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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노3

드레스덴 전투 (10) - 기후 변화의 피해자 오후 2시 즈음 도착한 파발마가 가져온 소식은 바로 어제 벌어진, 저 남쪽 피르나에서의 패전 소식이었습니다. 강을 건너 급습한 방담의 그랑다르메 제1군단에게 뷔르템베르크 오이겐 백작이 밀려났다는 소식이 그제서야 도착한 것입니다. 말로 달리면 불과 몇 시간 거리인 피르나에서의 소식이 왜 그제서야 도착했는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혹은 그 소식은 어젯밤에 도착했지만, 8월 27일의 전황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유사시 퇴각 방향인 피르나 상황에 대한 걱정이 갑자기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까딱하다가는 드레스덴 점령은 고사하고 퇴로가 끊길 수도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 보헤미아 방면군 수뇌부는 오스테르만-톨스토이(Alexander Ivanovich Ostermann-Tolstoy) 백작의 러시아.. 2024. 4. 22.
바그람 전투 (제18편) - 통쾌하지 않은 승리 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냉혈한인 그도 휘하 병사들이 거의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무려 40시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라콩브(Lacombe)라는 장교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었습.. 2017. 11. 11.
바그람 전투 (3편) - 도강 프랑스 병사들이 나폴레옹 섬(L'ile de Napoleon)이라고 별명을 붙인 로바우 섬에서의 준비는 6월 말 다리가 준비되면서 사실상 완료되었습니다. 회전 부교(pivoting bridge), 즉 작전이 시작되면 로바우 섬의 강변에 고정된 한쪽 끝을 축으로 회전하여 도나우 강 좌안에 붙게 되어 있던 다리는 나폴레옹의 공병단장 베르트랑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서, 약 800m에 달하는 긴 다리가 놀랍게도 하나의 통판(single span)으로 만들어진 걸작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작센 왕에게 이 회전 부교가 엘베 강변의 작센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다리보다 더 넓고 아름다운 다리'라며 자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준비가 끝났는데 시간을 더 끌 나폴레옹이 아니었지요. 그는 7월 5.. 2017.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