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당시인 19세기 초 전형적인 24파운드 함포의 모습입니다.    지금 이 함포는 장전을 위해 후퇴 위치(recoil position)에 놓여 있습니다.  대포 꼬리 부분의 둥근 돌기 같은 쇳덩이가 breech(포미)이고, 거기에 걸린 밧줄이 breeching(포삭)입니다.  그 외에 그림에 10번, 11번이라고 표시된 것이 train tackle, side tacke입니다.  Tackles는 원래 도르래의 밧줄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대포를 발사 위치로 당기고 고정시키기 위한 밧줄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포미 부분에 붙어서 뭔가 하고 있는 남자는 대포 약실 속에 밀어넣은 장약포(powder cartridge, 흑색 화약이 캔버스 천으로 된 헝겊주머니에 담겨있습니다)에 점화구(touchhole, 또는 vent)을 통해 긴 쇠꼬쟁이를 찔러넣어 구멍을 뚫고 있습니다.  그 뒤에 점화구로 긴 갈대 등에 화약을 채워넣은 뇌관(priming tube)을 삽입할 것입니다.)


Source :  http://www.navyhistory.org/the-constitution-gun-deck/





곧 화약 보이(powder boy)들이 함포의 장약(charge)을 하나씩 들고 달려왔다.  각 함포의 포삭(砲索, breeching, 대포를 고정시키기 위해 포미의 돌기에 거는 밧줄)을 벗겨냈고 함포 조원들은 포문(port)을 열고 함포를 발포 위치로 밀어내라는 명령을 기다리며 대포 견인줄(tackles) 옆에 대기했다.  부시는 양현을 재빨리 훑어 보았다.  각 함포의 조장들은 모두 제 위치에 있었다.  우현의 각 함포에는 10명씩 대기하고 있었고, 좌현 쪽에는 함포마다 5명씩이 대기했다.  이 숫자들은 24파운드 포의 최대 및 최소 운용 인원수였다.  양현의 함포들 중 어느 쪽이 포격에 동원되더라도 제대로 인원수를 갖추도록 감독하는 것이 부시의 책임이었다.  만약 양현의 함포들이 동시에 포격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는 양쪽에 인원을 공평하게 배분해야 했고, 사상자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일부 함포가 포격 불능 상태에 빠지면 그가 함포 조원들을 재조정해야 했다.  부사관(petty officer)들과 준위(warrant officer)들은 각자의 담당 분대의 전투 준비가 끝났다고 보고를 해오고 있었고, 부시는 전령 역할의 의무를 띠고 옆에 서있는 사관생도(midshipman)을 향해 돌아섰다.


"미스터 애봇(Abbott), 하갑판의 전투 준비가 끝났다고 보고하게.  그리고 함포를 내밀 것인지 여쭤보도록."


"예, 부관님 (Aye aye, sir.)"


잠시 전에만 해도 전함은 소음과 북적거림으로 가득했으나, 이제 선체 목판의 끼익거리는 소음을 빼면 모든 움직임이 멈췄고 조용해졌다.  전함은 파도의 리듬에 맟추어 오르내렸다.  주돛대 옆에 서있던 부시는 배의 요동에 따라 자동적으로 몸을 맞추어 균형을 잡았다.  어린 애봇이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미스터 버클랜드의 전언이십니다. (Mr Buckland's compliments, sir : 원래는 버클랜드가 칭찬을 한다 라는 뜻입니다만 영국 해군에서는 거의 관용어구처럼 '누가 보낸 전언이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아무리 시급한 전투 상황에서도 이 관용어구를 빼먹지 않아야 한답니다. : 역주)  아직 함포를 내밀지 말라십니다."


"알겠네.  (Very good : 여기서는 매우 좋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잘 알아들었다 정도의 뜻입니다.  보통 very well이라는 표현도 많이 씁니다.  가령 우리 편이 패전하고 있다는 전언을 들었을 때도 very well이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 역주)


혼블로워는 포가 견인줄(train tackles)의 고리 볼트(ringbolt)에 맞춰 더 선미 쪽에 서있었다.  그는 애봇이 가져온 전언을 듣기 위해 돌아보았다가 이제 다시 뒤돌아섰다.  그는 양발을 벌리고 서있었는데, 그가 등 뒤에서 양손을 맞잡고 약간 꽉 쥐는 것이 부시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어깨와 그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모습에는 뭔가 경직된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어떤 의미로든 해석될 수 있었다.  전투를 간절히 바라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정반대일 수도 있었다.  함포 조장 한 명이 뭔가 혼블로워에게 말을 걸며 이야기했는데, 부시는 혼블로워가 몸을 돌려 거기에 대답하는 것을 보았다.  하갑판의 희미한 채광 속에서도 부시는 혼블로워 얼굴 표정에 긴장감이 깃들어 있고 웃는 미소는 억지로 짜낸 것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뭐, 글쎄, 전투 돌입 직전에 사람들은 종종 저런 모습을 보이곤 하지'라고 부시는 최대한 선심을 발휘해 스스로에게 해명을 했다.


전함은 조용히 항진을 계속 했다.  부시가 귀를 쫑끗 세운 채 상갑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듣고 상황을 유추해보려 했지만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저 멀리 햇치 통로를 통해 어떤 수병의 외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바닥이 없습니다(No bottom, sir), 이 줄로는 바닥이 닿지 않습니다."


즉 돛대고정발판(chains : 돛대를 뱃전 양쪽으로 고정시켜주는 밧줄을 shrouds라고 하는데, 그 shrouds를 뱃전에 고정시키기 위해 뱃전 너머에 설치해놓은 작은 발판을 chains라고 합니다 : 역주)에 수병이 올라가서 납덩이가 달린 밧줄을 던지며 수심을 재고 (taking casts with the lead) 있는 모양이었고, 그건 이 전함이 육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갑판에 있는 모든이들이 같은 결론을 내리고는 옆사람과 그에 대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거기, 조용히 해 !" 부시가 윽박질렀다.


수심측정수(leadsman)의 외침 소리가 또 한번 들리더니, 이번에는 뭔가 우렁찬 호령소리가 뒤따랐다.  곧 하갑판 전체가 소음으로 가득 찼다.  포문을 열고 주갑판의 함포들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하갑판의 밀폐된 공간에서는 모든 소리가 함체의 목판에 반사되고 증폭되었기 때문에, 함포의 포가(gun truck)가 갑판 바닥을 가로질러 발포 위치로 내밀어지는 것은 마치 천둥같은 소리가 났다.  모든이들이 부시를 쳐다보며 명령을 기다렸지만, 그는 그냥 차분히 서있었다.  명령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사관후보생 하나가 사다리를 내려와 명령을 전했다.  


"미스터 버클랜드의 전갈입니다, 부관님, 함포를 발포 위치로 밀어내 주시기 바랍니다."  (Mr Buckland's compliments, sir, and please to run your guns out. : 지금이야 그렇다지만 사람들이 두동강 나고 피가 쏟아지는 처절한 전투 상황에서도 저렇게 compliments니 please니 하는 미사여구를 써야 한다는 것이 좀 우습지요 ? : 역주)


그 사관후보생은 하갑판에 발을 대지도 않은 채로 사다리에서 그 메시지를 새된 소리로 외쳤고, 모든이들이 그 말을 들었다.  하갑판 전체에서 즉각 웅성거림이 일어났고, 쉽게 흥분하는 사람들은 포문을 열려고 손을 뻗기 시작했다.


"조용 !" 부시가 호통쳤다.  모든 움직임이 검연쩍게 딱 멎었다.


"포문을 열어라 !" (Up ports !)


포문이 열리면서 하갑판의 어둑어둑함이 눈부신 대낮으로 바뀌었다.  좌현 쪽에서 작은 사각형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전함의 흔들림에 따라 넓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하며 갑판을 비추었다.  


"밀어내라 !"




이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서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제가 요즘 다사다난하여 책을 못 읽고 있습니다.  최소 몇 주 간은 C. S. Forester의 Lieutenant Hornblower 중에서 제가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을 발췌 번역해서 올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최고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이 책은 국내 연경사에서 '혼블로워. 2: 스페인요새를 함락하라'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제 발췌 번역본은 여러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중단될텐데, 재미있다고 생각되시면 영문판이든 한글판이든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linkClass=010310&barcode=9788989369097





Lieutenant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 1801년 카리브 해 HMS Renown 선상) --------------


(부시와 혼블로워가 각각 제3, 제5 부관으로 탑승한 영국 해군의 74문짜리 전함 리나운 호(HMS Renown)는 산토 도밍고 섬의 스페인 해군 요새를 파괴하고 그 곳의 스페인 선박들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카리브해에 도착합니다.  항해 도중에 함장이 미쳐버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함장은 함장실에 연금되고 제1 부관인 버클랜드가 임시 함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지 뛰어난 지휘관이 아닌 버클랜드는 별다른 계획없이 그냥 스페인 요새의 항구로 밀고 들어가 일제 포격을 하려 합니다.)


저녁 당직(dogwatches : 원래 4시간 단위의 교대근무 시간을 4pm~8pm 사이에는 2시간짜리 2개로 쪼개는데 이걸 dogwatch라고 불렀습니다 : 역주) 시간 동안 혼블로워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듯이 머리를 숙인 채 혼자서 갑판을 왔다갔다 걸었다.  등 뒤로 맞잡은 혼블로워의 두 손이 초조하게 꿈틀거리고 배배 꼬이는 것이 부시의 눈에 들어왔다.  부시는 잠깐 의심이 들었다.  이 열정적인 젊은 장교에게 혹시 신체적 용기가 없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  그 표현은 부시의 창작품은 아니었다.  그는 그 표현이 몇 년 전 어디서인가 악담으로 사용되는 것을 들었었다.  혼블로워가 겁장이일 수도 있다고 대놓고 스스로 짐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표현을 지금 쓰는 것이 더 나았다.  부시는 그다지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겁장이라면 그는 그 인간과는 뭐든 더 같이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절반 정도 흘렀을 때 갑판을 따라 호각들이 길게 울렸다.  해병들의 북이 두두두 소리를 냈다.


"전투 준비를 위해 갑판을 치운다 !  각자 위치로 !  전투 준비 !"  ("Clear the decks for action! Hands to quarters! Clear for action!"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갑판 아래의 선실을 이루는 격벽이나 식탁 등의 가구, 짐짝 등을 모두 치워 선창에 보관합니다.  그래서 전투 준비에 clear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 역주)


부시는 전투시 자신의 위치인 하(下) 포갑판(lower gundeck)으로 내려갔다.  하 포갑판 전체와 우현의 24파운드 포 17문이 그의 지휘 책임 하에 있었고, 좌현의 포들은 그의 밑에 있는 혼블로워가 맡게 되어 있었다.  수병들은 이미 칸막이를 해체하고 방해물들을 치우고 있었다.  갑판을 따라 군의관 조수들 한 무리가 내려왔는데, 그들은 구속복(straight jacket)을 입인 채 널빤지에 묶어놓은 사람 하나를 떠매고 왔다.  구속복과 결박 끈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힘없이 꿈틀거리며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전투 준비 때문에 함장실을 치우면서 함장을 닻줄 선창(cable tier, 닻줄을 말아두는 맨 바닥 갑판, 대포알이 흘수선 아래를 뚫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선창은 상대적으로 매우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 역주)으로 내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런 북적거림 속에서도 한두 명의 수병들은 그런 함장의 몰골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부시는 재빨리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는 하 포갑판이 전투 준비 완료가 되었다는 보고를 칭찬받을 만한 시간 안에 올리고 싶었다.  혼블로워도 나타나서 부시에게 경례를 하고는 그의 함포들을 감독하며 서있었다.  이 하갑판의 대부분 구역은 석양 무렵의 어둠에 덮혀 있었다.  상갑판으로 통하는 햇치 통로들(hatchways)로 들어오는 굵은 햇빛 줄기들은 진한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진 갑판의 저 구석까지는 거의 밝혀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군함의 보이들 6명이 모래를 담은 버켓을 들고 와서 갑판 여기저기에 한주먹씩 뿌렸다.  (매끄러운 갑판 위에서 피와 물기로 인해 미끄러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 역주)  부시는 그들의 작업을 날카로운 눈으로 감독했다.  포수들이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그 모래가 꼭 잘 뿌려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각 함포 옆마다 물을 가득 채운 버켓을 놓아두었는데, 이건 포구를 청소하는 장전봉의 헝겊뭉치를 적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혹시 화재가 발생할 경우 즉각 진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주돛대의 주변에는 여분의 소화용 물통이 둥글게 놓여 있었다.  군함의 양현에 있는 통에는 화승(slow match)이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어서, 만에 하나 어느 함포의 화승간(火繩桿, linstock, 끝에 화승이 달린 막대기 : 역주)의 불이 꺼질 경우 그 함포 조장이 여기서 다시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불과 물이 준비된 셈이었다.  낮은 천정 들보에 닿을 듯 높은 군모(shako)를 쓰고 선홍색 자켓과 하얀 십자밴드를 맨 해병들이 보초 임무를 위해 갑판 위를 쿵쿵거리며 뛰어왔다.  그린우드 상병은 각 햇치 통로에 장전하고 착검까지 한 보초를 한 명씩 세웠다.  그들의 임무는 겁을 먹고 안전한 흘수선 아래 구역으로 도망치려는 사람이 없도록 인가되지 않은 어떤 사람도 햇치 통로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임시 포술장인 미스터 홉스는 조수들과 함께 잠깐 나타났다가 곧 저 아래의 화약고(magazine)로 사라졌다.  그들은 모두 가장자리 천으로 만든 슬리퍼(list slippers)를 신고 있었는데, 이는 전투가 한창일 때 어쩔 수 없이 바닥에 흩뿌려질 약간의 화약가루가 폭발할 위험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Linstock의 모습입니다.  그냥 화승막대기입니다.  이걸 대포의 점화구 즉 touchhole에 대면 대포가 발사되는 것이지요.)




* PS1 : Dogwatch라는 독특한 2시간 짜리 교대 순번을 만든 이유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2교대로 돌아가는 군함의 교대 근무에서, 이렇게 2시간 짜리 순번이 없을 경우 어느 한쪽 교대조가 계속 특정 시간대(가령 0시~4시)에 근무를 서야 하는 불공평함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4시간 중에 모든 수병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쉴 시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 PS2 : 저 list slipper라는 단어는 19세기 문학 작품 여기저기에 나오는, 영어권 사람들로서도 약간 신기한 단어인 모양이더라구요.  List라는 것은 천의 가장자리를 뜻하는 것인데, 천의 가장자리는 실이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금 견고하게 처리가 되어 있지요.  그런 두꺼운 천으로 만든 슬리퍼를 list slipper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딱딱한 밑창을 가진 구두를 신었다가 구두 바닥과 갑판 사이에 낀 화약가루가 마찰열로 폭발할 것을 염려하는 것 같습니다.  List slipper라는 단어에 대한 토론은 아래 link를 참조하세요.


http://www.worldwidewords.org/qa/qa-lis1.htm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페인에서 싸우던 영국군 장교의 이야기를 그린 시리즈물, Sharpe 시리즈 중에서 한 장면입니다.  


아래는 그 중 한 장면입니다.  당시 영국군에서는 전사자의 유품을 그대로 유가족에게 보내지 않고, 동료들에게 경매에 붙여 매각한 뒤 그 돈을 유가족에게 송금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이는 해군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아마도 당시에는 DHL이나 FEDEX가 없어서 그랬나 봅니다.  아래 본문에 보면, 급여 담당관에게 돈의 송금을 맡기고, 그 급여 담당관은 일부 금액을 수수료로 떼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수수료는 대략 몇%였을까요 ?  대략 7~8%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인플레가 심한 편이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너무 심하게 떼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당시에는 온라인 송금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많이 떼는 것 같지도 않군요.






Sharpe's Waterloo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5년 벨기에) ----------------------


왕세자 직속 지원병 연대의 제1중대 지휘관인 해리 프라이스 대위는 탄약상자를 쌓아 만든 임시 연단 위에 올라섰다. 그의 앞에는 근처에 숙영하고 있는 여러 대대에서 온 40~50명의 장교들이 비로 흠뻑 젖은 벌판 위에 모여있었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이제 부슬비로 변하면서, 서쪽에서는 구름뒤의 희미한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신사 여러분, 준비되셨나요 ?" 프라이스가 외쳤다.


"시작하라구 !"


프라이스는 아주 즐거워하면서, 조롱을 퍼붓는 장교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는 특무상사 헉필드로부터 첫번째 물품을 건네 받았다. 해리 프라이스가 희미한 석양 빛 속에 높이 쳐든 것은 뚜껑이 은으로 된 회중시계였다.


"회중시계입니다, 신사 여러분, 고 미클화이트 소령의 유품이지요 ! 이 물건은 아주 약간만 피에 젖었으므로, 잘 닦아내기만 하면 시간이 아주 잘 맞을 겁니다. 신사 여러분, 여러분께 엑세터의 마스터슨 제의 회중 시계를 선보입니다 !"


"마스터슨이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어 !" 누군가가 외쳤다.


"댁의 무식함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마스터슨은 아주 유서깊고 명성있는 회사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항상 마스터슨 시계로 시간을 맞추셨고, 덕분에 평생 단 한번도 시골 무도회에 늦으신 적이 없었답니다. 자, 미클화이트 소령의 시계에 1파운드 부르실 분 있을까요 ?"


"1실링 ! (1/20파운드, 당시 일반 사병의 하루 일당이 1실링.  현재 가치로 대략 1만2천원 :역주)"


"자, 협조 좀 합시다 ! 미클화이트 소령은 미망인과 세명의 심성고운 자녀를 남겼습니다. 여러분같으면 어떤 도둑 심보의 후레자식들이 관대하질 않아서 여러분의 부인과 아이들이 빈곤하게 되는 걸 바라시진 않겠지요 ! 자, 1파운드라는 소리를 좀 들어보자구요 !"


"1플로린 ! (2실링:역주)"


"이게 무슨 인형가게인줄 아쇼, 신사여러분 ! 1파운드, 누구 1파운드 부를 사람 ?"


아무도 없었다. 결국 미클화이트의 시계는 6실링에 팔렸고, 인장 반지는 1실링에 팔렸다. 칼라인 대위 물건이던 멋진 은잔은 1파운드였고, 그날 경매에서 가장 고가에 팔린 것은 칼라인 대위의 검이었는데 10기니(1기니는 21실링:역주)에 팔렸다. 해리 프라이스가 그날 저녁 팔아야 했던 물건은 62개나 되었는데, 모두 그날 콰트르 브라(Quatre Bras, 4개의 팔이라는 뜻)에서 프랑스 기병대에게 당한 왕세자 직속 지원병 연대 장교의 유품이었다.  경매 가격은 무척 낮은 편이었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 그날 프랑스 기병대가 하도 많은 장교들을 죽여서 시장에 물건이 아주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의 이 물건들은 내일 쏟아져 나올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프라이스는 생각했다.


"칼라인 대위의 박차 한쌍입니다, 신사 여러분 ! 금제품입니다, 제가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 주장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조롱을 받았다. "1파운드 있습니까 ?"


"6펜스. (1페니는 1/12 실링)"


"이런 불쌍힐 정도로 빌어먹을 친구들 같으니라고. 내가 2펜스(당시 가장 낮은 단위의 동전이 2펜스였는지, 2펜스라는 것은 싸구려라는 뜻과 동의어: 역주)에 막 내줘버리는 물건이 댁들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소 ? 좀 관대해집시다, 신사여러분 ! 미망인들을 생각하세요 !"


"칼라인은 미혼이었는데 !" 한 중위가 외쳤다.


"그럼 그 인간의 정부를 위해서 1기니 ! 좀 기독교적인 관대함을 보여줘요, 신사 여러분 !"


"내가 그 인간의 정부를 1기니에 사지 ! 하지만 그 인간의 박차는 6펜스야 !"


미클화이트의 유품은 다합쳐서 8파운드 14실링하고도 6펜스에 팔렸다. 칼라인 대위의 소지품은 훨씬 더 많이 값을 받았는데, 그래도 원가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다. 항상 기병대 장교처럼 보이고 싶었던 해리 프라이스는 그 박차를 9펜스에 자신이 샀다. 그는 칼라인의 털가죽으로 가장자리를 댄 펠리즈도 샀다.  이는 부유한 장교들이 유행으로 입던, 우아하지만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옷인데, 망토처럼 한쪽 어깨에 걸쳐 입는 짧은 자켓이었다. 해리 프라이스는 칼라인의 값비싼 장식 의상을 자신의 초라한 붉은 코트 위에 입는 것에 무한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돈과 어음을 대대의 급여담당관에게 전달했고, 이 담당자는 자기 수수료를 챙긴 뒤에, 그 돈을 전사자의 유족들에게 보내게 되어 있었다.


해리 프라이스는 박차를 자신의 장화에 달고는, 울타리를 건너 다른 장교들이 비참한 움막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곳으로 물을 첨벙첨벙 튀기며 걸어갔다.


그는 달렘보드 소령이 울타리 저 너머에 기대어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오늘 경매에는 참여 안했지요, 피터 ?"


"오늘은 그만, 해리, 오늘은 제발 그만."  달렘보드의 목소리는 더이상의 대화가 반갑지 않다는 듯,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다.


프라이스는 달렘보드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채고는 그냥 울타리를 따라 좀 걸어간 뒤, 앉아서 그의 뒤꿈치를 장식하고 있는 박차를 감탄하듯 쳐다 보았다. 이 박차를 차고 가면, 파리의 숙녀들에게 틀림없이 깊은 인상을 줄 것이고, 사실 그것이 해리 프라이스가 싸우는 최상의 동기였다. 여자들은 외국 군인에게 끌리는 법이었고, 특히 그 군인이 박차와 펠리즈로 장식한 경우는 더욱 그럴 것이었다.



(목요일이라 전에 다음 블로그에 올렸던 것 다시 올립니다.)



웰링턴은 포르투갈에 상륙하자마자 곧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적, 그리고 사회적 특수성이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었습니다 !  이는 스페인의 침공 위협 때문에라도 스페인과의 교통로를 적극 개발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의 특수성에도 기인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모두 산업과 통상의 발달이 부진했다는 점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지역간에 거래를 할 상품이 없다보니 마차가 다닐 일도 없고, 마차가 다닐 일이 없으니 넓직한 길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지역 감정이 꽤 심한 나라여서 지방 간의 인적 왕래도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더더욱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통망에 더해,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건조한 편이라서 농업 생산량이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농가들은 어지간한 농가의 창고문만 걷어차도 밀과 보리, 달걀이 쏟아져 나왔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척박한 스페인과 대비했을 때조차도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현지 조달에 의존했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쫄쫄 굶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온 지역이 이렇게 가난하다보니,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보시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이 산지이거나 메마른 지대라서, 농업에 적절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스페인은 올리브유 생산이 매우 활발한 나라입니다만, 그건 반대로 곡물 농사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지대라는 반증입니다.)




현지 조달이 어려우면 본국에서 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의 열악한 내륙 교통망이 발목을 잡습니다.  가뜩이나 프랑스 본토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산맥이 있는 것도 장애가 되었는데, 해안길을 통해서라도 수송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뒤부터가 진짜 고생길이었던 것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보면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별로 큰 땅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건 메르카토르 도법의 특성상 남쪽에 있는 땅이 좁아보이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64만 평방 km인 것에 비해 스페인이 50만 평방 km으로서, 스페인은 굉장히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탄한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높은 산맥과 언덕이 많은 땅이지요.  길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을 가로질러 20만 대군이 먹을 식량을 마차로 수송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도전은 스페인의 게릴라들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경우, 이베리아 땅이 반도이니만큼 그냥 해상으로 수송한 뒤 내륙으로 운송하면 훨씬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저 망할 로열 네이비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는 수탈당하는 스페인 민중들에게도 큰 비극이었지만 약탈하는 프랑스군에게도 무척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만명 단위의 대군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그 일대의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먹어치우는 것도 있지만, 그 일대의 농민들이 식량을 감추거나 떠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프랑스군은 한 곳에서 1주일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굶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유랑하는 거지떼 내지는 떼강도 신세가 된 것이지요.  군사 작전이라는 것에서 이동이 잦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압박하거나 반대로 피하기 위해서이지 굶지 않기 위해서 이동하는 군대에게는 작전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페인에 투입된 근 20만에 가까운 프랑스군 대부분은 먹을 것을 찾아 이동 중이거나, 분산되어 먹을 것을 약탈 중이거나, 혹은 신기루 같은 게릴라들의 뒤를 쫓아 산 속을 헤매면서 세월을 낭비해야 했고, 실제로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프랑스군은 그 1/4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웰링턴은 유능한 지휘관답게,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영국군이 10만 단위의 대군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군량 조달을 가장 유용한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조건은 비슷했습니다.  길이 형편 없는 것도 똑같았고,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같았습니다.  스페인의 주요 항구들이 대부분 프랑스군 손아귀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식량을 수송해올 거리는 영국 측이 훨씬 멀었습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거리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거리보다 멀었고, 그나마 영국 본토도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식량난이 심해져서 밀과 빵값이 오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식량을 포르투갈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미국과 남미, 오스만 투르크, 심지어 북아프리카 모로코 등지에서 식량을 구매하여 포르투갈로 실어날랐습니다.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실제 소설이 씌여진 순서는 아니지만) 첫번째 편인 Mr. Midmanship Hornblower는 혼블러워의 사관후보생 시절을 그린 옴니버스식 소설입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식량으로 소를 사러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 들어갔다가 전염병에 휘말려 격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참부에게 진짜 고난은 포르투갈 해변에 온갖 보급품이 잔뜩 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1808년 8월, 당시 쥐노가 점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탈환하기 위해 웰슬리가 포르투갈 마세이라(Maceira) 만에 상륙했을 때, 전에 언급한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이름의 독일 출신 병참 장교에게 주어진 임무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조수도 부하도 없이 혼자서, 그저 공책 한권을 주고는 해변 여기저기에 야적된 수많은 보급품 더미를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한 뒤 이제 내륙으로 진격할 영국군 부대를 따라 수송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우만이 그런 업무에 숙련된 병참 장교였는가 하면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이전에 하노버 군에서 몇년 장교로 복무했다가 퇴역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장부 작성 등의 업무를 좀 해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국군 소속 독일군 전투 부대인 KGL 제7 연대 소속의 평범한 장교였고, KGL 장교로서는 승진과 연금의 비전이 없다고 보고 일당 7.5 실링(현재 가치로 대략 9만5천원)의 급여를 위해 병참 장교로 자리를 옮긴 아마추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무런 지침이나 교본이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The British Commissary'(영국 병참부)라는 멋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이 한권 있었는데, 이는 메서리어(Havilland le Mesurier)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쓴 것으로서, 당시 영국군 병참부 직원들에게는 수학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책이었습니다.  메서리어는 원래 해외 무역업자였다가 프랑스 혁명정부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부터 네덜란드 방면 영국군 원정대에 딸린 병참 장교 역할을 했습니다.  1794년에서 그 다음해까지 벌어진 이 방면 전투에서 영국군은 형편없는 성과만 냈을 뿐이었지만, 정말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던 영국군 병참부는 이 난리통 속에서 그나마 나름 경험과 수완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에도 메서리어는 병참부 장교직을 사직했다 복직했다 했는데, 영국군 병참부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저 'The British Commissary'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메서리어의 'The British Commissary'입니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책입니다만, 저는 못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영국군 병참부는 초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참부는 힘만 들고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노동일을 하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만큼, 빛나는 전통이고 뭐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랑 책 한 권을 손에 든 경험 없는 병참부 장교들도 막대한 보급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실은 병참부 소속 장교들은 진짜 장교도 아니었습니다.  병참부는 군의 일부가 아니라, 재무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파견직 민간인들이었거든요.  따라서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assistant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하는 것들은 진짜 장군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말단 사병들이 경례를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민간인 정부 관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교들과 엇비슷한,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나는 군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권총과 군도와 같은 무기도 휴대했습니다.  병사들은 '저것들은 장교 비슷한 군복은 입었지만 장교가 아니며,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도망친다'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적지 않은 경우 무기를 들고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아군에게 저평가되었지만, 사실 이들의 업무는 제1선 장교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개인적인 창의성과 수완,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대포알과 머스켓 탄환에 노출된 채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할 때, 멋진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교가 부릴 수 있는 재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운이 좋은 자는 살아서 전진할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쁜 자는 대포알에 두동강이 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흙탕 길에 바퀴가 빠진 무거운 수레를 어떻게 빼낼 것인지, 수송에 3일 걸리는 건빵 자루 더미들을 어떻게 2일 안에 최전방까지 나를 것인지, 가진 돈은 50쉴링 밖에 없는데 일당 1쉴링을 요구하는 노새 30마리를 어떻게 3일 동안 빌릴 것인지 등은 그야말로 담당 직원의 역량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성공과 실패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밀가루 자루를 실은 노새들을 끌고 최전선 부대에 도착한 병참부 장교에게 주어지는 것은 '왜 이리 늦게 왔냐' '왜 보급품이 이것 밖에 없는가' 등의 핀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병참부는 체계화가 꼭 필요한, 나름대로 무척 섬세하고 정밀한 병과입니다.  가령 포르투갈을 통해 상륙하는 영국군 병사들의 행군에 대해 웰링턴이 병참감(Commissary General)인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게 보낸 지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들어있습니다.


"상륙하는 부대는 각자 4일치의 빵과 2일치의 고기를 휴대한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빵 외에, 1만 명의 3일치 빵을 수송해야 하는데, 가능하다면 노새를 이용해 날라야 한다.  각 노새에는 2개의 자루, 즉 224파운드의 짐을 실을 수 있으므로 전체를 위해서는 130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


이 계산은 꽤 합리적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배식량은 하루에 빵 1파운드였는데, 1만 명의 3일치라면 3만 파운드입니다.  224파운드를 실을 수 있는 노새를 130마리 동원한다면 224 * 130 = 29,120 파운드이므로, 1인당 0.97 파운드씩의 빵을 3일간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노새가 먹을 사료는 계산에 넣지 않았쟎습니까 ?  노새는 하루에 10파운드의 곡물을 먹어야 했고, 병사들이 3일 행군하는 것을 따라 나섰다가 다시 보급품이 쌓여있는 항구로 되돌아오려면 왕복에 6일이 걸렸으므로, 노새 1마리가 싣는 224 파운드 중 최소 60파운드의 곡물은 노새가 먹어치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130마리의 노새의 실제 수송량은 29,120 파운드가 아니라 21,320 파운드였고, 병사들은 3일간 0.97 파운드가 아닌 0.7 파운드라는 부실한 양의 빵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노새들을 이용한 보급품 수송이 정말 최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영국군 병참부도 2년 정도에 걸쳐 노새꾼들과 노새들을 고용하여 운용을 하면서 경험이 쌓여, 그 고용 및 활용, 급여 지급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잡무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은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이 이런 노새 한마리가 몇 파운드의 짐을 싣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몇 마리의 노새가 필요한지에 대해 계산하여 병참감에게 보내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편지는 오히려 반대로 병참감이 원정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형태로 보내는 것이 맞겠지요.  당시 웰링턴은 병참부 장교들과 서기들의 무능력에 대해 짜증이 잔뜩 난 상황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샤우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참 장교들이 별다른 병참 업무 경험도 없이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다보니 워낙 아는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병참부는 웰링턴 하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총사령관 웰링턴이 직접 나서서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서'라고 지목하면서, 저렇게 노새 몇 마리가 필요하다는 계산까지 세세히 해줄 정도였으니 당연히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1810년 10월부터 다음해 초까지의 대치 끝에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앞에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후퇴시킨 승리는 사전에 충분한 군량을 비축해놓은 영국군 병참부가 아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아무도 병참부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지요.  이 사실은 웰링턴 휘하 어지간한 장군들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많은 정보가 있는 것에 비해, 웰링턴 휘하의 전체 병참부 책임자였던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 대해서는 정말 정보가 없다는 것으로도 반증됩니다.  오히려 영국군 병참부의 위력과 중요성을 잘 알고 두려워했던 것은 적군인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12년 웰링턴과 대치했던 마르몽(Marmont) 원수는 나폴레옹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웰링턴은 제게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광활한 척박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마르몽은 유난히 영국군의 노새 부대에 대해 넋두리를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1811년에도 그는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에게 편지를 써서 '영국군은 노새 1만2천 마리를 이용하여 너무나 쉽게 이동한다, 그러니 내게 단 1천2백 마리라도 노새를 좀 공급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용들이 등장하는 나오미 노빅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테메레르'에 대해 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지요.  대포의 시대라고 해도 그런 거대한 용들 수백 마리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면 아마 천하무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거대한 용들에게 먹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도 일종의 용이었습니다.  그 대군을 일거에 밀어넣으면 스페인 정도야 순식간에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지요.  영국군이 소수로도 내노라하는 나폴레옹의 부하들을 차례로 꺾고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것은 바로 그 문제를 잘 해결했기 때문이었고, 그 핵심에는 영국의 병참부가 있었습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https://en.wikipedia.org/wiki/Havilland_Le_Mesurier



이번 포스팅은 J. Kincaid 라는 이름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젊은 장교가 쓴 "Adventures in the Rifle Brigade, in the Peninsula, France, and the Netherlands from 1809 to 1815" 라는 책의 일부 중 인상 깊은 장면 몇가지를 발췌해서 적은 것입니다.   5년 전에 적었던 포스팅인데, 목요일이라 재탕으로 올립니다.  이제 다음주에 마무리할 '나폴레옹 시대의 병참부'와도 연계되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이 킨케이드 대위가 복무한 부대인 제95 라이플 연대는 Bernard Cornwell의 소설 속에서 리처드 샤프가 소위로 부임한 그 라이플 연대가 맞습니다.)



Episode 1.   영국 장교들의 야전 살림살이


이런 경우 우리 수송대는 언제나 아직 후방에 있었으므로, 각 중대의 장교들은 포르투갈 사내아이 하나를 고용하여 당나귀 한마리를 끌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중대를 따라오도록 했다.   이 당나귀에는 장교들의 야전 생활에 필요한 보잘 것 없는 사치품들이 실려 있었다.  그 짐꾸러미에는 큰 보트용 망토와 담요, 돼지가죽으로 만든 작은 포도주 부대 하나, 럼이나 브랜디 같은 증류주를 담은 수통 하나, 찻잎과 설탕 조금이 실려 있었고, 거기에 당나귀에 묶여 있는 염소 한마리가 있었다.  (염소는 아마 젖을 짜기 위함인듯 ?)  그리고 포르투갈 사내아이의 주머니에는 2~3 달러가 들어있었는데, 이는 그 날 행군을 하다가 운이 좋으면 생기는 기회에 따라 빵이나 버터 같은 사치품을 사라고 넣어준 것이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구해오는 그런 보급품의 출처를 캐묻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깐깐하게 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는 빈손으로 나타나지만 않으면 우리들의 역정에 시달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아이들은 무척이나 신의가 있고 똑똑하여, 무척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매일 저녁 어떻게든 우리 중대의 위치를 찾아 오곤 했다.  딱 한번, 마세나(Massena) 원수가 후퇴할 때 우리 중대의 아이가 우리를 찾아오지 못한 밤이 딱 한번 있었다.  이 아이는 그날 밤 내내 영국군의 넓은 야영 캠프 내에 복잡하게 산재된 모닥불들의 미로 속을 헤매고 다니다 결국 포기하고 용기병 부대 옆에서 당나귀와 함께 잠을 잤는데, 일어나보니 우리 중대는 그 용기병 부대에서 20야드 (약 18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Episode 2.   빵이 없어서 고기를 먹다 


5월 20일, 빵 또는 그 비슷한 아무 것도 없이 지낸지 3일 째다.  빵 없이 고기만 며칠 먹다보면 고기가 정말 구역질 날 정도가 된다.  


오늘 새벽에는 평소처럼 매우 이른 새벽에 행군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해가 뜨기 전에 시에라 데스트렐라(Sierra D'Estrella) 앞에 있는 약 2마일 (약 3.2km) 떨어진 한 마을로 출발했다.  그 마을은 프랑스군의 동선 바깥 쪽에 있었으므로, 뭔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도착해보니, 인근 수녀원에서 도망쳐 나온 수녀들이 마을 공동 화덕 건물 바깥 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옥수수 가루(Indian cornmeal)로 만든 빵 반죽을 들고 와 여기서 굽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 빵을 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자, 그들 중 두명이 친절하게도 자신들의 몫을 내게 내주었다.  


난 그녀들에게 키스와 함께 1달러(dollar는 당시 스페인 화폐 단위입니다 미국 달러도 원래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를 보답으로 주었다.  그녀들은 나의 키스를 '무척 특별한 호의'로 받아들였고, 내가 내민 1달러 은화에 대해서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런 말을 하면서 받아 들었다.


"우리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가난이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네요."


난 이 설구워진 빵덩어리를 들고 이제 막 무장을 하고 있던 동료 장교들에게 달려갔다.




Episode 3.   묘한 분위기의 비공식 휴전선


(포르투갈에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던 영국군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군과 대치하다가, 겨울이 되자 비공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묘한 휴전에 들어갑니다.)


협곡에 걸린 다리에서, 우리 부대의 보초 자리는 겨울 동안 매우 다양한 사람들에게 정식 응접실 역할을 했다.  


나는 우리 영국 해군 장교들이 마치 6파운드 포처럼 커다란 망원경을 안장 뒤에 매단 노새를 타고 리스본에서 가끔씩 오는 것을 무척 즐겁게 보곤 했다.  이들은 매번 올 때마다 어김없이 처음으로 묻는 것이 바로 코 앞에 있는 프랑스군 보초병을 가리키며 "저기 있는 저 친구는 누구요?" 하고 묻고는, 우리가 프랑스군이라고 대답하면 항상 화들짝 놀라서 "그럼 대체 왜 저 친구를 안 쏩니까 ?"라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이 비공식적인 적대 행위 중단 기간 동안 프랑스군과 우리 사이에는 예의와 호의가 넘치는 행동들이 여러번 반복되었다.  한번은 우리측 어느 장교의 그레이하운드 사냥개들이 토끼를 쫓다가 프랑스군 진영으로 넘어갔는데, 프랑스군은 깍듯한 예의를 갖추어 그들을 돌려 보내기도 했다.


어느날 밤, 다리 끝에 있는 보초 초소 현장에 내가 있을 때였는데, 프랑스군 보초 쪽에서 머스켓 총탄 하나가 날아와 우리 보초들과 내가 둘러싸고 앉아있던 모닥불의 불붙은 장작에 박히는 사건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에서는 백기를 든 사절을 보내어 간밤의 사고에 대해 '멍청이 같은 보초가 영국군이 자기 쪽으로 몰려 오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총질을 했다' 라며 사과를 해왔다.  우리는 그 총격이 멍청함보다는 악의 때문에 저질러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한번은 쥐노(Junot, 폭풍우라고 불렸던 아브란테스 공작 본인 맞습니다) 장군이 정찰을 하다 우리 보초가 쏜 총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때 프랑스군이 보급 물자 측면에서 무척 곤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웰링턴 경은 쥐노 장군에게 사절을 보내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리스본에서라도 구해드리겠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쥐노 장군은 너무 정치적인 인물이라, '사실 보급품이 부족한 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양했다.




(역주 : 실제로 쥐노 장군은 1811년 1월 코에 총탄을 맞고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어지간한 역사 자료에는 어떤 전투에서 그렇게 최고 사령관이 총을 맞을 정도로 악전고투를 벌였는지 나와 있지 않아서 의아해했는데, 그 사정이 이런 것이었군요 !)




Episode  4.  피폐한 포르투갈 상황


이 인근은 하도 오랜 기간 전쟁에 시달렸고, 또 영국군과 프랑스군 양쪽에게 번갈아가며 강제로 보급품을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자신들이 굶어죽게 될까 염려하여 결국 남아 있는 식량을 모두 감추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군이 프랑스군과 싸워주는 것에 대해서 입으로는 칭송과 감사를 늘어놓았지만, 식량은 빵 한덩어리도 내놓지를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인근 수 마일에 걸쳐, 대로변은 물론 골목길이며 숲길이며 요소요소마다 정찰병들을 매복시켰다가 이웃 마을로 가는 농민들을 잡아세워 놓고 검문검색을 해야 했다.  이렇게 찾은 식량은 병참부 명령서 한장을 주고는 빼앗았는데, 우리는 당시 할머니가 들고 가는 바구니에 든 감자 몇 알조차 빼앗을 정도로 궁한 상황이었다. 




Episode  5.  민간인에 대한 잔악 행위


우리는 피르네스(Pyrnes) 인근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이 작은 마을과, 프랑스 장군들의 믿지 못할 약속에 속아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그 몇 안되는 주민들의 비참함은 이 야만적이고 자비심 없는 적군이 최근에 다녀간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여자들은 집 안에서 잔혹하게 성폭행을 당한 채 누워 있었고, 거리에는 부서진 가구들 사이사이에는 살해된 농민들과 노새, 나귀들의 썩어가는 시체가, 역겨운 악취를 풍기는 온갖 종류의 오물과 함께 거리에 널려 있었다.  살아남은 몇 안되는 남자 주민들은 그들의 친지 및 재산의 잔해 속을 멍하니 돌아다녔는데, 마치 복수를 하기 위해 무덤 밖으로 걸어나온 시체들처럼 보였다.  간혹 낙오된 불행한, 혹은 부주의한 프랑스군의 시신도 발견되었는데, 그들의 시신은 하나같이 잔혹하게 난자되어 있어, 그 복수가 얼마나 정성껏 실행되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흔히 단순한 축성 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분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17세기부터 2백년간 요새와 포병, 병참, 병력 운영 등 모든 전쟁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 보방(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백작입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의 군사 요충지에 일찌기 보지 못했던 묘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당대 유럽의 군사 작전 행태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보방(Vauban)식 요새의 등장이었습니다.  대포의 발명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었던 중세식의 높고 웅장한 성벽과는 달리, 보방식 요새는 낮고 두꺼운 벽으로 된 보루(redoubt)와 쐐기 모양의 옹벽(ravelin), 그리고 대포알을 튕겨내기 위한 경사방벽(glacis) 등을 갖춘, 한마디로 방탄벽을 갖춘 요새였습니다.  이런 별모양의 보방식 요새는 17세기 프랑스의 공병 전문가 보방(Sebastien Le Prestre de Vauban, Seigneur de Vauban)에 의해 획기적으로 개선된 뒤 17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군사 작전의 형태가 군사작전의 형태가 대규모 회전보다는 요새를 둘러싼 포위전으로 변질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경사방벽이란 요새방벽을 둘러싼 해자 바로 바깥쪽에 흙으로 두툼하게 쌓아놓은 방벽이었습니다.  포위군이 요새방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쏘아대는 포탄 상당수가 이 경사방벽에 튕겨져 나갔습니다.)


(경사방벽이 포위군의 포병들에게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방어수단인지 보여주는 구조도입니다.  포위군은 요새방벽을 대포알로 때려 무너뜨리길 원하겠지만, 요새방벽은 깊은 해자와 경사방벽으로 인해 공성포에게는 지극히 작은 표적이 되었고, 맞추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방벽 위의 수비군은 적군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고요.)



(레만 Lehman 호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제네바 Geneva를 둘러싼 보방식 방벽의 모습입니다.  이 지도는 1841년의 모습인데, 지금 저 방벽은 헐리고 없습니다.)




전쟁의 형태가 장기간의 포위전이 되어버리자,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이 군대의 식량 조달이었습니다.  아무리 종군상인들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고 해도, 종군 상인 몇몇에게 전부대가 먹을 밀가루와 빵을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너무 비쌌습니다.  결국 군량 중 상당부분은 주변 농가들로부터 징발을 하거나 약탈을 통해 구해야 했는데, 수만 명의 포위군이 적 요새를 둘러싸고 근처에 몇 달 버티면 그 주변 일대의 식량은 씨가 말라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식량을 더 구할 수 없으면 포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는 곧 포위전의 패배를 뜻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를 개편한 나라는 역시 유럽의 육군 강국이자 가장 많은 침공 전쟁을 치른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보방식 요새를 구축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적 요새를 가장 많이 공격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삼총사에 나오는 유명한 추기경이자 정치인인 마자랭(Jules Mazarin)의 부하인 국방장관 르 틀리에(Michel Le Tellier)는 근대 유럽 세계 거의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병참 업무 개혁을 손보기 시작했니다.  기존에는 각 연대장들의 재량에 따라 그때그때 제멋대로 맺어졌던 종군상인들과의 계약을 표준화하여 좀더 체계적이고 원활하게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여태까지 하찮고 천하게 여기던 수송 업무에도 신경을 써서 짐수레 부대도 상설화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 지역 인근에 보급창을 세워 군량을 미리 축적하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 르 틀리에입니다.  이 분은 리셜리외의 뒤를 이은 추기경+재상인 마자랭에게 평생 충성했고, 또 루이 14세를 꼬드겨 프랑스 내의 신교도인 위그노들을 탄압하는데도 앞장섰습니다.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르 틀리에 본인은 끝까지 잘 살았고, 아들인 루부아 Louvois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방장관직에 올랐습니다.)



(르 틀리에의 병참 개혁이 큰 도움이 되었던 1658년 덩케르크 Dinkirk 포위 작전도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스페인 및 영국 왕당파 연합군이 점거한 덩케르크를 포위 공격한 전투입니다.  결국 영불 연합군이 덩케르크를 함락시켰습니다.)




물론 이런 개선은 여전히 미흡했고, 전선의 많은 부대들은 계속 약탈과 현지 징발에 의존했으며, 덕분에 프랑스군은 여전히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프랑스군의 병참 능력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우수해졌고, 이는 결국 나폴레옹의 기동전과 맞물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는데 큰 힘이 됩니다.  나폴레옹 기동전의 근원은 식량의 현지 조달이었는데, 이는 유능한 병참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 때는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의 흉내를 내어 식량의 현지 조달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병참부의 역량이 프랑스군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것이지요.  '현지 조달'이라는 것이 꼭 약탈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자비한 약탈로 당장 먹을 것을 손에 쥔 굶주린 병사들이 자기들 몇몇끼리만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수집한 식량을 재빠르게 계량하고 보관하고 수송하여 넓은 곳에 분산된 아군 병력에게 효율적이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질구레한 실무 능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나폴레옹이 말단 병참부 서기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밀가루와 와인 항아리를 다루는 법을 일일이 가르쳤겠습니까 ?  프랑스군 병참부는 르 틀리에 시절부터 근 100년 넘게 다른 나라 군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실무 능력을 쌓아왔었고, 나폴레옹이 그 혜택을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 영국은 나폴레옹 시대 100년 전부터 유럽 대륙은 물론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미와 카리브해 등 전세계를 지역구로 활발한 침략 전쟁과 식민지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거리에 걸친 병력과 장비, 식량과 탄약의 수송에 있어 굉장히 전문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해군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육군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그런 병참 업무의 체계화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1808년 포르투갈에 상륙한 웰링턴이 상륙 1주일 후 국방부 장관인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불평한 것이 병참 업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진격시 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바로 병참부(Commissariat)의 체계화입니다.  이 부서는 장관님의 심각한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 병참부는 웰링턴의 사령부에 있던 다른 지원 부서들, 즉 의무부(Medical Department), 조달부(Purveyor's Department, 이름과는 달리 병원기자재와 사망자 처리를 담당), 경리부(Paymaster-General), 자재부(Storekeeper-General, 역시 이름과는 달리 주로 장비와 텐트 등의 수송을 담당) 등과 함께 민간인으로 구성된 부서였습니다.  다만, 병참부는 다른 지원 부서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이들 부서 중에서 유일하게 그 부서장이 런던의 재무부(His Majesty’s Treasury)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웰링턴이 보낸 편지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모든 지원 부서 중에서 병참부의 업무가 군사 작전의 성패에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스본으로 선적된 건빵 한 개가 최전선의 병사의 입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전체 과정을 상세히 보살피고 추적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는 군사 작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이 둘의 군사적 역량 차이는 누가 봐도 나폴레옹이 두 단계는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웰링턴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웰링턴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실속있는' 스타일의 지휘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웰링턴이 이렇게 병참부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원래 웰링턴이 병참 업무가 주특기였기 떄문에 그랬을까요 ?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기 전에는 인도와 덴마크에서 활약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도 이렇게 병참부를 중시했을까요 ?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웰링턴이 뜬금없이 병참부의 열성팬이 된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그 특수성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번에는 좀 너무 짧군요.  분량 조절 실패로 병참부 이야기는 3부에 걸쳐 늘어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T T)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우습게 여기는 세계 유일의 민족이기도 하지만, 미국 문화에 대해서도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무척 낮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문화라는 것이 꼭 턱시도 입고 교향악 연주회에 가거나 찬란한 샹들리에 밑에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회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와인을 마시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입는 평상복, 평소에 먹는 음식, 평소에 흥얼거리는 노래 자체가 가장 중요한 문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현재 지구 최고의 문화 대국은 바로 미국이라고 봐요.  햄버거와 팝송, 영화,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 형성되는 전반적인 사회 가치관에 있어서 미국만큼 전세계에 강렬한 영향을 끼치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너무 그렇게 미국 문화의 파급력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보니 역으로 좀 더 흔하지 않은 문화를 접하는 것이 더 고급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장 쳐주는 것이 바로 프랑스일 것입니다.  저도 그래서 고딩 때 배운 것이 전부인, 사실상 전혀 못하는 프랑스어를 어떻게든 원문 그대로 인용하려고 (구글 번역기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노력하는 편입니다.  전에 와이프가 회사에서 어떤 젊은 컨설턴트와 일을 할 때, 그 컨설턴트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다르게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이 모든 것이 싸구려 문화 사대주의에 빠진 저희 부부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긴 합니다.  


프랑스 문화가 마이너러티 문화라고 하면 말도 안된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분명히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문화는 마이너리티입니다.  가령 영미의 유명 팝송은 가사까지 완벽하게 외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샹송 아니 그냥 프랑스 유행가는 가사는 커녕 요즘 누가 인기인지 99%의 분들은 알지도 못하시고 관심도 없으시지요.  그러면 마이너러티 문화 맞습니다.


그런 마이너러티 유행가 중에서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잘 아는 샹송도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긴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영화 중 2010년 디카프리오 주연의 '인셉션'에 주요 삽입곡으로 나와서 유명해진 곡이지요.  바로 에디뜨 삐아프(Édith Piaf)의 "농, 즈 느 르그레뜨 리앙(Non, je ne regrette rien  아니, 난 전혀 후회하지 않아)" 입니다.





저도 이 노래는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노래는 아니었어요.  너무 흘러간 노래이기도 하지만, 가사를 모르니 그 노래가 어떤 것에 대한 것인지 전혀 몰랐거든요.  제목으로 보아 대충 '어떤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버림을 받았지만 그걸 후회하진 않아'라는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가사를 (물론 또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읽어보니, 정말 너무 훌륭한 곡이더라고요.  이 노래는 흘러간 옛사랑을 후회하지 않고 소중히 여긴다는 신파극스러운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이 노래는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계속 '후회하지 않는다, 다 잊었고, 치워버렸고, 과거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지난 추억 따위는 다 불태워버렸다' 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클라이맥스는 맨마지막 소절인데, 사랑에 대한 노래치고는 다소 파격적인 힘찬 트럼펫(?) 연주와 함께 힘차게 외치는 것으로 절정과 함께 끝납니다.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나의 인생이 오늘 너와 함께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과거의 사랑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새로운 사랑에 대한 찬가인 것입니다.  저는 그런 미래에 대한 희망의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여러분도 가사와 함께 이 노래를 들어보시면 저와 똑같이, 정말 마음에 드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 유튜브를 틀어놓고 가사를 한번 따라 읽어보세요.


https://youtu.be/t6wjCcWC2aE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Ni le bien qu'on m'a fait, ni le mal 

tout ça m'est bien égal !


아니, 전혀 아니야

아니, 난 전혀 후회안해

남들이 내게 잘 해준 것도 필요없고, 못되게 군 것도 상관없어

모두 내겐 다 똑같을 뿐이야 !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C'est payé, balayé, oublié

Je me fous du passé !


아니, 전혀 아니야

아니, 난 전혀 후회안해

그거 다 대가를 치뤘고, 쓸어버렸고, 잊어버렸어

과거 따위 알게 뭐야 !

 

Avec mes souvenirs

J'ai allumé le feu

Mes chagrins, mes plaisirs

Je n'ai plus besoin d'eux !


내 추억은

불살라 버렸어

내 괴로움과 즐거움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아

 

Balayées les amours

Et tous leurs trémolos

Balayés pour toujours

Je repars à zéro


그 사랑들은 다 지웠어

그 모든 격정은

영원히 치워버렸어

난 제로에서 새로 시작해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Ni le bien qu'on m'a fait, ni le mal 

tout ça m'est bien égal !


아니, 전혀 아니야

아니, 난 전혀 후회안해

남들이 내게 잘 해준 것도 필요없고, 못되게 군 것도 상관없어

모두 내겐 다 똑같을 뿐이야 !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Car ma vie, car mes joies

Aujourd'hui, ça commence avec toi !


아니, 전혀 아니야

아니, 난 전혀 후회안해

왜냐하면 내 인생과 내 즐거움은

오늘, 너와 함께 시작되니까 !





PS.  프랑스어 능통자분들께 질문)  Je repars à zéro 부분에서 저는 연음법칙에 의해 '즈 르빠 사 제로'라고 발음이 날 것 같은데, 정작 이 노래를 들어보면 제 귀에는 '즈 르빠 라 제로'라고 들립니다.  이게 왜 이런 것일까요 ?  동사변형에 의한 s는 연음법칙에서 제외되는 것인가요 ?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분이 쓴 회고록이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영국군 작전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곧잘 인용됩니다.  이 샤우만이라는 분은 1778년 독일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난 순수 독일인으로서, 귀족 가문 출신의 신사였습니다.  영국 왕의 개인 영지이자 독립국이었던 하노버 공국의 군대에서 16세부터 21세까지 장교로 근무했던 샤우만은 원래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모르티에(Adolphe Edouard Casimir Joseph Mortier)의 1803년 하노버 점령을 계기로, 영국군 산하 왕립 독일군(The King's German Legion, KGL)에 가담하여 프랑스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1816년 나폴레옹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 고향 하노버로 금의환향하는 KGL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회고록을 보면 묘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는 원래 KGL 제7 대대 소속의 장교였다가 병참부(commissariat)으로 일했습니다.  제7 대대에는 개인 사정으로 일종의 휴가를 낸 상태로요.  병참부에서는 그의 일처리 솜씨가 마음에 들었던지 병참감 대리(Acting Commisary-General)로의 승진을 제시했는데, 샤우만은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정식으로 병참부 소속으로 이직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고민합니다.  샤우만의 고민은 일종의 외인부대인 KGL 부대 소속의 장교직은 영국군 입장에서는 정규 장교직이 아닌지라, 제대 후에도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half-pay)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업 군인의 최대 장점은 연금이었던 모양입니다.  친구들도 그렇게 권유했기 때문에, 결국 샤우만은 KGL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영국군 병참부에 정식으로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운칠기삼이라고, 샤우만의 이 결정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정식으로 취업을 하고나자, 병참부에서는 말을 바꾸어 전에 제시했던 승진을 걷어들이고 샤우만이 병참감 보조 대리(Deputy-Assistant Commisary-General)라는 말단직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결정 사항을 통보했습니다.  게다가 더 나중의 일이긴 했지만 영국 의회에서는 KGL의 모든 장교들에게 영국 정규 장교들과 동일한 연금을 지급하기로 의결하여, 샤우만으로 하여금 자신의 결정에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습니다.  병참부도 군대 아니던가요 ?  왜 KGL이라는 전투부대에서 병참부라는 수송부대로 자리를 옮기는데 사직서를 제출하고 계급이 바뀌는 등의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대적인 군대와는 달리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만 해도 병참 장교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군의 보급은 군이 직접 수행하지 않았거든요.  정규군 장교가 병참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의 일입니다.  


원래 무기가 없는 군대는 존재해도 군량이 없는 군대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3일 이상 굶으면 모두 탈영해버리거나 죽어버릴테니까요.  이처럼 군대의 식량 보급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병참은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업무로 취급되어 등한시되었고 상당히 원시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모두들 번쩍이는 갑옷과 날카로운 칼을 들고 깃발을 펄럭이는 일을 하고 싶어했으며, 냄새나는 농부들로부터 밀과 보리를 사들이거나 빼앗고 소와 돼지를 몰고 다니는 것은 창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업무는 고귀한 귀족 출신 군인들이 하지 않고 천한 장사치들, 즉 민간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시적인 화승총(matchlock musket)을 들고 16세기 유럽 전장을 누비던 병사들의 식사 시간은 요즘 군대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군함에서나 육상 부대에서나, 병사들이 조를 짜서 스스로 취사를 했다는 것은 이미 다들 아실 겁니다.  문제는 그 취사 재료로 쓰일 밀가루와 콩, 고기 등을 누구에서 받느냐 하는 것인데, 이걸 민간인 군납업자에게서 샀습니다.  군에서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뿐, 식량은 그 돈으로 알아서 사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대포알이 날아다니고 기병대가 칼을 꼬나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전장에 민간인 장사꾼이 따라다녔다고요 ?  예, 돈이 된다면 그 정도의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할 장사꾼들이 많았습니다.  




(종군상인 하면 아마 만화영화 '에어리어 88'의 무기상인 맥코이 영감님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에도 맥코이 영감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군상인의 취급 품목은 빵과 술, 군화와 의류, 종이, 잉크 등의 잡다한 생필품류가 대부분이었고, 정작 탄약과 포탄 등 무기류의 보급은 당시에도 민간 병참부가 아니라 정부 기관인 군수위원회(Board of Ordnance)에서 담당했습니다.  빵과 럼주는 그렇다쳐도 대포와 탄약류를 민간인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 민간인이 식량을 잔뜩 실은 마차를 끌고 전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사자떼 옆에서 돼지가 어슬렁거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난폭하고 배고픈데다 약탈과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병사들이 그 마차 주인에게 공손하게 가격을 흥정한 뒤 돈을 지불하고 먹을 것을 받아갈 확률보다는, 주인을 흠씬 두들겨패고 마차 통째로 빼앗아갈 확률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러나 군대에게 식량과 기타 생활용품을 팔고 싶어하는 민간업자들을 그렇게 험하게 다룬다면 그 부대는 머지 않아 굶어죽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어떤 장사꾼도 그 부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런 일은 실제로 종종 발생했습니다.  가령 제7차 십자군을 이끌고 1249년 이집트에 상륙하여 다이에타(Damietta)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프랑스왕 루이 9세(Louis IX)도 이탈리아나 레반트 등지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가며 원정의 보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미에타 점령 이후 불시에 일어난 (사실 예정되어 있었으나 십자군 지휘부의 무지함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나일강의 범람으로 몇 개월간 진격로가 막히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술과 연회를 벌이며 지루함을 달래던 기사들이 원정 초기의 긴장감이 풀리자 상인들을 함부로 학대하고 물건을 갈취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자 하나둘씩 종군 상인들이 십자군 캠프 주변을 빠져나가버렸고, 결국 십자군은 보급에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결국 다음 해에 루이 9세가 이슬람의 포로가 되는 참패로 이어집니다.  




(이집트에서 투르크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모습입니다.  자고로 상인 세력을 함부로 건드리고 무사한 군주가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종군 상인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는 (비록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고골리(Nikolai Vasilievich Gogol)의 명작 소설 대장 불리바(Taras Bulba) 속에 나옵니다.  다른 지역의 카자흐 부족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터의 카자흐들이 분노하여 소란을 일으키는데, 가장 만만한 것이 장터에서 장사를 하던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카자흐들은 저주받은 족속이지만 가진 것이 많은 유태인 장사꾼들을 두들겨패고 물건과 돈을 빼앗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는데, 이때 자신의 형과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얀켈(Yankel)이라는 이름의 유태인 장사꾼이 불리바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고, 불리바는 일단 그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아래 장면은 그 소란이 가라앉은 뒤, 그 자리에서 즉각 보복 원정을 결의한 카자흐 부대들이 열을 지어 출정하는 부분입니다.




(대장 불리바는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 '너무 우크라이나적인 이야기 아니냐'라며 러시아 당국의 거센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고골리는 1835년의 초판이 나온지 7년 뒤에 러시아 국민주의를 잔뜩 버무려넣은 개정판을 새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저도 제가 읽은 소설이 1835년판인지 1842년판인지 모르겠네요.)




대장 불리바 by 고골리 (배경 :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


불리바가 외곽 지역을 통과할 때, 아까 그가 살려준 얀켈이라는 유태인이 이미 차양까지 갖춘 가판대를 차려놓고 카자흐 기병들에게 부싯돌과 나사 드라이버, 화약 등의 온갖 군용품은 물론 빵까지 팔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정말 유태인들은 지독하구나 !" 불리바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에게 말을 몰아 다가갔다.  "이 바보, 자네 여기 앉아서 뭘 하는 건가 ?  까마귀처럼 총에 맞아 죽고 싶은 건가 ?"


얀켈은 대답 대신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두 손으로 뭔가 손짓을 하며 가까이 왔다.  "고귀하신 나으리, 부디 조용히 해주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요.  저기 카자흐 마차들 중 한대는 사실 제 것입니다요.  저는 카자흐분들께서 필요하신 온갖 물건을 가져가고 있읍지요.  어떤 유태인도 제시한 바 없는 낮은 가격으로, 카자흐분들의 원정길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제공해드릴 예정입니다요.  정말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진짜에요 !"


타라스 불리바는 유태인들의 장삿속에 질려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캠프를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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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도 전쟁터를 누비며 적이든 아군이든 군대에게 물건을 팔려고 위험을 무릅쓰는 유태인 장사꾼들의 이야기는 꽤 나옵니다.  나폴레옹이 무척 고전했던 1807년 2월 아일라우(Eylau) 전투 직후,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비참한 상태였던 프랑스군을 구원한 것은 놀랍게도 바르샤바 출신의 어떤 유태인 장사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태인답게, 돈을 벌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해야 하며, 또 프랑스군처럼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군대를 상대로 돈을 벌려면 빵이 아니라 술을 팔아야 한다고 판단을 했나 봅니다.  전투 바로 다음날인 2월 9일 정오 즈음,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장군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를 때, 기적처럼 이 유태인 상인이 4통(tun)의 브랜디를 실은 마차들을 몰고 아일라우에 나타났습니다.  Tun이라는 큰 발효통은 대략 252 갤론을 담는다고 하니까, 리터로 환산하면 이날 아일라우에 배달된 브랜디는 무려 3800 리터가 넘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약 5만5천명이라고 하면 일인당 70ml씩 돌아갈 정도로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이때 이 브랜디가 없었다면 엄동설한에 수천 명의 부상병들이 그대로 얼어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나폴레옹의 패전이나 다름없었던 아일라우 전투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다섯번째 남자는 뭔가 짐승 가죽을 안장 밑에 깔고 등을 보인 채 기병도를 뽑아들고 있습니다.  이 쾌남아가 누구이겠습니까 ?  예, 물론 당대 유럽 제1의 기병 뮈라입니다.  당시엔 베르크-클레브스(Berg-Cleves) 대공이었다가 다음 해에 나폴리 국왕에 등극하지요.  이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하드캐리로 구해낸 장본인이라고 하면 약간 과장된 말이긴 합니다만 뮈라가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민간 종군 상인들의 존재는 부대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부대 지휘관은 종군 상인들이 안심하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뭔가 유인 장치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독점 면허제였습니다.  부대 지휘관은 몇몇 상인들과 독점 계약을 맺고 안전통행증(safe conduct, passport)을 발부했습니다.  그래야 부대 병사들이 으슥한 숲길에서 그런 종군 상인의 짐마차를 만나더라도 그 상인 얼굴 또는 그 상인이 제시하는 안전통행증을 보고 보호해주거나, 최소한 약탈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는 반대로 다른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사방 10리 이내에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황량한 전장에서 병사들이 먹을 것을 구할 유일한 구매처가 이 독점권을 가진 종군 상인의 수송마차인데, 정상적인 상인이라면 그런 절대적인 이점을 120% 활용하려고 들 것이고, 그런 경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뻔했거든요.  한여름 설악산 꼭대기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1개에 5천원이 비싼 가격이 아닌 것과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어떤 선에서 적정 가격이 형성되었을 것 같긴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전쟁터는 큰 마을이나 도시 근처였으니 먹을 것을 구할 곳이 상인의 수송마차 뿐인 경우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아무리 면허장이 있는 종군 상인이라고 해도 당장 3일을 굶어 살기가 등등한 중무장 병사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 같거든요. 




(함락된 마을에서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14세기의 그림입니다.  당시 전쟁은 영주들과 용병들의 사업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와중에 불쌍한 농노들과 시민들만 죽어났습니다.)




이런 주먹구구식의 병참이 다소나마 체계화된 형태로 발전한 것은 17세기 들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참의 발전 원인은 역시 이 시기에 나온 중대한 기술 혁신에 있었습니다.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원래 한편으로 끝내려던 포스팅이었는데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