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2 13:20

II


아침 이른 시간부터 - 여기서는 미리 획책된 것이 분명한데 - 모든 거리의 모퉁이마다 이상한 플래카드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런 플래카드의 내용을 우리가 옮겨적었으므로, 독자들은 그걸 기억할 것이다.  가끔씩 파리 시내에 혁명의 대포 소리가 울려퍼지고, 정부가 아주 절박한 조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60년 동안에도, 이런 플래카드는 목격된 적이 없었다.  그 내용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모든 집회는 아무 사전 경고 조치 없이 무력으로 해산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문명의 대도시인 파리 시민들은 인간이라면 자신의 범죄를 그런 극단적인 선까지 밀어붙일 것이라고는 쉽사리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고문은 그저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협박용이라고 간주되었고, 거의 코미디 수준이라고들 얕보았다.


하지만 대중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전체 계획이 다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 경고는 매우 진지한 것이었다.


12월의 인간에 의해 준비되고 저질러진, 이 전대미문의 드라마의 무대가 된 장소에 대해서 한마디 첨언하겠다.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글자 그대로 성 마틴 대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시듯이, 노트르담이 있는 시테 섬 북쪽에 있습니다.)



마들렌(Madeleine)에서 포부르 푸아소니에르(Faubourg Poissonniere)에 이르는 대로는 막혀 있지 않았다.  짐나즈(Gymnase) 극장에서 포르트 생-마르텡(Porte Saint-Martin)까지의 부분은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고, 봉디 가(Rue de Bondy), 네슬레 가(Rue Neslay), 륀 가(Rue de la Lune)도 마찬가지였으며, 생-드니(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에 접하거나 연결된 모든 거리가 다 막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틴 너머의 대로는 샤또 도(Chateau d'Eau) 반대편에서 시작된 바리케이드 하나만 빼고는 다시 바스티유(Bastile)까지 그냥 뚫려 있었다.  포르트 생-드니(Porte 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7~8개의 바리케이드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텡의 위치를 보여주는 구글 지도입니다.  그 바로 서쪽으로 포르트 생-드니가 있습니다.) 






(구글 덕분에 앉아서도 파리 시내 구경이 가능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길 한복판의 두 대문 중, 왼쪽의 좀더 큰 것이 포르트 생-드니, 오른쪽 것이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때, 포르트 생-드니 주변 4개 도로가 모두 시민들이 쌓은 바리케이드로 막혔습니다.)




포르트 생-드니는 사면이 4개의 바리케이드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 4개의 바리케이드 중 마들렌 쪽을 향한 것은 진압군의 첫번째 공격을 받을 운명이었는데, 그 거리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세워져 있었고, 그 왼쪽 끝은 륀 가, 오른쪽 끝은 마자그랑(Mazagran)에 접하고 있었다.  4대의 합승마차(omnibus), 그리고 5대의 가구 운반마차, 내던져진 전세 마차(hackney coach) 감독관 초소, 그리고 부서진 간이 공중화장실(Vespasian column), 대로변의 공공 벤치, 륀 가의 계단 판석, 군중들이 통째로 뜯어낸 쇠로 된 인도 가드레일 등이 이 요새의 재료였다.  이런 바리케이드로는 그 넓은 대로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도로는 매커덤(macadam) 방식으로 포장된 것이라서, 보도블럭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 바리케이드는 대로 양쪽 끝까지 뻗어 있지도 않아서, 마자그랑 가로 향한 집 한 채를 짓고 있던 쪽으로는 큰 빈 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빈 틈을 본 어느 잘 차려 입은 젊은이가 공사용 비계에 올라가, 혼자 힘으로, 입에 담배도 그대로 문 채로 아주 여유있게, 그 비계의 밧줄을 모두 끊어버렸다.  인근의 창문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웃으며 이 청년에게 박수를 보냈다.  한 순간 뒤 이 비계는 큰 소리와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틈을 막았고, 이로써 바리케이드가 완성했다.






(마카담(macadam)으로 포장된 도로입니다.  일정한 크기로 잘게 부순 돌을 깐 도로입니다.  그 이름이 혹시 마카다미아 견과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와는 전혀 무관하고, 이런 도로 포장법을 최초로 만든 스코틀랜드 출신 엔지니어 이름이 존 매커덤(John McAdam)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도 학생들이 보도 블럭을 뜯어다 경찰에게 던졌기 때문에, 대학 주변의 도로에서 보도 블럭을 모두 없애고 인도까지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원래 공중화장실이라는 것이 파리에 처음 들어선 것은 1770년 경 '신사들을 위한 소변기' 수준이었습니다.  형태도 정말 나무통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30년 경 파리 시 장관이었던 랑뷔토 백작(comte de Rambuteau)이 칸막이가 달린 소변기를 도입했습니다.  그의 정적들은 이를 비웃어 이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랑뷔토 기둥'(la colonne Rambuteau)이라고 불렀는데, 랑뷔토 백작은 이를 맞받아쳐 로마 시내에 최초의 공중 소변 화장실을 만들었다는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베스파시아누스 기둥'(la colonne vespasienn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이 굳어져, 이런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베스파시아누스 기둥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이 보루가 완성되는 동안, 약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대 문을 통해 짐나즈 극장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에 거기의 옷장에서 찾은 머스켓 소총 몇 자루와 북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것들은 극장 용어로 '소도구'라 불리던 것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북을 쥐고 전투 준비를 알리는 북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뒤집어 놓은 간이 화장실들과 옆으로 넘어뜨린 마차, 뜯어낸 블라인드와 셔터, 낡은 무대배경 등으로 본느-누벨 대로(Boulevard Bonne-Nouvelle)의 초소 반대편에 일종의 전초진지 같은 작은 바리케이드, 아니 작은 반달 모양의 진지를 지었다.  여기서는 푸아소니에르 대로와 몽마르트르 대로 뿐만 아니라 오뜨빌 가(Rue Hauteville)까지도 관측이 가능했다.  군 부대는 아침에 그 초소에서 철수한 상태였다.  그들은 그 초소의 깃발을 뽑아와 바리케이드에 꽂았다.  그 깃발이 나중에 쿠데타의 신문들이 '붉은 깃발'로 부른 그 깃발이었다.


약 15명의 사람들이 이 전초 진지에 위치를 잡았다.  그들에게 머스켓 소총은 있었으나 탄약이 없었고, 있더라도 매우 적은 양이었다.  그들 뒤에는 포르트 생-드니를 커버하는 큰 바리케이드를 약 100여 명의 전투원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2명의 여자와 한 명의 백발 노인도 목격되었다.  그 노인은 왼손에 든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오른손에는 머스켓 소총을 쥐고 있었다.  두 여자 중 하나는 어깨에 군도(sabre)를 맨 채로 길 옆 보도의 가드 레일을 뜯어내는 것을 돕다가 쇠막대의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오른손의 손가락 3개를 베었다.  그 여자는 군중들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며 외쳤다.  "공화국 만세 ! (Vive la Republique!)"  다른 여자는 바리케이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위에 꽂힌 깃대에 몸을 기대고는, 머스켓으로 무장한 셔츠 차림의 두 남자가 받들어 총을 해주는 사이 좌익 대표단이 발행한 무장 봉기 호소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군중들은 박수를 쳤다.  


이 모든 일들은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일었났다.  바리케이드 이 쪽에서는 대로 양쪽의 보도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떤 곳은 조용했고, 어떤 곳에서는 "술루크 타도 ! 배신자 타도! (à bas Soulouque! à bas le traître!)"를 외치고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것은 수염난 남정네가 아니라 저렇게 서민들이 쓰는 붉은 고깔 모자를 쓴 마리안느라는 여성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명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입니다.) 




가끔씩 애도 행렬이 군중 속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 행렬은 병원 직원들과 군인들이 나르는 밀폐형 가마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선두에는 긴 막대를 든 남자들이 행진했다.   그 막대 끝에는 큰 글씨로 '군 병원 활동'이라고 적힌 파란색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가마를 덮은 커튼에는 '부상자, 앰뷸런스'라고 적혀 있었다.  날씨는 흐리고 비가 내렸다. 


이때 파리 증권 거래소(la Bourse)에는 많은 군중이 있었다.  모든 벽에는 벽보 붙이는 사람들이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는 공문을 붙이고 있었는데, 시장 상승세를 바라던 주식 중개인들조차도 이런 벽보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을 정도였다.  갑자기, 지난 2일 간 쿠테타를 열정적으로 환영하던 잘 알려진 투기꾼이 마치 도망자처럼 하얗게 질리고 숨이 찬 모습으로 나타나 소리쳤다.  "저들이 대로에서 발포하고 있어요 !"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았다.  






(파리의 증권 거래소인 부르즈(Bourse de Paris)입니다.  브롱냐르 궁(Palais Brongniart)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건물은, 원래 캥캉푸아(Quincampoix) 등 몇몇 곳에서 벌어지던 증권 거래를 통합하기 위해 나폴레옹 1세가 알렉상드르 브롱냐르에게 의뢰하여 지은 것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이 건물 디자인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는데, 정작 건축가들의 비평은 고리타분하다는 등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관련 source : http://carolineld.blogspot.kr/2016/08/last-relief.html 

https://en.wikipedia.org/wiki/Macadam

https://en.wikipedia.org/wiki/Paris_Bourse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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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홍락 2016.12.03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학교에도 마카담으로 포장된 도로가 일부 있는데, 유지비 측면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얘기가 있었지요.

  2. 장웅진 2016.12.03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샤프도 어릴 때 뱃밥을 만들던 구빈원에서 어른 빈민들은 돌을 쪼았다더니만, 도대체 뭘 하는데 쓴 건지 했는데...

  3. 블랑 2016.12.04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렇게 기동 촘촘하게 세우면 건물이 뭔가 답답한 느낌이던데

    • 장웅진 2016.12.04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질 일은 없겠죠.

      영화 [타이타닉]에서 "미관을 위해 구명보트의 수를 줄였습니다"라는 화이트스타 사 관계자의 말이 생각나네요.

  4. 질문 있습니다 2016.12.05 0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인장님, 전에 다음 블로그에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글에서 '당시 유럽의 도로 상태는 좋지 못했다'는 내용을 종종 보았습니다. 혹시 당시 유럽의 노면 상태와 관련된 자료를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