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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방진4

드레스덴 전투 (8) - 폭우 속의 부싯돌 보헤미아 방면군이 우물쭈물하다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나폴레옹이 몰고온 증원군과 불필요했던 혈투를 벌이던 8월 26일, 드레스덴 남동쪽 엘베강 상류의 피르나에서는 또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피르나 바로 맞은 편 엘베강 우안에서 대기 중이던 방담은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드레스덴 방향에서 전투의 포성이 격렬해지자 즉각 강을 건너 피르나 점령에 나섰던 것입니다. 당시 피르나를 지키고 있던 것은 뷔르템베르크 공작 오이겐(Friedrich Eugen Carl Paul Ludwig von Württemberg)이 이끄는 1만2천의 러시아군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방담의 병력은 제1군단 거의 전체로서 약 3만5천의 대군이었습니다.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고, 오이겐도 무의미한 혈투를 벌이기보다는 일단 후퇴.. 2024. 4. 8.
휴전 (1) - 나폴레옹의 축지법, 그게 될까? 앞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의 추격 작전은 기병대 부족으로 인해 심각한 지연을 겪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후퇴하면서도 꽤 강력한 후위대를 남겨 두었는데, 주로 강력한 포병대와 기병대 위주로 구성된 연합군 후위대를 기병 없이 상대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연합군 후위대는 주로 나지막한 언덕 위에 포병대를 방열하여 방어진을 구축했는데, 포병대 뿐이라면 추격하는 프랑스군이 별로 개의치 않고 쾌속으로 진격하여 제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포병대 옆에는 꽤 큰 규모의 기병대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원래 보병-포병-기병은 화수목금토 오행과 같은 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병은 밀집 보병대를 상대로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횡대로 얇고 길게 늘어서서 진격하는 보병대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인 존.. 2023. 7. 3.
엇갈린 발걸음 - 스몰렌스크 전투 (2) 바클레이가 7일 밤 바그라티온과 플라토프에게 보낸 명령서는 2가지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독일인 특유의 무뚝뚝함 때문인지 원래 바그라티온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는지, 바그라티온은 그냥 '우회전하여 전진'이라는 퉁명스러운 명령만 들어있었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그라티온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고, 일단 명령에 따르기는 따랐지만 마음 속으로는 바클레이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점점 커졌습니다. 둘째, 그나마 플라토프에게는 아예 명령서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 전장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무선 통신도 없고 GPS도 없고 항공 정찰도 없으니 아군끼리도 넓은 지역에서는 상호 교신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담이지만 1815년 워털루 전.. 2020. 3. 23.
바그람 전투 (제11편) - 기병대의 궤멸 기세 좋게 달려들어간 낭수티의 제1 중기병사단이 첫번째로 맞이한 난관은 그 지대가 너무 평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병이 달리는데는 평평한 것이 좋지 않냐고요 ?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만하게 오르내림이 있는 평원이 기병 돌격에는 더 좋았습니다. 여기 아더클라 앞마당처럼 너무 평평하면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병대가 그대로 적의 시선과 대포에 노출되면 기병대에게 불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들이 번쩍이는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동안,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침착하게 방진(square)을 구성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기병에 대항하여 보병 방진을 구성한 오스트리아군의 모습입니다. 1788년의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 때의 모습입니다. 머스켓 소총과 함께 총검이 개발되고 대포의 기동성이 향상되면서부터는,.. 2017.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