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입사원 기본 교육을 싱가폴에서 싱가폴 강사에게서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협상에 대한 내용도 있었는데, 거기서 당시로서는 굉장히 인상적인 강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 강사분이 가르치려던 것은 협상을 위해서는 상대방이 진짜 원하는 것이 뭔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스토리 라인을 아래와 전개하더라고요.


"내가 학생 시절에 내 여동생과 냉장고에 하나 밖에 안 남아 있던 오렌지를 두고 서로 다툰 적이 있었다.  한참을 싸우고 난 뒤에야 알았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오렌지로 쥬스를 만들어 마시려는 것이었는데 동생은 오렌지 껍질로 마멀레이드를 만드려는 것이었다.  알고 보면 서로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제 기억으로는 저는 그때 이미 마멀레이드가 뭔지는 대충 알고 있었고 (그것도 카투사 복무 중에였던가...?) 먹어본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때 그 강사의 말이 실제로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감탄했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강사의 스토리 라인은 엉터리였습니다.  저 이야기는 물론 강사의 실제 경험담이 아니라 흔히 써먹는 그런 협상 교육의 픽션일 뿐인데다, 마멀레이드에 분명히 오렌지 껍질이 조금 들어가긴 합니다만 주재료는 바로 오렌지 쥬스거든요.  그러니까 언니와 동생은 죽어라고 서로 싸울 운명이었던 것이지요.  





(사실 이 글은 전에 이케아에서 사온 스웨덴제 마멀레이드 병을 새로 오픈한 기념으로 쓰는 것입니다.  주성분은 보시다시피 오렌지 주스입니다.) 




미국에서는 과육을 통째로 갈아서 만든 것을 잼(jam)이라고 부르고 과즙, 그러니까 쥬스만을 이용해 만든 것을 젤리(jelly)라고 구분해서 부릅니다.  미국 애들이 간단한 점심 식사로 애용하는 PBJ라는 것도 땅콩버터와 젤리(peanut butter & jelly sandwich) 샌드위치이지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는 아닌거지요.  그러나 그렇게 깐깐하게 구분하는 경우는 미국 내에서도 그다지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국 등 미국 외 지역에서는 그냥 다 잼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영국에서도 젤리는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뜻인 물컹물컹한 디저트용 과일 젤(gel) 가공식품을 말한다고 합니다.




(PBJ sandwich라는 단어로 이미지 검색을 하다 찾은 사진인데, 이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로 점심 때우는 것이 사실 건강에도 그렇게 해롭지는 않고 돈 절약에 매우 좋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반대로, 잼 바른 빵이야말로 건강에 매우 나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우습게도, 이 젤리(jelly)라는 말 자체는 다른 모든 좋은 것들처럼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프랑스어로 과즙이나 육수 등이 굳은 것을 젤레(gelée, 거의 쥴레 정도로 발음이 됩니다)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거든요.  반면에 잼(jam)이라는 것은 교통 체증이라는 뜻의 traffic jam 처럼 '막힌다'라는 뜻이 원래 뜻이었는데, 나중에 진득진득하게 굳힌 과일 잼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답니다.  잼은 병을 거꾸로 들어도 잘 흘러나오지 않아서 그런 단어로 쓰이게 되었나 봐요.  정작 영국에 과일 잼이라는 신상품을 전달해준 프랑스에서는 젤리든 잼이든 꽁피튀르(confiture)라고 부릅니다.  심지어는 오늘의 주제인 마멀레이드도 프랑스에서는 그냥 꽁피튀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고, 굳이 구별하여 la marmelade d'oranges (마르멀라드 도랑쥐)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는 정도랍니다.


마멀레이드는 과일로 만든 잼 중에서도 다소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잼입니다.  싱가폴 강사가 오해할 정도로 (또는 어리숙하게도 제가 속을 정도로) 다른 잼과는 달리 과일 껍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과나 복숭아 등은 껍질째 먹기도 하지만 오렌지는 껍질이 두꺼운데다 쓰고 텁텁한 맛이 나기 때문에 껍질을 절대 먹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런 몹쓸 껍질을 잼 속에 넣었을까요 ?  




(수동 마멀레이드 기계입니다.  정확하게는 오렌지 껍질을 잘게 써는 도구이지요.) 




이유는 펙틴(pectin) 때문에 그렇답니다.  위에서 잼과 젤리를 구분해서 말씀드렸는데, 잼은 그냥 과일을 통째로 으깨서 설탕을 넣고 끓이면 대충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사과 주스에 설탕을 넣고 끓이면 사과 젤리가 만들어질까요 ?  저는 직접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안 만들어진답니다 !  그냥 엄청나게 진하고 단 가당 사과 주스가 되어버린다네요.  잼처럼 젤라틴 형태로 만들어지려면 펙틴(pectin)이라는 성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주로 과일 껍질 속에 많은 물질입니다.  그러니 우아하고 깔끔하게 과육 찌꺼기는 다 걸러내고 주스만 뽑아서 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공으로 만든 펙틴을 따로 집어넣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렌지 마멀레이드는 인공 펙틴 따위가 없던 17세기 후반에 이미 존재했던 물건입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  바로 오렌지 껍질 덕분입니다.  누가 맨처음에 오렌지 껍질을 잘게 썰어 넣으면 마멀레이드가 젤라틴처럼 응고된다는 것을 발견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아무튼 그 이름 모를 천재 덕분에 오늘날의 마멀레이드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마멀레이드에는 다른 잼과는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그것도 바로 그 껍질 때문이기는 한데, 바로 약간 쓴 맛이 난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TV에서 외화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 드라마에서 봤던 내용 중에 마멀레이드가 연관된 독살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떤 가정집에서 독극물에 의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사용된 독극물은 원래 약간 쓴 맛이 나는 물질이라서, 피살자가 의심하지 않고 먹게 하기 위해 독극물을 아침식사에 나오는 커피나 홍차, 마멀레이드 등과 같이 약간 쓴 맛이 나는 식품 속에 넣었을 것이라고 추리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그 독극물은 마멀레이드에 들어있었고요.  




(찾아보니 그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물 원작은 A Pocket Full of Rye 라는 작품이었네요.)




마멀레이드가 나오는 그 추리 소설 장면에서 드는 생각 중 첫번째 것은 의외로 많은 기호식품에서 쓴 맛이 난다는 점입니다.  위에서 언급된 커피, 차, 마멀레이드는 물론 초콜렛에서도 약간 씁쓸한 맛이 나지요.  보통 사람들이 쓴 맛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의외로 쓴 맛이 우아한 맛을 내는데 꼭 필요한 모양입니다.  물론 그 쓴 맛을 그대로 즐기는 사람보다는 그 쓴 맛을 엄청난 설탕과 우유 등으로 중화시켜서 즐기는 분들이 훨씬 많지요.  


두번째 생각할 부분은 왜 마멀레이드를 비롯한 과일 잼은 꼭 아침식사에만 나오느냐 하는 점입니다.  전에 (그때는 국내의 어떤 고급 콘도에서 진행된 교육이었는데) 회사 교육 때 강사를 하시던 어떤 노년의 컨설턴트분과 점심 식사 테이블에 같이 앉은 적이 있었습니다.  양식으로 제공된 그 점심에서 롤빵과 함께 1회용으로 포장된 딸기잼도 함께 나왔었습니다.  그걸 보고 그 강사분이 '원래 과일 잼은 아침에만 나오는 것이며 점심이나 저녁에는 잼 대신 버터가 나와야 하는데 이 식당 매니저는 양식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혀를 차시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실제로 저도 해외 호텔에서 식사를 할 때 점심이나 저녁 식사에 과일 잼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 긴 카투사 생활 중에도 없었고요.  점심이나 저녁에 유일하게 나오는 잼은 디저트로 나오는 패스트리에 이미 잔뜩 채워진 잼 정도였지요.  




(전에 파리에 가족 여행 갔을 때 먹었던 호텔 조식... 호텔 부페 식당에서 저렇게 작은 잼 병이 제공되는 것은 조식 뿐이더라고요.)




저는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딱히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제 짐작에는 서양인들이 과일을 의외로 많이 먹지 않으며 과일을 먹더라도 주로 아침식사에만 먹더라는 것과 상관있는 것 같습니다.  제 카투사 복무 중에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과일은 아침식사 때만 나왔고 점심 저녁에는 따로 과일이 나오지는 않았거든요.  잼이든 젤리든 원래 시작은 빵에 발라먹기 위한 버터 대용이라기보다는 과일을 오래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과일 대신 또는 과일과 함께 아침 식사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마멀레이드 등 과일 잼을 아침에만 먹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루이 14세 같은 경우 정찬을 들 때 마지막 디저트로 마멀레이드를 먹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요즘처럼 빵에 발라 먹는 것이 아니라 은접시에 담아온 것을 푸딩처럼 은스푼으로 떠먹는 형태였지요.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먹던 마멀레이드를 아침식사에 먹기 시작한 것은 스코틀랜드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습관은 곧 영국으로 전파되어, 19세기에는 영국인들도 아침에 마멀레이드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여류 작가인 루이자 알콧(Louisa May Alcott)이 1800년대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기록한 글에서, 마멀레이드와 차가운 햄 한 조각이 영국식 아침식사의 필수품이라고 적었을 정도니까요.


마멀레이드 이야기를 하는데 난데없이 스코틀랜드가 주요 역할을 하는 나라로 나오니까 약간 의아하실 것입니다.  따뜻한 지방에서 열리는 오렌지로 만드는 마멀레이드는 춥고 척박한 스코틀랜드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마멀레이드의 역사에서 실제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원래 마멀레이드는 좀더 뻑뻑하고 시커먼 색깔을 띤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스코틀랜드에 가면서 만들 때 좀 더 물 함량을 늘려 오늘날처럼 빵에 쉽게 발라먹을 수 있는 밝은 오렌지색의 스프레드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에 마멀레이드를 전파한 사람은 16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1세(Mary Stuart, Mary I of Scotland)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메리는 귀국할 때 마멀레이드를 들고 왔다고 전해지는데, 일부 사람들은 마멀레이드라는 이름 자체가 메리 1세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메리는 머리가 아플 때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마멀레이드를 먹었는데, '메리가 아프다'라는 "Mary is sick"이라는 영어 문장이 프랑스어로는 "Marie est malade"라고 되거든요.   그래서 프랑스어를 쓰는 시녀가 뭔가 우아하게 "Marie est malade" (마리 에 말라드)라고 혼잣말을 하며 신기한 과일 잼 단지를 들고가는 것을 본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그 과일 잼을 '마멀레이드'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지요.




(미모로 유명했다는 메리 1세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여왕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암살 모의 혐의로 목이 잘렸습니다.)




무척 재미있고 그럴싸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마멀레이드라는 이름은 메리 여왕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포르투갈어 marmelada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서양모과(영어로는 quince)를 포르투갈어로는 marmelo(마르멜루)라고 하는데, 이걸 꿀에 절여서 잼으로 만든 서양모과 잼을 marmelada라고 합니다.  원래 마멀레이드는 꼭 오렌지로 만든 잼만을 뜻하지는 않고 모든 과일 잼을 부르는 이름이었는데, 저로서는 이해가 안 가지만 서양모과 잼은 가장 오래된 잼으로서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거든요.  그리스어로는 서양모과를 melímēlon(꿀 + 사과)으로 불렀는데, 원래 서양모과는 과육이 너무 단단하고 떫은 맛이 나서 그대로는 못 먹고 꿀에 절여서 부드럽게 해서 먹었다고 합니다.  







Source : https://life.spectator.co.uk/2016/10/jam-beautifully-preserved-history/

https://en.wikipedia.org/wiki/Fruit_preserves

https://en.wikipedia.org/wiki/Marmalade

https://www.dailymail.co.uk/femail/food/article-3746934/The-foods-NEVER-eat-breakfast.html

https://en.wikipedia.org/wiki/Orange_(fruit)

http://www.nyu.edu/classes/bkg/forklore/archives/2005/03/marmalade_redux.html

https://www.quora.com/Why-does-all-marmalade-have-orange-peel-in-it-Where-can-I-find-a-marmalade-without-orange-peel

https://en.wikipedia.org/wiki/A_Pocket_Full_of_Rye

https://moneysavingmom.com/2012/04/if-you-want-something-badly-enough-you-can-usually-find-a-way.html

제가 좋아하는 3대 나폴레옹 전쟁 소설 시리즈인 혼블로워, 샤프, 잭 오브리 시리즈들 중에서 아침식사 장면만 몇몇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보세요.  다만, 출출한 야밤에 읽으시면 좀 곤란하겠네요.  





Mr. Midshipman Hornblower by C.S.Forester (배경 : 1795년 프랑스) ---------------------

(프랑스 망명귀족들이 영국 해군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퀴베롱 지역에 상륙합니다.  사관후보생 혼블로워는 통역으로 이들과 동행합니다.)

그들은 번쩍이는 구리 냄비가 벽에 걸린 커다란 주방으로 들어갔고, 말이 없는 여자가 커피와 빵을 내왔다.  그녀는 애국자로서 열정적인 반혁명주의자일 수도 있었겠지만, 최소한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녀의 감정은 이 귀족 패거리들이 자신의 집을 멋대로 점거하고는 자신의 음식을 돈도 내지 않고 마음대로 먹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쉽게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망명 귀족들의 군대가 징발한 마차나 말들 중에는 그녀 소유의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제밤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주민들 중 몇몇이 그녀의 친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커피를 내왔고, 참모진들은 박차를 단 장화를 신은 채 커다란 주방 여기저기에 서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혼블로워는 그의 컵과 빵 한조각을 손에 들었다.  이 순간 이전에는 4달 동안이나 건빵 외에는 빵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맛이 좋은지 나쁜지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전에 커피를 겨우 3~4번 정도 밖에 마셔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컵을 두번째 들어올렸을 때, 그는 마시지 않았다.  마시기 직전에 저 멀리 어디선가 대포 소리가 울렸기 때문에, 그는 컵을 내려 놓고 얼어붙은 듯 굳어 버렸던 것이었다.  대포 소리는 두번, 세번 반복되었고, 그에 이어 더 가까이서 더 날카로운 포성이 울렸다.  둑방길에 설치되었던 사관후보생 브레이스거들의 6파운드 포의 포성이었다.

주방에서는 즉각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컵을 엎질러 검은 액체의 시냇물이 테이블을 가로질러 흘렀다.  다른 누군가는 서둘러 나가다 박차가 서로 엉켜 다른 사람의 품 안에 쓰러졌다.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혼블로워도 다른 사람들처럼 몹시 흥분되었다.  그도 당장 뛰어나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려 했지만, 그 순간 자신이 소속된 HMS 인디퍼티거블 호가 전투 직전에 보여주었던 군기잡힌 차분함을 생각해냈다.  그는 이런 부류의 프랑스 사람이 아니었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컵을 들어올려 차분히 마셨다.  이미 대부분의 참모진들은 말을 대령하라고 외치면서 밖으로 뛰어나간 상태였다.  안장을 채우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는 주방을 서성이는 푸조쥬와 눈길이 마주쳤는데도, 차분히 커피를 주욱 다 마셨다.  비록 좀 뜨겁긴 했지만 뭔가 폼나는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빵도 있었기 때문에, 식욕이 전혀 없었지만 억지로 씹어삼켰다.  이제 야전에 하루 종일 있을 거라면, 다음번 식사가 언제일지 전혀 알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먹다남은 반덩어리의 빵은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Master and Commander by Patrick O'Brian (배경: 1800년, 스페인 부근 마요르카 섬)------------------

사실 목공장의 때이른 열성은 바로 이 때문이었고, 또 장교 식당의 급사가 전임 함장인 앨런 함장의 변함없는 아침식사 메뉴였던 스몰 비어(옥수수 죽(hominy grits), 그리고 차가운 쇠고기를 들고 서성거렸던 이유이기도 했다. 





Lieutenant Hornblower by C.S.Forester (배경 : 1801년 대서양 HMS Renown 선상) ---------------------

장교실에 아침식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평상시보다는 더 조용하고 활기가 없는 아침식사였다.  항법장, 사무장, 해병 대위가 평소와 같은 '굿 모닝' 인사를 하고는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앉아 먹기 시작했다.  그들도 전함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함장의 의식이 깨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배 현창으로 두 줄기의 긴 햇살이 들어와 그 비좁고 사람이 빽빽히 앉은 선실을 비추면서, 배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따라 장교실 바닥을 앞뒤로 흔들거렸다.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무역풍의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가 열린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커피는 뜨거웠고, 배에 실린지 3주 밖에 안된 건빵은 바구미가 전혀 없는 것이, 배에 실리기 전에도 창고에 보관된 것이 겨우 1~2달 밖에 안되었던 모양이었다.  장교실 요리사는 눈치좋게 좋은 날씨의 기분을 내려고 지난 밤의 염장 돼지고기와 배에서 점점 줄어가는 저장 양파를 볶아 내놓았다.  채를 썰어 양파와 함께 볶은 염장 돼지고기에, 뜨거운 커피와 오래 되지 않은 건빵에, 신선한 공기와 햇살에 좋은 날씨라면, 장교실은 아주 활기찬 장소여야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근심과 걱정,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Lieutenant Hornblower by C.S.Forester (배경 : 1802년 런던 혼블로워의 하숙집) ---------------------

(방세를 못내 구박받던 혼블로워가 지난 밤 도박장에서 큰 돈을 따서 밀린 방세를 내고 그 동안 당했던 설움에 방을 옮기겠다고 하자, 하숙집 주인인 메이슨 부인이 서둘러 근사한 아침식사를 올려보내줍니다.)

어린 수지가 케이블이 올려질 때 절단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소년들처럼 두 테이블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식탁을 차렸다.  커피 포트와 토스트, 버터와 잼, 설탕과 밀크, 양념병과 뜨거운 접시, 그리고 넓은 접시가 혼블로워 앞에 놓여졌다.  그녀가 뚜껑을 들어올리자 접시에 놓인 멋진 챱스 요리에서 맛있는 냄새가 피어올라 방안을 채웠다.

"아!" 혼블로워가 스푼과 포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너 아침은 먹었니, 수지 ?"
"저요, 중위님?  아니오, 아직이요."
혼블로워는 손에 스푼과 포크를 든 채 멈춰 챱스와 수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스푼을 내려놓고는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이런 챱스 요리를 니가 먹을 방법이 전혀 없겠지 ?"  그가 말했다.
"저요, 중위님 ?  물론 안되요."
"이제 여기 반 크라운(half-crown. 2.5 실링짜리 은화. 현재 가치로 약 3만2천원 : 역주)이 있단다."
"반 크라운이라고요 !"
그건 노동자 하루 일당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었다.
"너에게서 약속을 받아야겠다, 수지."
"중위님 - 중위님 - !"
수지의 손은 등 뒤로 사라졌다.
"이걸 받고, 시간이 나는 대로, 메이슨 부인이 너를 나가도 좋다고 하자마자, 당장 나가서 뭔가 먹을 걸 사거라.  너의 그 불쌍하고 조그마한 배를 채우라고.  패것(faggot.  잘게 썬 고기를 빵과 섞어 구운 것: 역주)이나 완두 푸딩, 돼지 족발 (pig's trotters), 니가 먹고 싶은 건 모조리.  약속해."
"하지만 중위님 -"
반 크라운, 거의 무제한의 음식, 이런 것은 사실이기엔 너무나 환상적인 것들이었다.
"아, 받으라고." 혼블로워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 중위님."
수지는 그녀의 바짝 마른 손에 은화를 꽉 움켜쥐었다.
"약속했다는 거 잊지 말라고."
"예, 중위님, 정말, 고맙습니다, 중위님."






Sharpe's Fortress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3년 인도) -----------------------------

(샤프는 영국군 기병대의 아는 친구를 찾아 갑니다.)

록하트 중사는 연기 자욱한 아침부터 찾아온 불청객 이야기에 궁시렁거렸으나, 그 방문자가 샤프인 것을 알아보고는 씨익 웃었다.
"아마 싸움거리가 생긴 모양이다, 얘들아."  그는 소리쳤다. "망할 보병이 왔네 그려.  좋은 아침입니다, 소위님.  저희 도움이 또 필요하신가요 ?"
"아침 좀 먹었으면 하는데."  샤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홍차부터 시작하시지요.  스미더스 ! 포크 챱스를 가져와 !  데이비스 ! 니가 나 몰래 숨겨 놓은 빵 좀 가져와 !  당장 움직여 !"  록하트는 다시 샤프를 돌아보았다.
"포크 챱스가 어디서 생긴 건지는 묻지 마세요.  물으시면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는 양철 머그잔에 침을 뱉고는 담요 끝으로 그 내부를 닦아내고, 거기에 차를 따랐다.
(...중략...)
포크 챱스와 빵을 먹고나자, 중사는 샤프를 인도인 기병대 진지를 가로질러 제7 인도 기병대의 지휘관의 텐트로 데려갔다.  그 지휘관이 전체 원정군의 기병대를 책임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분 이름은 허들스톤이고요,"  록하트가 말했다. "그리고 괜찮은 양반이에요.  아마 우리에게 두번째 아침식사를 권할 겁니다."
허들스톤 대령은 정말 록하트와 샤프에게 쌀과 달걀로 된 아침식사를 권했다.






Sharpe's Trafalgar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5년 인도양 무역선 상) -----------------------------

아침식사는 매일 오전 8시였다.  3등실의 승객들은 종종 그룹으로 나뉘어, 각 그룹 내에서 당번을 정해 앞갑판(forecastle) 쪽에 있는 주방으로부터 버구(burgoo) 한단지를 가져왔다.  버구라는 것은 오트밀 죽에 밤새 주방 난로에서 고기를 삶을 때 나온 쇠고기 기름 조각을 섞은 것이었다.  점심은 정오에 있었는데, 이 때의 메뉴도 역시 버구였다.  다만 점심 때의 버구에는 좀더 큰 고기 조각 또는 질긴 말린 생선 조각이 좀 탄데다 덩어리진 오트밀에 섞여 나왔다.  일요일에는 소금에 절인 생선과 돌처럼 딱딱한 건빵이 나왔는데, 건빵은 바구미 투성이어서 탁탁 두들겨 벌레를 빼내야 했다. 
비스킷은 끊임없이 씹어야 했는데, 마치 벽돌을 으깨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건빵을 두들길 때 빠져나오지 못한 벌레가 이따금씩 씹혀서 색다른 맛을 내기도 했다.  차는 오후 4시에 제공되었으나, 이는 배 고물 쪽의 1등실 승객들에게만 제공되었고, 3등실 승객들은 저녁 때가 되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 메뉴도 그저 말린 생선에 비스킷, 그리고 벌레 구멍이 숭숭 뚫린 딱딱한 치즈였다.

(...중략...)

1등실의 승객들에게는 아침식사로 3등실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사치품인 달걀과 커피가 제공되었는데, 샤프는 이 VIP 승객들과의 아침식사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중략...  샤프는 무역선에서 영국 군함 HMS Pucelle로 옮겨 탑니다.)

체이스 함장은 샤프를 반겼다.  체이스의 함장모는 그의 턱에서 매듭을 진 캔버스 천으로 묶여 있었다.  "아침은 들었나 ?"

"예, 함장님."  푸셀 호에는 보급품이 떨어져가고 있었으므로 아침식사는 변변치 못한 편이었다.  장교들도 수병들처럼 부실한 배급량의 쇠고기와 건빵, 그리고 스캇치 (Scotch) 커피로 때우고 있었는데, 스캇치 커피란 태운 빵부스러기를 뜨거운 물에 풀고 설탕으로 단 맛을 낸 꺼림직한 액체였다.





Sharpe's Prey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7년 덴마크) -----------------------------

(덴마크군의) 장군은 차가운 청어, 치즈와 빵으로 된 아침식사를 새벽이 되기 훨씬 전에 이미 먹었다.  이제 부대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행군 준비를 시작했다.  민병대 대령 한명이 목사의 집에 와서 자기 부대원들이 맞지 않는 구경의 탄약을 공급받았다는 우울한 보고를 했다.  "구경은 맞을 겁니다." 대령은 보고했다.  "하지만 총강 내에서 총알이 튀어다닙니다.  이런 걸 두고 유극(windage, 총강과 탄환 사이의 간격: 역주)이 너무 크다고 하더군요."  민병대 대령은 보르딩보르그 출신의 치즈 제조업자였는데, 사실 목제 나막신을 신은 그의 병사들을 영국군 정규병들 앞에 내모는 것이 영 탐탁치 않았다.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9년 포르투갈) -----------------------------

새벽녁에 그들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에 다다랐다.  그들은 시냇물가에 멈춰서 오래된 빵과 너무 딱딱해서 구두 밑창으로 써야겠다고 농담들을 해댄 훈제 고기로 아침을 먹었다.  병사들은 샤프가 불을 피워 홍차를 끓이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궁시렁거렸다.

(...중략...)

궁전 복도의 시계가 11시를 알릴 때, 술트 원수가 중앙의 대형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바지와 셔츠 위에 비단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아침식사는 준비되었나 ?"  그가 물었다.
"청색 리셉션 룸에 준비되었습니다, 장군님."  부관이 대답했다.  "손님들께서도 오셨고요."
"좋아, 좋아 !"  그는 시종들이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자들을 활짝 웃으며 반겼다.  "앉으시지요, 앉으세요. 아, 우리가 공식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군요."  이 마지막 말은 아침 식사가 긴 옆 테이블에 풍로가 달린 은제 식탁 냄비(chafing dishes 역주: 부페에 가면 볼 수 있는 그릇)에 차려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술트 원수는 그 뚜껑을 열어보며 긴 식탁을 따라 걸었다.  "햄 ! 멋지군. 삶은 콩팥, 굉장해 !  쇠고기 ! 혀 요리, 좋군, 좋아, 그리고 간 요리.  아주 맛있어 보이는군.  좋은 아침이요, 대령 !"  이 인사는 크리스토퍼에게 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숙임으로써 답했다.






Sharpe's Rifles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9년 스페인) -----------------------------

새로 부임한 중위는 지금 시간이 정오 2시간 전 쯤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전투 후퇴는 오후 일찍 끝날 것이고, 그러고나면 그는 서둘러 하들이 밤을 보낼 만한 외양간이나 교회 같은 곳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는 병참 장교가 밀가루 한포대를 들고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그걸 물로 반죽해서 쇠똥으로 피운 불 위에 구우면 저녁거리와 그 다음날 아침거리로는 충분했다.  재수가 좋으면 죽은 말에서 고기를 좀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Sharpe's Sword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2년 스페인) -----------------------------

"아, 좋아 !  공작님께 알려드려야지.  자네 아침 먹었나 ?"
"예, 소령님."
"그럼 한번 더 들게 !  내가 하인을 시켜서 자네 말을 마굿간에 넣도록 하지."  그는 가다 멈춰서 샤프를 돌아다 보았다.  "힘들었나 ?"
"예."
호간 소령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유감이군.  하지만 자네 일이 제대로 되었다면 말일세, 리처드..."
"압니다."
그의 일이 제대로 되었다면 전투가 있을 것이었다.  마을 남쪽 언덕 둘레의 드넓고 건조한 평원은, 벼락이 치던 날 밤의 배신과 사랑에서 싹이 튼 살륙의 현장이 될 것이었다.  샤프는 두번째 아침 식사를 하러 갔다.




Sharpe's Enemy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2년, 포르투갈)----------------------------------------

웰링턴이 외지로 떠나고 난 뒤라서, 장교들은 아침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든가, 아니면 바로 옆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이 포르투갈 여관 주인은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만드는 법을 배운 모양이었다. 포크 찹스, 계란 프라이, 튀긴 콩팥, 베이컨, 토스트, 클라레 포도주, 더 많은 토스트, 버터, 그리고 화약찌꺼기가 늘러붙은 곡사포의 포구를 씻어내릴 정도로 강하게 끓인 티가 준비되어 있었다.







Clarissa Oakes by Patrick O'Brian (배경: 1813년, 남태평양 영국 군함 선상)------------------

"그럼 가서 첫번째 아침식사를 나와 함께 들겠는지 머투어린 박사께 여쭙게."
잭 오브리는 우람한 체구를 유지하기 위해, 아침을 두번 먹었다.  아침 해가 뜰 무렵 토스트 약간과 커피를 들었고, 8번 타종 (역주: 오전 8시) 직후에 훨씬 더 든든한 식사, 즉 어쩌다 잡힌 신선한 생선, 달걀, 베이컨, 가끔씩은 양고기 챱스(chops)를 아침에 당직을 섰던 장교 및 사관후보생(midshipman)과 종종 함께 들곤 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3년 스페인 내 프랑스 요새) -----------------------------

(샤프는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 매우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문이 열렸고, 그가 그냥 누워있는 동안 프랑스 당번병이 베리뉴이 장군이 보내준 아침식사를 테이블에 차려졌다.  메뉴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뜨거운 코코아, 빵, 버터, 치즈였다.  "메르시(고맙네)."  최소한 프랑스어를 좀 배우고는 있구만 하고 그는 생각했다.





Sharpe's Revenge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4년 프랑스 내 영국군 점령지) -----------------------------

(샤프는 이른 아침에 들판에서 결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프레데릭슨은 다시 회중 시계를 꺼내 들었다.  "6시 반."
"춥구만."  샤프는 처음으로 온도를 느끼는 것 같았다.
프레데릭슨이 말했다.  "한 시간 후면 우리는 포크 챱스와 완두콩 푸딩으로 아침을 먹고 있을 거에요."
"자네는 그렇겠지."
"우리 둘다 그럴 겁니다."  프레데릭슨은 참을성있게 주장했다.

(...중략...)

그 후에, 기름걸레로 검을 닦아 칼집에 넣은 뒤, 그는 네언 장군의 텐트로 갔다. 그 텐트 밖에서 그 스코틀랜드 출신의 노인(네언 장군)이 빵과 차가운 염장 쇠고기, 그리고 강하게 끓인 홍차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중략...)  샤프는 웃었다.  그는 네언 맞은 편에 앉았고, 두번 구운 빵을 한조각 집으려 손을 뻗으면서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는지 스스로 궁금했다.  버터는 약간 상한 맛이 났지만 염장 쇠고기의 짠 맛이 그 신 맛을 없애 주었다.





Sharpe's Revenge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4년 프랑스) ---------------------------------------

네언 장군은 토스트용 포크를 샤프에게 건네주고, 검게 그을린 빵에 버터를 듬뿍 바르기 시작했다. "차 들겠나 ?"
"죄송합니다, 장군님." 샤프가 미리 차를 따라놓아야 했었다. 그는 네언이 토스트에 겨자를 듬뿍 바른 엄청난 크기의 햄을 얹는 동안 차 두잔을 따랐다. 네언 장군은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챗츠워드는 천국에서나 맛볼만한 차를 끓일 줄 안단말이야. 결혼하면 여자를 아주 훌륭한 아내로 만들거야." 그는 샤프가 빵조각을 토스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거보다 더 검게 태우는게 낫지 않나 ?"
"아닙니다, 장군님." 샤프는 약하게 익힌 토스트를 더 좋아했다. 그는 빵을 뒤집었다.






Hornblower and the Hotspur by C.S.Forester (배경 : 1802년 런던 혼블로워의 하숙집) ---------------------

(혼블로워는 촌스럽지만 착한 하숙집 딸 마리아와 결혼합니다.  이제 결혼 후 첫 출항을 앞둔 아침입니다.)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요리 냄새가 흘러들어왔고, 뭔가 팬에서 지글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마리아와 나이든 아주머니와의 대화가 터져나오더니, 마리아가 들어왔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몹시 빠른 것으로 보아, 손에 든 접시가 꽤 뜨거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접시를 혼블로워 앞에 내려 놓았는데, 그 위에는 아직도 지글거리는 거대한 스테이크 덩어리가 놓여있었다.

"여기 있어요, 여보." 그녀는 말하면서 식사의 나머지 부분들을 그의 손이 닿는 곳에 차려 놓았다.  그 동안 혼블로워는 낙담하여 스테이크를 내려다 보았다. 
"제가 어제 특별히 당신을 위해 고른 거에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배에 가 있는 동안 푸줏간에 걸어갔었어요."
혼블로워는 해군 장교의 부인이 '배에 가 있는' 것에 관해 말하는 것에 대해 움찔거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또 그는 스테이크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침식사에 스테이크를 먹게 된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그는 오늘처럼 흥분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그는 미래를 엿볼 수가 있었다.  그가 만약 무사히 이번 임무에서 돌아온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가정 생활에 정착한다면, 무슨 특별한 순간마다 스테이크가 식탁에 올라올 것 같았다.  그 생각에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입도 먹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마리아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없었다.

"당신 것은 어디있지 ?" 그는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오, 저는 스테이크를 먹으면 안돼요." 마리아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어떻게 아내가 감히 남편과 똑같이 잘 먹을 수가 있겠느냐는 투였다.  혼블로워는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거기 !" 그는 소리쳤다.  "거기 주방 ! 접시 하나 더 가져 오시오.  뜨거운 걸로."
"오, 안돼요, 여보."  마리아가 부산 떨며 말했지만, 혼블로워는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그녀 자리에 앉혔다.
"자, 거기 앉아."  혼블로워가 말했다. "말은 더 필요없어. 우리 가족 내에 반란자는 있을 수 없으니까.  아 !"
접시가 하나 더 왔다. 혼블로워는 스테이크를 반으로 잘라 더 큰 덩어리를 마리아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하지만 여보-"
"내가 우리 팀에 반란자는 필요없다고 했지." 그는 자신이 군함에서 으르렁거리던 것을 스스로 흉내냈다.
"오, 호리 (혼블로워의 이름이 호레이쇼입니다. :역주), 여보, 당신은 정말 제게 잘 해주시네요, 너무 잘 해주세요." 순간적으로 마리아는 손과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쌌다.  혼블로워는 이 여자가 우는 거 아닌가 하고 두려웠지만 다행히 손을 무릎에 내려놓고 등을 곧게 편 다음, 정말 영웅적으로 감정을 추스렸다.  혼블로워는 그러는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가 내미는 손을 꽉 쥐었다.

"이제 든든한 아침을 먹는 걸 보여줘."  그가 말했다.  그는 아직도 수병들을 다루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그가 느꼈던 부드러움은 아직도 분명했다.  마리아는 나이프와 포크를 잡았고 그도 그렇게 했다.  그는 몇 입 먹고는, 나머지 스테이크에 난도질을 가해 너무 많이 남기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해놓았다.  그는 그의 맥주잔을 들이켰다.  아침에 맥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이렇게 도수가 낮은 스몰 비어(small beer, 알코올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저렴한 보리차 수준의 맥주)조차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나 있는 저 나이든 하숙집 하녀는 홍차 상자를 넣어둔 찬장의 열쇠가 없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글을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성경 이야기입니다.  저는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기는 커녕 성경을 완독해본 적도 없는 동네 아저씨에 불과하니 진지한 신학 강론을 쓸 수는 없고, 그냥 가볍게 읽고 웃을 만한 이야기로 쓴 것입니다.  '잘 모르는 평신도들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구나'라고 그냥 가볍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개신교 신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런 나일론 신자입니다.  제 와이프는 이대로 회개하지 않고 죽을 경우 제 가련한 영혼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무척 염려할 정도지요.  제가 제대로 된 신자로 인정을 못 받는 이유는 성서나 교회에 대해 자꾸 이런저런 의심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12사도 중 절대 베드로 같은 사람은 아니고 의심많은 도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저 같은 사이비가 자신을 도마에 비유한다는 것을 안다면 도마가 펄쩍 뛸 것 같기는 합니다.




(그 유명한 카라바죠의 명화 '성 도마의 의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이후 처음 나타나셨을 때 현장에 없었던 도마가 그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 옆구리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정말 손가락을 넣어보게 하신 이야기가 요한복음 20장 24절에 나오지요.  저말고도 기독교에 사이비/나일론 신자들이 많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예수님께 부활의 능력은 있지만 상처 치유 능력은 없다, 예수님은 힐러가 아니라 네크로멘서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좀비 창시자' 등등 온갖 우스개 소리를 늘어놓곤 합니다.)





(주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그냥 한번 웃자고 한 짓입니다.)





(의심많은 도마의 이야기는 중세 유럽에서 또다른 전설을 낳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 때 선교 때문에 인도에 있었던 도마는 그 승천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도마가 의심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성모 마리아께서 도마에게 증거물로 자신의 허리띠를 떨어뜨려 주었다는 것이지요.  이 베키오의 명화 '성모 승천'에서 도마는 파란 옷 입은 사도의 머리 위쪽 언덕에서 달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영원히 조롱받는 의심많은 도마 T T )




어떤 분들은 성서는 사람이 그냥 쓴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사 한글자 한글자 씌여진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여러가지 번역본에서조차도) 토씨 하나도 실수로 씌여진 것이 없으니 모든 문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점들 때문에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몹시 어려운 방향으로 성서를 받아들이시는 분도 있습니다.  가령 어느 날 제게 문득 엉뚱한 의문이 들더라고요.  


'흔히 성서에서 어린이들은 죽으면 그대로 천국에 간다고 하던데, 몇 살까지를 어린이로 인정해줄까 ?  그게 만약 만 14세라고 하면, 14번째 생일을 하루 남겨두고 죽은 아이는 천국으로, 하루 넘기고 죽은 아이는 지옥으로 가는 것일까 ?'


이 의문을 제 주변의 독실한 신자께 여쭈어봤더니, 천만뜻밖의 대답이 돌아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이라고 무조건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간다는 것이지 어린이라고 무조건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다'라고 하시더군요.


마태복음 18:3 KLB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제가 '아니 그럼 아직 말도 못하는 아기들이 불행히도 병이나 사고로 죽을 경우, 걔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인가요 ?' 라고 여쭈니 침통한 표정으로 답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독교인 부모의 제1 의무는 아이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까지 죽지 않도록 잘 돌보는 것이다"  


저는 아무리 성경이라고 해도 그렇게 글자 하나하나를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신의 뜻은 미물인 인간의 두뇌로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어눌한 인간의 언어로 신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고 보거든요.  성서는 은유와 비유가 가득한 책인지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하는 그 본질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은 종파마다 사람마다 매우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로마 치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써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당시의 관습과 상식, 그리고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성경은 원래 고대 히브리어로 적힌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람어를 쓰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스어(헬라어)로 적었다가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된 후, 다시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을 거쳐서 우리말로 다시 넘어온 것이다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역사학은 물론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까지도 익혀야 하고, 전통적으로 유럽 사회에서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했지요.




(영어-헬라어 대역본인 누가복음 16장입니다.  검색엔진도 구글번역기도 없던 중세 시절에 헬라어 원문으로 성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시던 분들이 중세 유럽 정신 세계를 지배했던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나오는 이 이야기는 여러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한 구절이라고 하더군요.  



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에게 재산 관리인 하나가 있었다. 주인은 그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2  그를 불러 물었다. ‘내가 너에 대해서 들은 소문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더 이상 내가 너에게 재산을 맡길 수 없으니 지금까지 네가 맡아 하던 일을 다 정리하라.’

3  그러자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일자리를 빼앗기게 생겼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고 … … .

4  옳지, 알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쫓겨나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반갑게 맞아 주겠지.’

5  그러고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다 놓고 먼저 온 사람에게 ‘당신은 우리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6  그가 ‘감람기름 100말입니다’ 하자 그 재산 관리인은 그에게 ‘어서 앉아 이 증서에 50이라고 쓰시오’ 하였다.

7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 진 빚은 얼마요?’ 하고 묻자 그는 ‘밀 100섬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재산 관리인은 그에게 ‘당신의 이 증서에다 80이라고 쓰시오’ 하였다.

8  주인은 옳지 못한 이 재산 관리인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것을 보고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자신을 위해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그것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들일 것이다.

10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성실하고 작은 일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큰 일에도 정직하지 못하다.

11  너희가 세상 재물을 취급하는 데 성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하늘의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성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한편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보통 '부정직한 청지기' 또는 shrewd steward 등으로 불리는 이 재산 관리인 이야기는 정말 이해가 잘 안 가는 구절입니다.  분명히 저 재산 관리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문서 위조를 저지른 나쁜 사람이자 파렴치 범죄인입니다.  그런데 왜 피해자인 저 주인은 그 관리인을 칭찬한 것일까요 ?  또 왜 예수님께서는 저 이야기를 본받아야 할 좋은 예로 드신 것일까요 ?  이건 마치... 부자들의 재물은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빨갱이 선동으로도 들릴 수 있는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  



찾아보니 여러 신학자들이 여러 견해를 내놓았고, 아직 (어쩌면 영원히) 명확한 정답은 없는 모양입니다.


1.  가장 전통적인 설 : 결과가 중요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관리인이 결국 주인의 평판과 명예를 드높였으니 그 점을 칭찬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들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요 우리가 우리 재산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저 우리가 잠깐 가지고 있는 것 뿐이다 뭐 그런 설교가 이어집니다.  제일 무난하면서도 제일 지루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2. 금융공학적인 설 : 관리인이 탕감한 것은 자신의 커미션


이 설에 따르면 관리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인의 채권을 부당한 방법으로 탕감해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직업인 당시 로마 제국의 세리(세금 징수원)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이스라엘 같은 속주의 세금 징수를 현지 민간인들에게 위탁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받아내야 할 세금이 10 데나리온이라면, 임명된 현지 민간 세금 징수원에게 (가령) 7데나리온만 가져오라는 식이었지요.  원래 피점령지 농민들에게서 세금을 받아내는 것이 어렵쟎아요.  그러니 3데나리온은 민간 세금 징수원에게 주는 비용으로 처리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민간 세금 징수원이 원래 세금을 다 받아낼 수록 징수원의 이익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징수원들은 대부분 세금을 난폭한 방법을 써서라도 악착같이 받아냈고 그 때문에라도 동족의 고혈을 짜내 로마제국에 바치는 민족 배신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설에 따르면 주인과 관리인도 이와 비슷한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리인이 채무자들에게 탕감해준 빚은 주인의 계좌로 들어가야 할 원금이라기보다는 관리인의 몫으로 가는 커미션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관리인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며 주인의 명예를 높였으니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많은 개신교 목사님들 뿐만 아니라 (영문 위키에 따르면) 카톨릭에서도 이 설을 주로 채택한다고 합니다.


매우 마음에 드는 해석이기는 한데, 그렇다면 관리인이 자신의 커미션을 포기하는데 왜 채무자들에게 찾아가 대출문서를 새로 작성하는지가 설명이 안 됩니다.  게다가 왜 밀 100석을 꾼 사람에게는 80석로 줄여주고, 올리브유 100말을 꾼 사람에게는 50말로 줄여주는지도 의아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논의를 하다가 나름대로의 이론을 제시했었습니다.  곡식은 보관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원래 커미션으로 20%만 주지만, 올리브유는 깨지기 쉬운 토기 항아리에 담아야 하는 등 취급이 어렵기 때문에 커미션으로 50%를 준 것이라고요.  현대에서도 원유 같은 액체 상품은 보관료가 비싸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을 듣던 사람이 이견을 내더라고요.  "하지만 곡식은 쥐가 파먹는데요 !"  제 이론은 회사원들 술자리에서 나온 반론조차도 감당을 못하더군요.


3. 해학 풍자설 : 관리자를 비꼬는 유쾌한 설교


이 설은 예수님께서 꼼수를 써서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부정직한 관리자를 냉소적으로 풍자하는 설교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른 책에서도 읽기에, 예수님의 설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엄숙-근엄-진지하지 않았고 풍자와 해학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은 자주 폭소를 터뜨리며 웃었다고 합니다.  


4. 편집 실수설 : 성서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뭔가 실수가 있었다 ?


이건 진짜 소수설로서, 제대로 된 연구에서는 이런 주장하는 것은 못 봤고 인터넷 홈피 등에서만 봤습니다.  다만 저도 이 설이 완전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배운 것 없는 서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비유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혼동을 일으키는 모호한 설교를 하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쓰인 것이 아니라 해외 교포 유대인들을 위해 헬라어로 쓰인 책입니다.  그나마 원본은 (어쩌면 당연히) 분실되었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누가복음은 복사본의 복사본(third-generation copies)에 근거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복사본들 중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네요.  




(3세기 경에 씌여진 파피루스 종이 위의 누가복음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어느 설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맨 마지막으로 하셨던 말씀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여러분,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삽시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정신입니다.  나중에 선거 때가 되면 당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서민들을 위한 복지 확대를 추구하는 쪽에 표를 던져 주세요.  적은 돈이라도 기부도 하시고요.  저도 천국에 갈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옥에 갈 때의 자기 변호를 위해서 눈곱만큼 정도의 기부는 하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레미제라블 중에서 미리엘 주교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끝냅니다.  저는 저 제보랑씨가 마치 저처럼 느껴져요.  



레미제라블 중에서 -----------


주교의 설교 주제는 자선이었다.  그는 부자들이 지옥을 피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지옥의 끔찍함을 생생하게, 그리고 천국의 아름다움을 달콤하게 묘사했다.  청중 중에는 은퇴한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이름은 제보랑이라고 했고 고리대금업자처럼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나사천과 서지(serge) 천, 모직천 등을 제조하여 50만 프랑(현재 가치로 약 50억원)의 거액을 모았는데, 평생 불쌍한 거지에게 단 한 푼도 동냥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설교 뒤에, 제보랑씨가 일요일마다 성당 입구에서 가난한 여자 거지들에게 1수(sou, 현재 가치로 약 500원)를 나눠주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 1수를 여섯 명의 거지들이 나눠가져야 했다.  하루는 미리엘 주교가 그가 그런 자선을 베푸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여동생에게 말했다. 


"보려무나.  저기 제보랑씨가 천국을 1수 어치 사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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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시는 분은 없겠지만 노파심에서 이야기하자면 미리엘 주교는 분명히 냉소적으로 제보랑씨를 비웃고 있는 겁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the_Apostle

https://en.wikipedia.org/wiki/Girdle_of_Thomas

https://en.wikipedia.org/wiki/Gospel_of_Luke

https://www.bible.com/ko/bible/86/LUK.16.KLB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selectedColls=Expression&category=Report&m201_id=10020367&actionUrl=search/detailView&local_id=10021458&dbGubun=SD&index=&baseUrl=/krmts&reportGubun=RS&metaDataId=&linkingentry=2009-327-A00255&currentGroup=frbr

https://en.wikipedia.org/wiki/Parable_of_the_Unjust_Steward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마리우스는 가난한 청년이지만, 그의 외할아버지는 부자로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외할아버지도 대단한 부자는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Look down - Paris" 부분에서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있을 때 외할아버지가 그 광경을 마차 안에서 지켜보면서 통탄하고 있는 모습이 잠깐 나오지요 ?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이 외할아버지는 마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2인승 작은 마차라도 소유하려면 1달 유지비만도 500프랑 정도로서 엄청나게 비쌌거든요.  이 외할아버지가 마차를 탔다면 현재의 택시 같은 삯마차를 탄 것입니다.  과연 이 외할아버지 질노르망(Gillenormand) 씨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 




(이 분이 마리우스의 외할아버지 질노르망 씨입니다.  그는 결코 귀족이 아니라, 그냥 Grand Bourgeois, 즉 앙시앵 레짐 (구 체제)를 지지하는 부유한 시민입니다.  현대어로 하면 보수우익 노친네정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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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내, 두 번째 아내는 그의 재산을 하도 잘 관리해서, 어느 날 그가 홀아비가 되었을 때, 질노르망 씨에게는 꼭 먹고살 만한 재산이 남아 있었는데, 즉 거의 전부를 종신 연금으로 예금함으로써 연수입이 1만 5천 프랑쯤 되었는데, 그 중 3/4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게 되어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유산을 남기려는 배려는 별로 염두에 없었으니까.  더구나 그는 상속 재산에는 뜻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예컨대 그것이 '국가 재산'이 되는 것을 보았고, 제3 정리 공채의 변화를 목격했으며, 원장은 별로 믿지 않았다.  "캥캉푸아 거리의 은행 밖에 없지 않은가 !" 라고 그는 말했다.  피유 뒤 칼베르 거리의 집은 앞서 말했 듯이 그의 소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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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 민음사 번역의 문제가 나옵니다.  아마 저 번역은 구글이 나오기 전인 수십년 전에 해놓은 번역 같아요.  저 제3 정리 공채 (tiers consolidé) 라는 것은 불어를 직역하면 그런 번역이 나오는데, 다른 영문판을 보면 이를 'consolidated three per cents'로 번역했더군요.  즉 원금 상환없이 영구적으로 3%의 이자를 주는 3% 통합 영구 채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통합 영구채인 'Consol'에 해당하는 채권인데, 아마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지요 ?  또 원장(grand-livre)이라는 것은 Great Book of the Public Debt 로서, 국채 원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캥캉푸아 거리 (Rue Quincampois)라는 것은 은행이 아니라, 나폴레옹 이전 시대에 파리 증권 거래소(Bourse)가 있던 거리 이름입니다.  즉, 국채 원장이라고 해봐야 증권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유가 증권에 불과하다, 즉 못 믿을 물건이다 라고 비꼬는 것입니다.




(현대의 캥캉푸와 거리입니다.  현대의 파리 증권 거래소는 이곳이 아니라  Palais Brongniart에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노르망 씨가 작은 2인승 마차라도 소유했다면, 1년에 6천 프랑을 그 유지비로 써야 했는데 (세금, 말 사료 값, 마차 수리비, 마부 임금 등등) 그건 자신의 1년 연금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니까, 당연히 질노르망 씨는 마차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500프랑이면 어느 정도의 액수이고, 1만 5천 프랑이면 또 어느 정도의 금액이었을까요 ?  현재 우리나라 원화 가치로 따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저는 확실히 속물이겠지요 ?


일단 당시 프랑 화의 가치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구절을 레미제라블 속에서 모아보았습니다.  가령 가정에 숙식하는 요리사의 월급은 50 프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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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지기 족속 같은 키다리로 거만한 요리사 하나가, 요리의 명수가 나타났다.  "월급은 얼마를 받고 싶은고 ?" 하고 질노르망 씨는 물었다.  "30프랑입니다."  "이름은 무엇인고 ?"  "올랭피라고 합니다."  "50프랑 주겠다.  그리고 이름은 니콜레트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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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가 외할아버지 몰래 자기 아버지 퐁메르시 중령의 무덤에 가서 슬퍼하는 장면의 삽화입니다.  마리우스는 결국 생전의 아버지는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죽은 아버지를 도서관에 가서 신문 및 정부 보고서를 통해 찾아보고, 결국 보나파르트주의자가 되어 버리지요.  할아버지는 왕당파, 손자는 보나파르트주의자 내지는 공화주의자라... 요즘 한국 사회와 많이 비슷합니다.)




아버지 퐁메르시 중령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급작스럽게 보나르파트주의자가 된 마리우스는, 보나파르트나 혁명이라면 질색을 하던 보호자이자 외할아버지인 질노르망 씨와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마리우스의 변화에 분노한 외할아버지는 마리우스를 집에서 내쫓는데, 그러면서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외손자에 대한 정이 남아 있어서, 마리우스의 이모이자 자신의 딸인 질노르망 양에게 6개월에 60 피스톨을 보내주라고 하지요.  1 피스톨(pistole)은 10 프랑에 해당하는 옛 스페인 금화입니다.  그러니까 한달에 100 프랑, 1년에 1200 프랑을 보내주는 셈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생활비일까요 ?




(앙졸라도 알고 보면 부르조아 계급 출신입니다.)




마리우스가 집을 나와서 사귀게 되는 ABC의 벗들은 경제적으로 어떤지 살펴보면 그 답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일단 앙졸라(Enjolras)는 그냥 부자집 외아들이라는 것 말고는 자세한 신상에 대해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대충 먹고 살만 한 중산층 집안의 자제인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문제로 궁핍한 흔적이 보이지 않거든요.  그 중 바오렐(Bahorel)의 부모는 농부인데,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자작농인 모양입니다.  그 부모는 '법률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바오렐에게 1년에 3천 프랑의 생활비를 보내주었는데,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이에 대해 '꽤 넉넉한 액수'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마리우스와 앙졸라, 그리고 앙졸라와 마주 보고 있는 그랑테르를 빼면 누가 푀이고 누가 쿠르페이락인지 전혀 못 알아보겠어요.)




다만 ABC의 벗들 중 유일한 노동자 계층인 푀이(Feuilly)가 1프랑의 가치를 말해줍니다.  그는 부채를 만드는 노동자인데, 원래 고아 출신으로서 일을 하면서도 독학을 해서 읽고 쓰는 것 뿐만 아니라 역사를 공부한 지식인입니다.  그는 하루에 간신히 3프랑을 벌었습니다.  노동자라고 해도 일요일은 놀았을테니, 기껏해야 한달에 75프랑을 벌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1년이면 900프랑입니다.  놀고 먹는 바오렐의 3000프랑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액수이지요.


더 자세히 보시지요.  마리우스가 출판사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 때, 그의 가계부를 작성해보았습니다.




(마리우스는 결국 집을 나가서 변호사가 되는데, 정작 변호사로서의 수입은 없고 출판사에 글을 써주면서 돈을 법니다.   애초에 친구인 쿠르페이락이 이 출판사 일을 소개해줄 때 '영어하고 독일어를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인데' 라고 하자, 마리우스는 겁도 없이 '배워서 하지 뭐' 하면서 도전해서, 결국 그 일을 따냅니다.)




대충 이러면 푀이의 생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혼자서는 그럭저럭 먹고 살아도,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이지요.  참고로 마리우스가 저녁 식사를 루이 식당이라는 곳에 가서 매일 외식을 했다고 해서 그가 아직도 부자 시절을 못 잊고 된장남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집은 수도는 커녕 (당시 파리에 그런 거 없었습니다) 난로조차 없는 곳이라서 취사가 아예 불가능했거든요.  마리우스가 그 식당에서 어느 정도의 절약을 했는가 하면 '수프는 먹지 않고, 포도주 대신 항상 물을 마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우스가 원작에서도 미남으로 나오냐고요 ?  예, 앙졸라 만큼은 아니지만 지나가는 여자들이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의 아름다운 흑발 청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는 여자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이유가 자신의 구멍난 셔츠와 팔꿈치가 헤어진 자켓 때문인줄 알고 부끄러워하지요.)




자, 저런 액수가 과연 현재 가치로 어느 정도에 해당할까요 ?  당시 1프랑의 현재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금리며 인플레며 구매력 산업 생산성 등등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냥 금의 가치는 영원하다고 가정하고 계산해보면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옵니다.  당시 루이 금화 (Louis d'Or)는 20프랑 짜리였는데, 당시 원칙은 그 금화를 녹였을 때 나오는 금의 양이 실제 그 금화 액면가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국가에서 주조한 금화는 그 신뢰성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해주었습니다만, 여기서는 계산상의 편의를 위해 그냥 생략하겠습니다.)




(이것이 2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입니다.)




당시 프랑스 화폐 단위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화폐 단위는 크게 리브르 (livre = 20 sous), 수 (sou = 12 derniers), 데르니에 (dernier)로 나뉘었습니다.   프랑스어로 livre라고 하면 책이라는 뜻도 있지만 원래 영어의 pound에 해당하는 무게 단위입니다.  즉 1파운드 무게의 은에 해당하는 가치를 1 리브르로 정했던 것이지요.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 파운드화의 기호가 P가 아니라 L 모양인 것입니다.) 




(설마 이 표시가 영국 파운드 스털링 화의 심볼이라는 거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그러다가 혁명 정부 들어서서 과거의 도량형을 바꾸면서 공식 화폐도 1795년에 프랑(franc = 100 centimes)과 상팀(centime)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라는 것이 정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지라, 여전히 리브르나 수 라는 단위도 여전히 혼용되어 쓰였는데, 특히 리브르는 원래 프랑보다는 약간 더 큰 단위였습니다만, 그에 상관없이 1리브르 = 1프랑이라는 약간 부정확한 개념이 그대로 통용되었던 모양입니다.  원본에서는 어떤 경우에는 리브르, 어떤 경우에는 프랑이라는 단위를 썼는데, 제가 산 민음사 레미제라블에서는 그런 구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원본에서는 리브르라고 쓴 경우에도 그냥 무조건 프랑으로 번역을 해버리는 바람에, 1프랑=20수의 개념이 계속 나옵니다.  실제로도 리브르나 프랑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니까, 여기서도 그냥 그렇게 1리브르=1프랑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흔히 나폴레옹을 군사적 천재로만 받아들입니다만, 사실 나폴레옹은 오늘날 프랑스, 더 나아가 유럽 전체의 기틀을 닦은 사람으로서, 오늘날 위인전에 올라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진짜 위인입니다.  아우스터를리츠나 예나, 마렝고 등의 승전보다도 오히려 더 프랑스를 빛낸 나폴레옹의 업적은 바로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 고등학교인 리세(lycee) 제도의 확립, 그리고 프랑스 중앙은행의 설립입니다.  그 중 프랑스 중앙은행은 영국의 영란은행을 본 뜬 것이라서 비록 창의성 면에서는 떨어지므로, 나폴레옹의 2대 업적에서는 빠집니다만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가가 복위한 이후에도 나폴레옹이 이룩한 이 제도들은 그대로 이어졌던 것을 보더라도, 그의 위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총재 정부 시절 아시냐 지폐의 실패로 인해 하이퍼 인플레를 겪던 프랑스의 재정난은 안정을 되찾았고, 프랑스의 인플레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즉, 1810년 경인 나폴레옹 당시의 물가나 1832년 경인 레미제라블 시대의 물가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위 표가 연도별 금 1 온스의 가격입니다.  금 가격이 이렇게 상상을 초월하게 뛰게 된 것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대공황 때부터 좀 이상하더니 1970년 경에 미국이 금태환 제도를 포기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때 이후 금값은 그야말로 폭등을 거듭했는데, 사실 금값이 올랐다가 보다는 화폐가치가 떨어진 것이지요.)




덕분에 당시 나폴레옹 금화로부터 쉽게 당시 1프랑의 가치를 현재 대한민국 원화로 환산이 가능합니다.  4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 1개 속에 들어있는 금의 양은 11.614g, 2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 1개 속에 들어있는 금의 양은 5.801g 이었습니다.  현재 금 1g의 가치를 원화로 대략 56,000원이라고 보면, 레미제라블 시대의 1프랑은 현재 우리 원화로 약 16,000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ABC의 벗들 중 푀이의 한달 월급은 약 120만원이고, 바오렐이 넉넉하게 써대던 1년 생활비는 약 4,800만원이었던 것이지요.  더불어, 질노르망 씨가 외손자 마리우스에게 '최저 생계비'로 주려고 했던 돈은 대략 연간 1,920만원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졸지에 이름이 니콜레트로 바뀌어야 했던 질노르망 씨 요리사의 월급은 80만원인 것이었지요.  (하긴 니콜레트는 그 외에 숙식 제공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마리우스가 가난하게 살 시절 매일 저녁 루이 식당에서 먹었던 조촐하지만 푸짐했던 저녁 식사의 가격은 1만2천8백원 정도였습니다.  조촐했던 빵과 날계란 점심값은 3200원 꼴이었고요.  그러니까 1년에 식비로 584만원을 쓴 것이고, 그에 비해 1년 피복비는 겉옷 속옷 다 합해서 240만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사정과 비교했을 때 대략 어떤가요 ? 




(이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앙졸라가 부르는 Red - Black의 가사 중에서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부분이 있지요.  - Who cares about your lonely soul ? )




자, 그럼 여기서 좀더 속물스러운 분들께서 솔깃해하실 이야기를 해보지요.  질노르망 씨는 살고 있는 집을 제외한 남은 재산 전부를 종신 연금으로, 그것도 본인 사망시 3/4이 소멸되는 '일부 상속형' 연금 상품으로 다 가입해 놓았고, 그래서 연간 15,000 프랑의 수입이 있다고 했습니다.  원화로 따지면 연간 2억 4천만원입니다 !  충분히 부자집인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풍족한 연금이 나오려면 대체 원금은 얼마였을까요 ?


그에 대한 설명이, 놀랍게도 레미제라블 본문에서 어느 정도 나옵니다 !  바리케이드 사건이 끝나고, 모두가 화해를 한 뒤에, 질노르망 씨에게 코제트가 장발장과 함께 와서 인사를 하지요.  질노르망 씨는 코제트의 아름다움과 천진함에 반해서 참으로 예쁜 아이라고 칭찬을 하다가, 문득 그녀의 손을 잡고 우울해 합니다. 


"참으로 유감이구나 !  내가 그것을 생각하니 !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반 이상은 종신연금이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래도 아직 괜찮겠지만, 내가 죽은 뒤에는, 지금부터 이십 년쯤 후에는, 아 ! 내 가엾은 아이들아, 너희들은 무일푼이 될 것이다 !  당신의 아름다운 흰 손도, 남작 부인, 생활이 궁하여 일을 해야 할 거요."



이때 장발장이 마들렌 시장으로 일하면서 모아두었던 돈 58만4천 프랑을 코제트의 지참금으로 내놓습니다.  현재 가치로 93억4천만원 정도입니다 !!! 




(자기야, 이제 우린 폈어 !  우리 아버지가 나 몰래 감춰두신 재산이 90억이 넘는대 !)




아마도 마리우스는 이 돈으로 자기 외할아버지처럼 종신연금을 넣은 모양이에요.  나중에 장발장이 자신이 사실은 전과자이며, 그래서 떠나겠다고 하자, 마리우스는 못 이기는 척 허락하면서도, 장발장이 준 그 지참금에 대해서도 꺼림직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리우스와 코제트와 한 대화가 코제트의 입을 통해서 나옵니다.  


"코제트, 우리는 3만 리브르의 연금을 가지고 있어.  2만7천은 네가 갖고 있는 것이고, 3천은 할아버지가 주시는 거야.  너는 그 중 3천 리브르만으로 살아갈 용기가 있겠니 ?"


(민음사 레미제라블 제5편 424페이지에는 '너는 이 3만 프랑으로 살아갈 용기가...' 라고 되어 있는데, 이거 오타입니다.  원본을 확인했는데, 3천이 맞습니다.  단위도 리브르이고요.)




(마리우스가 코제트에게 '그 중 3천 리브르만으로 살아갈 용기가 있겠니 ?' 라고 물었을 때 코제트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  "물론.  난 너만 있으면 돼.")




즉 마리우스는 장발장이 준 지참금은 범죄에 연관된 돈이라고 의심하여, 가급적 그 돈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무튼 여기서 실마리가 나옵니다.  즉, 58만4천 프랑으로 연 2만7천 프랑의 연금이 나오는 것이지요.  원금이 워낙 컸으므로, 아마도 원금은 그대로 보존하는 상품에 가입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연 수익률이 4.62%에 해당하는 연금 상품에 가입한 것입니다.  실제로 1830년대의 프랑스 금리는 대략 4% 정도였으니까, 연금 상품에 가입했다면 저 정도의 금액이 나오는 것이 맞습니다.   


저처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40대 가장의 입장에서는 3만 프랑은 고사하고 1년에 3천 프랑, 그러니까 연간 4800만원의 연금만 있다고 해도 목구멍에서 수건 짜는 소리가 들릴 만큼 부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도 항상 어떻게 돈을 모으고 어떻게 돈을 굴려야 제 가족이 생활비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고 고민합니다.  물론 그런 고민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크게 나누면 수익형 부동산에 투자하느냐 연금을 택하느냐 펀드 같은 것에 투자하느냐 그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질노르망 씨나 마리우스 부부는 종신 연금을 택한 것 같아요. 



 

(근데 자기야... 이거 연 4.6%가 과연 최선일까 ?  인플레 헷지는 어떻게 하려고 ?)




그런데 종신 연금이 답일까요 ?  글쎄요,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질노르망 씨가 살던 시대에는 금본위제도 덕분에 장기적인 측면에서의 인플레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즉, 금리보다 물가인상률이 훨씬 낮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10년 20년 후에도 동일한 금액의 연금이 나온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없지요.  그러나, 지금 받는 100만원의 돈 가치가, 10년 20년 후에는 지금 가치의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하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지금 우리나라 금리가 매우 낮은데, 물가는 원유나 곡물 등 원자재 가격 인상으로 인해서 계속 오르고 있지요.  실질적인 마이너스 금리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연금은 아무래도 답이 아닌 것 같아요.  연금이 물가 인상율과 맞물려 계속 증액되는 구조라면 모를까...  그런데 그런 상품은 아직 못 본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욕을 먹는 국민연금 빼고는요.




(물론 단기적인 인플레야 꽤 있었습니다만, 레미제라블 시대인 저 1800 ~ 1840 사이에 실제 인플레는 매우 낮았습니다.  그에 비해 금리는 4~5% 수준이었지요.  저 시대에는 정말 종신 연금이라는 것이 안전한 투자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마들렌 시장, 그러니까 장발장에게로 관심을 되돌려보시지요.  장발장은 코제트와 함께 파리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적선을 하며 '착한 삶'을 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수양 딸인 코제트에게 무려 60만 프랑에 가까운, 즉 90억원이 넘는 거액을 증여해주었네요 !!  이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라는 레미제라블 정신에 좀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  생각해보면 팡틴느의 비참한 최후도 장발장의 탓이 될 수 있습니다.  애초에 팡틴느에게 충분한 급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팡틴느는 직장을 잃으면서 곧장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니까요.  결국 장발장은 우익 보수층이 더 좋아해야 할 인물 아닐까요 ?




(실제로도 팡틴느는 처음에 장발장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때 그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자기가 이 모양이 된 것이 장발장이 자기를 내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장발장이 그녀를 불미스러운 사생활을 이유로 내보내면서 규정에도 없는 퇴직금 조로 50프랑을 준 것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글쎄요.  우익이건 좌익이건 다 집어치우고, 이런 점을 생각해보시지요.  장발장은 그 유리 공장을 운영하면서, 라피트 은행에 자기 명의로 무려 63만 프랑의 금액을 예금했습니다.  이 돈이 결국 나중에 코제트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하지만 장발장은 63만 프랑을 예금하면서 동시에, 지역 사회인 몽트뢰유 시의 빈민들을 위해 무려 100만 프랑 이상을 썼습니다.  일단 빈민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빈민가 소년 소녀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당시 프랑스에는 아예 그 개념 자체가 희미했던 탁아소를 세우고, 무료 약국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난했던 그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바로 잡는 일 중에는 저렇게 정치 운동을 벌이고 바리케이드를 쌓는 것도 있겠지만, 공장을 세우고 사람을 고용하여 사람들이 누군가의 자선에 의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그런 일자리가 새로운 기술 혁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건 정말 인류 전체에 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영화에도 잠깐 나옵니다만, 장발장이 죽기 전에 코제트에게 읽어보라고 주는 편지가 나오지요.  영화 속에서는 그 편지가 '증오심으로 살다가 너를 맡게 되면서부터 사랑으로 살게 된 사람의 이야기'라고 나오지요.  뮤지컬의 대사는 '코제트 너를 항상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실제 원작에서는, 그 편지는 코제트에게 주어진 지참금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해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장발장이 어떤 기술 혁신을 이룩했고, 그로 인한 수익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그러니까 그 돈은 정직한 것이니 부디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그 돈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지요.  알고보면 장발장은 스티브 잡스였던 셈이지요.  이 정도 되는 인물이 자기 수양 딸에게 60만 프랑을 물려준다고 해서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보면 정말 장발장이야 말로 진정한 보수 진영의 영웅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줘야 서민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가짜 보수들 말고) 이런 진짜 보수 인사들로 가득 차있다면 정말 우리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되겠지요.




(장발장은 므슈 포슐르방으로서 코제트에게 베푼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마들렌 시장으로서 몽트뢰유 시의 빈민들을 위해 베풀었습니다.)




팡틴느의 몰락은 장발장이 박봉을 주었기 때문 아니냐고요 ?  애초에 팡틴느가 몰락했던 것은 사실 팡틴느가 고향 마을에 되돌아 왔을때, 시작부터 가구 등을 들이느라 빚을 지고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마들렌 시장, 그러니까 장발장의 공장에 취직했을 때 생각보다 급료가 괜찮았으므로, 팡틴느도 '이젠 살아갈 수 있겠다' 라고 판단하여 마음을 놓고 과감히 빚을 졌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덜컥 뜻하지 않게 직장을 잃게 되었는데, 빚이 있다보니 그 도시를 떠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 손바닥만한 도시에서 탕녀로 소문이 났으니 다른 일거리를 구하지도 못했지요. 




(사실 팡틴느가 몰락한 것은 같이 일하던 동료 여자들의 시기심과 천박한 호기심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웬만하면 직접 들어가서 살 주택을 구입할 자금 외에는 빚은 지지 마세요.  빚은 부모님이 자유인으로 낳아주신 여러분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못된 것입니다.   특히 갚을 수 없는 빚은 정말 그렇습니다.  요즘 자동차 살 때 할부로 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요 ?  글쎄요... 예전 노예제 시절 사회에서나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중 진정한 자유인이 몇이나 되겠어요 ?  할부금 남은 자동차를 모는 청년은 노예이고, 그냥 버스를 타고 다니는 청년은 자유인인가요 ?  판단은 여러분 각자가 내리셔야지요.

전에 제가 블로그에서 아래 구절을 인용하면서 결투를 할 때 신사들은 실크로 된 셔츠를 입고 싸우거나, 실크 셔츠를 입을 형편이 안 되는 신사들은 아예 셔츠를 벗고 싸웠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명이나 삼베로 된 옷은, 총알에 맞으면 그 부위가 총알 모양으로 동그랗게 잘려나가며 총알과 함께 살 속으로 파고 들게 되는데, 그것이 결국 염증을 일으킵니다.  그에 비해 무척 질긴 섬유인 실크는 총알에 맞더라도 찢어질 뿐 파편이 잘려나가지는 않기 때문에 상처 속에 실크 파편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HMS Surprise by Patrick O’Brian (배경 180X년 인도) -------------


(잭 오브리의 친구인 군의관 스티븐 매튜어린이 여자 문제로 동인도 회사의 고위 간부와 권총 결투를 벌입니다.)


스티븐은 코트를 벗더니, 이어서 셔츠까지 벗어서 조심스럽게 접어놓았다.


“자네 대체 뭐하는 건가 ?” 잭이 옆으로 와서 나직히 물었다.


“난 항상 바지만 입고 싸운다네. 상처 속으로 말려들어간 천 조각은 아주 끔찍한 결과를 낳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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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렇게 셔츠 뿐만 아니라 코트까지 입고 권총 대결을 벌이시는 분들은 뭘 몰라도 한창 모르거나 또는 목숨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인터넷에서 18세기 시절의 세탁 방법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가 "Two Nerdy History Girls" 라는 웹사이트에서 매우 흥미로운 정보를 발견했습니다.  (맨 아래 source 부분에 URL 올려놓았습니다.)  Loretta Chase와 Susan Holloway Scott이라는 두 여성 작가분이 운영하는 이 역덕 사이트에 따르면 적어도 18세기 영국 신사들의 셔츠는 절대 실크로 만들지 않았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셔츠라는 것은 속옷 개념의 옷이었거든요.



마태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And if any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shirt, hand over your coat as well.



그래서 원래 제대로 된 신사들은 절대 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항상 겉에 자켓을 입고 다니며, 자기 사무실에서도 셔츠 위에 조끼(베스트)를 입는다고 합니다.  그런 양반들은 한국의 찜통 더위에 한번 제대로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제 후배 직원 중 아주 잘 생기고 깔끔한 친구 하나는 정말 더운 여름철 사무실에서도 항상 양복 자켓을 입고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친구 지금은 월급 많이 주는 더 좋은 회사로 갔습니다.)


이 역사학자들의 말씀에 따르면 - 저는 맞는 말씀 같다고 생각합니다 - 19세기 중반까지 셔츠라는 옷은 유럽 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인 의류였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3세의 셔츠나 그의 시종들이 입었던 셔츠나 재질이나 디자인이 사실상 거의 똑같았다고 합니다.  어차피 속옷인걸요 !  




(왕도 장군도 병사도 농부도 다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다니 !!)




당시 셔츠는 거의 모두 동일하게 아마포(linen)으로 만들었습니다.  속옷을 실크로 만드는 일은 (설령 있었다고 해도) 거의 없었습니다.  요즘 속옷은 다 면으로 만듭니다만, 당시 면포는 속옷 따위로 쓰기에는 아직 너무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면으로 만든 천인 모슬린(muslin, mousseline)은 마리 앙뜨와네트가 드레스로 만들어 입을 정도로 비싼 유행품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산업 시찰을 가기 직전에 조세핀과 부부 싸움을 벌인 이유도 모슬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리용(Lyon)산 견직물(비단)로 만든 드레스를 입으라고 지시했는데 조세핀은 당시 대유행이던 모슬린 드레스를 고집했거든요.  물론 그런 모슬린은 인도를 독차지한 영국산이었으니 산업 시찰을 나가는 나폴레옹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앙뜨와네트의 유명한 초상화입니다.  당시 앙뜨와네트가 검소해서 비단이 아닌 면직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같은 아마포 셔츠라고 해도 신사용 셔츠를 만드는 아마포는 더 하얗고 고운 실로 짠 것이었겠고 바느질도 더 촘촘하게 되어 있었을 것이며 다림질도 더 잘 되어 있었겠지요.  부유한 신사의 셔츠 소매 등에 레이스 등의 장식이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왕이든 신사든 농부든 모든 셔츠의 디자인은 동일했답니다.  현대 정장 차림에서는 와이셔츠가 앞이 완전히 열려 있고 그걸 많은 수의 단추로 잠그는 형태입니다만, 당시 셔츠는 무조건 머리 위로 뒤집어 쓰는, 그러니까 요즘의 티셔츠 같은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린 목과 소매를 단추로 잠그는 형태였지요.  또 당시의 셔츠는 품이 매우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요즘도 속옷의 사이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듯이, 당시 속옷 개념이었던 셔츠도 사람의 체격이나 체형에 따라 옷이 맞지 않는 경우가 없도록 어느 정도 프리사이즈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나 군함 등에서는 고참이 후임의 깨끗하게 세탁해놓은 셔츠를 빼앗아 입기도 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 분처럼 가슴팍은 물론 복근까지 다 까보이는 셔츠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Mr. Midshipman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 1790년대 HMS Justinian 함상)   ----------------


(10대의 혼블로워가 사관후보생 생활을 하고 있는 군함에는 못된 고참 사관후보생이 있어서 후임들을 몹시 괴롭히고 있는 상태입니다.)


가장 큰 원망을 자아냈던 것은 그 고참의 일상적인 수탈 행위가 아니었다.  후임 사관후보생들로부터 깨끗한 셔츠를 빼앗아 입는다든가, 식사로 나오는 고기 중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을 자기 몫으로 독차지한다든가, 심지어 후임들 몫으로 나오는 럼주를 빼앗는 것조차도 참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 것들은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넘어갈 만한 일이었고, 후임들도 만약 그럴 권력이 손에 들어오면 스스로도 저지를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고참에게는 고전 교육을 받은 혼블로워에게 로마 황제들의 광기를 연상시키는 종잡을 수 없는 변덕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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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코제트가 'In My Life'를 부를 때의 장면입니다.  장발장이 저렇게 셔츠 바람으로 나오는데, 의복 고증이 매우 잘 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목 부분의 열린 부분이 약간 많이 파인 것 같군요 ?)




그렇게 목과 소매의 단추를 풀기만 하면 무척 편한 속옷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잠옷으로도 사용했습니다.  즉, 잠을 잘 때는 따로 잠옷을 입고 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켓과 바지만 벗고 그냥 셔츠 바람으로 자는 것이었지요.  당시 셔츠는 꽤 길어서 넓적다리를 덮을 정도의 길이였거든요.  실제로 잠옷이라는 영어인 파자마(pajama)는 원래 인도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인도 식민지에서 영국인들이 배워온 것이었고 이 단어가 영국에 정착한 것은 19세기 후반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였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길이가 길다보니 당시 셔츠는 정말 속옷 역할도 톡톡히 했습니다.  당시의 신사들은 별도의 속옷 하의(drawers)도 입긴 했습니다만 많은 서민들은 그냥 셔츠가 속옷 하의 역할까지도 했습니다.  즉 긴 셔츠의 아랫자락을 다리 사이에 넣어서 남성의 주요 부위를 감싸는 역할까지도 했던 것입니다.  


좀 더럽지 않냐고요 ?  예, 좀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셔츠가 가장 민주적인 의류였다고는 해도, 당연히 귀족이 입는 것과 밭일하는 농부가 입는 셔츠는 차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바로 청결함이었습니다.  신사들은 자주 셔츠를 갈아입었고 특히 외출을 할 때는 닳지 않고 하얀 새 셔츠만 입은 것에 비해, 서민들의 셔츠는 누렇게 찌들고 여기저기 헤어지고 너덜너덜해진 셔츠를 입어야 했습니다.  신사 중에서도 진짜 부유한 신사는 조금 헤어지고 변색된 셔츠를 하인들에게 던져 주었을 것이지만, 신사치고는 가난한, 가령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 같은 청년은 구멍난 셔츠 팔꿈치 부분은 물론 헤어지고 닳은 소매 부분이 자켓 밖으로 보이지 않도록 노심초사해야 했을 것입니다.  17세기 중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고골리(Nikolai Gogol)의 소설 '대장 부리바'(Taras Bulba)에서도 어떤 폴란드 귀족을 묘사하면서, '행사장에는 화려하게 잔뜩 껴입고 나왔지만, 집에는 구멍난 셔츠와 낡은 구두 한켤레 밖에 없는 신세'라고 조롱하는 부분이 나오지요. 


서민들은 낡고 헤지고 구멍난 셔츠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입다가 완전히 넝마조각이 되면 그걸 또 푼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당시는 생산성이 무척이나 떨어지고 물건이 귀한 시대였습니다.  헌 셔츠도 하나도 붕대로든 걸레로든 다 쓸모가 있는 시대였거든요.  더 밑에서 설명하겠습니다만, 당시 그런 아마포 셔츠는 한벌에 대략 6실링 정도 했습니다.  현재 가치로는 7만원 정도하는 셈이지요.  하지만 당시 비숙련 노동자의 일당이 1실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요즘 최저 임금으로 계산하면 당시 사람들의 체감상으로는 대략 30만원 정도 했던 것입니다.  셔츠가 닳고닳아서 넝마조각이 될 때까지 입었던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지요. 




(율 브린너가 부리바로, 토니 커티스가 그 아들로 나왔습니다.  어렸을 때 정말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물론 흑백 TV로요.)




하지만 현대 정장에서 와이셔츠의 칼라 부분이 무척 중요한 것처럼 당시 신사들의 옷차림에서도 목 부분은 자켓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냐고요 ?  가만 보면 당시 초상화의 신사님들과 장군님들의 목 부분은 목에 매는 별도의 장식 천, 즉 neckcloth나 초기 형태의 넥타이인 cravat 등으로 잘 가려져 있습니다.  물론 살짝 드러난 셔츠의 목자락 부분이 누렇게 찌들어 있다면 그 창피함은 말할 수 없었겠지요.  




(자켓 밑에 드러난 단추 많이 달린 옷은 셔츠가 아니라 조끼(vest)입니다.   조끼 위로 드러난 셔츠의 대부분은 넥클로쓰(neckcloth)로 덮혀 있습니다.  당시 신사들은 아무리 더워도 저 넥클로쓰를 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영국에서나 통할 이야기이고 인도에서는...)




당시 셔츠에서 또 한가지 이색적인 부분은 목과 소매의 단추입니다.  당시에는 플라스틱이 없었으니 셔츠의 단추로 어떤 것을 썼을 것 같습니까 ?  나무 ?  상아 ?  설마 녹슬지 않는 구리 ?  물론 부잣집에서야 색다른 재료를 쓸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표준적인 재료는 바로 아마포 그 자체였습니다.  아마포 실을 둥글게 뭉치고 매듭을 지어 헝겊 단추를 만든 것입니다.  이는 두가지 때문이었습니다.  나무 같은 단단한 물건으로 단추를 만들면 그로 인해서 옷이 더 빨리 닳습니다.  게다가 세탁 비누가 없던 당시의 빨래 방법은 잿물과 삭힌 오줌 등의 괴이한 세제로 옷을 불린 뒤에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옷을 두들기는 것이었거든요.  그런 과격한 세탁 방법을 견딜 재료가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헝겊 단추라니 !  굉장히 이색적이지만 생각해보면 꽤 실용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자, 나폴레옹 시대의 영국군 병사들의 셔츠는 어땠을까요 ?  물론 마찬가지로 동일한 형태의 셔츠를 입었습니다.  당시 복장 규정은 연대마다 또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 달랐습니다만, 대개 3~4벌의 셔츠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가령 1800년 제40 보병연대의 경우 병사들이 소지해야 하는 셔츠의 수량과 재질과 크기는 물론 그 가격에 대해서도 세밀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즉 '1야드 당 1실링 6펜스 짜리 아마포로 1실링 짜리 바느질삯을 주고 만들어진 셔츠를 4벌씩 준비하되, 목과 소매 길이가 넉넉해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셔츠는 재질과 구입 장소에 따라 한벌에 대략 4실링에서 10실링까지의 가격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평균 6실링이라고 해도, 모병제였던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급여가 일당 1실링이었으니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인데 군복을 자기 돈으로 마련해야 하는 건 너무 하지 않느냐고요 ?  당시 군에서 일괄적으로 셔츠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급된 셔츠들은 (당시 영국도 방산 비리가 심각하여) 재질이나 바느질 품질이 형편없었고 그나마 가격을 아무 할인 없이 시장가 그대로 쳐서 병사들 급여에서 공제했으니 병사들로서는 군에서 지급하는 셔츠가 전혀 반갑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전선에 투입되어 검열이 좀 느슨해진 병사들은 2벌의 셔츠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병사들로서야 돈이 나가는 것보다는 그냥 좀 더럽고 구멍난 셔츠를 입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았을테지요.  


이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1811년 정도가 되자 장교 위원회에서 병사당 2벌의 셔츠만 소지하면 되는 것으로 규정을 바꾸자는 건의를 올렸고 영국 육군 사령부에서도 그 건의를 받아들여 1812년 정식으로 복장 규정을 바꾸었습니다.  이유는 금전적 부담이 아니라 병사들의 배낭이 너무 무겁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긴 당시 그렇게 넉넉한 품의 아마포 셔츠는 무게가 1파운드, 그러니까 0.453kg이나 되었으니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결국 이 규정은 1817년 다시 '3벌 소지'로 바뀌게 됩니다.


저 위에서 당시 모든 셔츠는 아마포가 표준이라고 했는데, 항상 혁신은 군대에서 일어나는 법입니다.  1812년 캐나다에 주둔했던 영국군은 아마포 셔츠 외에 모직인 플란넬(flannel) 셔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심지어 1814년 북부 캐나다에 주둔하고 있던 제89 연대 제2 대대의 모리슨(Morrison) 중령이라는 분은 아래와 같은 명령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플란넬 셔츠를 지급받은 병사들 중 몇몇은 여전히 가끔씩 아마포 셔츠를 입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건강에 해로운 것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각 중대 지휘관들은 플란넬 셔츠가 지급되는 대로 기존 아마포 셔츠를 금지하고 처분하도록 강제하기를 바란다."


물론 플란넬 셔츠가 더 비쌌습니다.  한벌에 8~10실링 정도 했으니, 6실링짜리 아마포 셔츠보다 약 1.5배 더 비싼 것이었지요.  그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던 병사들의 원망이 있었겠습니다만, 사령부에서는 플란넬 셔츠가 병사들의 건강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캐나다에 비해 더 따뜻한 지방이었던 스페인 전역에서도 플란넬 셔츠가 지급되었습니다.  심지어 열대 지방인 자메이카 주둔 부대에도 플란넬 셔츠가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1804년에 나온 로버트 잭슨(Robert Jackson)이란 분의 '군대의 구성, 규율, 경제성에 대한 체계적인 관점'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플란넬 셔츠의 장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플란넬은 아마포보다 더 온기를 잘 보존한다.  습기 흡수도 잘 되고 피부에 닿는 감촉도 더 좋은 재료이다.  더운 날씨에서는 땀을 재빨리 흡수한다.  추운 지방에서는 비에 젖는 것이 건강에 무척 해로운데 플란넬로 몸을 감싸면 그 해로움이 덜해진다."


글쎄요, 모직이 땀을 더 잘 흡수하고 피부에 기분 좋은 감촉을 주나요 ??  저는 전혀 동의못할 내용입니다.  아마 저 잭슨이라는 분의 친척이 모직 공장을 운영하든가 또는 양떼 목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네요.  실제로 몇몇 병사들은 플란넬 셔츠를 맨살에 입는 것을 꺼려 했습니다.  1799년 10월, 제49 연대의 제임스 피츠기본스(James Fitzgibbons) 하사는 '도저히 플란넬이 맨살에 닿는 느낌을 견딜 수 없다' 라며 아마포 셔츠를 밑에 입고 그 위에 플란넬 셔츠를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을 괴롭히던 것은 더운 날의 플란넬 셔츠 뿐만 아니었습니다.  당시 복장 규정은 셔츠의 목과 소매의 단추를 항상 채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진지 구축 작업 등을 할 때 군복 자켓을 벗고 일하는 것은 허락될지라도, 소매를 걷어올리거나 목 부분을 풀어헤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빌라 벨라(Velha) 근처에서 숙영 중인 부대' 라는 1811년 C, Turner의 판화입니다.  소매를 걷은 병사들이 없다는 점 보이십니까 ?)




위에서 '당시 셔츠는 비교적 프리 사이즈'라고 언급했는데, 특히 그렇다면 병사들끼리 셔츠를 훔치거나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요 ?  실제로 좀 그랬나 봅니다.  특히 전장에서는 병사들이 현지 주민들에게서 술이나 음식을 사기 위해 셔츠를 팔아먹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자기 것을 벗어 주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전우의 것을 훔쳐서 주는 경우도 있었겠지요.  그 때문인지 1811년에는 셔츠에 잉크로 소유자의 이름을 표시하라는 새로운 규정이 나왔다고 합니다.  






Source : http://www.warof1812.ca/shirts.htm

http://twonerdyhistorygirls.blogspot.com/2011/04/finer-points-of-18th-c-mans-shirt.html?m=1

https://militaryhistorynow.com/2016/11/03/pistols-at-dawn-officers-gentlemen-and-duelling-in-the-18th-and-19th-centuries/

https://en.wikipedia.org/wiki/Duel

https://en.wikipedia.org/wiki/Matthew_5:40

공화국의 마리안느와 자유-평등-박애

잡상 2018.12.13 06:30 Posted by nasica

이번에 노란조끼(gilets jaunes)라는 시위대가 파리를 뒤집어 놓으면서 개선문 안에 보관되었던 마리안느(Marianne)라는 여자의 두상도 크게 파괴었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의 혀를 차게 했습니다.  특히 저 마리안느라는 여자의 표정이 몹시 화가 난 표정이라서 더욱 눈살이 찌푸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정작 마리안느 자신은 시위대가 자신의 두상을 과격 시위로 파괴한 것에 대해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안느 자신이 바로 저항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2013년에 썼던 것인데, 이번 노란조끼 시위대 사건으로 약간 고쳐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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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제가 몇년 전 가을 파리 여행 갔을 때 찍은 노트르담 성당입니다.  그때 오전에는 루브르 박물관을 휘리릭 둘러본 다음이었던지라, 사실 다리가 무척 아픈 편이었고, 점심 때 들렀던 식당도 뭐 그다지 푸짐하거나 맛이 있지는 않아서 더욱 지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요.  저희 가족은 루브르에서 생-제르맹 어쩌고 성당을 거쳐, 노트르담이 있는 시테 섬까지 그냥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소 처량하고 다리도 많이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막 노트르담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면서 파란 하늘과 밝은 햇살이 나오더군요.  게다가 노트르담은 어찌나 멋있던지 !  




(노트르담은 앞쪽도 멋있지만 옆쪽과 뒤쪽은 더 멋있던데요 !)


 


그런데 시테 섬으로 들어가는 퐁뇌프 (Pont Neuf, 새 다리) 교를 건너자 마자 뭔가 커다란 관공서 같은 건물이 나오더군요.  이 건물은 Cour de Cassation, 즉 파기법원으로서, 우리나라로 치면 대법원에 해당하는 기관입니다.  뭐 그리 대단한 예술적 건축물로 보이지는 않아서 그냥 지나쳤는데, 그 앞을 지나다 보니 작은 출입문 위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와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바로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 입니다. 




(저처럼 눈이 침침하신 분들을 위해 확대 사진도 하나 추가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만큼 프랑스 정치와 역사에 강렬한 인상을 준 사건이 없을 정도로, 1789년의 혁명은 대단한 의미를 가집니다.  제가 연재하는 나폴레옹 이야기도 그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은 자신의 쿠데타로 인해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한 바 있지요.  즉,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프랑스 혁명 기간은 1789년 바스티유 요새 습격 사건부터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까지의 10년 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10년이 아니라, 약 100년 간 진행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1870년 제3 공화국(La Troisieme Republique, La IIIe Republique)의 성립 때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 즉 나폴레옹의 제1 제국, 부르봉 왕가의 복위, 7월 혁명, 루이 필립 왕정, 2월 혁명에 의한 제2 공화국,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국, 그리고 1870년 보불 전쟁의 뼈아픈 패배는 모두 프랑스 대혁명의 진통이었던 것이지요.




(프랑스 제3 공화국의 업적 중 하나는, 나폴레옹도 이루지 못했던 정교 분리를 1905년에 마침내 이루어냈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카톨릭 신부에게 이별을 고하는 '빨간 고깔모자를 쓴 삼색기의 여인'이 바로 마리안느 Marianne, 즉 프랑스 공화국을 의인화한 캐릭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혁명의 혼란 속에서 19세기를 보낸 덕분에 프랑스가 과거의 영광을 모두 잃고 영국이나 독일에 비해 크게 암울한 20세기를 맞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사실 제 세대는 학교 교과서에서 대략 그렇게 배웠습니다.  실제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19세기 동안 독일이나 영국의 인구가 크게 증가할 때, 유럽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의 인구 증가율은 크게 정체된 편이어서, 이 현상 자체가 하나의 연구 과제가 될 정도였는데, 일부에서는 19세기 프랑스의 정치 혼란이 그 원인이라고 탓하기도 합니다.  물론 반대론도 많지요.  하지만 프랑스가 19세기의 혼란기를 겪어나가면서, 국가적으로 얻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저 파리 대법원의 작은 출입문 위의 새겨진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 입니다. 




(이건 정부 소유의 어떤 교회 문위에 새겨진 자유-평등-박애입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는 다들 익숙하실 텐데, 정작 저 3번째의 Fraternite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한 느낌이 드실 것입니다.  이는 영어로도 fraternity이고, 형제 관계, 형제애, 동포애, 남학생클럽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이걸 그냥 '박애'라고 번역합니다.  이 '박애'에 대해서는 생소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원래 모토가 아니라 훗날 정립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 초기부터 리베르테와 에갈리테, 즉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는 워낙 이야기가 많이 되었지만, 세번째 모토는 처음부터 명확히 프라테르니테라고 정의가 되지 않았고 다른 개념이 대신 끼어들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그냥 자유와 평등만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정의도 1789년의 인권 선언 (De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에 다음과 같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맨 처음 이 글을 썼던 것이 2013년이었는데, 지금은 촛불 혁명 거치면서 우리나라도 많이 개선이 되었나요 ?)




"자유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같은 권리를 누리는 것을 보장하는 한, 모든 남녀가 타고난 권리를 누리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한다." 


"평등이란 법이 모든 사람에 대해, 그것이 보호이건 처벌이건,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을 뜻한다.  모든 시민들은 법 앞에 평등하며, 모든 시민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 고위 관직 및 공직, 일자리에 있어 동일한 기회를 가지며, 그들의 덕성과 재능 외에는 어떠한 차별도 받아서는 안된다." 



사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은 서로 양립하기가 조금 아리송한 개념이기는 합니다.  애초에 인간은 평등하지가 않습니다.  외모이건 신체적 능력이건, 그리고 특히 지적 능력과 사업 수완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이런 소양 차이는 필연적으로 성과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으므로, 어떤 사람은 부와 권력을 손에 쥐게 되고, 어떤 사람은 가난과 불명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평등이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자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을 주도한 세력은 18세기 말의 계몽 사상에 기반을 둔 유식하고 능력있는 부르조아 계층이었으므로, 이들에게는 귀족이라는 특권 세습 신분의 타파만 중요했습니다.  그런 특권만 제거된다면 부와 실력을 가진 자신들의 세계가 펼쳐질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지요. 




(프랑스 혁명 초기에 나온 자유-평등-박애 문구입니다.  밑에 달린 ou la mort는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다소 과격한 구호입니다.  이 죽음 부분은 너무 과격하다고 하여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자유라는 개념은 무척 난해한 것입니다.  원래 자유로우려면 경제적인 독립성이 먼저 확립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자신과 가족의 생계가 어떤 권력자에게 달려있다면, 자신이 그 권력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  따라서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이 없는 자유는 허울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가령 산업 혁명 당시 맨체스터 공장 지대의 일용 노동자는 명색은 자유인이지만 정작 미국 남부 흑인 노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이 없다면 자유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다보니 부자들로부터 더 높은 세금을 걷는 등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가령 최저 임금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제가 당장 라면이라도 끓여먹기 위해 한달에 50만원이라는 박봉으로라도 좋으니 어떤 공사장 경비원 자리를 구하고 싶은데, 국가가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최저임금 이하의 금액으로 고용 계약을 맺는 것은 불법이라고 이 고용 계약을 취소한다고 하면, 저와 그 고용주가 서로의 사정에 따라 계약을 맺을 자유를 국가가 빼앗는 것이 됩니다.  또,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기업은 두부를 만들어 팔면 안된다 라든가, 대기업의 대형 마트는 일요일에 영업을 하면 안된다 라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로마 방문했을 때 멀리서라도 뵐 기회가 없었던 프란체스코 교황입니다.  당시 현지 가이드 이야기를 들어보니, 로마 현지에서나 전세계에서나, 전임 베네딕트 교황에 비해서 인간미가 넘치고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우선시하여, 인기가 폭발적이라고 하더군요.  프란체스코 교황은 최근에 '규제받지 않은 자본은 또 하나의 독재'라는 발언을 하여 특히 미국의 보수파 (자칭 신자유주의파)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급기야 교황이 '나는 마르크스 주의자가 아니다'라는 해명 발언까지 해야 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종북 빨갱이몰이는 공통된 현상인가 봅니다.)




이렇게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 문제에 들어가게 되면 정말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제3의 구호, 박애라는 개념이 들어가게 되면 이야기가 좀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저 자유와 평등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문제인 것에 비해, 박애라는 개념은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본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고 할 지라도,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른 '별로 안 뛰어난'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필요합니다.  '내가 혼자 잘나서 이렇게 부를 이루었는데, 왜 내가 무능력한 가난뱅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고율의 세금을 내야 하느냐'라고 묻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부나 돈이라는 개념은 홀로 있는 무인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직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회에서나 의미를 가지는데, 사람의 사회라는 집단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박애라는 개념은 같은 피가 흐르는 같은 영장류 동물로서, 당연히 동족에게 가져야 할 최소한의 연민과 사랑이지요.  결국 자유와 평등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을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박애라고 저는 저 나름대로 정의를 합니다.




(바티칸에 있는 4대 복음서 저자 중 한명인 마태 Matthaeus의 석상입니다.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 어록에 아래와 같은 말이 있지요.  저는 전에 어느 분의 장례 미사에 갔다가, 신부님이 읽어주시는 이 글귀를 듣고... 감동도 좀 먹었지만 사실 좀 무섭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말 지옥에 갈 죄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지요.  세상에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 가족의 행복과 안녕이 더 급하고 더 귀하기 때문에 기부도 많이 안 하는 편이거든요.  아마 그때부터였나... 저는 복지를 위한 중과세에 적극 찬성하는 사람이 되엇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45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이런 자유-평등-박애의 구호는 그냥 막연히 떠드는 구호는 아닙니다.  근 100년 간의 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스 사회가 내린 결론이지요.  이 구호는 1870년 이후 성립된 프랑스 제3 공화국에서 국가 이념으로 내세우면서 확실히 정립이 되었고, 1880년 이후 지어지는 관공서 등의 건물의 박공 등에 이 문구를 새겨 놓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 파리 여행에서 시테 섬의 파기법원 출입문 위에 새겨진 저 문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국가 이념을 저렇게 정한다고 정말 저렇게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저렿게 이념이라도 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요!)




저는 그때 꽤 지치고 (비까지 와서) 처량한 기분이었으나, 저 문구를 보고 괜히 저혼자 흥분했었어요.  그래서 별로 관심도 없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 애에게 저 문구의 의미를 설명해주려고 막 떠들다가 핀잔만 들었지요.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저 구호의 가치를 국민들에게 심어주는데 무척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유-평등-박애의 상징은 프랑스 곳곳에서 자주 눈에 보입니다.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마리안느(Marianne)라는 여자의 모습과 프랑스 삼색기와 함께, 이 구호는 마치 프랑스와 불가분인 것처럼 지금도 외쳐지고 있지요.  프랑스의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프랑스의 국가 이념이 바로 이 Liberté-Egalité-Fraternité라는 것을 반복해서 배운다고 합니다.  




(프랑스 공화국의 마리안느는 결코 청순가련형의 순종녀가 아닙니다.  자유와 평등을 침탈당할 때는 저렇게 총검을 손에 들고 민중을 이끄는 행동파입니다.)




전에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서 쓰면서 이렇게 '독재자의 깃발이 올랐다 시민들이여 무기를 들라 !'라는 가사를 국가 의례 때마다 부르는 나라에서는 독재자가 자리잡기 어렵겠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지요.  같은 맥락에서, 부유층의 수퍼카와 호화 요트에 대한 세금은 없애면서 서민들의 연료비에 대한 세금은 높아지는 현실을 접했을 때, 학교에서 에갈리떼(Egalité)와 총검을 든 마리안느에 대해서 배우는 나라의 국민들이라면 노란 조끼(gilets jaunes) 시위를 통해 파리를 뒤집어 놓는 것이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퇴하는 웰링턴의 뒤를 쫓아 리스본으로 달리던 마세나가 1810년 10월 14일 생각지도 못했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직접 육안으로 보고 그 규모에 경악하는 사이, 웰링턴이 사전에 프랑스군 후방에 미리 풀어놓았던 비밀 병기는 이미 작동을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기아였습니다.  애초에 웰링턴은 마세나와 피투성이가 되어 멱살을 쥐고 구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기본 전략은 리스본 북쪽의 황량한 험지에서 마세나의 진격을 틀어막고 마세나에게 굶어죽든지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웰링턴은 부사쿠 전투를 전후하여 계속 그 일대의 포르투갈 주민들을 방어선 이남으로 피난가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병력은 부족하지만 물자는 풍부하고 기동력은 느리지만 방어에는 탁월한 영국군에게 딱 어울리는 매우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웰링턴의 자화자찬에 불과했습니다.  포르투갈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작전은 웰링턴이 영국군의 전투 손실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 민간인들을 희생시키자는 수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0월 중순부터 우기가 시작되는데, 식량이나 주택이나 영국군은 아무 것도 책임져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집을 떠나 남쪽으로 가라는 것은 사실상 길바닥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으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주민들은 피난 가기를 거부했고 영국군은 집에 남은 주민들에게 '떠나지 않을 경우 무력을 행사하겠다' 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전쟁은 비참한 것입니다.  영국군의 명령에 순종하여 정처없이 길을 떠난 주민들도, 명령을 거부하고 집에 남은 주민들도 모두 전쟁의 참혹함에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도 인정은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집에 남은 주민들은 그야말로 프랑스군에게 가진 식량과 주택을 모두 빼앗기고 여성들은 성폭행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그에 저항하던 주민들은 가차없이 살해되었습니다.  가령 쿠임브라(Coimbra) 시의 주민들 중 끝내 피난가지 않고 남은 주민들 약 2만명 중 5% 정도인 1천명 정도가 쿠임브라가 함락될 때의 무질서한 약탈 와중에 살해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영국군의 총칼에 떠밀려 길바닥에 나선 주민들의 처지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동맹군이라지만 난폭하기로는 프랑스군 못지 않았던 영국군의 약탈과 폭행, 굶주림과 추위였습니다.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뒤로 후퇴할 때 연합군과 함께 집을 버리고 피난가도록 강요된 포르투갈 주민들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로열 스코틀랜드 제1 연대 3대대의 존 더글라스(John Douglas)라는 부사관이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주민들은 가족마다 앞에 어린 것들을 앞세우고 걸었는데, 이 어린 것들은 매일, 아니 거의 매시간 줄어들었다.  그러나 난파선의 선원들이 물 위에 뜬 마지막 나무조각에 매달리듯 이들은 계속 어디론가 걸어가야 했다.  이들을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적이나 아군이나 모두 이들의 소지품을 약탈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영국군 포병 진지 뒤편에서 땡전 한푼 없이 참혹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 글을 읽는 영국인들이여, 생각해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사실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또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잠시 동안이라도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쉬운 일이리라.  그러나 전쟁의 참혹한 손아귀로부터 이 축복받은 섬 주민들(영국인들을 지칭: 영국)을 지켜주신 주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Los desastres de la guerra, 즉 '전쟁의 참상'이라는 고야(Goya)의 시리즈 판화물 중 'No hay quien los socorra' (그들을 도울 자는 없다)라는 그림입니다.  세 명의 여인이 죽어 쓰러져 있고, 한 명이 서서 울고 있습니다.)




(역시 '전쟁의 참상' 시리즈 중 'De qué sirve una taza?' (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는 그림입니다.  두 명의 굶주린 여인이 쓰러져 있는데 다른 여자 하나가 그 중 죽어가는 한 명에게 뭔가가 담긴 컵을 권하고 있습니다.)




결국 1810년 10월부터 1811년 봄까지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동안 무려 5만명의 포르투갈 주민들이 아사 및 병사, 동사해야 했습니다.  5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포르투갈 전체 인구의 2%로서 정말 막대한 피해였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남한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는데 그 끔찍했던 3년 전쟁 동안 남한 민간인 사망자만 약 38만명으로 약 2%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포르투갈은 약 5개월 동안 전체 인구의 2%가 사망했으니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는지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포르투갈 민간인들에게 이토록 참담한 희생을 강요한 결과 프랑스군도 큰 피해를 입었을까요 ?  예, 당연히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매우 작았습니다.  1810년 9월 기세 좋게 포르투갈 국경을 넘은 프랑스군은 총 6만5천으로 시작했으나 다음해 2월 결국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 살아서 돌아간 것은 4만이었습니다.  그 중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부사쿠 전투 때의 약 4500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굶주림과 그로 인한 합병증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습니다.  또 알게 모르게 굶주림에 지쳐 탈영한 프랑스군도 꽤 많았겠지요.  무려 2만이나 되는 적을 총 한방 쏘지 않고 무찔렀으니 웰링턴은 기뻐했을까요 ?


웰링턴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자책감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세나는 불과 2~3주도 버티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때 굶주리고 지친 채 후퇴하는 마세나의 군대를 추격하여 격파할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약 1년 전인 1809년 5월, 포르투(Porto)에서 퇴각하는 술트의 군단을 추격하며 기세를 올렸던 신나던 순간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마세나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바로 코 앞에서 무려 1달을 버텼습니다.  웰링턴의 예상대로 프랑스군의 굶주림은 극심했습니다.  불과 2주만인 11월 초 이미 식량 부족으로 인한 프랑스군의 비전투 병력 손실은 5천에 달했으니까요.  수백 명의 프랑스군이 굶주림에 견디지 못하고 영국군 측에 투항해왔습니다.  그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마세나는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확실히 노련한 적수였습니다.  짙은 안개가 끼었던 11월 14일 밤, 프랑스군은 군복을 입고 군모까지 쓴 허수아비들을  감시 초소에 남겨둔 뒤 조용히 철수해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10시가 넘어 안개가 다 걷히고도 몇 시간이 더 지나서야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모조리 철수했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의 기민함이었습니다.  


포르투에서 술트를 결국 놓쳤듯이 마세나도 놓치게 되었다고 생각한 웰링턴이 느림보 영국군을 닥달하여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았으나 영국군 전위부대가 프랑스군을 따라잡은 것은 무려 2일이 지난 11월 17일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랑스군은 기가 죽어 걸음아 날살려라 도망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쫄쫄 굶은 군대치고는 엄청난 속도인 하루 28km의 행군을 2일간 강행한 프랑스군은 어느 틈에 테주(Tejo) 강 북안에 면한 강변 도시 산타렝(Santarém)에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고 든든한 방어진지까지 구축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마세나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식량 사정이 그나마 나았던 이 곳에 진지를 구축한 뒤 포병대와 야전 병원 등 이동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부대부터 미리 이동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산타렝에는 레이니에(Jean Reynier)의 제2 군단이 자리잡았고 나머지 부대들은 역시 먹을 것이 있는 더 북쪽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웰링턴은 감히 프랑스군을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닭쫓던 개 신세가 된 영국군을 프랑스군이 든든한 방어진지 안에서 비웃는 상황이 된 셈이지요.  




(마세나가 원래 대치하던 곳은 토헤스 베드하스가 아니라 소브랄이라는 마을 근처였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산타렝까지는 대략 55km 정도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하루에 28km씩 걸었다는 이야기지요.)




이렇게 양군은 지루한 대치 상황에 들어갔습니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여기서도 굶주리다 결국 몇 주 버티지 못하고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놀랍게도 마세나의 프랑스군은 정말 뛰어난 식량 수집 기술을 발휘하여 다음해 3월까지 무려 3개월이 넘는 기간을 버텼습니다. 


대체 프랑스군은 어떻게 이렇게 먹을 것도 없이 버틸 수 있었을까요 ?  결국 웰링턴의 초토화 작전은 그다지 완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찰스 콕스(Charles Cocks)라는 영국군 정보 장교가 11월 4일 기록한 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병참 장교들을 동원해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 10 리그(league, 1리그는 약 5.5km)에 걸친 전 지역에서 모든 식량을 다 사들였더라면 적은 식량 부족으로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페니슈(Peniche) 지방의 총독인 블런트(Blunt) 장군이 얼마전 포르투갈 민병대장들(Capitao Mors)에게 레이리아(Leiria)와 방어선 사이에 있는 전체 곡물을 다 치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답변은 6주였으나, 지난 달 우리가 후퇴할 때 실제로 그들에게 통보가 갔을 때는 불과 며칠의 여유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많은 양의 식량이 적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니까 원래 계획은 토헤스 베드하스 북쪽 100km 넘게 떨어진 레이리아까지 초토화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철저히 수행되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죽어야 했을까요 ?)




그래도 물론 먹을 것은 부족했습니다.  마세나가 그렇게 먹을 것도 별로 없는 곳에서 버틴 이유는 웰링턴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서 서투른 공격을 해오는 것을 역공하든가, 아니면 스페인에서 드루에(Drouet)의 제9 군단이 지원을 위해 이동해오면 합세하여 웰링턴을 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의 조심성은 바닥을 몰랐고, 레이니에의 제2 군단이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굶주리고 있었는데도 공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세나는 다음 해인 1811년 2월, 실패를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으로 후퇴했습니다.  그 때 즈음에는 먹이찾기의 귀재 프랑스군조차도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일대가 탈탈 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웰링턴은 '영국군이라면 한달도 버티지 못할 곳에서 프랑스군은 무려 3달을 버텼다'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결국 1810년~1811년 봄까지 이어진 마세나의 침공과 그에 맞선 웰링턴의 작전은 수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만 낸 채 양측에게 아무 의미도 없이 끝났습니다.  전쟁, 특히 외국군에게 국토를 맡긴 전쟁이란 이렇게 참혹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Source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peninsular.html

https://en.wikipedia.org/wiki/Lines_of_Torres_Vedra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lines_of_torres_vedras.html

http://samilitaryhistory.org/vol102sm.html

https://www.voakorea.com/a/article----625----124496254/1348359.html

https://en.wikipedia.org/wiki/The_Disasters_of_War

저는 몇번 언급드렸다시피, 기독교에 관심이 많고 실제로 매주 교회에도 나가지만 그다지 믿음이 깊지 않은 반쪽짜리 신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앙심을 가진 분들을 이해도 하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느끼고 세상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만, 과연 그 신의 이름이 여호와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인지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이 없어요.  그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시작해야 이번에 쓰는 글에 대해 오해가 없겠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물론 정식 신학 공부를 하신 신부님들이나 목사님에 비하면 어림도 없겠습니다만, 믿음을 중시하는 일반적인 개신교 신자보다는 성경을 더 많이 읽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드는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가령 한가지 예만 들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부터의 내용은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진 두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둘다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것이 당연한 악당인데, 그 중 하나는 죽어가는 순간에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로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deathbed conversion'인데, 그래서 불신자들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만 참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 이전에는 아무리 악당으로 살아도 천국행 티켓 걱정은 없다' 라고 빈정대기도 하지요.  아무튼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같은 장면을 그린 마태복음 27장 38절부터의 부분을 보면 골고다 언덕에 매달리신 예수님 양편에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진 두 강도가 예수님을 함께 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히 두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욕합니다.  왜 같은 성서에 서로가 모순되는 사실이 적혀 있을까요 ?  (참고로 이런 점에 대해 여쭈어 보면, 대부분의 열혈 신자들은 '너의 믿음이 약해서 그렇다' 라고 답합니다.  감히 목사님과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습니다.  일단 무릎 꿇고 기도부터 하자고 하실 것이 겁나서 그랬어요.)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신앙심이 전혀 없을 때 제가 받은 느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초기에 그냥 사실 그대로 쓰였는데, 누가복음은 더 뒤에 쓰여져 이런저런 픽션(?)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다' 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결론을 얻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제 주변의 일부 열혈 개신교 신자분들은 이런 제 나름대로의 해석에 펄쩍 뛰십니다.  성서는 사람이 제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에 따라 쓰여진 것이므로 어느 글자 하나도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게 된 지금도, 저는 그런 말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반쪽짜리 신자인가 봐요.  그래도 지금의 저는, 모세가 홍해를 둘로 갈랐다는 것이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또 골고다 언덕의 강도 중 한 명이 예수님을 찬양했건 욕했건 그런 역사적 사실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의 어느 독실한 신학생이 유럽 어디론가 신학 유학을 가서 겪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차 목사가 될 독실한 신학생들로 가득찬 그 강의실에서 신학 교수님이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고 실제로 믿는 사람 손들어봐라' 라고 하니 유럽 출신 백인 학생들은 아무도 손을 안드는데, 자기만 손을 들더랍니다.  그러니까 그 신학 교수님이 웃으며 '너는 정말 그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고, 또 만약에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너의 신앙심이 흔들리느냐?' 라고 묻더랍니다.  저도 뭐라고 말로 설명은 잘 못하겠는데, 그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꼭 이렇게 해야만 신앙심이 생깁니까 ?)




하지만 아직도 깊게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문점이 있습니다.  짧고 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진보인데 왜 목사님들은 보수인가 ?"


너무 짧게 써서 질문 자체가 무척 잘못된 점이 많습니다.  가령 진보와 보수의 개념부터 시작해서, 모든 목사님들이 보수 성향을 가진 것이 아니다 등등 문제가 많은 질문이지요.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을 묻는 것인지 다들 이해하실 질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예수님 말씀인지 마르크스의 말인지 헷갈리는데...    

"각자의 능력에 따라 걷어" 사도행전 11장 29절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눈다" 사도행전 4장 35절)




예수님은 부자나 재물을 적대시하지는 않으셨지만, 분명히 부자와 권력자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굳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라는 유명한 구절이 아니더라도, 공관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언행을 읽으신 분이라면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자들과 창녀들, 그리고 현재로 따지면 일본군 헌병 보조에 해당하는 민족적 배신자인 세리들처럼 점잖은 사회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돕지 않는 것은 주님을 외면하는 행위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게다가 기존 기득권층인 유대 제사장의 이익에 어긋나는 언행을 많이 하신 결과, 결국 십자가에 매달리는 끔찍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예수님의 행보를 다분히 진보적이라고, 더 나쁘게 왜곡하면 빨갱이스럽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겪은 바에 따르면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간지가 벌써 만 20년입니다) 적어도 한국 개신교 목사님들은 상당수가 보수 우익이십니다.  제가 직접 보고 들은 몇가지 사례들을 나열하자면... 그건 교회 목사님들의 너무 안 좋은 면을 내비치는 것 같아 관두겠습니다.  


저는 대형 교회 두 곳을 다녀 보았고, 지금은 작은 동네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만, 그런 경향은 대형이나 작은 교회나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대형 교회에서는 좀더 재물 이야기를 많이 하기는 했습니다.  심지어 예배 시작할 때 장로님이 앞에 나와 기도를 올리시면서 "불신자들이 저희를 비웃지 않도록 저희에게 재물을 내려주소서" 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는 경우까지 보았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정말입니다.)  특히 십일조를 강조하셨는데, 정말 여러번 반복하신 설교 내용이 미국의 록펠러나 포드 같은 재벌들이 십일조를 꾸준히 낸 덕분에 그렇게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러분 중에서도 그런 큰 부자가 나와서 우리 교회를 크게 흥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좋은 축복 내용입니다만, 저는 뭔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한국 전통의 구복 신앙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이 소싯적 가난할 때부터 십일조를 낸 덕분에 당시 뉴욕타임즈가 "the most cruel, impudent, pitiless, and grasping monopoly that ever fastened upon a country" 이라고 평가한 Standard Oil 사를 창립한 록펠러이십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만 이 분에 대해 듣는다면 세상에 이렇게 착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 행했던 그 모든 악... 에이 아닙니다.)




전에도 한번 쓴 적이 있었습니다만,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성경 구절은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저는 전에 어느 분의 장례 미사에 갔다가, 신부님이 읽어주시는 이 글귀를 듣고... 감동도 좀 먹었지만 사실 좀 무섭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말 지옥에 갈 죄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지요.  세상에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 가족의 행복과 안녕이 더 급하고 더 귀하기 때문에 기부도 많이 안 하는 편이거든요.  아마 그때부터였나... 저는 복지를 위한 중과세에 적극 찬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지를 구현하여 세상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 되면, 저의 가련한 영혼의 죄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45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굶주리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자 동네에 살아서 직접 마주칠 일이 없더라도,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매일 그런 사연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는 그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녔던 대형 교회에서는 그런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목사님들이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씀하시는 것을 정말 들은 적이 없어요.  그에 비해 록펠러 이야기는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심지어 '일반 신도 수백명보다, 그렇게 거액의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신도 한 명을 얻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라는 말씀을 하는 것까지 들었습니다.  (거짓말 같은데, 정말입니다.)  정말 개신교는 자본주의에 맞게 진화한 것 같았습니다.  하긴, 신년맞이 예배에서 목사님이 엄숙하게 '올해의 목표, 1. 교육관 건립  2....' 하는 식으로 그 해의 목표를 정해주시는 교회였으니, 제가 '대체 여기가 교회냐 회사냐 ? 잘하면 올해의 목표 헌금액까지 정해져 나오겠네' 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리도 아니었지요.  (참고로 그 교회는 결국 교회 본당만큼 커다란 교육관을 세웠습니다.  할렐루야 !)


저는 한국 교회의 이러한 변질이 꼭 한국 개신교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교계도 변질되고 부패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고, 카톨릭도 내부에는 많은 부패와 부조리가 있겠지요.  생각해보면 모든 종교는 시작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창시되었으나, 종교 권력으로 성장하면서 결국은 부와 권력 편에 서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직접 보고 느낀 한국 교회의 모습은 정말 좀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모든 것이 결국은 돈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결국 무슨 일이든 벌이려면 예산이 필요하고, 예산에는 당연히 권력이 따라 붙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카톨릭이 그나마 그런 경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이미 카톨릭은 전세계적으로 탄탄한 조직과 재원이 마련되어 있고 개인적인 가정이 없으므로, 그런 돈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원래 유대교는 아무데서나 하나님께 제사를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루살렘 지성소 바로 밖에 있는 지정 장소에서, 대제사장의 집전 하에서만 제물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교리는 대제사장 계급의 막대한 경제적 이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바쳐지는 제물로 인한 경제적 이익, 특히 성전에 봉헌되기 위해서 반드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을 성전세 지불용 화폐인 셰켈로 환전해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점적 환전 이익이 막대했거든요.  그 부분을 읽으니, 다들 아실만 한 어느 유명 복음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집에서 읽은 문답이 기억났습니다.  




(이것이 성전세 납부용으로 사용된, 예루살렘에서 주조된 화폐 shekel 은화입니다.  이 은화는 반 (half) 셰켈짜리입니다.  당시 성전세는 당시 성인 남자 일인당 반 셰켈로 정해져 있었으므로, 좋든 싫든 일반적인 화폐 데나리온을 반드시 반 셰켈 또는 셰켈로 환전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차익이 대제사장의 손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 문답에서, 어느 신자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은데,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대신 직접 그 사람들 또는 단체에 기부를 하면 안될까요 ?' 하고 물으니, 그 교회의 단호한 답변은 이랬습니다.  '안된다.  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돕겠다는 것은 개인의 오만이다.  반드시 교회에 바쳐라.'


성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지성소에 쳐진 장막이 찢어졌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소통해야 한다는 제약이 사라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교회에서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 빈민을 돕는 것이 '개인의 오만'이니 허락할 수 없다는 모습에서, 저는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비난하시던 유대교 제사장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 혁명을 추구하셨지만, 성전에서 대제사장의 돈벌이판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시고는 희생 제물용으로 판매되던 가축들을 쫓아내고 환전상의 가판대를 힘으로 뒤엎으셨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예수님이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신 것은 권력을 이용하여 성전에서 경제적 독점권을 취하던 이들을 내쫓을 때 뿐이었습니다.)




저는 성서를 글귀 한글자한글자에 교조주의적인 맹신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전에 다녔던 대형 교회에서는 어느 복음서의 시작 부분이 '너희가 강녕하기를 바라노라' 라는 당시의 평범한 인사말로 시작하는 것을, '봐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돈 많이 벌고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신다' 라며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해석하시더군요.  특히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를 바치면 그 백배천배의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될 거라는 부분은 글귀 하나하나를 정말 너무나 애용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에 가려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부분은 그렇게 글귀만 보고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딱 선을 그으시지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개신교와 카톨릭이 정면 충돌하는 부분이 제사 부분입니다.  개신교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라는 십계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금지하는 것에 비해 카톨릭에서는 제사 행위 자체를 우상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판단하여 허락하지요.  참고로 저는 제사 폐지론자입니다만, 제사가 우상 숭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돌아가신 조부모님이나 부모님 등의 분들에게 초능력이 있어서 간절히 모시면 우리 소원을 들어준다든지, 반대로 제삿상이 부실하면 화를 내고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  교회에서도 우상의 정의를 '주님보다 더 소중히 모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현대의 한국 교회들 중 많은 수가 주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돈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정말로 주님을 따른다면 성경 내내 여러차례 반복되는 아래의 말씀들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서 58:7

너희는 굶주린 자에게 너희 음식을 나눠 주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사람을 너희 집으로 맞아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고 도움이 필요한 너희 친척이 있으면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어라.


누가복음 18:22

예수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너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요한일서 3:17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뜻이 이 사회에서 가장 잘 구현될 수 있는 길은 사회 복지 확대입니다.  결국 사회 복지 확대 재원을 위해서는 부유층에게 어느 정도 증세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것 때문에 부유층에서는 진보적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부유층과 밀착한 언론에서는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끌어들여 진보 정권을 공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주님을 따른다는 개신교 목사님들이 극우파스러운 언행을 하시는지 정말 의아합니다.  도대체 (일부) 한국 개신교 목사님들은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길래 '남이야 어떻게 되건말건 많은 돈을 모아서 대를 이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주님의 은총을 입증하는 길'이라고 믿게 된 것일까요 ?  개탄스럽습니다.  



* 예전에 다음 블로그에 썼던 글 약간 고쳐서 다시 올린 것입니다.  매주 목요일엔 주로 과거 글을 옮겨 옵니다.


** 물론 훌륭한 목사님들과 훌륭한 성도님들 많습니다.  개신교 전체를 매도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반쪽짜리이긴 하지만) 저도 개신교 신자입니다.


*** 댓글 중에 '예수님께서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건 진보 성향인가 보수 성향인가' 라고 물으신 분이 있었고, 바로 그 밑에 다른 분이 '그건 예수님 말씀이 아니라 바울의 말씀이다' 라고 댓글을 다셨네요.   찾아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 


6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여러분은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과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7 여러분은 우리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제멋대로 살지 않았으며

8 아무에게도 공밥을 얻어먹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밤낮 수고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9 우리가 여러분에게 도움을 받을 권리가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고 몸소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10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 고 가르쳤습니다.

11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12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명령하며 권합니다. 조용히 일하며 자기 생활비를 벌어서 살도록 하십시오.


이건 당시 텟살로니카 교회에서 공연히 사건만 일으키고 신도들에게 경제적 부담만 줄 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원래 바리새인으로서, 바리새인들은 율법학자로서 살더라도 종교 활동을 본업으로 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율법학자가 되기 전에 텐트 제조 기술을 배웠고 실제로 사역 활동 중에도 노동을 해서 스스로의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사도행전 18:3   바울은 그들의 직업이 자기처럼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으므로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일하였다.


결론적으로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라는 말씀은 노동을 하지 않는 전업 종교인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일을 하지 않고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전적으로 사역만 했는데... 제가 알기로는 베드로와 바울의 관계가 썩 매끄러웠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은 저 말씀을 '노동을 하지 않는 자본가들'을 공격하는 용도로 쓰는 모양입니다.  확실히, 자본주의적인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1936 CONSTITUTION OF THE USSR


ARTICLE 12. In the U.S.S.R. work is a duty and a matter of honor for every able-bodied citizen, in accordance with the principle: "He who does not work, neither shall he eat."

The principle applied in the U.S.S.R. is that of socialism: "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work."




10월 5일, 프랑스군 전위 부대에게 사로잡힌 영국군 포로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보고가 마세나에게 들어왔습니다.  영국군이 서둘러 '방어선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태까지 마세나는 웰링턴이 1809년 1월 코루냐로 후퇴하던 무어 장군과 똑같은 신세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웰링턴의 영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놓치는 정도이고, 리스본 함락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국군 포로 취조 보고서에 따르면 웰링턴의 목적지는 리스본 항구에 정박한 영국 수송선이 아니라 어디엔가 구축해 놓은 방어선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세나는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부사쿠 능선 같은 천혜의 방어선조차도 (비록 빙 우회하느라 시간은 걸렸지만) 간단히 돌파했는데, 영국군이 리스본 앞에 무슨 병정놀이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해봐야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프랑스군이 그 방어선이라는 것의 실체를 처음 접한 것은 그로부터 또 일주일이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10월 11일, 소브랄(Sobral)이라는 작은 마을에 영국군 1개 중대 정도가 전초 진지를 마련하고 있는 것을 몽브렁(Montbrun) 장군의 기병대가 발견했습니다.  문제는 이 마을도, 그 마을에 들어앉은 영국군 부대도 아니었습니다.  그 마을 뒤에는 낮고 긴 언덕이 병풍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그 언덕 위에 일련의 요새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 것이 프랑스군 기병대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음날 현장에 도착한 쥐노(Junot)의 보병 사단이 소브랄 마을의 영국군을 간단히 내쫓았으나, 이들이 도망쳐 들어간 언덕 위의 요새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해 직접 이 영국군의 방어선을 본 마세나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언덕 위의 영국군 방어선이라는 것은 하나의 길고 높은 벽이 아니었고 일련의 보루(redoubt)와 옹벽(ravelin), 강화진지(blockhouse) 등으로 이루어진 느슨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런 각각 독립된 보루들은 상호 지원이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하여 어느 하나를 돌파하기가 쉽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바로 10여일 전에 부사쿠 능선에 자리 잡은 영국군의 철벽 방어를 경험한 마세나로서는 저렇게 대포와 참호, 옹벽으로 도배질 이 된 방어선 뒤에 틀어박힌 영국군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젊음을 스타크래프트에 바쳤던 저로서는 그 느낌 알지요.)





(제가 옹벽이라고 번역해놓은 ravelin은 윗 그림과 사진에서 성벽 앞에 위치한 쐐기 모양의 낮은 외벽을 뜻합니다.  성벽 본체 앞에 저런 쐐기 모양의 벽을 배치하고 거기에 대포와 수비병을 보강하여 성벽 본체를 더 강화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윗 사진은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의 일부는 아니고, 다른 지역의 요새 사진입니다.)




(제가 강화진지라고 번역해놓은 blockhouse의 모습입니다.  보통 여기에 대포도 장착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에 대항하여 버틸 수 있도록 한 작은 요새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영국 해변에 많이 설치된 마르텔로(Martello) 탑도 blockhouse의 일종입니다.)




마세나는 두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습니다.  먼저 영국군 방어 진지의 규모와 견고함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렇게 길고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프랑스군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무엇보다 기동성을 중시하고 적 야전군의 격파를 노리는 프랑스군이라면 저렇게 막대한 예산을 들여 오랜 시간 삽질을 하느니 차라리 그 예산으로 총과 대포, 수송용 말과 노새를 더 구입하여 병력을 더 충원하고 훈련시켰을 것입니다.  저 방어선은 정말 영국군처럼 돈과 물자가 풍부한 대신 병력이 부족한데다 방어전에 특화된 군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고, 또 영국군에게만 가능한 물건이었습니다.


마세나가 놀란 이유는 하나 더 있었습니다.  실은 놀랐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일이었지요.  바로 10여일 전 부사쿠 능선을 우회하여 돌파한 것처럼 저 방어선도 굳이 돌파하지 않고 그냥 우회하면 간단히 해결될텐데, 웰링턴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무식한 방어선을 구축해놓은 것일까요 ?  설마 저 방어선이 테주(Tejo) 강부터 바다까지 연결된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방어선은 테주 강부터 시작하여 바다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  이 방어선을 우회할 길을 찾기 위해 방어선의 양측면으로 출동한 기병대는 가도 가도 저 방어선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를 했길래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방어선을 구축해놓았던 것일까요 ?  




(저 지도에서 점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입니다.  보시다시피 1차선과 2차선, 최종적으로 3차선까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저 1차선조차도 돌파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마세나가 만난 방어선은 약 1년 전인 1809년 11월부터 건설에 들어갔었고, 영국-포르투갈 측에서는 이 방어선을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최북방의 거점 마을이 토헤스-베드하스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 엄청난 시설물은 1809년 7월 스페인 탈라베라(Talavera) 전투에서 웰링턴이 승리하고도 허겁지겁 도망쳐야 했던 쓰라린 기억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시 웰링턴의 영국군은 주르당의 프랑스군의 공세를 잘 막아냈으나, 측면에서 술트가 예상보다 큰 규모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온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하면서 내빼야 했지요.  그때의 경험에서, 웰링턴은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결국 야전으로는 승산이 없고 방어전을 펼쳐야 하는데, 그러자면 영국과의 보급선 기지인 리스본을 사수하기 위한 굳건한 진지가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 방어선의 초안을 만든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07년 쥐노(Junot)가 이끈 제1차 포르투갈 정복 때, 쥐노의 부하 중 벵상(Vincent)이라는 대령이 리스본 주변의 지형을 관찰한 뒤 이런 방어선이 가능하겠다는 초안을 만들어 쥐노에게 제출한 바 있었습니다.  물론 쥐노에게는 그런 방어선을 만들 필요도 시간도 재원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 보고서가 돌고 돌아 결국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고, 네바 코스타(Neves Costa)라는 포르투갈군 소령에 의해 좀더 구체화된 뒤에 웰링턴에게 채택된 것이었습니다.  




(리스본 일대의 지형입니다.  보시다시피 리스본은 사실상 작은 반도의 남쪽 끝에 붙어 있었으므로, 테호 강과 대서양 사이에 철통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어렵긴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리스본 북쪽의 지형이 꽤 험하다는 점과, 테주 강이 바다와 만날 때 거의 큰 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넓은 하구를 구성한다는 점, 그리고 영국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리스본은 그 거대한 테주 강 하구의 북쪽 강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작은 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북쪽의 험한 지형의 언덕들을 잘 이어 붙이면 테주 강부터 대서양 연안까지 이어지는 30~40km 정도 길이의 방어진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부사쿠 전투 때 웰링턴이 요새도 없이 그냥 능선에 의지하여 펼쳤던 방어선의 길이가 약 10km 남짓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요새와 옹벽 등으로 강화한 방어선을 40km 정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데다 주도면밀하기까지 했던 웰링턴은 한줄의 방어선으로는 안심이 안 되어 약 10km 후방에 더 견고한 제2 방어선을 또 구축했고, 또 리스본 서쪽 강가에의 사오 줄리오(São Julião)에는 작은 규모로 제3의 방어선까지 구축했습니다.  게다가 리스본의 남쪽을 가로막은 테주 강 하구는 거의 바다라고 생각될 정도로 넓어서, 제해권을 장악하지 않는 이상 도하가 불가능했습니다.  




(현재의 토헤스-베드하스 방어선은 윗 사진과 같은 주요 성채와 보루 등만 일부 남아 있습니다.)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의 일부로 편입된 기존 성채의 모습입니다.  토헤스 베드하스는 이렇게 기존 시설과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렇다고 웰링턴이 자신의 군사적 무능함을 돈과 물자로 때우려는 무식한 작전에만 의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이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든 시간은 고작 11개월, 비용은 1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대략 250억원)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웰링턴이 포르투갈 주재 영국 대사인 존 빌리어스(John Villiers)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영국군이 포르투갈에서 작전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이 매달 20만 파운드라고 했으니 저 정도 예산이면 정말 합리적인 비용으로 극강의 효과를 보여준 방어선을 구축한 셈이었습니다.  이는 지형 지물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한 영국군 공병대의 기술적 우수성과 함께 나라를 지키겠다는 포르투갈 노동자들의 열정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특히 1년 간이나 이 정도의 대공사를 진행하면서도 프랑스 측에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은 것은 정말 경탄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실은 프랑스 측 뿐만 아니라 영국군 병사들과 포르투갈 시민들조차도 리스본 북쪽에 그렇게 거대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고 하니, 보안에 정말 철저했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마세나도 이 벽에 부딪힌 뒤 어쩔 줄 몰라했던 것이지요.


또한 웰링턴이 마세나를 위해 준비한 것은 이 토헤스-베드하스 방어선 하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벽은 벽일 뿐, 벽으로 적을 몰살시킬 수는 없었지요.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궤멸시킬 웰링턴의 비장의 무기는 별도로 준비되어 있었고, 마세나가 이 방어선 앞에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사이 이미 작동을 개시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바다까지 이어지는 철통 방어의 선구자는 아테네와 피라에우스 항구를 연결하는 아테네의 장성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벽의 길이는 6km에 달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일찌기 '벽 뒤에 숨는 자는 결국 진다' 라고 말한 바가 있었고, 결국 아테네는 스타르타에게 패배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 나폴레옹 자신도 생-장-다크레의 성벽 뒤에 숨은 투르크군에게 패배당하기는 했습니다.)







Source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peninsular.html

https://en.wikipedia.org/wiki/Lines_of_Torres_Vedra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lines_of_torres_vedra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