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해외 언론에 트럼프의 작년말 법인세 대폭 인하 효과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Trump’s tax-cut party is officially over

https://finance.yahoo.com/news/trumps-tax-cut-party-officially-204513240.html


별로 긴 기사도 아니지만, 요약하면 '기업 세금을 대폭 깎아줬지만 트럼프의 선전과는 달리 그 혜택 대부분은 기업의 금고를 채우기만 할 뿐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극히 작더라' 라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법인세 인하를 비판하는 비슷한 내용의 기사는 매우 많습니다.  (물론 반대로 찬양고무하는 내용도 많습니다.)


'Trump’s Tax Cut Hasn’t Done Anything for Workers'

https://www.bloomberg.com/opinion/articles/2018-07-18/trump-s-tax-cut-hasn-t-done-anything-for-workers


'The Trump Tax Cuts Did One Thing: Give Rich People More Money'

http://nymag.com/intelligencer/2018/09/trumps-tax-cuts-did-one-thing-give-rich-people-more-money.html


'How the Trump Tax Cut Is Helping to Push the Federal Deficit to $1 Trillion'

https://www.nytimes.com/2018/07/25/business/trump-corporate-tax-cut-deficit.html


'No, Trump’s Tax Cut Isn’t Paying for Itself'

https://www.nytimes.com/2018/10/17/business/trump-tax-cuts-revenue.html


'FactCheck: have the Trump tax cuts led to lower unemployment and higher wages?'

http://theconversation.com/factcheck-have-the-trump-tax-cuts-led-to-lower-unemployment-and-higher-wages-101460


목요일엔 과거 다음 블로그 내용을 퍼나르고 있는데, 오늘은 위 기사와 관련된 내용인 "문제는 세금이야 이 멍청아 !"를 퍼왔습니다.  


이 글은 정치글이라기 보다는, 노벨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이라는 경제학자의 저서 '미래를 말하다' (원제는 The Conscience of a Liberal, 즉, 어느 진보주의자의 양심)이라는 책을 읽고 난 뒤에 적은 독후감 내지는 요약 정도입니다.  책의 내용이 많다보니 지루하지 않게 요약하기도 쉽지 않네요.   이 자극적인 독후감 제목은 이 책 본문에 나오는 클린턴의 선거 구호인 '문제는 경제야 이 멍청아 !' (It's the economy, stupid ! 에서 따왔습니다.)






지루해하실 분들을 위해 인터넷 상에 글을 올릴 때의 필수 사항인 3줄 요약을 (감히) 저 나름대로 해보자면 이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미국 역사상 가장 빈부격차가 작고 노동자들에게 풍요로운 시대였던 1930년 대 후반 부터 1970년 대 초까지의 '대압착시대'는 무거운 세금과 큰 정부 정책을 썼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산물이다.


-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정치 성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정치 환경의 변화로 부자들에 대한 세금이 가벼워지면서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다.


- 지금도 우파에서는 부유층과 재계의 이익을 정치판에서 대변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싱크탱크들과 언론기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진보진영에서는 이에 대적할 세력이 부족하다.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라는 1985년 영화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J 폭스라는 뜰 뻔 하다가 결국 못 뜬 배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워낙 유명해서 이 영화 안 보신 젊은 분들도 대략 그 영화의 줄거리는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는 시점은 1955년입니다.  왜 하필 돌아가는 배경이 1955년인가는, 일단 주인공의 부모가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이던 시절로 주인공이 돌아가 자신의 부모와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함이지요.  그러나 이유는 또 있습니다.  바로 그 시절이 미국 역사상 가장 근심 걱정없고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황금 시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 아니 소련과의 핵전쟁 공포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뭐 그다지 현실적이지는 않았고, 베트남 전쟁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히피들도 없었으며, 마약 문제도 아직 없았고 범죄율도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상당히 풍요로왔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타임머신 장치로 저 드로리안 스포츠카가 사용되었습니다만, 원래는 냉장고를 타임머신으로 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냉장고 안에 기어들어갔다가 질식사할까봐 스포츠카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왜 시대에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왔을까요 ?  실은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왔다기보다는, 중산층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더 두터웠다는 정도가 맞는 표현입니다.  원래 미국은 중산층의 비율이 높은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 대까지, 미국은 일부 계층이 석유, 철도, 철강 등의 산업을 독식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했습니다.  영국이나 독일 등 유럽에서 이미 오래 전에 도입한 의료 보험이니 노인 연금이니 하는 기본적인 복지 제도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따라 부유층에 대한 세금도 상당히 낮은 편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고전적인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정리해줄테니 정부는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가만히 있으라는 주의였지요.   노조요 ?  20세기 초 미국에는 많은 노조들이 있었고, 유럽을 휩쓸던 공산주의의 위협도 있고 해서, 이들을 바라보는 미국 정부의 시선도 무척 곱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노조들은 기업과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미국도 영국도, 이런 노조의 파업이 많았고, 또 군경을 이용해서 잔인하게 탄압했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일시에 바꿔버리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바로 1930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이었지요.  이런 미증유의 사태 속에서 민주당의 루스벨트 (Franklin D. Roosevelt)가 대통령이 되어 뉴딜 (New Deal) 정책을 펼칩니다.  한마디로 여태까지 추구해왔던 작은 정부를 포기하고, 국가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많은 재정 지출을 하는 것이 뉴 딜 정책의 핵심이었지요.   루스벨트의 첫 임기 때 소득세 상한선은 63%까지 올라갔고, 두번째 임기 때는 무려 79%까지 올라갔습니다.  1920년 대 소득세 상한선이 24%였고, 유산에 대한 상속세 상한선도 20%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부자들에게는 지옥같은 나날이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는 한술 더떠서, 냉전 비용 충당을 위해 상한선이 91%(!!) 까지 올라갔습니다.  개인 뿐만이 아니라 기업 이익에 대한 평균 연방세도 1929년에는 14%에 불과하던 것이, 1955년에는 무려 45%까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뉴딜 정책이 부자들에게 가혹한 희생을 강요한 반면, 육체 노동자들에게는 큰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1930년대야 모두 힘들었겠으나, 194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는 30년은 미국 노동자들에게는 황금기였습니다.  흔히 미국이 대공황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전쟁을 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건물들을 때려부순다고 경제가 부흥할 수 있다면 지금은 왜 그러지 않겠습니까 ?  누군가는 비용을 대야 했는데, 그 비용은 결국 부자들이 세금을 내서 댔던 것이지요.  미국 노동자들이 1940년대부터 황금기를 누린 것은 바로 뉴딜 정책에 의해 많은 일자리가 생긴 것과 동시에, 노동 계층에 우호적이었던 미국 민주당 정권에 힘입어 노조 세력이 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체 노동자들이 다 노조에 가입된 것도 아니었고 고작 30% 정도의 노동자들만 노조 소속이었으나, 노조가 있는 큰 산업군에서의 임금 협상이 다른 기업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노조원 노동자들도 임금 인상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1933년에 루스벨트가 시행한 농가 보조금 법안, 즉  the Farm Relief Bill 이 전통적인 미국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비판 만화입니다.  도덕적 해이 어쩌고 했던 이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은 꽤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1952년 드디어 민주당으로부터 백악관을 탈환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1954년 자신의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어떤 정당이든 사회보장이나 실업보험제도를 폐지하려고 한다거나 노동법과 농업지원 프로그램을 없애려든다면 다시는 그 정당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좌파적인 법안들을 폐지할 수 있다고 믿는 텍사스 석유 재벌 등 몇몇 기업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소수인데다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평가절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 계층의 소득이 크게 향상되어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는 가구의 퍼센티지가 크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는 부유층의 희생을 수반했습니다.  이 책 본문 중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1950년대 중반이 되면 부유층이 모여 살던 롱아일랜드의 골드코스트의 대저택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대저택들이 헐값에 팔려 헐린 뒤 그 부지에 중산층들이 살만 한 작은 집들을 건설하든가, 살인적인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비영리기관이나 정부에 기증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때의 대저택들이 컨트리 클럽이나 요양원, 수련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 나왔던 저택들이 바로 그 롱 아일랜드의 골드코스트 저택들입니다.  구글에 long island gold coast mansions 라고 치면 볼만 한 그림들 많이 나옵니다.   크루그먼에 따르면, 당시 부자들이 이런 저택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일반적인 임금이 워낙 많이 올라서, 저런 저택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정원사니 하인이니 하는 인건비가 너무 많이 들어갔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보수화된 공화당이 집권하면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기에는 1970년대를 강타했던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당시 크게 치솟은 범죄율, 그리고 베트남전 패배로 인한 동남아의 공산화와 소련의 아프간 침공 등으로 인한 안보 불안감이 크게 작용합니다.  우경화된 공화당 정권은 노조를 적극적으로 탄압했고, 또 이미 빈부 격차가 많이 줄어들어 더 이상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대중들은 노조에 등을 돌렸습니다.  또한 우경화된 공화당이 남부의 뿌리깊은 인종 갈등을 교묘하게 잘 활용한 것도 공화당 집권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1964년 3명의 민권 운동가 살해 사건 실화를 그린 영화 미시시피 버닝입니다.  미국 역사도 조금만 들춰 보면 정말 미국이 선진국 맞나 싶은 그런 이야기가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저자 크루그먼은 책 속에서, '자신도 이 책을 쓰기 전에는 경제의 흐름에 따라 대중이 영향을 받아 정치 판도가 바뀐다고 믿어왔는데,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를 해보니 정반대더라, 즉, 정치 판도가 바뀌어 세금 제도와 사회 규범 등이 바뀌면 그에 따라 경제의 흐름이 바뀌더라'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재계는 이 사실을 정확히 깨닫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치판을 이끌기 위해 많은 돈을 쓰고 있습니다.  미국 정치판도 우리나라보다 크게 우월하지는 않아서, 선거자금을 얼마나 동원하느냐가 선거에서의 승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재계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합법적으로 기부받는 정치인들이 재계의 이익에 반하는 법안을 함부로 낼 수 없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재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높은 세율을 낳게 되는데, 사실상 돈은 대부분 재계에 있으므로 결국 그 부담은 재계가 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실제로 표를 가진 국민 대다수는 높은 세율과 그에 따른 많은 사회복지로 인해 혜택을 보게 되므로, 선거철에 그런 법안을 내는 의원이나 대통령을 뽑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재계는 많은 싱크탱크 (think tank)를 운영하면서 '사회복지가 늘어나면 도덕적 해이가 생겨난다'  '최저 임금제는 일자리 수를 줄여 오히려 서민 계층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줘야 서민들이 더 잘살게 된다'  '의료보험을 민영화해야 국민들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등등의 해괴하고 입증도 안된 괴담을 마치 역사 속에 엄연히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언론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 재벌들은 단지 재계로부터의 광고 수익 뿐만 아니라, 부자인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그런 싱크탱크의 미심쩍은 연구 결과를 국민들에게 진실인 것처럼 홍보하는 것이지요.




(헤리티지 재단은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파 싱크탱크입니다.)




미국이라고 뭐 하바드 경제학과를 졸업한 학생에게 돈과 명예를 누릴 기회가 무궁무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헤리티지 재단같은 유명한 싱크탱크에서 손을 내밀어 높은 연봉을 제시한다면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또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세력이 어디인지 뻔히 아는 학자들이 자신의 고용주의 이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다 학자적 양심으로 옳은 소리했다가 파면 당한 학자의 사례도 이 책에서 제시됩니다.   크루그먼은 이런 보수파들의 대국민 홍보 전력이 막강한 것에 비해, 진보파의 전력이 무척 빈곤한 것에 우려를 표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예일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해도, 이 노곤한 세상의 돈 논리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거든요.  크루그먼이야 노벨상도 받은 워낙 유명한 학자이고 대학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이 있으니 이런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 대학 교수님들도 이왕이면 이런저런 재계 강연회에 나가서 두둑한 강연료를 받고 또 연구 비용 후원을 받는 것이 싫을 리가 없지요.




(만화는 헤리티지 재단에서 풍겨나오는 악취가 온나라를 더럽히고 있다고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보수파는 필연적으로 재계의 후원을 받기 때문에, 학문의 방향을 보수파 쪽으로 정한다는 것은 부와 명예의 기회가 그만큼 더 많아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그만큼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몰리니까 그 안에서의 경쟁도 치열하겠지요.)




그래서 저도 이번 편에서는 어지간한 박사님들을 압도하는 '노벨상에 빛나는' 폴 크루그먼 교수의 저서에 대해 독후감을 쓴 거에요.  물론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책이라고 해서 다 맞는 말만 쓴 것은 아닙니다.  가령 저 위에 소득세가 79%까지 올라갔다는 부분은 다소 오도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이는 당시 록펠러를 희생양 삼아 국민들을 달래려는 쇼우맨쉽이 들어간 부분이었습니다.  당시 저 세율에 해당할 정도로 돈이 많았던 사람은 록펠러 단 1명이었거든요.  또 (크루그먼 본인도 본문에 원인 중 다른 것들에 대해서 이미 썼습니다만) 40년대 노동자 계층의 소득 상승의 주요 원인을 오직 노조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쟁 통에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갔고 또 추가 이민자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는 일이 없었으므로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진 것도 분명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루스벨트의 정부는 전쟁 당시 국가 경제 활동을 모두 통제했는데, 기업들이 부족한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해 더 높은 임금을 제시하지 못하도록 정부의 승인없이는 임금 인상도 못하도록 할 정도였거든요.  또 전후 미국의 제조업이 사실상 거의 경쟁 없이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도 미국 노동자들이 계속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입니다.  (크루그먼은 이에 대해서도 본문에 이미 썼습니다.)




(전쟁통에 일손이 부족해 여성들에게도 일자리가 주어졌고, 결국 이는 여성 해방 운동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 책에는 많은 인용과 사례가 나옵니다만, 저소득층 어르신들이 '누가 뭐래도 빨갱이만 때려잡으면 돼' 라고 앵무새처럼 되뇌이거나, 일베에서 뭔가 정곡을 찌르는 댓글이 달리면 '네다홍'이라며 무조건 전라도를 까고보는 현상에 대해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 노동자들의 황금기였다는 시절을 30년이나 누리고도 아직 미국이 선진국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국가의료보험 제도가 없다는 것이 무척 의아하실 겁니다.  실은 그에 대한 시도가 1946년에 있었습니다.  트루먼이 단일 지불체계의 국민의료보험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현대의 미국보다, 당시의 미국은 이런 국민의료보험을 도입하기가 훨씬 유리했습니다.  아직 민간의료보험이 활성화되지 않아 국민의료보험과 정면으로 경쟁해야 하는 보험회사들의 세력이 크지 않았고, 또 GDP 대비 의료비 총액도 지금의 16%보다 훨씬 적은 4.1%에 불과했습니다.   국민의료보험이 도입되면 이익에 큰 손해를 보게 될 제약회사들의 로비도 아직 약했고요.  그런데도 실패했습니다.  왜였을까요 ?




(모두가 욕하는 미국의 의료보험제도... 더 좋은 것을 가질 기회가 있었으나, 미국 서민층은 그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습니다.  왜였을까요 ?  증오와 두려움 때문이었지요.)




일단 미국의학협회가 무려 500만 달러 (현대 시세로 2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들여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가족주치의들에게 자신들이 맡고 있는 동네 주민들에게 반대표를 던지도록 설득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당시 동네 주치의들은 그 동네의 신사계급이자 지식인계급으로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으니 그 영향력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의학의 사회주의화'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열심히 광고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흑인들이었습니다.  많은 남부 지방에서, 국민의료보험이 체계화되면 지역 병원에서 흑인 환자도 차별없이 받아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던 것입니다.  당시 백인들이 다니는 병원에는 흑인들이 출입할 수 없었는데, 국가 의료보험제도가 정착되면 자신들이 다니는 점잖은 병원에서 결국 흑인 환자들도 받아야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종 차별주의 때문에, 대부분이 저소득층이었기 때문에 국민의료보험 제도로 인해 큰 혜택을 보게 될 남부 백인들이 반대표를 대량으로 던진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백인들 용은 좋은 것으로, 흑인들 용은 개판으로 꾸며졌으나, 나중에는 '동일한 수준으로만 맞춰주면 백인용과 흑인용을 구분하는 것은 괜찮은 거 아니냐' 라는 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저는 궁금한 게, 저 시절 가령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미국에 관광 갔다면 백인용으로 가야 했을까 흑인용으로 가야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사정과 다른가요 ?  일베가 보수층을 대변한다면 상당히 거북한 분들이 (좌건 우건) 많겠습니다만, 제가 보니까 일베에서 가장 열심히 두들겨 패는 것이 전라도와 외국인 노동자들입니다.  특히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은 무조건 까야 하고 모든 논리와 진실을 다 묻어버리는 것이 정당화되는 요소더군요.  그런 말도 안되는 차별주의 덕분에, 미국의 의료 체계는 '정말 미국이 선진국 맞나 ?'라는 의구심을 들게 할 정도로 엉망이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많이 후퇴한 것 같습니다.   또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보수층이 매우 요긴하게 이용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고요.  이 책에서 인용되는 부분을 보면, 현재 미국에서 '소련을 무너뜨리고 감세로 경제 호황을 이끌어낸'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1명으로 뽑히는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출마할 때 행한 연설 중 하나가 흑인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즉, '만약 시민들이 집을 임대 놓을 때, 그 임대인이 유색인종인지에 따라 임대를 거부할 권리를 당연히 누려야 한다' 라며 노골적인 인종 차별주의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레이건의 인기가 2013년 당시엔 JFK는 물론 링컨마저 뛰어 넘었다는군요 !!)




이 아래부터는 독후감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견해...라기보다는 넋두리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확고한 중산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댓글 다시는 분들 중 일부는 저를 좌파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저는 우파입니다.  제가 이 사회에서 나름 풍족하게 먹고살 만 하고, 또 증세하면 아무래도 받는 혜택보다는 세금 부담 증가가 더 클 것 같은 계층인데, 저는 이런 상황을 더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그런데 일부분들이 제가 좌파라고 오해하실 정도로 증세와 복지 확대를 외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급진적인 좌파 정치인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여당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대오각성한 숀 펜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골 장터 한 구석 돼지우리 옆에 세워진 연단에서 진심 어린 호소를 통해 redneck, 즉 남부의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장면은 참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앤소니 홉킨스까지 나오는 초호화 배역에도 불구하고 완전 망했습니다.   제가 봐도 그 징면 이후로는 재미가 없더라구요.)




All the King's Men이라는 숀 펜과 쥬드 로 주연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 배경은 1950년대 미국이고, 숀 펜은 한물 간 사회 운동가로서 여당 측의 협잡에 휘말려 야당의 표 분산을 위해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속물로 나옵니다.  그러다 그가 뭔가 대오각성하여 정말 '저 가진자들에게 한방 먹이자'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혼을 다한 선거 운동을 펼쳐 가난한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결국 정말 루이지애나 주지사에 당선되고 맙니다.  그는 선거 공약을 지키기 위해 온갖 도로망 건설이며 학교 건설, 복지 혜택 확대 등을 실시하는데, 이는 세금을 내야 하는 기업체들에게 고스란히 부담으로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쥬드 로는 신문기자로서 그런 숀 펜을 취재하다 결국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되는 사람 역을 맡았는데, 영화 속에서 원래 루이지애나의 부유층 가문 출신으로 나옵니다.  그런 그가 부유층 인물들과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사 중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즉, 어떤 기업가가 '저런 비용은 결국 누가 내는 것인가 ?  저건 결국 루이지애나를 파멸로 이끌 행동들이야'라고 한탄하자 쥬드 로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애초에 여러분들이 정말 루이지애나의 서민들을 위해 뭔가 일을 했다면 저런 인물이 주지사로 당선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일부 자칭 보수파 분들은 파이가 커져야 결국 노동자 계층에게 돌아가는 몫도 더 커지므로, 분배의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일단 기업이 잘되도록 부자와 기업에 대한 지원만 열심히 하면 결국 노동자 계층도 잘 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미국 시민 80%가 소유하는 금융 자산은 전체 금융 자산의 7%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그림인데, 정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노동자 계층이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중산층이 되었다고 보십니까 ?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들에서도 많은 노동 운동이 있었고, 그런 노동 운동은 항상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자애로운 마음으로 국민연금이나 국민의료보험 등을 만들었나요 ?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었습니다.  노조가 없는 삼성그룹이 가장 많은 임금을 주는 것이, 과연 노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보십니까 ?  삼성이 누구보다도 노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노조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조가 있는 다른 기업들보다 더 많은 임금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예에서 결국 노조의 역할이 없었던 것이라고 보십니까 ?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삼성이 노조를 탄압하는 방법 ?  간단합니다.  다른 회사 노조가 힘겨운 싸움 끝에 받아낸 임금 인상분보다 더 많은 임금을 삼성 노동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회사에도 노조가 없다면 ?  삼성이 과연 그래도 많은 임금을 줄까요 ?)




앞서 피를 흘린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모두가 1표씩의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구태여 폭력적인 노동 운동이나 혁명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그런 폭력에 적극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싸게 얻은 투표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별 다른 고민없이 보수층이 주입하는 보이지 않는 위협에 떨거나 부자 감세 신화 같은 것을 믿고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측에 표를 던지는 것도 자유입니다.  하긴 현재 야당이라는 인간들의 무능함, 구태와 부패를 보면 그쪽도 답이 안나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부자 감세 따위의 허무맹랑한 이론에 속지 않는다는 목소리는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자들이 누진세를 내는 것을 영광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대한 사회의 필수 요소이고, 더 나아가 강력한 방첩기관보다 더 효율적으로 빨갱이들을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PS.  미국이 대공황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뉴딜 정책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었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 큰 전쟁을 치르면 증세 없이도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그 전쟁 비용을 주머니를 털어 갚았던 것인지 궁금해서 미국의 국채와 소득세 최고 세율의 연도별 그래프를 찾아보았습니다.  아래 첫번째 그래프가 GDP 대비 미국 국채의 변화 추이입니다.  그 아래는 소득세 최고 세율의 변화 그래프입니다.







보시다시피, 전쟁 비용은 (일부 영국과 소련에게서 받아낸 빚을 빼고) 고스란히 국채로 남았습니다.  그 빚은 한마디로 미국 부유층의 주머니를 수십년 동안 무려 70~90%의 중과세로 털어내며 조금씩 갚았던 것이고요.  1980년이 될 때까지도, 미국의 부유층은 무려 70%의 소득세를 부담하고 있었더라고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레이건이 '부자의 세금을 깎아줘야 미국 경제가 살아난다' 라며 대규모 감세를 했고, 미국의 국채는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견들이 많겠습니다만, 이 그래프를 보면 미국이 빚더미에 오른 것은 과다한 의료비와 복지 혜택 때문이 아니라, 부자 감세와 전쟁 때문으로 보입니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줘야 기술의 발전이 있고 산업이 발전한다고요 ?  수십년간 자유세계 영공을 지킨 맥도널 더글라스의 F15 전투기는 최고 세율이 90%이던 1960년대에 개발이 시작되어 1972년에 첫 비행을 했고, 역시 수십년간 컴퓨터 세계를 지배한 IBM 메인프레임 S/360은 1964년도에 발표되었습니다.  세금 탓 하지말고 그들을 본받으셔야 합니다.

9월 27일 오전의 이 부사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500의 전사와 3600의 부상, 거기에 400에 가까운 실종자를 냈는데 비해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고작 전사 200에 부상 1000, 그리고 50의 실종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명백한 프랑스군의 참패였고, 그 원인은 마세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자신의 작전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에 대해 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우수한 지휘관은 패전의 충격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는 법이지요.  그는 실패의 원인이 생각보다 웰링턴의 방어선이 훨씬 더 길게 늘어져 있어서, 가파른 능선이라는 강력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습니다.  원인이 나오면 해법도 있기 마련이고, 해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훨씬 더 크게 우회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 날 오후에 패전의 상처를 추스린 마세나는 다음날 아침 기병대를 출격시켰습니다.  능선에 자리잡은 웰링턴의 방어선을 우회할 도로를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병대는 곧 쉽게 우회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불과 15k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사쿠 능선이 끝나는 지점이 나오고, 거기서 부사쿠 능선 뒤쪽을 돌아 쿠임브라(Coimbra) 시까지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부사쿠 능선을 넘는 것에 비해 30km 정도를 우회하는 것이니 거의 하루 더 행군해야 한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하루의 행군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적군을 몰아낼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마세나는 '진작 이럴걸'이라는 후회를 마음 한구석에 품은 채 즉시 군을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왜 진작 저렇게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  원래 프랑스군의 강점은 화력이 아니라 기동력에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마세나의 3개 군단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부사쿠 능선 위의 영국군에게도 훤히 내려다 보였습니다.  웰링턴에게도 그 의미는 명백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군이 부사쿠 능선 전체를 우회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웰링턴에게는 3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첫번째가 추격 및 섬멸, 두번째가 대응 행군, 세번째가 후퇴였습니다.


원래 전투에서 적의 사상자를 극대화하려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적의 등 뒤에 총알을 박아넣거나 기병대의 군도로 내리찍는 것은 모든 지휘관들이 꿈꾸는 바였지요.  그러나 비록 전날 부사쿠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라고 해도, 저 아래 행군을 시작한 프랑스군은 절대 패주하는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옵션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경우, 연합군으로서는 프랑스군보다 더 빨리 이동하여 그 우회로의 요지를 장악하고 더 강력한 방어선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은 이 두번째 옵션 대신 후퇴를 택했습니다.  사실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아무 미련없이 후퇴를 택했지요.  


웰링턴이 후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마세나의 침공에 맞서 그냥 계속 후퇴할 생각이었거든요.  부사쿠 전투가 벌어진 것도, 마세나가 넘으려던 부사쿠 능선이 방어전에 너무 좋은 위치이다보니, 마세나와 한판 붙어보고자 하는 욕망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마세나가 부사쿠에 미련을 갖지 않고 우회한다 ?  그러면 웰링턴도 미련을 갖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사쿠 능선 위에 모닥불을 평소처럼 피워 연합군의 후퇴를 프랑스군이 눈치 못 채도록 하고 거기에 후위대까지 남겨두는 치밀함을 보여주며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의 결정에 대해 많은 이들, 특히 포르투갈 측에서는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부사쿠를 포기한다는 것은 유서깊은 도시인 쿠임브라를 포기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전날 부사코 능선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성에 불안해 하던 쿠임브라 시민들은 웰링턴의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달아오르기도 전에 '연합군은 남쪽으로 철수하니 쿠임브라 주민들도 남김없이 피난을 가라'는 통보가 날아오자 주민들의 낙심은 그만큼 컸습니다.  




(몬데고 강 북안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도시 쿠임브라입니다.)




실은 웰링턴은 애초에 쿠임브라를 사수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이미 쿠임브라에 대해 강제 주민 소개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집과 상점, 농장과 창고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625 전쟁 때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때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한국을 지원해주고 있었으니 집과 논밭을 버리고 부산이나 경남으로 피난가더라도 미군이 주는 옥수수가루라도 먹고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10년 오만한 매부리코 영국군 장군의 명령에 따라 고향집을 버리고 떠나는 포르투갈 주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에게 맞아죽기 전에 굶어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부사쿠 전투가 끝나고 마세나의 군대가 북쪽 우회로로 이동하고 있던 9월 29일 밤에도 아직 쿠임브라 시민 80% 정도는 그대로 시내에 남아 있었습니다.  9월 29일 밤 이 사실을 알게된 웰링턴은 인정사정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장 쿠임브라를 떠나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쫓아내겠다'라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쿠임브라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앞서 웰링턴이 쿠임브라를 비롯한 각지의 주민들에게 강제 소개령을 내린 이유는 프랑스군에게 식량을 넘겨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과연 그런 소개령이 효과가 있었을까요 ?  적어도 약간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사쿠 전투 직전인 9월 24일 웰링턴이 마세나에게 프랑스어로 보낸 답장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구글 번역기 썼습니다.  저 프랑스어 잘 모릅니다.)



"Je suis fâché que votre Excellence sent quelques inconvéniens personnels de ce que les Portugais quittent leurs foyers à l'approche de l'armée Française. Il est de mon devoir de faire retirer ceux que je n'ai pas les moyens de défendre ; et j'observe que les ordres que j'ai donné là-dessus n'étaient presque pas nécessaires. Car ceux qui se ressouvenaient de l'invasion de leur pays en 1807, et de l'usurpation du Gouvernement de leur Prince en tems de paix, quand il n'y avait pas un seul Anglais dans le pays, pouvaient à peine croire aux déclarations que vous faites la guerre aux Anglais seuls ; et ils pouvaient à peine trouver la conduite des soldats de l'armée Française, même sous vos ordres, envers leurs propriétés, leurs femmes et eux-mêmes, conformes aux déclarations de votre Excellence."


"프랑스군의 진격을 피해 포르투갈인들이 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것 때문에 각하께서 개인적인 불편함을 좀 겪고 계신다니 유감입니다.  제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것이 제 의무인데, 사실 제가 내린 소개령은 거의 불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나라에 영국인이 단 한 명도 없던 1807년에 벌어진 프랑스군의 침략과 선전포고도 없이 왕정을 찬탈당했던 것을 잘 기억하는 주민들은 각하께서 배포한 포고문, 즉 각하께서는 포르투갈이 아니라 영국군만을 적대시한다는 말씀을 거의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은 각하께서 내리신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재산과 여인들과 자기 자신들에 대한 프랑스군의 행실이 각하의 포고령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아마 마세나가 웰링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군이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바람에 식량을 못 구해서 불편하다, 이건 신사들의 통상적인 전쟁 규칙에 어긋난다'라고 불평을 했었나 봅니다.  과연 영국군은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총검을 들이대고 피난을 떠나도록 강제했을까요 ?  설마 끝내 소개령에 응하지 않을 경우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을까요 ?  글쎄요.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최소한 프랑스군은 실제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사쿠 전투 약 1주일 전인 9월 20일, 마세나가 나폴레옹의 참모장인 베르시에(Berssier)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Monseigneur, nous ne marchons qu’à travers du désert; pas une âme nulle part; tout est abandonné. Les Anglais poussent la barbarie jusqu’à faire fusiller le malheureux qui resterait chez lui; femmes, enfants, vieillards, tout fuit. Enfin on ne peut trouver nulle part un guide. Nos soldats trouvent des pommes de terre, et d’autres légumes; ils sont fort contents, et ne respirent qu’après le moment de rencontrer l’ennemi. Les marches nous ont fort peu donné de malades”.


"각하, 우리의 행군은 마치 사막을 횡단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버려진 상태입니다.  영국놈들의 야만성은 극에 달하여 자기 집에 남아있던 불행한 주민들에게 총을 쏠 정도입니다.  여자, 아이, 노인, 모두가 도망쳤습니다.  결국 이젠 길잡이를 구할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감자와 기타 채소류를 찾았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좋은 편이고 적과 만날 때까지 쉬지 않을 기세입니다.  강행군으로 인한 환자는 매우 적은 편입니다."  




포르투갈인들에 대한 존중이 거의 없었던 웰링턴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영국군 병사들이 그다지 점잖게 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은 범죄자까지 포함된 사회 최하류층 출신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 사실은 부사쿠에서 남쪽의 리스본 쪽으로 후퇴하는 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곳곳의 마을에서 영국군에 의한 약탈이 벌어졌습니다.  웰링턴이 비록 인정머리 없는 오만한 귀족이지만, 공정하다는 점에서만은 인정받을 만 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병사들, 심지어는 장교들조차 철저히 불신하고 잔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약탈 행위를 주도하다 잡힌 병사들을 현장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일부 부대, 특히 픽튼(Piction) 장군 휘하의 제3 사단의 경우는 후퇴 길에 마을을 만날 경우 아예 먼길로 빙 돌아가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부대는 부사쿠 전투에서 수훈을 세운 부대였지만 후퇴 길에 일부 마을에서 약탈 행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이런 수모와 불편함을 준 것입니다.  




(마세나의 침공 불과 19년 뒤인 1839년에 그려진 쿠임브라 시 외곽의 전경입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은 영국군의 이런 부랑자같은 행동들 때문에 웰링턴은 마세나가 우회로를 택했다는 정보를 접하자마자 미련을 두지 않고 후퇴를 했던 것입니다.  1809년 1월 코루냐 철수 작전에서 영국군은 (비록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꽁무니를 바짝 추격해오는 프랑스군 앞에서 후퇴할 때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 매우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바 있었지요.  웰링턴은 비록 전략적인 철수라고 하더라도 후퇴는 후퇴이므로 코루냐 꼴을 되풀이하는 것에 대해 거의 강박관념 수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10월 중순부터 우기가 시작되므로 행군하는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지겠지만 무엇보다 도로 사정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부사쿠 능선을 우회하는 동안 연합군을 일찌감치 앞서서 후퇴시킨 것입니다.  


드디어 10월 1일, 프랑스군이 쿠임브라 외곽에 나타났습니다.  그때까지 주민들은 다 도시를 비웠을까요 ?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유가 있던 상류층 주민 대부분은 이미 도시를 버린 뒤였지만 영국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주민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당장 피난 길을 떠나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난한 주민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영국군이 소개령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도 꼭 믿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프랑스놈들이 나타났다'라는 비명소리가 거리 한쪽에서 터져나오자, 맹수같은 프랑스 병사들의 난폭함이 갑자기 무서워진 일부 주민들이 마지막 순간에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은 전염성이 짙은 것입니다.  일부 주민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피난길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자 나머지 주민들도 공포에 사로잡혀 앞서거니 뒷서거니 무작정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곧 거리가 가득 찼고 몬데고(Mondego)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하는 다리는 교통 제층이 생겨 길이 꽉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직 우기가 시작되지 않아 몬데고 강에는 1m~1.5m 정도로 얕은 여울이 곳곳에 있어 주민들은 이 여울들을 통해 피난에 나섰습니다.  아무 준비없이 공포에 사로잡혀 떠나는 피난길 광경은 주민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로 매우 참혹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쿠임브라 시와 몬데고 강의 전경입니다.)




이렇게 허둥지둥 나서는 피난이라면 겨우내 먹으려 저장해두었던 곡물과 저장식품 등을 다 싸들고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민들이 남기고 간 식량은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웰링턴의 혀를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쿠임브라는 웰링턴의 후퇴 작전에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동안의 고달픈 행군길에 배가 고팠던 프랑스군은 먹을 것이 있는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군기가 문란해져 식량, 특히 와인을 약탈하며 행군을 멈춰 버린 것입니다.  마세나로서도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이 좀 쉴 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군이 일찌감치 총퇴각에 들어가서 어차피 따라잡기도 힘든 마당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프랑스군 주력은 이 도시에 4일간이나 머물렀고, 10월 5일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추격에 나섰습니다.  마세나는 리스본 정복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10월 5일, 추격에 나섰던 선발 부대가 잡은 영국군 낙오병은 천만뜻밖의 정보를 불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napoleon-series.org/research/miscellaneous/c_Tojal8.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wtj.com/archives/wellington/1810_09c.htm

마세나의 명령대로 이른 아침 부사쿠 능선에 늘어선 영국군 방어선의 측면을 향해 기어오른 레이니에의 제 2군단은 크게 2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들은 몬데고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아침 안개에 가려져 영국군의 관측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안개로 인해 프랑스군도 능선 위의 영국군의 존재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대오를 맞추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사단 단위의 질서 정연한 대오가 아니라 기껏해야 대대 단위를 간신히 유지한 엉클어진 모습으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안개를 뚫고 고지에 오른 프랑스군 눈 앞에 펼쳐진 능선은 텅 비어 있어야 했습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방어진의 측면을 우회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프랑스군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연합군의 포병대와 머스켓 일제 사격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요 ?


마세나의 상식으로는 웰링턴도 프랑스군 본진의 위치가 어디인지 보았으니, 능선을 방어한다고 해도 적당한 길이, 즉 4~5km 정도에 걸쳐 방어선을 펼칠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세나도 참전했던 바그람 전투 때, 막도날이 프랑스군 제5 군단을 기둥 모양으로 편성해서 오스트리아군의 전선을 들이받을 때도 그 기둥 앞면의 폭과 길이는 550m x 800m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프랑스군 3개 군단 약 6만5천보다 약간 작은 5만 정도로 알려진 영국군의 경우도 적절한 규모의 예비대를 대기시킬 것을 생각하면 최대 5km 이상 펼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은 정말 가늘고 긴 방어선 매니아였습니다.  예비대 ?  그런 건 겁쟁이나 준비해두는 것이었지요.  그는 예비대도 없이 거의 8~9km에 걸쳐 5만의 영국-포르투갈 사단들을 최대한 펼쳐서 가늘고 길게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세나가 '이 정도면 연합군 방어선의 왼쪽 측면 너머겠지'라고 생각한 부분이, 놀랍게도 연합군 방어선의 거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




(영국군 방어선의 오른쪽으로 충분히 우회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군 우익은 커녕 거의 중앙부로 돌격해들어간 프랑스군의 공격 방향을 보십시요.)




웰링턴의 이 가늘고 긴 방어선은 마세나를 포함한 프랑스 지휘관들의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진형이었습니다.  이렇게 방어선이 가늘고 길면 그 중 어느 한 곳이 적의 집중 공격에 돌파될 가능성이 너무 높았고, 그럴 경우 뚫린 곳을 틀어막을 예비대조차 없다면 방어선이 전면적으로 붕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웰링턴은 이렇게 무모한 방어선을 펼쳤을까요 ?  레이니에 휘하의 2개 사단, 즉 외들레(Étienne Heudelet de Bierre)와 메를르(Pierre Hugues Victoire Merle)가 이끄는 사단들은 각각 그 이유를 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외들레 사단의 공격은 너무나도 치열한 연합군의 사격과 포격을 받고 그만 딱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머스켓 소총의 사격 속도는 최대 분당 2발 정도였는데, 혼란스럽고 숨도 가쁘기 마련인 실전에서는 1분에 1발 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은 정말 최대 사격 속도를 꾸준히 유지하며 프랑스군의 2배에 가까운 속도로 머스켓 볼을 날려댔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은 얇고 넓은 횡대로 부대원 전원이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아래 쪽의 프랑스군을 향해 침착하게 총을 쏘아대는 영국군에 비해, 프랑스군의 반격은 빈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영국군과는 달리 프랑스군은 높고 가파른 경사로를 헥헥거리며 올라와 지친 상태인데다, 진격을 위해 대대 단위의 좁고 긴 종대를 이루고 있던 프랑스군 병사들은 맨 앞 열 500여명 정도만 발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도 사격전에 유리한 횡대로 대오를 변경하려 허둥대었지만, 연병장에서도 잘 안 되던 것이 영국군의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매끄럽게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외들레 사단은 얼마동안 버티다 많은 사상자만 낸 채 서둘러 경사면을 뛰어내려가야 했습니다.




(외들레 장군은 반도 전쟁에서 활약한 것 외에는 큰 활약은 없었습니다.  그는 1812년 러시아 침공 때 다행히 후방 예비대를 맡아 러시아 땅에 진입하지는 않았었고, 1813년 단치히 포위전 끝에 연합군에 항복했습니다.  그도 나폴레옹 몰락 후에 일단 루이 18세에게 충성했으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 쪽에 붙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메를르 사단은 좀더 운이 좋았습니다.  이들이 안개를 뚫고 올라선 능선은 하필 영국군 제88 연대와 제45 연대 사이의 큰 빈틈이었던 것입니다.  이 곳은 정말 지키는 병력이 없었습니다.  뒤늦게 안개 속에서 프랑스군의 군화 소리를 들은 영국군 제 45연대와 포르투갈군 제8 연대가 그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습니다만, 역시 때가 늦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먼저 도착했던 것입니다.  역시 지나치게 가늘고 길었던 웰링턴의 방어선이 돌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반대 방향에서 영국군 제88 연대까지 몰려든 것입니다.  능선에 도달하자마자 숨고를 사이도 없이 양방향에서 몰려든 연합군에게 측면을 찔린 메를르 사단은 크게 휘청거리다 결국 물러났습니다.  다만 비탈길을 구르듯 내달려 도망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던 영국군도 더 아래 쪽에 대기 중이던 프랑스군 포병대의 공격을 받고 다시 기어올라 후퇴해야 했습니다.  




(포이 장군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종전 후 반도 전쟁에 대한 역사서를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영국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정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습성은 행군하는 병사에게 딱 들어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장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을 갖추고 있다.  바로 전투 현장에서의 침착함이다.  영국 육군의 영광의 기반은 그 뛰어난 군기 및 그 민족적인 침착성과 굳건함에 있다.  실제로 그들보다 더 군기가 엄정한 군대는 찾기 어렵다...")




추격하던 영국군이 물러나자 레이니에는 군단 내 예비대로 대기시켜 두었던 포이(Maximilien Sébastien Foy)의 여단을 투입하여 아까 공격했던 바로 그 부분을 다시 들이쳤습니다.  가늘고 긴 방어선은 한 곳을 집중해서 뚫는 것이 정석이었으니까요.  과연 반복된 공격에 지친 연합군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정말 긴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우측, 그러니까 프랑스군의 좌측에서 새로운 영국군 병력, 즉 제9 연대가 쏟아져 나오며 포이 여단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결국 포이 여단도 이 새로운 영국군 증원 병력에 밀려 후퇴해야 했고, 이것으로 레이니에 군단의 공격은 최종적으로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레이니에 군단은 총 2천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고, 그 사상자 중에는 메를르 장군과 포이 장군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연합군의 사상자는 587명에 불과했습니다.  


한편, 레이니에 군단이 능선에서 뜻하지 않은 연합군 방어선을 만나 악전고투를 벌이며 울리는 총성이 들리자마자, 레이니에의 측면 우회 공격이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판단한 네(Michel Ney) 원수는 저 위의 영국군 방어선 중앙부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네가 공격한 곳은 영국군 중앙부가 아니라 좌익에 가까왔습니다.  네의 공격은 레이니에의 공격처럼 루아송(Louis Henri Loison)과 마르샹(Jean Gabriel Marchand)이 각각 이끄는 2개 사단을 앞세웠고, 예비대로 메르메(Julien Augustin Joseph Mermet)의 사단을 예비대로 대기시켰습니다.  




(루아송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전부터 네의 휘하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떤 전투에서 한쪽 손을 잃은 듯 합니다.  그는 1807년 쥐노를 따라 포르투갈을 점령한 지휘관 중 하나였는데,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는 바람에 포르투갈 주민들은 그를 Maneta, 즉 '한손이 없는 자'라고 부르며 증오했습니다.  나중인 1809년 술트의 포르투갈 침공 때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포이 장군이 사로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 포이가 루아송인 줄 알고 그를 살해하려던 주민들에게 포이가 두 손을 들어보이며 자신은 '마네타'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목숨을 건진 일도 있다고 합니다.  루아송의 군 생활은 잘 풀린 편이 아니라서, 그는 1812년 러시아 침공 때 후발대로서 주로 독일 및 이탈리아에서 강제징집한 소년병들로 구성된 1만5천의 병력을 이끌고 리투아니아 인근에서 야영을 하다가 섭씨 영하 35도의 혹한에 거의 전병력을 하룻밤 사이에 동사시키는 참극을 낳기도 했습니다.)




고지를 향해 헐떡거리며 올라간 루아송의 사단이 능선 인근에서 마주친 것은 1300여 명의 대규모 유격병들이었습니다.  알메이다 요새 때부터 프랑스군을 견제하던 크로퍼드 장군의 경보병 사단 전체가 유격병으로 나와 프랑스군을 견제한 것입니다.  이들을 쫓아내느라 시간을 쓰는 사이 능선 위의 영국군의 포병들이 준비를 갖추고 프랑스군에게 대포알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루아송 사단은 당연히 이 포대들을 새로운 목표로 삼고 진격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프랑스군과 영국군 포대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아송 사단이 이 포대 근처에 도달했을 때, 포대와 경사면 사이에는 움푹 들어간 도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더 나쁜 것은 그 숨겨진 도로 안에 제43연대와 52연대, 총 1700여 명의 영국 보병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오자 즉각 뛰어나와 당황하는 루아송 사단에게 일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들은 꽤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뛰어나오자마자 프랑스군 종대의 머리 부분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집중 사격을 가하는 능숙함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얇은 영국군의 방어선 중 한 곳을 공격으로 뚫으려던 프랑스군의 종대가 오히려 역으로 집중 공격을 당한 셈이었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후퇴한 루아송 사단은 총 6500의 병력 중 무려 1200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 43연대와 52연대는 23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그 옆의 마르샹의 사단도 사상자만 냈을 뿐, 영국군의 얇은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왼쪽이 영국군, 오른쪽이 프랑스군입니다.  종대로 올라온 프랑스군을 약간 반원형으로 펼쳐진 영국군의 횡대가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요.)




어째서 마세나의 예상과는 달리 가늘고 길게 늘어진 영국군의 방어선이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일까요 ?  특히 메를르 사단이나 포이 여단은 분명히 취약한 영국군 방어선을 거의 돌파했었습니다.  그럴 경우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정되어야 했는데, 오히려 영국군은 측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박하여 몰아냈지요.  원래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능선이라는 험한 산악 지형에서 그 측면의 수비군들이 그렇게 빨리 이동해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요.  


영국군이 부사쿠에서 승리했던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영국군의 머스켓 재장전 속도가 프랑스군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 간단히 말해서 모병제인 영국군의 훈련 정도가 징집된지 얼마 안 된 프랑스군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발사 속도가 2배 빠르다는 것은 실질적인 병력 수가 2배라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가령 패퇴한 메를르 사단의 병사들은 자신들보다 3배가 많은 영국군에게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실제로는 당시 전투 현장의 영국군의 숫자는 프랑스군의 절반에 불과했습니다.


2) 확실히 고지를 방어하는 측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 공격군은 고지를 기어오르느라 기진맥진하고 진격 속도도 느려진다는 핸디캡을 지고 갔습니다.  또한, 방어군은 공격군의 이동 방향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결정적인 이점이 있었습니다.


3) 웰링턴은 부사쿠 능선을 따라 긴 교통로를 구축해 놓았습니다.

: 길고 가늘게 늘어진 방어선의 약점은 웰링턴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를 보완하려면 능선 위의 수비군이 좌우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그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미리 능선을 따라 긴 도로를 닦아놓았던 것입니다.  이 도로 덕분에 메를르 사단이나 포이 여단이 방어선을 돌파했을 때 신속하게 그 옆쪽 영국군이 이동하여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43연대와 52연대가 그 움푹 꺼진 도로 속에 매복해 있다가 루아송 사단을 기습했던 것은 보너스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영국군의 장점과 한계가 명확하게 보입니다.  이런 전술들은 모두 방어전에서나 요긴하게 통하는 것이고 공격에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한편, 능선 아래의 마세나는 이 황당한 패배에 크게 낙심했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하고 후퇴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과연 마세나는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peninsularwar.org/bucaco.htm

https://en.wikipedia.org/wiki/%C3%89tienne_Heudelet_de_Bierre

https://en.wikipedia.org/wiki/Maximilien_S%C3%A9bastien_Foy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Henri_Loison



저는 전부터 퀸의 We will rock you 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굉장히 이상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다들 아시다시피 전세계 스포츠 경기장에서 가장 많이 울려퍼지는 응원가와 축가로 쓰이는 신나고 힘찬 노래입니다.   그러나 그 가사 내용은 사람의 사기를 드높이기보다는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면 늙어서 추해진다' 라는 내용의 가사이거든요.   그런데 미국 영국 등의 관객들이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아닐텐데 그런 가사의 노래를 응원가로 부를까 싶어 의아했습니다.





(구글에 we will rock you sports anthem으로 검색해보면 수많은 클립이 쏟아집니다. )




그런데 이 기사를 보니 작사작곡을 한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정말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이더라고요.  공연에서 관객과 호응하며 함께 부르기 위해 만든 힘찬 노래이긴 하지만, 일부러 그 가사는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도록 좀 우울한 내용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 곡이 온갖 스포츠 경기장에서 응원가로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특히 메이가 씁쓸해하는 부분은 미군이 파병될 때 이 음악을 틀어주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라고 하는군요.


http://www.espn.com/espn/magazine/archives/news/story?page=magazine-20100208-article26



특히 충격적인 부분은 we will rock의 의미가 '너희들은 아주 뒤집어 놓겠어' '롹 스피릿을 불어넣어주겠어' 등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브라이언 메이의 설명에 따르면 이건 원래 체코 전통 자장가에서 따온 것이랍니다.  즉, rock이 흔든다는 뜻은 맞는데 롹이 아니라 '요람을 흔든다'는 뜻이라는군요.  그러니까 부모가 아기의 요람을 흔들어주는 것처럼 위로와 보살핌의 뜻이라고 합니다.  원래 체코 자장가는 영어로 번역하면 we will rock you rock you로 rock you가 두번인데, 브라이언 메이는 고민을 잠깐 한 뒤에 그것 대신 we will we will rock you로 we will을 두번 하는 것이 더 리듬에 맞는다고 보고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전세계 스포츠팬들은 모두 가사에 대해서는 별 생각없이 그냥 we will we will rock you 라는 가사를 잘못 이해하고 따라 부르는 셈입니다.  물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가사는 듣고 부르는 사람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이 노래 가사의 매력입니다.  


브라이언 메이처럼 노래 가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는 작사가도 있습니다만, 많은 작사가들은 가사의 의미에 대해 아무 설명을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Miss American Pie'를 작사작곡하고 노래까지 부른 Don McLean의 경우입니다.  뭔가 심오해 보이고 무엇에 대해 풍자하는 것인지 알쏭달쏭한 이 긴 노래 가사에 대해 많은 이들이 수십년 간 지치지 않고 질문을 해댔으나, 돈 맥클린은 언제나 'poetic silence' 즉 시인의 침묵을 지켜야 한다며 일체의 설명을 회피했습니다.  저는 돈 맥클린처럼 하는 것이 더 옳다고 봅니다.  






(구수한 자막이 곁들여진 1985년 MBC의 라이브 에이드 녹화방송입니다.  Source :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382958 

따로 가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But it's been no bed of roses 라는 부분을 들으면 no bed or roses로 들리기도 합니다.  아마 저거 번역하신 분은 bed of roses (아주 호화롭고 편한 상태, 글자 그대로 꽃길)라는 관용적 표현을 모르셨나 봅니다.)




젊어서는 모두들 꿈이 크지만, 노년기에 '난 내가 원하던 것을 모두 이뤘고 아무 회한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늙어서 회한에 젖기 마련이지요.  우리도 꿈을 다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곱게 늙고 또 미련 갖지 말고 죽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이 곡의 감상은 아래 공식 퀸 채널에서 하세요.


https://youtu.be/-tJYN-eG1zk



Buddy you're a boy make a big noise

Playin' in the street gonna be a big man some day

You got mud on yo' face

You big disgrace

Kickin' your can all over the place


친구 자넨 지금 꼬마야 소란을 떨어봐

거리에서 놀면서 언젠가는 거물이 될거라고 하지

네 얼굴에 진흙이 묻었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온동네에서 깡통을 차고 돌아다니는구나


Singin'


소리질러


We will we will rock you

We will we will rock you


우리가 널 흔들어줄게

우리가 널 흔들어줄게


Buddy you're a young man hard man

Shoutin' in the street gonna take on the world some day

You got blood on yo' face

You big disgrace

Wavin' your banner all over the place


친구 자넨 이제 젊고 강한 남자야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언젠가 세상에 도전할 거라고 하지

네 얼굴에 피가 묻었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온동네에서 네 깃발을 휘두르고 다니는구나


We will we will rock you

(Sing it!)

We will we will rock you


우리가 널 흔들어줄게

(소리 질러)

우리가 널 흔들어줄게


Buddy you're an old man poor man

Pleadin' with your eyes gonna make you some peace some day

You got mud on your face

Big disgrace

Somebody better put you back into your place


친구 자넨 이제 가난한 노인이야

눈으로는 동정을 구하며 언젠가는 안식을 찾을거라고 하지

네 얼굴에 진흙이 묻었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누군가 자넬 원래 자네 자리로 돌려놓아야 할텐데


We will we will rock you

(Sing it!)

We will we will rock you

We will we will rock you

We will we will rock you


우리가 널 흔들어줄게

(소리 질러)

우리가 널 흔들어줄게




사족1 : 이 노래의 초반에는 아무 악기 연주 없이 발과 손으로 하는 쿵쿵짝 쿵쿵짝으로만 연주됩니다.  이 쿵쿵짝을 영어로는 stomp-stomp-clap이라고 하는군요.


사족2 : 브라이언 메이는 이 곡을 단 10분 만에 작곡했다고 합니다.


사족3 : 테러범이나 탈레반 포르 등을 가둬두고 고문까지 하며 취조하는 것으로 악명높은 쿠바 관타나모 미해군기지에서 사용하는 고문 종류 중 하나가 이 곡을 최대 볼륨으로 해서 몇 시간 동안 죄수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브라이언 메이가 아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겠군요.


사족4 : 아래 영상을 보면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 제작진이 얼마나 철저하게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그대로 재현하려 노력했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https://www.independent.co.uk/arts-entertainment/films/news/bohemian-rhapsody-rami-malek-freddie-mercury-queen-live-aid-video-concert-show-film-a8637271.html?utm_medium=Social&utm_source=Facebook&fbclid=IwAR36wu_RWskg6hTbAYhwwwlkbNErGDnj_POxZs9jbaSoFdBzSHyUUngPlNA#Echobox=1542383310




**  이번주 나폴레옹 이야기는 오늘 말고 목요일에 올라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문학과현실'사에서 출간된 빅토르 위고의 "브르타뉴의 세 아이들"이라는 소설은 솔직히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소설 속에는 주인공들이 마라나 당통, 콘월리스나 윌리엄 피트와 같은 실존 인물과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제가 읽을 때 누가 실존 인물이었고 누가 가공의 인물인지가 약간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위키를 뒤져 보았으나, 대체 이 소설에 대해서는 찾을 수가 없더군요.  한참 후에야, 이 소설의 원제가 '1793'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소설은 빅토르 위고가 마지막으로 쓴 작품으로서, 제목이 암시하듯이 프랑스 대혁명에 반발하며 일어났던 방데(Vandee) 지방의 내란을 다룬 것입니다.  


줄거리는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만 몇가지 인상적인 대목들이 있더군요.  아마 '~주의자'라는 사람들은 무척 경멸할, 빅토르 위고다운 '싸구려 인간미'가 진하게 풍겨나오는 구절들입니다.





(쪽배 위에서 권총으로 위협당하고 있는 사람이 랑트나크 후작입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것보다는 좀... 가볍게 그려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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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데 지방에 내란을 일으키러 영국으로부터 잠입한 랑트나크 후작은, 프랑스에 몰래 상륙하자마자 이미 자신의 행방이 알려져있고 자신의 목에 6만 프랑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포고문을 보고 놀랍니다.  그가 농부로 변장을 하고 숲 속으로 숨어들 때 왠 거지를 만나는데, 이 거지는 대뜸 랑트나크 후작을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 숨으라고 권합니다.)


"그럼 자네가 글을 읽을 줄 안다니 나를 넘겨주면 6만 프랑(요즘 가치로 약 7억원)을 받게 된다는 것도 알 텐데."


"예, 압니다.  금화로 말이지요."


"6만 프랑이면 큰 재산인 것도 모를리 없겠지 ?"


"그럼요."


"누구든지 나를 넘겨주기만 하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요.  당신을 보았을 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이 사람을 넘겨주는 자는 누구나 6만 프랑을 얻어 한 재산 톡톡히 장만할 거라구.  그러니 서둘러 숨겨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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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혁명정부에서 정치위원으로 내려온 시무르댕은 전직 신부로서, 젊은 시절 귀족인 고뱅 가문의 가정교사로서 어린 고뱅을 아들처럼 키운 사람입니다.  이제 청년이 된 고뱅 자작은 혁명정부의 대령이 되어 자신의 할아버지인 랑트나크 후작을 토벌하는 부대의 유능한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냉혹한 성격인 시무르댕은 고뱅이 관용/온건파인 것을 보고 크게 우려합니다.)


"왜 자네는 성 마르크 르 블랑 수도원의 수녀들을 석방시켰는가 ?"

"저는 여자들을 상대로 전쟁하진 않습니다."


"왜 자네는 루비네에서 잡은 광신적인 그 늙은 신부들을 혁명 재판소에 파송시키지 않았는가 ?"

"저는 늙은이들을 상대로 전쟁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소한 동정은 하지 말게.  시역자들이 바로 해방자야.  저 탕플 탑을 지켜보란 말이야."

"탕플 탑, 저라면 거기서 태자(처형당한 루이 16세의 아들)를 풀어 주겠습니다.  저는 어린애들을 상대로 전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이 루이 카페라면 어린애들과도 싸워야 하는 거다."

"선생님, 저는 정치가는 아닙니다."


"코세 초소의 공격에서 반역자 장 트르통이 궁지에 몰려 허둥지둥 혼자 군도를 휘두르며 자네 부대에 달려 들었을 때, 자네는 왜 '대열을 풀어 통과시켜라!'하고 외쳤는가 ?"

"한 사람을 죽이는 데 1천5백명이 필요하진 않기 때문이죠."


"라 카유트리 다스티예에서 부상당해 기어가던 조제프 베지에라는 방데군을 부하 병사가 죽이려 할 때 '전진하라! 그는 내가 처리하겠다'고 하고선 권총을 공중에다 대고 쏜 일이 있었다. 그건 왜 그랬지 ?"

"쓰러진 사람을 죽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 둘은 지금 부대장이 되어 있다.  그 두 놈을 살려 줌으로써 자네는 공화국에 두 적을 제공한 셈이야."

"물론 저는 공화국에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했지, 적을 만들어 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시무르댕은 프랑스를 환자에, 방데를 종기에 비유하며, 외과의사가 종기를 용서하지 않고 잘라내듯 방데를 냉혹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혁명은 이제 전 세계를 절단하고 있다.  그래서 93년은 유혈의 해란 말일세."

"외과의사는 침착한데, 제가 보는 혁명가들은 난폭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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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고뱅 자작은 소설 후반부에서 프랑스 농민들의 식생활 이야기도 합니다.  프랑스 농민들은 고기를 1년에 나흘 정도 밖에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요.  하긴 당시 서민들이 빵이 없어 굶는다는 이야기가 있자, 당시 왕비 앙투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닌가" ("S’ils n’ont plus de pain, qu’ils mangent de la brioche") 라고 했다지요 ?  앙투와네트도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최소한 그 여자도 농가에는 고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앙투와네트는 실제로는 pain이니 brioche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기는 빵보다 비쌀 수 밖에 없는 물건입니다.  같은 면적의 땅에서 목초를 키우고 그것으로 소나 양을 치는 것에 비해, 밀이나 쌀을 재배하여 그것으로 빵을 만드는 것이 훨씬 '많이' 만들 수 있으니까요.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서양인들은 빵을 먹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서양인들이 식사를 하는 광경을 보면, 주식이 빵이라기보다는 고기라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됩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고기집에 가서 고기를 잔뜩 몇인분씩 구워 먹고 난 뒤 '식사'로 된장찌게에 공기밥을 먹는 것처럼, (비록 순서는 바뀌었지만) 주식인 고기를 먹기 전에 가볍게 롤빵 1~2개 정도를 먹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Treason's Harbour by Patrick O'Biran (배경 : 1813년 지중해 몰타 섬) -----------------------------


하지만 화요일,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에는 '그리갈레(gregale)'라고 불리는 지중해의 북서풍이 몹시 심하게 불어 어선이 출항을 하지 못한데다, 장교 식당의 설리(Searle)는 카톨릭 신자인 장교를 접대해 본 적이 없는지라 (당시 영국 해군에서는 모든 위관급 장교는 임관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의식을 거치게 되어 있었으므로, 카톨릭 신자인 장교는 사실상 없었습니다:역주), 소금에 절인 생선을 아무 것도 준비해놓지 않았었다.  덕분에 머투어린은 영국식으로 요리된, 물기가 가득하고 맛대가리 없으며 무척 꺼림직해보이는 채소 요리로 식사를 때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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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영미식 시금치 요리입니다.  시금치를 버터와 함께 물에 넣고 푸욱 삶으면 이렇게 회색 빛이 감도는 꺼림직한 물건으로 변합니다.  저는 카투사로 군대에 갔다가 미군 식당에서 이 물건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위 소설 구절 속에서도, 빵은 주식이라기보다는, 식사의 작은 일부로서, 빵 바구니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대체 유럽인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고기를 많이 먹게 되었을까요 ?


원래부터 유럽인들은 고기를 주식으로 한다고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실은 유럽인들이 제대로 된 빵을 주식으로 한 것도 그다지 오래 된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밀과 보리로 만든 마자(maza)라는 납작한 떡을 주식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효모를 넣어 부풀린 흰빵은 명절 때나 먹었다고 하네요.  중세 유럽의 농민들도 빵을 양껏 먹지는 못했고, 이런저런 찌꺼기를 넣어 끓인 수프 또는 죽을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농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밀과 호밀, 보리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제대로 구운 빵을 먹게 되었지요.  


이렇게 가난한 유럽에서도, 물론 귀족들은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귀족의 음식은 정말 고기가 주식으로서, 중세 연대기를 보면 프랑스 왕실에서는 하루에 600마리의 어린 닭, 200마리의 비둘기, 50마리의 거위 새끼를 먹었다고 합니다.  (몇 명이서 먹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들이 어찌나 고기를 좋아했는지는 종교적 관행도 바꿀 정도였습니다.  즉, 원래 카톨릭에서는 위 소설에 인용된 것처럼, 금요일에는 고기(원칙적으로는 달걀도 포함되었다고 하네요)를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대신 생선을 먹어야 했었는데,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냥 벌금을 내고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중세에는 도로 교통 사정 때문에 내륙 지방에서는 생선 가격이 무척 비쌌으므로, 무척 경제적인 선택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때 귀족들은 두껍고 넓적한 빵을 접시 대신으로 썼는데, 이렇게 고기 국물이 스며든 빵 접시는 대개 먹지 않고 내버렸습니다.  이 고기 국물이 묻은 빵 접시는 매일 밤 성문 밖에 모여든 가난한 농부들에게 하사품으로 나누어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온 나라의 거지들은 모두 귀족의 궁성 앞에 모여 살았을 것 같은데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





(프랑스인들은 자기 나라의 상징을 삶아먹는답니다 !!!  앙리 4세와 얽힌 요리, Poule au pot, 그러니까 닭 냄비 요리 chicken in pot 입니다.  마치 우리 삼계탕 비슷한 음식처럼 보이는군요.)




아무튼 그러니까 유럽인들이라고 아주 옛날부터 당연히 고기를 먹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닭이 프랑스의 상징이 된 것과 상관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고대 골 족의 상징이 수탉이었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  1589년 프랑스 종교 내란을 일단락 하고 프랑스 왕위에 오른 앙리 4세는, 대관식에서 이렇게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신께서 제게 천수를 누리게 해주신다면, 일요일마다 프랑스의 모든 농부들의 냄비에 닭이 들어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니까 그 시절에도 일반 농민들에게는, 소나 돼지는 고사하고 닭조차도 매일은 커녕 1주일에 1번 먹는 것이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다는 것이지요.  불행히도 앙리 4세는 57세의 나이에 광신도에게 암살되었습니다만, 사실 앙리 4세가 80까지 살았다고 해도 프랑스가 모든 농민이 1주일에 1번씩 닭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번영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당시에는 농업 생산력이 딸릴 수 밖에 없었거든요.  아무튼 신구교 양측의 화합을 위해 애썼던 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상 매우 존경받는 왕이 되었고, 그 왕의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 즉 '일요일의 닭'은 프랑스의 국가 이념 비슷한 것이 되어 닭이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고기국에 이밥 먹여주겠다'라고 한 대국민 약속은 현대의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비웃음거리가 되는데, 프랑스의 국가 이념이 그렇다고 하니 국민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인본주의가 아주 간지가 넘쳐 보입니다...)





(앙리 4세에게 Poule au Pot를 권하고 있는 저 여자는 Gabrielle d'Estrées 라는 귀부인으로서,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이 되기 전부터 그의 정부였던 여자인데, 앙리 4세의 아이를 낳다가 죽는 바람에 앙리 4세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고 합니다.)




앙리 4세가 죽은지 200년이 훨씬 지나 19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유럽인들은 여전히 고기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 수병들은 매주 쇠고기 4파운드(1.8kg)와 돼지고기 2파운드(0.9kg)를 배급받았다고 했지요.  이 고기들이 소금에 절여진 한 1년 정도 된 물건이라는 점만 빼면, 이 정도의 육류 배급은 정말 대단한 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먹는데 그리 돈을 아끼는 편이 아니지만, 그 정도로는 못 먹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생활이 당시 유럽 서민층의 일반적 식사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수병들이나 군인들은 직업 특성상 엄청 많이 먹어야 했거든요.  사실 저 정도의 양은 지나치게 많은 것이라서, 직업이 군의관인 저 소설 속 주인공 머투어린도 여러차례 수병들의 건강을 위해 고기 및 주류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고 언급하곤 했습니다.


같은 시기, 일반 농민들의 식생활은 영국 해군에 비하면 동물성 식품이 무척 귀했습니다.  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래도 채소나 곡물보다는 비싼 것이었으니까요.  전에 번역해서 올렸던 글 중 일부를 다시 발췌해보겠습니다.





Sharpe's Revenge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4년 프랑스) -----------


하지만 이날 밤, 루실은 불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샤프가 잘 먹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식탁 위에는 포도주, 빵, 치즈와 작은 햄조각이 있었는데, 프레데릭슨 대위는 햄을 조심스레 샤프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샤프는 프레데릭슨의 접시를 보고, 이어서 루실의 접시를 보았다.  "자네 햄은 어디 있지, 윌리엄 ?"


"카스티노 부인(루실)은 햄을 좋아하지 않으신답니다." 프레데릭슨은 치즈를 잘랐다.


"하지만 자넨 좋아하쟎아 ? 난 자네가 햄을 빼앗으려고 살인하는 것도 봤는데."


"영양분을 필요로 하는 건 소령님이쟎습니까." 프레데릭슨은 고집을 부렸다. "제가 아니고요."


샤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집에는 돈이 부족한 모양이지 ?" 그는 카스티노 부인이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리지 않고 했다.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소령님. 물론 땅은 많은데, 요즘은 그게 도움이 안되나 봅니다. 게다가 앙리의 약혼식에 가진 돈을 거의 다 써버렸나봐요."


"망할." 샤프는 햄을 우스꽝스럽도록 작은 세조각으로 잘랐다. 왼팔을 아직 제대로 쓸 수가 없어서 그의 동작은 매우 서툴렀다. 그는 햄을 세 접시 위에 공평하게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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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대가 지난, 19세기 중반 일반적인 유럽 농민의 식사도 그다지 큰 개선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밀가루로 만든 빵에 버터를 발라 먹을 정도면 유럽에서 평균 이상은 가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아일랜드에서는 감자에 버터를 발라 먹었으니까요.  아일랜드도 목축이 성행했기 때문에 그나마 버터라도 발라 먹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 버터와 우유는 있는데, 그 쇠고기는 어디 갔냐고요 ?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은 버터와 우유 정도만 먹을 수 있었고, 소는 영국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기 위해 영국에 수출해야 했지요.


19세기 후반인, 보불 전쟁 때 이야기를 보시지요.


포로들 (모파상 작, 배경 : 1870년 프랑스) -----------------------------------------------


(프랑스 시골 숲 속, 중년 부인이 사는 어느 외딴 집에 6명의 프로이센 정찰병들이 침입합니다.)


그녀는 솥에 물을 좀더 붓고, 버터와 감자를 넣었다.  그러고 난 뒤, 벽난로 안쪽 구석자리의 갈고리에 걸어둔 베이컨 한 덩어리를 꺼내어 두 조각을 내어, 그 중 반을 솥에 집어 넣었다.


6명의 병사들은 그녀의 움직임을 굶주린 눈빛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총과 헬멧을 한쪽 구석에 모아두고, 마치 학생들이 교실에서 말을 잘 듣듯이 얌전히 저녁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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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녁 식사라고 베이컨이 좀 나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수프는 모조리 하류 음식 취급을 한다는데, 이유는 수프라는 물건은 태생 자체가 적은 재료로 여럿이 나눠 먹기 위해 만든 요리라는 것이지요.  이 소설 속에서도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수프를 만드는 것이고요.


결국 유럽인들이 육류 위주의 식생활을 굳힌 것은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19세기 말엽이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지금부터 불과 150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유럽인 서민들에게 고기는 매우 귀한 음식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식민지 수탈의 결과로 유럽인들이 잘 먹고 잘 산다고 푸념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만, 그렇다고 영국이 인도의 소를 잡아오거나 이집트의 닭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니었지요.  확실히 식민지 수탈이 유럽 경제 발전의 기초가 된 것 같기는 합니다만, 거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으므로 일단 패스하겠습니다.


아무튼 결국 유럽인의 주식은 고기가 되었고, 반만년간 쌀을 주식으로 하던 우리나라도 (사실 쌀을 주식으로 한 건 몇백 년 안되었지요... 유럽인들이 빵을 주식으로 한 지 몇백 년 안된 것처럼이요) 최근 30여년 정도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 덕택에 육류를 많이 먹게 되었습니다.  대신 쌀 소비가 줄어서 큰 일이지요.  우리나라의 쌀 소비 저하 문제가 심각한 것처럼 유럽에도 밀 소비 저하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까요 ?





(한국의 쌀밥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바게뜨도 위기랍니다)




심각하답니다.  프랑스에서 1인당 하루 빵 소비량은 1880년에는 600 그램이었지만, 1950년에는 300 그램으로 줄었고, 1977년에는 180 그램으로 다시 줄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지 알아볼 엄두가 안나는군요.  다만, 우리나라는 그 과정이 불과 20~30년 사이에 급속도로 진행된 반면, 유럽은 거의 100년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유럽의 농가들은 그에 대해 적응할 기간이 길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이미 우리나라 농촌도 쌀보다는 돼지 사육과 채소 농사가 더 큰 매출을 올리고 있는데 특히 돼지 사육은 환경 오염이 심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최근에 어디서인가 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서 프랑스에서는 빵이 전멸하는 것이 아닐까요 ?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어르신들께서, 무조건 쌀밥을 먹어야 밥을 먹은 것으로 쳐주시는 것처럼 (가령 피자 3조각이나 먹고 왔다고 설명드리면 그럼 밥은 아직 안먹었네 하시면서 밥상을 차려주시는 분들이 아직 많지요), 프랑스에도 비슷한 정서가 있나 봅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왜 식사 때 빵을 먹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냥 먹어야 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을 한다는군요.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쌀밥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험상궂은 아저씨가 허버트 후버입니다.)




여담으로, '모든 냄비에 닭을' (Chicken in Every Pot) 이라는 캣치 프레이즈는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현직 대통령이자 공화당의 연임 후보이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가 썼던 선거 구호였다고 합니다.  이 문구는 스코틀랜드 작가인 알렉산더 스미스 (Alexander Smith)가 1863년에 쓴 책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세계를 다스린다면 무지와 전쟁이 사라지고 세금이 가벼워지며,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냄비에 닭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쓴 것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유래가 무엇이었건간에, 당시 경제 대공황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정말 먹고 살게 해줄 대안으로 민주당의 후보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택했다고 합니다.


결국 고기는 비싼 것이고, 동양이나 서양이나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부유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덴마크나 룩셈부르크, 스위스 같은 곳에서 고기를 가장 많이 먹을까요 ?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부유한 일본이 우리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보다 1인당 GDP가 훨씬 떨어지는 중국이 우리보다는 고기를 훨씬 많이 먹습니다.  명목당 GDP와 구매력 기준의 GDP가 다른 것도 원인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식생활이라는 것에는 경제적 배경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천년간 이어온 문화적 배경이라는 것이 무시될 수는 없는 것이라서 그렇지요.





(이렇게 쇠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행복한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요 ?  정답은 몬테비데오를 수도로 하는 나라입니다.)




참고로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쇠고기를 소비하는 나라는, 우루과이라고 합니다.  1인당 1년 소비량이 무려 60kg입니다.  근수로 따지면 무려 100근 !  대략 1주일에 2근씩 먹어치우는데요 !  참고로 개돼지처럼 먹어대는 미국도 1인당 1년에 43kg, 사람보다 소와 양이 훨씬 많다는 오스트레일리아도 39kg, 브라질도 36kg 정도입니다.  우루과이 바로 옆나라인 아르헨티나도 1인당 1년 소비량이 55kg 정도라고 하니, 솔직히 부럽습니다 !!!

탄약고 폭발로 인한 알메이다 요새의 갑작스러운 함락은 웰링턴을 크게 당황시킬만 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은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생각보다 너무 일찍 함락되긴 했지만 어차피 알메이다의 함락은 예견되었던 것이고,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스페인군이 분전해준 덕분에 방어 준비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었거든요.  문제는 그 방어 준비라는 것의 본질이었습니다.


웰링턴의 방어전략은 간단했습니다.  후퇴였지요.  그는 기세등등한 프랑스군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일대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게속 후퇴했습니다.  군대가 후퇴하면서 주민들에게까지 소개령을 내리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웰링턴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식량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식량을 현지 조달하는 프랑스군의 약점은 보급이고 프랑스군이 제풀에 꺾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격 예상지에서 밀가루 한줌도 남겨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민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식량이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는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인 농토와 집을 버리고 알아서 어디로든 사라지라는 것은 웰링턴의 깔끔한 사령부 탁자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집을 버리지 않았고, 당연히 자신들이 먹을 식량도 마루바닥 밑에 감춰둔 상태였습니다.  포르투갈 농부들의 소박한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군은 그렇게 농민들이 감춰둔 식량을 찾아내는데는 도사였고, 프랑스군은 그런 식량들을 먹어치우며 계속 전진했습니다.




(알메이다에서 쿠임브라로 향하는 길입니다.  쿠임브라 서쪽에 늘어선 산맥이 보이십니까 ?  현대의 지도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위의 크게 우회하는 도로가 아래의 두 도로보다 별로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저 산맥이 상당히 험하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손자병법에도 원정군은 보급 문제 때문에 전투를 서두를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요.  따라서 손자병법을 읽지도 않은 웰링턴이 그런 후퇴 및 초토화 전략을 생각해낸 것은 무척 칭찬할 만한 일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중국이 아니었고 러시아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좁은 포르투갈에서 언제까지고 후퇴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수도이자 주요 항구였던 리스본 북쪽 어디에선가는 프랑스군을 저지해야 했습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 못지 않은 지도 매니아였고, 그는 알메이다에서 리스본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퇴각로와 프랑스군의 추격로는 기본적으로 몬데고(Mondego) 강 계곡을 따라 서진하는 것이었는데, 몬데고 강의 북안보다는 남안의 지형이 훨씬 좋았습니다.  따라서 웰링턴은 남안의 길목 중에서 알바(Alva) 강이 몬데고 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1차 저지를 시도해야겠다고 미리 방어진지 준비를 해놓고 있었습니다.  




(지도 좌하단에 있는 도시가 쿠임브라(Coimbra)입니다.  쿠임브라 남단을 끼고 도는 강이 몬데고(Mondego) 강이고요.  언듯 봐도 상당히 거친 지형이네요.)




하지만 마세나는 적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바지저고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웰링턴이 '포르투갈 왕국 전체에서 최악의 도로'라고 평가하고 있던 몬데고 강 북쪽 경로를 택했습니다.  알메이다의 함락에도 당황하지 않았던 웰링턴도 이번에는 당황했습니다.  마세나는 대체 왜 이 경로를 택했을까요 ?  그 결정의 이유에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만 웰링턴의 당혹감 속에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는 기쁨도 가득했습니다.  특히 이 경로를 택할 경우, 중간 경유지인 대도시 쿠임브라(Coimbra) 시로 가기 위해서는 부사쿠(Buçaco, Bussaco) 능선을 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웰링턴으로 하여금 애초 전략에서 다소 어긋난 결심을 하게 합니다.  이 부사쿠 능선에서 마세나의 프랑스군과 한판 싸움을 벌이기로 한 것입니다.


애초에 피를 흘리지 않고 마세나의 침공을 저지하려 했던 웰링턴의 결심이 흔들린 것은 부사쿠의 지형이 지키는 입장에서 너무나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사쿠 능선은 몬데고 강에서부터 급경사로 시작되어 북서쪽으로 뻗은 산맥인데, 최고 높이는 560m에 달하는 꽤 높은 산맥이었습니다.  관악산이 대략 630m니까 상당한 높이지요.  높이보다 더 나쁜 것이 그 급경사였습니다.  쿠임브라로 향하는 고갯길의 최고 높이도 400m 정도로서, 남산(260m)이나 인왕산(340m)보다 더 높고, 경사도 여전히 급했습니다.  덕분에 그 고갯길은 능선을 똑바로 넘지 못하고 정상 근처에서 크게 오른쪽으로 틀어져서 비스듬히 올라가야 했습니다.  즉, 바로 좌측 위의 근거리 능선에서 적군이 빗발치듯 날려대는 총탄과 포탄을 측면에 뒤집어 쓴 채로 비스듬이 전진해야 했던 것이지요.  이런 매혹적인 능선 위에 올라서서 저 밑을 낑낑대며 기어 오르는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 마세나에게 총질을 해댈 기회를 날려버리기에는 웰링턴의 자제력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포르투갈 방위를 책임진 전체 야전군 5만이 고스란히 다 휘하에 있는 상황에서 말이지요.




(현재의 부사쿠 능선입니다.  뭔가 궁전 같은 건물은 Palácio Hotel do Buçaco라고 19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한편, 왜 굳이 이 경로를 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부사쿠 능선 앞에 6만5천의 침공군을 이끌고 온 마세나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과 체코 등 다양한 지역 다양한 상황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습니다.  능선 아래에서 망원경을 뽑아든 마세나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능선 위에 옹기종기 배치된 포대들과 프랑스군을 역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영국군 장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세나의 눈에 그들은 한마디로 병정놀이에나 어울리는 풋내기 애송이들에 불과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높고 험한 능선에 방어진을 친 상대를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건너기 힘든 긴 장애물이라는 점에서 높은 능선과 강은 유사했는데, 마세나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던 적들을 여러 차례 아주 쉽게 요리한 적이 있었지요.  강이든 능선이든 그런 것을 방어선으로 삼는 것은 나폴레옹이나 마세나와 같은 명장들에게는 하책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했던 비결은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적을 분산시키고 아군을 집중시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이나 능선에 기대려는 적군은 필연적으로 그 긴 강이나 능선에 걸쳐 병력을 주욱 늘어뜨려 놓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쪽에서 기만 기동을 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미리 병력 분산시키는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은 일은 이렇게 얇아진 적의 긴 방어선 중 적당한 어느 한 곳을 골라 송곳으로 구멍을 뚫듯이 집중 공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세나는 자신있게 공격 작전 계획을 하달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3개 군단이 모두 집결해 있었습니다.  레이니에(Jean Reynier)의 제2 군단, 네(Michel Ney)의 제6 군단, 그리고 쥐노(Jean-Andoche Junot)의 제8 군단이었지요.  흔히 부사쿠 전투에서 마세나가 고지에 자리잡은 영국군을 과소평가하고 무식하게시리 정면 공격을 고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자는 사냥할 때 새끼 영양 한마리도 과소평가하지 않는 법이고 마세나는 진짜 사자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폴레옹이 공통적으로 즐겨 사용하던 고전적 모루와 망치 전법을 변형해서 적용했습니다.  먼저, 레이니에가 영국군 방어선의 좌측 측면(영국군 쪽에서는 우익)을 멀찌감치 우회하여 고지를 기어오른 뒤 영국군의 측면을 찌르면, 네의 제6 군단이 영국군의 정면을 들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작전에서 필수적인 시간 동기화는 쉬웠습니다.  저 좌측 능선 위 어디선가 요란한 총성이 들리기 시작하면 네가 진격을 시작하면 되었으니까요.  그 총성이 영국군 베스 브라운 소총에서 나오는 것인지 프랑스군 샤를빌르 소총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는 영국군을 과소평가하기는 커녕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습니다.  예상 외로 영국군이 억세게 저항하여 레이니에와 네의 공격을 모두 격파할 수도 있다고 보고,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쥐노의 제8 군단을 예비대로 대기시켰습니다.  




(레이니에 장군입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함께 이집트 원정에도 갔었으나 나폴레옹이 조기 귀국할 때 따라가지 못하고 므누 장군과 함께 뒤에 남겨진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나폴레옹의 심복 부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그람 전투 때 클레나우의 진격을 저지했던 로바우 섬의 포격을 지휘한 로바우 섬의 책임자였습니다.)




하지만 마세나는 쥐노의 예비대까지 실제 전투에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저 능선을 따라 길게 분산되어 있을 영국군은 그 자체로 이미 패배한 셈이었으니까요.  마세나가 보기에 영국군이 가진 유일한 이점은 고지에서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프랑스군의 공격 방향에 대응하여 영국군이 서둘러 재배치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산 위는 당연히 길이 험했으니 능선을 따라 포병대와 탄약차량은 커녕 경보병 대대를 이동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때마침 공격이 시작되던 9월 27일 이른 아침에 부사쿠 능선 아래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습니다.  덕분에 산 위의 영국군은 아래 쪽의 프랑스군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꼭 우연만은 아니었습니다.  근처에 몬데고 강이 흐르는 계곡 아래 쪽이니, 가을철 이른 아침에는 안개가 낄 가능성이 꽤 많았던 것이지요.  마세나는 애송이 웰링턴의 실수를 비웃으며 레이니에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마세나는 아직 웰링턴이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peninsularwar.org/bucaco.htm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2번 본 기념으로 퀸의 노래 가사 한편 더 올립니다.  지난 6월부터 이 영화 개봉을 학수고대했는데, 그러면서도 혹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면 어쩌나 하고 약간 걱정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적어도 제게는 매우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 하일라이트인 웸블리 공연 장면은 이미 2번 보았지만 또 보고 싶을 정도로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진짜 프레디 머큐리는 아니지만 큰 화면에서 빵빵 터지는 사운드로 들으니 진짜 공연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유튜브로 보는 실제 프레디의 공연 녹화와는 또다른 감동이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서의 웸블리 공연은 실제 공연과는 달리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빼고 4곡이 연주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걸 뺸 것은 영화의 감동을 위해 매우 잘 된 선택이라고 봅니다.  또 (제 기억이 맞다면) Radio Ga Ga의 경우 실제와는 달리 1절까지만 불렀는데, 그건 약간 아쉬웠습니다.  저는 실제 웸블리 공연에 'Another one bites the dust'나 'Don't stop me now'는 들어가지 않고 별로 유명하지 않은 'Hammer to fall'이 들어간 것이 다소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비록 사실의 왜곡 논란이 있긴 합니다만) 영화에서 웸블리 공연 직전에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준 뒤에 그 전설적인 공연을 보여주니, 그 선곡 하나하나 가사 한줄한줄이 정말 대단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가령 Radio Ga Ga의 가사는 원래 이미 절정기를 지난 라디오에게 바치는 위로와 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웸블리 공연에서는, 퀸 자신들에게 바치는 용기와 신념의 노래였어요.  당시 락스타로서는 늙었다고 할 수 있는 40에 가까운 나이에 (영화 속에서는) 사실상 해체되어 이미 한물 갔다는 평을 듣던 퀸이, 극적으로 재결합하여 AIDS 감염으로 엉망이 된 프레디의 성대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선 무대가 웸블리 공연으로 영화에서는 묘사 되거든요.  브라이언 메이가 스스로 '우린 공룡 화석'이라고 평가하며 관객들은 마돈나를 찾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 뒤에 그런 무대가 펼쳐지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So don't become some background noise

A backdrop for the girls and boys

Who just don't know or just don't care

And just complain when you're not there


그러니 그저그런 배경 소음이나

철부지 애들을 위한 무대 장식 따위로 전락하지는 말아줘 

걔들은 널 이해하지 못하고 신경도 안써

그저 네가 없으면 불평만 할 뿐이지


You had your time, you had the power

You've yet to have your finest hour


너도 전성기가 있었고 그때 넌 정말 대단헀지

하지만 너의 가장 빛나는 때는 아직 오지 않았어



저도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Hammer to Fall이라는 노래를 잘 알지도 못했고 가사를 들어보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체념과 의지가 공존하는  그 가사 한줄 한줄의 의미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인간의 필멸성(mortality)에 대해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노래인 이 곡은 리드 기타리스트였던 브라이언 메이가 쓴 곡인데, 실제로는 물론 프레디의 AIDS 감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곡입니다.  '곧 떨어질 망치'라는 표현은, 가사 속의 '버섯 구름'이라는 표현과 맞물려 냉전 시대였던 당시의 핵전쟁 공포에 대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일부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이건 그냥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인 죽음에 대한 노래입니다.  


가사 자체를 한줄 요약하면 '어차피 죽으면 썩어문드러질 몸이지만, 그래도 숨이 붙어있는 한 신나게 살자' 정도입니다.  영화나 문학 속에서 자주 사용되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저나 여러분이나 조금씩 죽어가고 있지요.  죽음은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노력하는 사람에게나 게으른 사람에게나 모두 똑같이 찾아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모으겠다고 또는 더 성공하겠다고 아둥바둥거리지 말고 꿋꿋하고 신나게 살다 가자라는 것이 이 노래의 메시지입니다. 





(특히 브라이언 메이 역을 맡은 배우는, 머릿발이 컸겠지만, 아무튼 정말 브라이언을 많이 닮았더군요.)




어떻게 보면 염세적인 의미의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브라이언 메이는 원래 천체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던 학생이었지요.  결국 2007년 모교인 Imperial College London에서 천체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 Liverpool John Moores 대학의 총장까지 지낸 인텔리입니다.  천체물리학을 하다보면 티끌만한 지구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는 짧은 순간인 80년 좀 넘는 세월을 아웅다웅 살아가는 인간은 정말 티끌의 티끌같은 존재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이런 가사를 지었나 봅니다.  


특히 What the hell are we fighting for ? 라는 부분은 '백년도 못 살 인간들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라는 말을 연상케 합니다.  MB는 어차피 죽을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을 왜 그리 나쁜 짓까지 해가며 모았을까요 ?  우리가 광대한 우주 속 순식간에 반짝 했다 사라지는 한낱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과욕도 없을 것이고 그에 따라 갈등과 싸움도 크게 줄어들지 않을까요 ?



제 친구 중 하나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데, 고등대딩 시절에는 '아무리 공부 열심히 하고 노력해도 자기라는 존재는 결국 수십년 후에 죽어 없어질 존재'라는 사실에 너무 좌절하여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몸부림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제 친구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으로 그런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신앙심이 깊은 그 친구도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공평함에 대한 것이었다고 해요.  어린 시절 그 친구 생각으로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태어났으니 모두에게 회개와 믿음 즉 구원에 대한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져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시대에 어떤 지역에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아예 구원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데, 그게 말이 되는가 하는 의아함이지요.  그걸 어떻게 극복했냐고 물어보니,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더군요.  저도 그게 무슨 뜻인지 대충 이해는 갔어요.  저는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 가사처럼, 신을 'high indifference'라고 이해하는데,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인 아주 어릴때, 어떤 TV 탤런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뉴스를 TV에서 보고는 죽음 즉 절대 무에 대한 공포를 이해하고 벽장 속에서 막 울었던 것이 기억나요.  지금도 죽음은 무섭습니다.  그럴 때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 조금 덜 무서울까요 ?






Hammer to Fall의 진짜 Live Aid 1985년 웸블리 실황 공연은 다음 유튜브 클립을 감상하세요.



https://youtu.be/5oSz8Xip_ho




Here we stand or here we fall

History won't care at all

Make the bed, light the light

Lady Mercy won't be home tonight


우리가 우뚝 서든 고꾸라지든

역사는 눈도 깜짝 안 할거야

그러니 침대정돈하고 불이나 켜

자비의 여신은 오늘 밤 외출 중일거야


You don't waste no time at all

Don't hear the bell but you answer the call

It comes to you as to us all

We are just waiting

For the hammer to fall


넌 조금도 꾸물거리지 않는구나

아직 벨도 안 울렸는데 수화기부터 집어드네

너에게나 우리에게나 결국 모두에게 찾아와

우린 그저 기다릴 뿐

망치가 떨어질 순간을 말이야


Oh every night, and every day

A little piece of you is falling away

But lift your face, the Western Way

Build your muscles as your body decays


아 낮이나 밤이나 매일매일

너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거야

하지만 서부식으로 고개 들라고

썩어가는 몸이지만 근육 좀 키워


Tow the line and play their game

Let the anesthetic cover it all

Until one day they call your name

You know it's time for the hammer to fall


출발선에 늘어서서 게임을 시작해

중간 과정은 마취제로 덮어 버리자구

너의 이름이 불리는 바로 그 날까지

망치가 떨어질 순간임을 너도 알게 될 거야


Rich or poor or famous for

Your truth is all the same (oh no, oh no)

Lock your door but rain is pouring

Through your window pane (oh no)

Baby now your struggle's all in vain


부자든 가난하든 유명하든

너의 최후는 다 똑같아  (아 안돼 안돼)

현관문을 걸어잠가봐야 

빗방울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올걸 (아 안돼)

니가 노력했던거 다 헛수고야


For we who grew up tall and proud

In the shadow of the Mushroom Cloud

Convinced our voices can't be heard

We just want to scream it louder and louder


우린 꿋꿋하게 자라났어

버섯구름 그림자 속에서도 말이야

우리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 뻔하니까

우린 그저 소리지르고 싶어 더 크게 더 크게 


What the hell are we fighting for?

Just surrender and it won't hurt at all

You just got time to say your prayers

While you are waiting for the hammer to, hammer to fall


대체 우린 뭐하러 싸우는거야 ?

그냥 포기하면 편해

네게 주어진 시간은 딱 기도드릴 정도 뿐이야

망치가 떨어질 순간을 기다리는 중에 말이야


It's gonna fall

Hammer... You know... Hammer to fall

Waiting for the hammer to fall now, baby

While you're waiting for the hammer to fall


그거 반드시 떨어진다구

망치말이야, 알잖아... 망치가 떨어질 순간말이야

이제 망치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어 자기야

망치가 떨어질 순간을 기다리는 중에 말이야




사족 : 이번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에서의 자막 번역은 대체적으로 괜찮았습니다.  특히 Killer Queen의 가사 중 'Drop of a hat' (눈 깜짝할 사이에)를 '신호만 떨어지면' 으로 해석한 것이라든가, Another one bites the dust에서 'I'll get you too' (너도 잡고야 말거야)를 '너도 기다려'로 해석한 것에는 저도 매우 감탄했습니다.

다만 We will rock you의 가사 중, 'big disgrace'를 '수치를 무릅쓰고'로 번역한 것은 다소 이상했어요.  물론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건 그런 뜻이 아니라 '이 수치 덩어리야' 또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정도로 해석하는게 맞지 않을까 합니다.


어느 병사의 주석 스푼 이야기

잡상 2018.11.05 06:30 Posted by nasica

화제의 영화였던 마블 스튜디오의 '어벤저스 3 : 인피니티 워'에서 묘한 소품이 있었습니다.  토르가 우주 공간에서 떠돌다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이하 가오갤) 일당의 우주선에 구출해낸 뒤, 뭔가 음식을 먹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토르는 상당히 조그만 구리 사발 같은 것에서 뭔가 수프 같은 것을 스푼으로 먹고 있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타노스가 가오갤 일당 중 가모라를 붙잡은 뒤에, 가모라에게 '너 배고프지 않냐?' 라며 뭔가 먹을 것을 건네는데, 그게 토르가 먹던 것과 똑같이 생긴 조그만 구리 사발 같은 것이었어요.  




(유튜브를 열심히 검색해서 간신히 찾은 화면입니다.  원래도 좀 작은 사이즈의 사발인데 타노스의 손에 쥐니 거의 컵이네요.  토르가 먹던 사발 장면은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옵니다.)



(인피니티 워의 명장면이지요.  우주 전체에 천둥의 신을 코 앞에 두고 당당히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영화 관계자들이 소품에 신경을 별로 안 썼나 보다, 타노스네 집이나 가오갤 우주선에서나 똑같은 사발과 스푼을 쓰는게 말이나 되나' 라는 생각도 했지만, 동시에 '서양애들은 사발에 그냥 입대고 마시는 것을 진짜 싫어하는 모양이다'라고도 생각했습니다.  타노스-가모라 신에서, 가모라는 그 사발을 받아들자마자 집어던졌는데, 그때 보니 어차피 사발 속에 든 수프에는 건데기도 없어서 그냥 사발째 들고 마시면 되는 거였는데, 타노스는 친절하게도 그 사발에 스푼도 담아서 건넸었거든요.


그 장면을 보니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독일 영화 '몰락'(Der Untergang)의 끝부분에서 역시 굉장히 인상 깊었던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히틀러가 자살한 뒤 남은 총통부 소속 병력들과 비서 등의 직원들이 도망을 치는 와중이었는데, 밤이 되어 어느 폐가에서 일행이 통조림을 따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다른 독일 관리가 나타나자 반갑게 맞으면서 '일단 뭐 좀 먹어둬라'라며 개봉한 통조림을 내미는데, 스푼도 딱 꽂아서 함께 주더라고요.  그걸 보고 '야, 저 독일놈들은 소련군으로부터 허겁지겁 도망치는 중에도 저렇게 깡통 1개당 스푼 1개씩을 꼭 챙겨서 왔나보다'라며 감탄했었습니다.



(제가 감탄했던 그 장면들입니다.  통조림과 함께 건네는 저 스푼을 보십시요.)



(여러가지 패러디로 유명해진 이 '몰락'이라는 영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저 히틀러의 마지막 식사 장면이었습니다.  채식주의자이던 히틀러가 먹던 저 마지막 요리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  영화 속에서는 토마토 소스를 넣은 파르팔레(farfalle)나 라비올리(ravioli) 형태의 파스타처럼 보였는데, 검색해보니 실제로 토마토 소스 파스타를 마지막으로 먹었다고 합니다.  저 장면에서 히틀러는 식사를 마치고 “Danke, das war sehr gut, Fräulein Manziarly" (고맙네, 아주 맛있었어, 미스 만치알리)라고 말하지요.)




병사들에게 스푼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카투사로 입대했을 때 먼저 논산 훈련소에서 10주간 훈련을 받았는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식사를 할 때 젓가락은 없고 그냥 포카락(포크 + 숟가락) 1개만 받았거든요.  식판은 공용이었지만 그 포카락은 개인 소지품이었습니다.  훈련병에게는 그게 사실 총보다도 더 중요한 장비였지요.  미군 부대에 배치를 받은 뒤에도 스푼의 중요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군도 표준 장비 중에 mess kit라고 해서 스텐리스 반합과 스푼, 포크, 나이프 같은 것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으로 식사를 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야전 전투부대가 아니라서 1년에 1번 정도 FTX라고 야전 훈련을 3박4일인가 4박5일인가 했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식사는 MRE로 했는데, 그 속에 플라스틱 스푼이 들어었었거든요.  플라스틱 포크나 나이프는 없고 그냥 플라스틱 스푼만 들어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병사들이 야전에서 먹는 음식은 어차피 스푼 1개만 있으면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야전에서 스테이크를 썰 일도 없고 우아하게 완두콩을 포크로 찍어 먹을 할 일도 없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맛이 없었던 MRE... 그래도 저 속에 가끔 들어있던 오트밀 쿠키바(oatmeal cookie bar)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병사들에게는 포크나 나이프 따위는 필요없고 오로지 스푼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15년 초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 현장에서 건축 공사를 하던 중 한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워털루 전투 당일 사망한 영국 병사의 것이었습니다.  흉부에 프랑스제 샤를빌르(Charleville) 머스켓 소총 구경에 딱 맞는 납탄이 박힌 채 발견된데다, 휴대하고 있던 2개의 예비 부싯돌도 영국군이 사용하던 브라운 베스(Brown Bess) 소총에 딱 맞는 크기의 암회색 부싯돌이었거든요.  프랑스군은 주로 노란색의 부싯돌을 썼습니다.  이 병사의 시신은 건설 현장의 불도저에 의해 두개골 부분이 날아가는 등 일부 훼손되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습니다.  키가 158 cm 정도로서, 당시 기준으로도 다소 작은 편이었던 이 병사의 주머니에서는 22개의 여러 나라 동전과 함께, 스푼 1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시신에 대해 소개한 기사에는 이 스푼이 어떤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는지는 나오지 않았으나, 혹시 이 스푼에 이 병사가 소속되었던 연대 마크가 있지 않을까 싶어 엑스레이 촬영을 해본 사진을 보니 금속제는 확실합니다.  아마 당시 식기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되던 백랍(pewter, 보통 주석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대략 95%의 주석과 약간의 구리 및 안티몬으로 만들어진 합금)으로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도 이 병사가 금속제 스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서 그나마 따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혹시 이 병사의 스푼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저 불쌍한 시신의 갈비뼈 부분에 작고 둥근 회색 구체 하나가 보이시나요 ?  프랑스제 머스켓 볼입니다.)



(이 병사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스푼과 그 엑스레이 사진입니다.)




의외로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금속 생산량이 그렇게까지 풍부하지는 않아서, 금속 대신 나무를 써도 되는 물건들은 나무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폴레옹 당시 유럽 전역의 머스켓 소총 숫자와 농기구 숫자 전체를 비교해보면 소총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금속은 주로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농부들의 괭이나 쟁기는 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전통이 놀랍게도 19세기 초반까지도 이어졌던 것이지요.  심지어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주교님도 은접시를 장발장이 훔쳐가는 바람에 나무 접시로 음식을 먹어야 했쟎습니까 ?   19세기 중반인 미국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명작 서부 영화 '황야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처음 장면에서 '나쁜놈'으로 나오는 리 밴클리프가 멕시코 농부와 눈싸움을 벌이며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두 사람은 나무로 만든 스푼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 당시의 영국 병사들은 최소한 스푼만큼은 백랍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 농부보다는 더 나은 대우를 받았던 셈이지요.  






사족 1)


동양 삼국에서는 희한하게도 한국에서만 숟가락이 중요하게 사용되는 편입니다.  식사를 할 때, 특히 주식인 쌀밥을 숟가락으로 먹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니까요.  일본은 원래 젓가락으로만 식사를 하지요.  국은 그냥 그릇을 입에 대고 마십니다.  중국도 스푼은 국물을 떠먹을 때만 사용하고, 쌀밥을 먹을 때는 밥그릇을 입에 대고 젓가락으로 쓸어넣는 편입니다.  특히 중국식 숟가락은 조그만 국자 모양의 깊고 평평한 바닥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입 안에 집어 넣는 것은 부적절하고, 숟가락에 입술을 대고 숟가락을 기울여 그 안의 국물을 입으로 흘려넣어야 합니다.  보통은 거기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빨아먹게 되지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나 중국이나 별로 점잖지 않은 습관을 가진 셈입니다.   


병사들 말고 점잖은 서양인들의 스푼 사용법은 굳이 따지자면 중국인들에게 좀더 가까운 편입니다.  정찬에 있어서 스푼은 수프를 먹을 때만 사용되는데, 제대로 예절을 지키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이나 국을 먹을 때처럼 스푼 전체를 입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중국식 숟가락을 쓸 때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수프 국물을 스푼의 옆면으로부터 받아 마셔야 합니다.  이때 절대로 후루룩 소리가 나면 안 됩니다.  예전에 영국 드라마 채널에서 방영한 Hornblower 시리즈를 볼 때, 주인공 혼블로워가 오찬에 초대되어 수프를 먹을 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스푼으로부터 수프를 먹는 모습을 보고 '참 보기 흉하게 먹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제대로 된 방식이라고 해서 놀랐던 것이 기억납니다.




(중국식 스푼입니다.)



(양식에서 점잖게 수프를 먹는 방식이라고 하네요.  사실 후루룩 쩝쩝 소리만 안 내면 되지 뭐 이렇게까지 먹어야 하나 싶습니다.)




사족 2)


병사들의 스푼 사랑은 이라크 전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저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인데, 이라크에서 어느 집 안에 잠복해있던 반군들과 뒤엉켜 육박전을 벌이던 미육군 레인저 병사가 처음에는 대검을 뽑아 상대를 찌르려 했으나 손이 닿지 않아, 마침 군장 탄띠에 꽂아두었던 플라스틱 MRE 스푼을 뽑아들고 상대를 찔러 죽였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 https://www.ebay.com/itm/US-Army-Mess-Kit-Wyott-Complete-/283196753881 )  비록 confirm 된 이야기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이건 정식 뉴스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믿지 못할 전형적인 가짜 뉴스 같습니다.  심지어 존 윅도 연필로 사람을 죽였지 플라스틱 MRE 스푼으로 사람을 죽이진 않았쟎습니까 ?




(그 병사가 스푼을 꽂아두었다는 MOLLE(몰리라고 읽습니다)입니다.  MOLLE는 Modular Lightweight Load-carrying Equipment의 약자입니다.  그냥 군장 탄띠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전투기나 탱크 사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사 개개인의 장구류도 중요하지요.  특히 야시경은 매우 중요한 장비같은데...)



사족3)


지금도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 지방에서는 전통적으로 스푼이나 포크같은 식기를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도 맨손으로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포함한 중동 사람들은 어떻게 국물있는 음식을 먹었을까요 ?  차라리 묽은 국같은 것은 (일본 사람들이 하듯) 그릇을 들고 마시면 되겠지만, 스튜같은 어정쩡한 음식은 스푼이 없다면 정말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예수님께서 손에 소스를 잔뜩 묻힌 채로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스튜를 먹었다 ?  그건... 점잖지만 믿음이 약한 신도들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장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스푼 없이도, 우아하게 스튜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즉, 중동에서 주로 먹는 얇고 넓적한 피타 빵이 스푼 대용 역할도 했습니다.  피타 빵을 뜯어서, 알맞게 접으면 스푼처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빵에 국물을 묻혀서 먹어야 피타도 먹을 만 했다고 하네요.  스튜같은 국물있는 음식이 없을 때도, 피타에 하다못해 물이라도 꼭 찍어서 먹었답니다.  생각해보니 멜 깁슨 주연의 스코틀랜드 독립 투쟁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치마(퀼트)를 입은 멜 깁슨과 그 일당이 들판에서 그런 식으로 뻑뻑한 빵을 주걱 삼아 뭔가 스튜 같은 음식을 퍼먹던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피타 빵을 굽는 모습입니다.)



사족4)


본문에는 저 워털루 현장의 병사가 나무 스푼이 아니라 주석 스푼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써놨습니다만, 꼭 금속제 스푼이 나무 스푼보다 더 비싼 것만은 아닙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암살당하고 난 뒤에 안경과 시계 하나, 샌달 한 켤레 등 매우 조촐한 소지품만을 유품으로 남겼습니다.  그렇게 가진 것이 없었던 간디도 식기류는 개인 물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남긴 유품 중에는 금속제 사발 하나와 나무로 만든 스푼 2개와 포크 1개가 있었답니다.  그것들이 2016년 경매에 붙여진다는 뉴스를 봤는데, 시작가가 22,900 파운드(약 3천3백만원)이라고 씌여있네요.  실제로는 얼마에 낙찰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것들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푼일 것 같기는 합니다.  인도에서는 맨손으로 식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간디가 스푼과 포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네요.  영국 유학파라서 그랬을까요 ?





(진짜 간디가 쓰던 사발과 스푼, 포크랍니다.)





Source :  https://www.archaeology.org/issues/79-1303/features/535-waterloo-british-soldier-dominique-bosquet

https://www.mreinfo.com/mres/

https://tribunist.com/news/report-army-ranger-gets-confirmed-kill-with-mre-spoon/

https://en.wikipedia.org/wiki/MOLLE

https://www.youtube.com/watch?v=po5F65mrjn4&vl=en

https://www.youtube.com/watch?v=s9oviaIumJM&index=15&list=PLgXs8EKlGi7C8iNJdAWGbYZgPVnNZraPL

https://nypost.com/2017/11/24/this-was-hitlers-final-meal/

https://www.wikihow.com/Eat-Soup

https://www.youtube.com/watch?v=fX7zVa19Iqw

https://en.wikipedia.org/wiki/Pita

https://www.easterneye.biz/gandhis-food-bowl-wooden-spoons-auction/

요즘 한국 경기가 어렵다는 신문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  체감적으로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실은 제가 느끼기에는 리먼 사태 이후, 조금 더 과장하면 IMF 이후 젊은이들 취업은 항상 어려웠고 자영업자 장사도 계속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각종 경제지표를 보면 그동안 우리나라는 MB와 503 정권 하에서 대단한 호황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런 호황의 달콤한 과실은 주로 기업들과 자본가들이 다 따먹었기 때문에, 대기업에 근무하지 않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것일까요 ?  하긴 양극화는 점점 심해진다고 하지요.


생각해보면 그동안에도 보수 언론의 경제란에서도 서민 경제를 걱정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김영란법이나 노인기초연금처럼 정부에서 사회정의 또는 사회복지를 위한 규제나 법령을 새로 만들려고 하면 항상 '식당 이모'님들과 '아파트 경비원'님들의 일자리가 날아간다고 대성통곡하는 기사가 대단했지요.  그러면서 꼭 나오는, 이제는 진부하다 못해 냄새까지 나는 상투적인 표현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였습니다.  서민들에게 잘 해주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래봐야 다치는 것 서민 뿐이니 그냥 현체제 그대로 살자는 것이 보수 언론들의 선동질이었지요.


현 정권에서 추진하는 52시간 근무제나 최저임금 대폭 인상은 분명히 서민들을 위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또 분명한 것은 그나마 경제지표 상으로는 나쁘지 않았던 한국 경제가 그런 경제지표에서조차 약간씩 나빠지는 조짐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미국 연준의 양적완화로 강제부양되었던 세계 경제가 금리 인상과 함께 쭈그러들 때가 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런 최저임금 인상 제도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최근 국내 언론에 따르면 영화 안시성이 실패한 이유가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52시간 근무제 때문에 늘어난 제작비 탓인 것처럼 되어 있던데, 아무튼 보수언론에 따르면 모든 문제는 결국 52시간 근무제와 최저임금 때문이더군요.   


그런 보수언론이 줄기차게 비교하는 대상이 미국입니다.  요즘 미국 경제 잘 나갑니다.  미국 경제가 잘 나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동안 말이 많았지요.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등으로 대표되는 기술 혁신과 우버로 대표되는 규제 철폐, 대대적인 감세 정책, 심지어 트럼프의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으로 대표되는 보호무역 정책이 그 이유라고들 이야기되었습니다.


최근 미국 언론에 다음과 같은 두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기하게도, 그토록 미국 좋아하는 보수 언론에서는 이 기사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더군요.  보수 언론에서는 매우 싫어하는 뉴스 같아서 제가 다음에 간략히 간추렸습니다.



1.  미국 경제가 활황인 이유 중 큰 것은 정부 재정 지출

"A Big Reason U.S. Economy Is Accelerating: Government Spending"

https://www.wsj.com/articles/government-and-military-spending-fuel-u-s-growth-1540459800


2.  트럼프 감세에 의한 기업의 투자와 고용 확대는 아직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The Trump tax-cut stimulus still isn’t here"

https://finance.yahoo.com/news/trump-tax-cut-stimulus-still-isnt-185207034.html



미국 경제가 2017년 4월 이후 2.9% 성장했는데, 이는 2009~2017 사이의 연평균 2.2% 성장보다 훨씬 빠른 것입니다.  그런데 월스트리트저널의 분석에 따르면 그 초과 성장분의 절반은 정부 지출 증가 떄문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방위비 지출 증가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 방위비는 2009~2017 사이의 2.1% 감소에서 2017년 4월 이후 2.9% 증가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부분이 미국 전체 경제 성장에 0.21%p의 플러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방위비 이외의 기타 정부 지출 증가까지 합하면 0.34%p가 됩니다.  결국 2017년 4월 이후의 더 높아진 경제 성장률 0.7%p 중 절반 정도는 정부 지출 증가 덕분인 셈입니다.  




(미국 방위비 지출 추이)




그에 비해, 보수파가 그토록 부르짖던 감세에 의한 기업 투자의 증가와 그에 따른 고용 증대 효과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작년 12월에 기업에 대한 법인세를 35%에서 21%로 크게 인하해주었으나 약 1년이 지난 지금 그로 인해 투자와 고용을 늘렸다는 기업은 12%에 그쳤습니다.  3%는 오히려 줄였다고 응답했고, 절대 다수인 81%의 기업들은 '아무 변화없음'이라고 응답한 것이지요.  결국 감세는 기업들과 부자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로 인해 투자와 고용이 증가한다는 것은 현실이 아닌 것입니다.  




(미국 기업 자본 지출 및 설비 투자 추이) 




결국 미국발 뉴스에 따르면 경기 활황을 위해서는 법인세 인하해주는 것은 바보짓이고, 정부 지출을 늘려야 합니다.  그러나 재정 균형을 깨지 않고 정부 지출을 늘리자면 세금을 더 걷어야 하므로 보수파들은 아주 싫어할 뉴스인 셈이지요.   그래서 국내 보수 언론에서는 절대 보도하지 않는 뉴스가 되었나 봅니다.



Sharpe's Trafalgar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5년 인도양 무역선 상) -----------------------------


아침식사는 매일 오전 8시였다. 3등실의 승객들은 종종 그룹으로 나뉘어, 각 그룹 내에서 당번을 정해 앞갑판(forecastle) 쪽에 있는 주방으로부터 버구(burgoo) 한단지를 가져왔다. 버구라는 것은 오트밀 죽에 밤새 주방 난로에서 고기를 삶을 때 나온 쇠고기 기름 조각을 섞은 것이었다. 점심은 정오에 있었는데, 이 때의 메뉴도 역시 버구였다. 다만 점심 때의 버구에는 좀 탄데다 덩어리진 오트밀에 좀더 큰 고기 조각 또는 질긴 말린 생선 조각이 섞여 나왔다. 일요일에는 소금에 절인 생선과 돌처럼 딱딱한 건빵이 나왔는데, 건빵은 바구미 투성이어서 탁탁 두들겨 벌레를 빼내야 했다.


비스킷은 끊임없이 씹어야 했는데, 마치 벽돌을 으깨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건빵을 두들길 때 빠져나오지 못한 벌레가 이따금씩 씹혀서 색다른 맛을 내기도 했다. 차는 오후 4시에 제공되었으나, 이는 배 고물 쪽의 1등실 승객들에게만 제공되었고, 3등실 승객들은 저녁 때가 되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 메뉴도 그저 말린 생선에 비스킷, 그리고 벌레 구멍이 숭숭 뚫린 딱딱한 치즈였다.




The Happy Return by C. S. Forester  (배경 : 1808년, 영국 프리깃함 HMS Lydia 함상) -------------------------------


혼블로워 함장이 갑판 아래로 내려가니, 급사인 폴휠이 아침식사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와 버구입니다, 함장님."  폴휠이 말했다. 


혼블로워는 식탁에 앉았다.  지난 7개월 간 항해를 하다보니, 사품이라고 할만 한 식량은 다 바닥이 난 상태였다.  커피는 까맣게 태운 빵을 우려낸 물에 불과했고, 그 맛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달고 뜨겁다는 것 뿐이었다.  버구라는 것은 해군용 비스킷을 으깬 것과 잘게 썬 염장 쇠고기를 섞어 만든, 맛있기는 하지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모양새의 잡탕죽 같은 것이었다. 


혼블로워는 멍한 마음므로 아무 생각없이 식사를 했다.  왼손으로는 해군용 비스킷을 테이블에 계속 두들겼는데, 그래야 그가 버구를 다 먹을 때 즈음해서는 비스킷 속에 든 바구미들이 다 밖으로 기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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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en Biesty의 "Cross-sections : Man-of-War" 라는 책이 여전히 아마존에서 중고품으로 팔리고 있더군요.  아주 반갑게 샀습니다.  저도 잘 몰랐던 부분, 가령 저렇게 배식받은 쇠고기는 식사조 mess별로 금속제 꼬리표를 붙여 삶았다는 것도 상세하게 소개되더군요.)




위에서 나오는 음식인 버구에 대해서는 이미 저 소설 본문에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으므로 더 자세한 설명은 피하겠습니다.  참고로 버구라는 것은 미국 요리에도 있는, 일종의 스튜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주제는 저 버구가 아니고 버구를 만들 때 쓴 곡식인 귀리입니다. 


귀리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귀리 농사를 짓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만, 귀리하면 뭐니뭐니해도 스코틀랜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고딩 때 성문종합영어인가 무슨 책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영국인이 스코틀랜드인을 멸시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영국에서는 귀리는 말에게나 주는 사료 같은 건데,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걸 먹고 산다지 ?"


그러자 스코틀랜드인이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좋은 말이 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좋은 사람이 나는 거야."


그런데, 이게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실제로 1755년 사뮤엘 존슨 (Samuel Johnson)이라는 사람이 런던에서 발행한 영어 사전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을 보면, 귀리 (oat)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OATS. n.s. [?, Saxon] A grain, which in England is generally given to horses, but in Scotland supports the people.

It is of the grass leaved tribe; the flowers have no petals, and are disposed in a loose panicle: the grain is eatable. The meal makes tolerable good bread.






즉, 귀리라는 곡식에 대한 정의를 "영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말이,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이 먹는 곡물" 이라고 내린 것입니다.  이런 경멸에 가득찬 묘사가 사전에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왜 스코틀랜드가 최근 독립하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웠는지 이해가 갑니다.  그쪽도 변화를 바라지 않는 노년층의 투표가 상황을 결정지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왜 밀 대신 귀리를 먹었을까요 ?  아일랜드에서 감자를 주식으로 했던 것은 영국인들의 토지 수탈 때문인 탓이 컸지만, 스코틀랜드의 사정은 그와는 약간 달랐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햇볕이 안 좋고 날씨가 추운 기후에서는 밀 농사가 잘 안되어, 척박한 그런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귀리를 주식으로 삼아야 했던 것입니다.


다만, 저 위에서 영국인과 스코틀랜드인이 나눈 대화에서처럼, 실제로 밀보다 귀리가 훨씬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는 것은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귀리는 10대 수퍼 푸드로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요.   특히, 귀리에는 밀이나 보리, 호밀과는 달리 글루텐이 거의 없어 요즘처럼 '글루텐-프리'가 뭔가 멋진 단어로 보이는 시대에 더욱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글루텐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귀리는 과거에는 더욱 천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저 존슨 사전에는 귀리 가루로 tolerable good bread를 만들 수 있다고 했지만, 글루텐이 없는 곡식 가루로는 반죽 모양이 나오지도 않고 발효에 의한 부풀기도 잘 안되므로, 순수 귀리만으로는 빵을 못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귀리는 빵보다는 주로 죽으로 먹어야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오트밀(oatmeal)이라는 것은 영어 단어 그대로 번역하면 귀리가루라는 뜻입니다.  Meal이라는 단어는 식사라는 뜻 외에 가루라는 뜻이 있거든요.   맛없는 요리로 악명높은 영국인들도 아침 식사만큼은 괜찮은 것을 먹습니다.  베이컨, 달걀 프라이, 소시지, 버섯, 콩 등을 아주 푸짐하게 먹지요.  18~19세기 당시 영국 서민들이 그런 기름진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들은 물론 아닙니다만, 영국인들의 그런 아침 식사와 스코틀랜드인들의 초라한 귀리가루 죽이 비교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뭔가 곡식 이름에 ~meal이라는 것이 붙으면 그 곡식의 가루를 뜻하는 것입니다.   가령 보리가루는 barleymeal이지요.  오트밀은 귀리가루 자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거칠게 간 귀리 가루를 물이나 우유에 넣고 끓인 요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회색빛이 나고, 맛도 없습니다.  여기에 설탕을 잔뜩 넣으면 좀 먹을 만 해집니다.)




여러분은 죽 좋아하십니까 ?  저는 싫어합니다.  누가 뭐래도, (새우나 전복 같은 비싼 재료를 넣은 것도 있지만) 죽은 그다지 맛이 있는 음식이 아니라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니까요.  그래서인지, 귀리 죽을 많이 먹는 나라들은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북유럽 등 과거 살림살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나라들입니다.  죽은 더 많은 머릿수를 먹이기 위해서는 그냥 '물만 좀 더 부으면 된다'는 점 외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편리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제분입니다. 




(러시아군 식사라고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입니다.  진짜 여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빵은 제조 과정이 복잡하고 힘도 많이 들어갑니다.  반죽도 발효도 오븐에서 굽는 것도 모두 만만치 않은 과정입니다.  그러나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곡식으로 가루를, 그것도 아주 고운 가루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집에서 손으로 맷돌을 돌려 빻는 것 정도로는 아주 고운 가루를 내기가 어려웠고, 이렇게 거칠게 간 가루로 만든 빵은 부드럽지 않고 식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중세 어떤 수도사가 쓴 일지를 보면 "이런 거친 가루로 만든 빵을 먹으면 악마라도 방귀를 뀔 수 밖에 없다" 라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점을 이용해서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장원의 물레방아 또는 풍차로 된 제분소를 장악하고 제분 과정에서 짭짤한 세금을 뜯었지요. 


이렇게 모든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야 비로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럽인들의 사고 방식 때문에,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가령 이집트를 침공한 나폴레옹군이 침공 초기에 마을마다 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방앗간이 없어서 굶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또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감자 잎마름 병에 의한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필(Sir Robert Peel) 경이 미국으로부터 10만 파운드 상당의 옥수수를 대량 구매하여 구호 식품으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미국산 옥수수는 단단하게 마른 옥수수 알갱이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이를 가루로 만들 제분소가 충분치 않아서 이를 제분하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또 굶어죽어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귀리는 낟알이 너무 길어서, 죽이라도 끓여먹으려면 좀 자르고 빻아서 잘게 부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steel-cut 처리된 귀리 낟알입니다.)



하지만 귀리는 이렇게 곱게 갈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끓여 먹을 거니까요.  요즘 나오는 인스턴트 오트밀을 보면 그 사실이 좀더 명백해집니다.  제가 코스트코에서 가끔 사먹는 Quaker Instant Oatmeal을 보면 거칠게 부순 귀리 낱알을 압착 처리해서, 좀더 쉽게 물이나 우유를 흡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끓이지 않고 차가운 상태에서 완전히 부드럽게 만들어 먹으려면 5분 정도로는 택도 없고 적어도 1시간 이상 물이나 우유를 부어 놓아야 합니다.  저는 전날밤에 우유를 부어 놓습니다.  그러면 다음날 아침 뮤즐리 비슷하게 됩니다.) 





(코스트코에서 파는 인스턴트 오트밀입니다.  역시 오리지널 맛은 좀 그렇고, 단풍나무 시럽이나 갈색 설탕이 든 것은 그나마 먹을만 합니다.  가격은 의외로 무척 비쌉니다.)




영국인들은 귀리를 먹지 않았는가 하면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당연히 먹었고, 저 위 소설에서 언급했듯이, 영국 해군에서도 오트밀을 배식했습니다.  혼블로워나 오브리 시리즈에는 염장 쇠고기 이야기가 하도 많이 나와서 영국 해군은 매일 쇠고기를 먹나 보다 싶습니다만, 사실 정확하게는 쇠고기는 일주일에 딱 두번 나왔습니다.  돼지고기도 두번 나왔고, 나머지 3일, 정확하게 월수금요일에는 아예 고기가 안 나오고 오트밀에 버터, 치즈가 조금 나왔습니다. 




(역시 Stephen Biesty의 "Cross-sections : Man-of-War" 중 일부입니다.  영국 수병들 배식표를 보면, 맛없는 함상 식사 중에서도 월,수,금요일은 특별히 더 우울한 날이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 귀리는 그 보습성 때문에 화장품 원료로도 쓰이고, 또 건강식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귀리의 인기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80년대에 건강식이라는 이유로 큰 인기를 끌어, 귀리겨를 섞은 포테이토칩이 나오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귀리의 꺼끌꺼끌하고 질긴 식감은 인기가 없었는지 불과 5년도 안되어 그 인기는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FDA나 이런저런 유명 기관에서 '귀리가 건강에 좋다' 라고 발표를 하면 다시 반짝 인기를 얻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집에서도 요즘 밥에 귀리를 섞어 먹는데, 우리 식구들 입맛에는 잘 맞습니다.  가격이 무척 비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캐나다산 수입품이라서 그런지 그냥 쌀과 비슷한 가격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