가 내 집에 들어가기 싫은 상황이 되는 건 정말 싫어.


이하는 댓글들인데, 그 중 대표적인 것 몇개를 뽑아 보았습니다.


- 그냥 니네 집에서 1 마일 정도 떨어진 집을 사시라고 하지 그래 ?  난 돈보다는 사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봐.

- 아냐, 아냐, 하지마.  이게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야.  (역시 부모자식 간에도 눈치 안보고 평등하다는 미국인들도 시부모 모시고 사는 거 싫어하는 군요. : 역주)

- 내 직장 동료가 그렇게 살았어.  걔들은 사돈어르신들이 살 별도의 거주구역이 딸린 (in-law suite) 집을 찾았지.  사돈어른들도 그 주택 매입에 $XXX를 보탰어.  꽤 큰 돈이었어.  그리고 지금은 그 집에서 월세 안 내고 사셔.  전기나 가스 같은 비용은 나눠서 내는 것 같은데, 그것 뿐이야.  이건 좀 새로운 개념 같은데, 그래도 모두 만족해하더라고.  걔들 사례에 있어 중요한 점은 사돈어른들이 자기들만의 주방, 침실, 거실, 욕실 등이 따로 있었다는 점이야.  너도 너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날 권리가 있다구.  그 분들도 성인이니까, 니가 규칙을 정하는 걸 달가와하진 않으시겠지.  하지만 니가 기대치를 설정할 수는 있을거야.  만약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거라면,  아주 특정한 형태의 주택을 찾는게 좋을 걸.  집 구조나 뭐 그런 것에 있어서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의논하도록 하라구.    (사실 이 ADU 부분은...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것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합니다. : 역주)

- 행복으로 가는 길 = 장인장모 사망

- 남자는 그걸 바라겠지.

- 사는 곳마다 다르겠지만 보조 거주 구역 (Accessory Dwelling Unit, ADU)은 많은 도시에서 점점 더 중요한 옵션이 되어가는 것 같아.  우리도 나중에 애를 봐주실 분이 필요하게 되면 지금 우리 사는 집에 사돈어른들을 위한 ADU를 지을 계획이야.

 

(ADU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 덴버(콜로라도 주에 있습니다 : 역주) 지역에서도 그런 ADU 많이 봤어.  내 와이프의 가족들이 한 집에서 세 가구가 모여 살 것을 고려 중이거든.  할아버지 할머니가 ADU에 살고, 그 두 딸의 가족들이 큰 집을 나눠서 살 계획이더라.   

- 우린 우리 부모님하고 몇 년간 같이 살았어.  괜찮았어.

- 우린 장인장모와 몇 개월 같이 살았어.  아주 끔찍했어.  가능한 빨리 빠져나왔지.  차라리 1년 간은 임대를 내서 그 분들하고 먼저 살아보고 결정하지 그래 ?  그러면 같이 살 때의 문제점들을 큰 돈을 미리 투자하지 않고도 미리 알 수 있게 될 거야. 

- 내가 그런 걸 고려하게 된다면 그건 집에 반드시 별도 거주 구역이 딸려 있을 때 뿐일 거야.  별도의 주방, 욕실, 거실 말이야.

- 내 아빠가 우리하고 18개월 간 같이 사셨어.  괜찮았어.  하지만 부모님에게 집안 잡일 해달라고 시키는 건 어렵더라.  또 아빠는 청력이 나빠지기 시작해서 밤에 TV를 보실 때는 엄청 크게 볼륨을 높이시더라고.  우린 애들에게 집안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편인데, 가령 식탁에서는 절대 스마트폰 못 쓰게 하는 거 말이야.  근데 아빠는 저녁 드시면서 맨날 문자 확인하시더라구.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사는데 애들 교육 방침과 맞지 않으면 정말 난처해져.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니네 시부모님이 이사 오시기 전과 후에 그 분들과 아주 톡 까놓고 의사 소통을 해야 한다는 거야.  모든 참여 구성원이 서로의 기대치를 분명히 이해해야지   (이 부분은 정말 합리적인 미국인들답네요. 배울 만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역주)

- 나라면 진짜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니면 그런 짓 안 할 거야.  장인장모 또는 시부모가 항상 주변에 있다면 정말 스트레스 받을 거 같아.  그 분들에게 별도의 ADU를 지어드릴 정도로 큰 주택지를 사는 것이 가능한가 ?

- ADU가 있으면 모두가 각자의 공간을 가지면서도 애를 봐줄 정도로 가깝게 지낼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공조가 되지.  이웃집 vs. 룸메이트 식으로 생각을 하라구.  난 곧 장인장모가 되실 분들과 아주 잘 어울렸고 심지어 그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식'으로 인식될 정도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분들하고 같이 살 작정을 하게 된다면 그건 그 분들이 치매에 걸렸을 때 뿐이야.  그 분들이 치매에 걸릴 경우 우리 경제 수단으로는 그 분들 돌볼 방법이 ADU에 모시는 것 밖에 없거든.  그거 외에는 내 사생활과 자율권을 포기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난 또 우리 부모님이 더 나이가 들면 모셔야 할 상황인데, 그를 위한 우리 계획은 ADU를 짓거나 우리집 옆집을 사는 거야.   (미국인들 중에도 치매 걸린 장인장모를 모시겠다는 효자가 있군요... 그러나 치매는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일텐데... : 역주)

- 그 분들에게 옆집을 사드려.  니네 부부가 성자가 아니라면 절대 같은 지붕 밑에 살지는 말라구.  공짜로 육아 서비스를 받게 되는 건 괜찮지.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실제 아기가 생겼을 때 제대로 애를 봐주지도 않으셨어.  니 예감이 '이거 조심하는 것이 낫겠는데' 라고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 말에 따르는 것이 좋을거야.  

- 니 자신의 집에 대해 제몫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럴 가치가 없는 일이야.  니 가족과 니 집은 당연히 너희들만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니 계획대로 하면 넌 절대 '시부모님과의 공유'라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을걸 ?  내 집은 성스러운 곳이야.  특히 애가 생기면 그게 얼마나 성스러운 곳인지 깨닫게 될 거야.  애 봐줄 분들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나라면 절대로 그런 조건의 공동 생활은 하지 않겠어.  내 입장은 '난 내 와이프와 결혼을 한거지 장인장모와 결혼을 한게 아니야' 라는 거야.  한번 그렇게 공동 생활을 택하게 되면 그거 사실상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할텐데, 그럼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할 거야.  이런저런 일들이 생길거라구.  가령 니 시부모님이 뇌졸증이나 암에 걸리거나, 죽거나, 뭐 그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면 어쩔건데 ?  어떻게 그런 규칙들을 의논하면서 통제권에 집착한 여자처럼 안 보이겠냐고 ?  니 배우자 및 니 애들하고 같이 살고 모든 결정을 니들 부부가 내리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일이야.  그렇게 시부모와 공동생활을 하게 되면 너와 니 배우자의 관계, 더 나아가 결혼에도 영향을 미칠 거야.  그건 잘못된 거지.  데이브 램지가 말하는 것처럼 "추수감사절 저녁식사는 절대 그 전과 같은 맛이 나지 않을 거야".  그거 하지마 !   (아마 이게 대부분의 미국인들 생각이 아닐까 해요. 하지만 다른 댓글에서도 보셨듯이 미국인들이라고 다 이렇게만 사는 것은 아니고 시부모나 장인장모를 모시고 사는 가족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ADU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니까요. :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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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그냥 제 생각입니다.   미국인들 중에도 저렇게 장인장모나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시부모/장인장모와 수평적인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처럼 부모공경 노인우대가 무조건적으로 강요되는 분위기에서는 시부모나 장인장모와 한집에서 산다는 것이 부부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됩니다.  저쪽은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이쪽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관계가 되어버리니까요.  그 때문에 요즘 젊은 부부들, 특히 젊은 며느리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시부모와 합가해서 사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부모공경 노인우대의 전통이, 오히려 시부모가 버림받고 따돌림 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봅니다.

 

차라리 서구식으로, 시부모와 며느리, 장인장모와 사위 사이가 수평적인 관계가 되어 서로 공평하게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타협할 것은 타협하는 관계가 된다면, 오히려 시부모 및 장인장모에게도 더 좋은 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김창환 교수님의 글 (https://sovidence.tistory.com/800) 중에서 전에 읽은 내용이, 미국내 소수민족 중에서 우리나라 재미교포 여성들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재미교포 남성들은 (재미교포 여성들 중 상당수가 외국인과 결혼해버리니까) 짝을 찾지 못해서 한국에서 한국 여성을 데려와 결혼하는 비중이 높고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 중 하나가 재미교포 가정에서도 버리지 못한 한국적인 가부장 문화라는 분석이었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겉으로 보기엔 남성들에게 유리한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성들이 그런 문화의 남성과의 혼인을 회피하게 되므로 결국 그 피해는 남성에게 돌아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부모공경 노인공경이 강요되는 문화도 비슷한 결과를 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는 독일 출신 할머니와 독일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처녀적 이름이 안할트-제릅스트(Anhalt-Zerbst) 출신의 소피(Sophie)로서 나중에 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대제로 알려진 러시아의 여황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어머니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공주였지요.  다른 유럽 왕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는 이렇게 계속 외국 특히 독일 출신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다보니 러시아 왕가는 일반 러시아 국민들은 물론 러시아 귀족들에 비해서도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춥고 먼 동쪽 구석의 러시아를 서구화시키는 노력은 대개 국왕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혁신이 위주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과 국민들은 그런 서구 사상의 침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반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알렉산드르에게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스위스 출신의 공화주의자인 라 아르프(Frédéric-César de La Harpe)를 가정교사로 하여 루소 등의 프랑스 계몽사상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당연히 그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지독한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계몽사상에 젖어든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라 아르프입니다.  그는 30대를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의 가정교사로 보낸 뒤, 베른의 귀족 정권에 시달리던 고향 스위스 보(Vaud) 지방을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스위스에 헬베티카 공화국(République Helvétique)을 만들었습니다.  혁명의 폭풍 속에서 그는 추방을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그는 옛제자 알렉산드르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 보 지방의 권익을 지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물려받은 전제 군주 짜르의 왕좌는 결코 절대 권력이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의 할아버지 표트르 3세(Pyotr III )는 그의 홀대에 불만을 품은 근위부대의 반란으로 황비인 예카테리나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결국 암살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파벨 1세(Pavel I) 또한 귀족 출신의 해직 장교들에 의해 아주 간단히 암살되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이어 암살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표트르 3세나 파벨 1세나 모두 농노들의 처지를 향상시키고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공통적인 개혁 조치를 취한 바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먼 동구의 대국으로서 소수의 전근대적인 귀족들이 노예 상태의 국민들을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가령 표트르 3세의 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귀족들은 자기 농노를 죽여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나름대로의 그런 전통과 특성을 무시하고 귀족들의 이익을 해친다면, 아무리 동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짜르라고 해도 야밤에 한낱 개처럼 살해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평민 출신 고문 스페란스키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르를 따라 에르푸르트 회담장까지 가서 직접 나폴레옹과 환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는 결국 친프랑스파이자 불온사상을 가진 자로 낙인찍혀 1812년 초에 고문직에서 해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베리아에 유배를 간 것은 아니고, 핀란드 대학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록 알렉산드르가 서구 계몽사상으로 훈련된 개혁적 군주라고 해도 실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시골 마을 신부의 아들인 스페란스키(Mikhail Speransky)를 고문으로 등용하여 당시 계몽사상가들이 꿈꾸던 입헌 군주국으로 러시아를 탈바꿈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는 짜르가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처럼 선진 교육을 받은 귀족 및 시민들이 많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당시 그 넓은 러시아에 딱 3개 있던 대학 수를 6개로 늘리는 등 교육 제도 개선에도 힘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혁은 쉽지 않았고 알렉산드르도 주변 왕족 및 귀족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런 개혁에 대한 열의는 점점 옅어져 갔습니다.  가령 스페란스키가 제시했던 의회, 즉 러시아어로 두마(дума, '생각'이라는 뜻)로 불리는 기구는 거의 1백년이 지난 뒤 노일전쟁의 패전 결과로 발생한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겪고서야 간신히 설립될 지경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러일 전쟁 패배의 여파로 들끓던 사회적 불만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포템킨 호의 반란 사건도 이때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서구 사회에 긍정적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 시민 계급을 대표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폴레옹의 앙기앵 공작 납치 사법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범죄 행위를 보고는 기대만큼 큰 실망을 하여 반-나폴레옹파로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제3차 대불동맹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의 손에 참담한 패배의 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렉산드르는 젊은 낭만파 몽상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1807년 틸지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대인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는 나폴레옹의 매력에 젖어든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첨벙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역시 낭만파 몽상가이자 지략가였던 나폴레옹이 제시한 프랑스와 러시아가 힘을 합해 유럽을 양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점령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도 전율했습니다.  그 결과, 분명히 바로 직전까지 영국의 금융 지원을 받으며 피튀기게 싸우던 적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여태까지의 돈 줄이자 중요 경제 파트너였던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틸지트 회담에서 알렉산드르는 무엇보다 남쪽의 숙적 오스만 투르크가 차지했던 발칸 반도 등지를 빼앗기를 원했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얻은 것은 핀란드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오스만 투르크는 영국의 근동 지방 전략에 저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동맹이었고 또 나폴레옹이 구워삶아야 하는 다른 강국인 오스트리아도 오스만 투르크의 땅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얻은 것에 비해 영국과 척을 진 대가는 컸습니다.  러시아는 토지 귀족의 나라였고, 토지 귀족의 돈벌이는 자신의 장원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영국제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호기 있게 맺은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 토지 귀족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곧장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물론 불만 세력들은 모양새 없게 '돈벌이가 안된다'라는 것을 나폴레옹과의 동맹 반대 이유로 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은 신이 내려주신 왕위를 뺴앗은 찬탈자이고 불온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야만인이므로, 동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로마노프 왕조는 그 코르시카놈과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정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모후인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까지 나서서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출석하지 말라고 종용할 지경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둘러싼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야밤에 칼로 찔러 죽인 자들이 가득찬 왕궁에서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이 결코 자신과 유럽을 공유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어디까지나 전제 왕정의 군주였지, 결코 낭만적인 친구들로 둘러싸인 젊은 독일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독립 폴란드 왕국으로 부활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오스만 투르크의 분할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메테르니히가 빚어낸 가짜 뉴스였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1810년 12월 31일 발표된 짜르의 칙령은 프랑스산 제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하고, 반대로 영국 상품에 대해서는 입항 허가를 내주는 내용이었고,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와 알렉산드르 사이의 전쟁은 거의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제 벌어질 전쟁은 유럽 산업화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영국 시민 계급과 프랑스 시민 계급의 싸움이었습니다.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된데다 강력한 로열 네이비를 보유한 영국과 싸울 방법이 궁했던 프랑스가 꺼내든 대륙 봉쇄령이라는 무역 전쟁은 결국 동방의 대국 러시아를 싸움판에 끌어들였고, 결국 영국 대신 러시아가 프랑스를 상대로 대리전을 치르게 된 것이었지요.  

자신의 전쟁에 제3자를 끌어들인 것은 영국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도 혼자서 러시아와 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가 굴복시킨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의 위성국가들에게 병력과 물자, 자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럽 거의 전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거대한 전쟁에 휩쓸려야 했습니다.  과연 이 전쟁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요 ?  물론 대부분은 황제가 또 전쟁을 한다면서 불만이었습니다만, 지식인들 대부분은 이 전쟁을 계기로 유럽의 근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점령군 뒤에는 예외없이 무자비한 병참장교와 세관원들이 따라와 점령지의 고혈을 짜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나폴레옹의 정복지에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계승한 헌법과 나폴레옹 법전도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이례적으로 잔혹하게 난동을 부렸던 스페인에서조차,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이 세운 허수아비 왕 조제프의 정권이 기존 부르봉 왕정보다 스페인을 훨씬 더 근대화시켰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최소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중세시절부터 계속 내려오던 고문으로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도 폐지되었으니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망한 뒤 스페인 종교재판은 다시 부활했다가 1834년에야 간신히 폐지되었습니다.  괴테 등 당대의 지성인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일주의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나폴레옹이 동방으로 끌고 갈 그랑다르메(Grande Armee)의 전진과 함께, 신분제 폐지와 천부인권 등의 계몽사상이 저 동방까지 전달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 = 이단심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와 나무가지, 그리고 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Yo, Say Love"를 선창하시는데 이들은 떼창으로 "No Mercy"를 외쳤군요.)

 



이제 유럽은 누가 영국과 러시아 편에 설 것이고 누가 프랑스 편에 설 것인지, 과연 중립이란 것이 가능할지 외교적인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I_of_Russia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Speransky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