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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도날4

드레스덴을 향하여 (10) - 그의 사전에 원수 두 명은 없다 8월 23일 오후, 드레스덴 남쪽 피르나(Pirna)에 주둔하고 있던 생시르 원수로부터 나폴레옹에게 날아든 급보의 내용은 나름 극적이었습니다. 그랑다르메가 지키고 있지 않던 페터스발트(Peterswald) 고개길을 이용하여 러시아군 군단 하나가 쳐들어왔고 그 뒤로는 오스트리아군이 따르고 있는데, 그 규모는 오스트리아군 전체로 보인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었습니다. 전에 언급한 것처럼 이때 점심을 먹고 있던 나폴레옹은 들고있던 와인잔을 탁자에 내리치며 깨뜨렸다고 전해지지만, 그렇다고 그가 완전 패닉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드레스덴 방어 계획은 결코 지타우와 럼부르크, 즉 보헤미아에서 작센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철통같이 지킨다는 정적인 것이 아니었거든요. 기본적인 방어는 피르나에 주둔한 생시르의 제1.. 2024. 2. 12.
바그람 전투 (제18편) - 통쾌하지 않은 승리 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냉혈한인 그도 휘하 병사들이 거의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무려 40시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라콩브(Lacombe)라는 장교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었습.. 2017. 11. 11.
바그람 전투 (제16편) - 막도날의 기둥 막도날의 제5 군단에는 원래 완편과는 거리가 먼 허약한 보병 2개 사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라마르크(Jean Maximilien Lamarque) 장군이, 다른 하나는 브루지에(Jean-Baptiste Broussier) 장군이 지휘했지요. 거기에 나폴레옹이 붙여준 제6 군단 소속 모로 장군이 지휘하는 스라 장군의 사단까지 붙여서 총 1만1천 정도의 병력이 있었는데, 특히 모로 장군의 사단은 방금 지휘권을 받은 것이다보니 아무래도 모로와 그의 사단에 대해서는 믿음이 덜 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로 장군과 긴밀하게 작전 회의를 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막도날에게는 정답이 적혀있는 문제 풀이집도 없었습니다만, 특히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명령을 받은 그가 .. 2017. 10. 4.
바그람 전투 (제15편) - 종과 횡 나폴레옹은 전투 내내 전장 한가운데 위치인 라스도르프(Raasdorf)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치한 마르히펠트 평원보다 높은 곳인 루스바흐 고원 위에 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서의 전황을 양군의 전열이 뿜어내는 머스켓 소총의 화약 연기를 보며 파악하고 있었지요. 그 연기의 긴 횡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의 높은 석탑을 통과하는 보고, 그는 이제 승리의 때가 왔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다부를 돕기 위해 일제히 전체 전선에 걸쳐 총공격을 명했습니다. 마세나는 남쪽 에슬링에서 클레나우를, 우디노는 고원 위의 호헨촐레른을 공격하면 되었지요. 그리고 막도날에게는 특별히 따로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바그람 전투 현장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나폴레옹입니다. 무전기가 없던 당시 전투는 현장 지휘관의 재량.. 2017.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