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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뤼허13

드레스덴을 향하여 (8) - 대환장 파티 8월 21일의 뢰벤베르크 전투에서 연합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면서도 단 한 명의 포로도 내지 않았다는 것은 슐레지엔 방면군 병사들의 질적 수준이 황급히 징집된 병사들로 이루어진 그랑다르메보다 더 높았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사람이 미우면 그 사람이 손에 쥔 숟가락도 밉다더니, 후퇴하여 한숨을 돌린 이후 블뤼허와 그나이제나우는 평소 밉상이던 요크 장군 휘하의 국민방위군(Landwehr) 부대들의 어설픈 전투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하들이 얼마나 급조되어 끌려온 병사들인지 잘 알고 있던 요크 장군은 이 국민방위군 부대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첫 전투를 훌륭하게 싸워냈다고 칭찬했습니다. 가령 뢰벤베르크 인근의 전투에서 이 국민방위군 부대들 중 유격병 대대에게 주어진 임.. 2024. 1. 29.
드레스덴을 향하여 (7) - 분위기 파악 못하는 블뤼허 8월 20일 아침, 나폴레옹은 지타우(Zittau)에서 보헤미아 방면군이 드레스덴을 노릴 경우 어떻게 지타우 일대에서 막을 것인지를 살펴본 뒤 괴를리츠(Görlitz)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발마로 들어온 슐레지엔 방면으로부터의 급보에는 막도날이 가지고 있던 암호키가 적군에게 탈취되었다는 소식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전날인 19일 시버나이헨(Siebeneichen) 마을에서 코삭 기병들이 막도날의 개인 짐마차를 노획할 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사용하던 암호키가 어떤 형태였는지는 모릅니다. 아마도 16세기부터 프랑스 육군에서 발전되어온 비쥬네르(Vigenère) 암호를 변형한 것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데, 그랬다면 암호키라는 물건은 아마도 몇가지 키워드가 적힌 종이였을 것입.. 2024. 1. 22.
드레스덴을 향하여 (1) - 단 한 명의 프랑스군을 찾아서 슐레지엔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블뤼허와 그나이제나우에게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임무를 가로막는 중립지대의 존재였습니다. 슐레지엔 방면군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했습니다. 보헤미아로 쳐들어갈 것이 분명한 그랑다르메의 측면에 붙어 감시하며 괴롭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자면 먼저 적과 접촉을 해야 했는데, 적과 자신의 사이에는 하루 이상의 행군거리인 수십 km의 중립지대가 있다보니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연합군 모두가 전투가 재개되자마자 나폴레옹은 보헤미아, 그러니까 남서쪽으로 쳐들어갈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으므로 블뤼허는 더욱 애가 탔습니다. 원래 휴전이 종료되는 8월 10일 새벽부터 양측은 병력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고, 전투는 적.. 2023. 12. 11.
새로운 전쟁의 준비 (5) - 러시아군의 상황 지난 편에서 프로이센군의 상황을 대충 보셨습니다만, 러시아군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국가는 덩치가 깡패라고, 러시아는 대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의 침공이 시작된 1812년 8월부터 1813년 8월까지의 1년 동안 대략 65만 명을 징집했습니다. 당시 러시아 인구가 대략 3천만이었으니 전체 인구의 거의 2.2%에 해당하는 엄청난 비율이었습니다. 덕분에 휴전 기간 중 러시아군은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병력 보충과 보급품, 그리고 장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러시아군이 충분한 병력과 장비를 갖추지 못한 것은 본국 러시아와의 거리 때문이었지 본국의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거든요. 휴전 직전만 하더라도 바클레이는 탄약이 부족.. 2023. 11. 13.
새로운 전쟁의 준비 (3) - 국민방위군(Landwehr)의 실상 여기서 잠깐, 국민방위군이란 정규군에 징집될 청년보다는 나이가 좀 더 많지만 중산층의 시민들이 자비로 무기와 군복을 마련하여 자발적으로 편성된 부대라고 하지 않았나요? 원래는 그랬습니다만 그건 평화시에 향토 방위 임무나 주어질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애초에 프로이센에 자비로 무기와 군복을 마련할 정도의 중산층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만, 이제 머나먼 타향으로 떠나 무시무시한 나폴레옹군의 총검 앞에 총알받이로 뛰어들어야 할 판국인데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자원하는 중산층의 중년 남자가 많을 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은 자원병도 아니었고 중산층도 아니었으며, 자비로 마련한 군복과 무기도 없었습니다. 현실의 이들은 그냥 누더기 같은 작업복을 입고 손에는 보병용 창을 든 .. 2023. 10. 30.
새로운 전쟁의 준비 (2) - 프로이센의 고민 원래 7월 20일까지였던 휴전 기간은 양측의 합의 하에 8월 10일로 연장되었고, 그때까지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전투가 재개되려면 6일 간의 유예기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투가 재개되는 것은 8월 17일 새벽 0시부터였습니다. 사실상 건성이었던 평화 협상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양측은 8월 17일의 전투 재개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양측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프로이센군은 전반적으로 사기가 높은 편이라고 다들 말했습니다. 비록 뤼첸-바우첸에서 2연패를 당했으므로 4월달에 처음 출정할 때처럼 희망만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러시아군이 후퇴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무시.. 2023. 10. 23.
바우첸을 향하여 (7) - 비트겐슈타인의 결정 밀로라도비치가 프랑스군의 기습 도하 작전을 막지 못하고 쩔쩔 매던 5월 9일, 프로이센군의 총사령관은 블뤼허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부상을 입고 있었던 블뤼허는 이 날 특히 상태가 좋지 않아 병석에 드러누웠고, 지휘권을 다른 사람에게 이양해야 했습니다. 상식적인 관례에 따른다면 프로이센 야전군 내의 서열 2위인 요크 대공이 임시 사령관이 되어야 했는데, 뜻밖에도 일개 참모에 불과한 그나이제나우가 지휘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이는 프로이센군 위아래 모두가 블뤼허의 모든 작전은 어차피 그나이제나우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요크 대공 본인도 새파랗게 아랫것인 그나이제나우로부터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무척이나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2023. 1. 23.
바우첸을 향하여 (3) - 샤른호스트의 빈 자리 5월 6일 아침, 나폴레옹은 스파이들로부터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이 각각 따로 엘베 강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특히 프로이센은 북쪽의 마이센(Meissen)으로 향하고 러시아군은 예상대로 남쪽의 드레스덴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나폴레옹은 자신이 토르가우로 네의 군단을 보낸 것에 프로이센군이 베를린이 위협받고 있다고 겁을 집어먹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기분 좋게 그 날 저녁 뷔르젠(Wurzen)까지 도착했지만, 프로이센군 중 일부 1만2천 정도만 마이센으로 갔을 뿐 나머지는 모두 러시아군을 따라 드레스덴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에 놀란 나폴레옹은 정확한 정보를 얻기를 원했고, 프랑스군의 진격은 또 잠시 멈춰야 했습니다. 혹시나 이것들이 결별하지 않으면 어떡.. 2022. 12. 26.
뤼첸 전투 (6) - 나폴레옹의 속셈 볼콘스키 대공은 원래 게으른 쿠투조프를 감시하고 독촉하기 위해 짜르가 쿠투조프의 참모로 알박기를 해놓은 짜르의 심복으롯, 누구보다 짜르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짜르가 지금은 자제하고 있지만 나중에 승리가 확실해지면 짜르 본인이 직접 러시아 예비군단의 선두에 서서 나폴레옹에게 막타를 쳐서 승리의 주역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토르마소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예비군단의 선두 부대의 지휘관은 코노브니친(Petr Petrovich Konovnitsin)으로서, 원래 쿠투조프의 참모였다가 볼콘스키 대공에 의해 교체된 인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코노브니친은 볼콘스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코노브니친도 쿠투조프 못지.. 2022. 10. 10.
스페인 모델의 실패 - 냉정한 작센 사람들 3월 30일, 드레스덴의 강북 신도시 노이슈타트(Neustadt)에 들어온 블뤼허는 브레슬라우 사령부에 있던 하르덴베르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서 블뤼허는 노이슈타트와 드레스덴 구도심지 알트슈타트(Altstadt)를 연결하는 아우구스투스 다리의 폭파에 대해 언급하며 이로 인해 작센인들의 반(反)프랑스 감정이 악화되었다고 썼습니다. 실제로 드레스덴에 입성한 프로이센군은 드레스덴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나폴레옹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체제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그냥 불만 가득한 침묵을 지켰을 뿐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군도 엄정한 군기를 준수하여, 드레스덴은 물론 모든 작센 주민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드레스덴에 입성한 이후 블뤼허가 자신의 부.. 2022. 6. 27.
드레스덴(Dresden)을 향하여 - 지킬 것과 버릴 것 나폴레옹은 자신이 새로운 군대, 즉 마인 방면군(Armée du Main)을 연성하는 동안 외젠이 기존 그랑다르메의 잔존부대를 지휘하여 어떻게 해서든 오데르 강, 적어도 엘베 강에서 러시아군의 침공을 막아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외젠이 아니라 외젠의 아버지, 즉 나폴레옹 본인이 와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폴레옹도 그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월 2일에 외젠에게 편지를 보내어 '곧 내가 30만 대군을 몰고 갈테니 그때까지만 잘 버텨라'라고 위문 편지를 보내면서도, 같은 날 동생 제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외젠은 엘베 강을 포기하고 물러서면 베저(Weser) 강과 카셀(Kassel)에서 적을 막아낼 것'이라고 썼습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러시아군은 틀림없이 오데르 강과 엘베 강을 건너.. 2022. 5. 30.
나폴레옹을 잡을 작전 - 샤른호스트의 비책 프로이센이 러시아와 손잡고 나폴레옹과 전쟁을 하기로 했으니 먼저 총사령관을 선정해야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프로이센 내부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크네제벡과 같은 인물은 러시아군과의 협력이 최우선이니 러시아 짜르의 신임을 받고 있는 타우엔치엔(Bogislav Friedrich von Tauentzien) 장군이 적절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크네제벡이 아무리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측근이라고 해도 그는 중령에 불과했고 인사권자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국방부 장관 샤른호스트는 바로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를 천거했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 프로이센 장군들 중에서 오직 블뤼허만이 나폴레옹에게 겁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타우엔치엔 장군입니다. 그는 18.. 2022.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