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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308

다리는 불타고 있는가? - 베레지나의 여인 비트겐슈타인의 러시아군을 막아내느라,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스투지엔카의 임시 교량 쪽을 일대를 살펴볼 수 있었던 빅토르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낙오병들과 피난민들이 아직도 다리를 건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도 서둘러 다리를 건너기보다는, 이제 어둠이 내려앉은 강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모닥불을 피우는 등 밤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제9군단이 친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오전 일찍부터 그저 원거리에서 포격만 해대던 러시아군에 대해 방어 측이던 그랑다르메가 오히려 공격을 감행했던 것은 오로지 낙오병들과 피난민들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희생을 치루면서 종일 고생했건만, 낙오병과 피난민들은 무엇.. 2021. 10. 11.
베레지나의 동쪽 - 비극과 투지 빅토르의 제9군단은 비교적 최근에 편성되어 보로디노 전투 이후인 9월 초에야 네만 강을 건넜던 약 3만 규모의 군단으로서, 대부분 바덴(Baden), 헤센(Hessen), 작센(Sachsen) 등 독일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일부 폴란드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도 물론 척박한 러시아 땅에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베레지나 강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1만2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추격을 뿌리치고 스투지엔카 외곽으로 달려온 빅토르 휘하엔 불과 8천명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4천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들은 파르투노(Louis Partouneaux) 장군 휘하의 1개 사단이었는데 이들은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일종의 미끼로서 며칠 전부터 보리소프의.. 2021. 10. 4.
베레지나의 동과 서 - 러시아군의 등장 베레지나 강 위에 놓인 2개의 다리는 결코 근대 공학의 금자탑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워낙 단시간에 날림으로 만든 것이라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가끔씩 일부 구간이 무너져 끊어지기도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더라도 일부 구간은 축 늘어져서 상판이 강물에 약간 잠긴, 부분 잠수교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위태위태한 다리가 유일한 퇴각로라면 서로 먼저 가겠다고 난리가 날 것 같지만 26일 밤 ~ 27일 저녁까지 베레지나 양안은 매우 평온했고 질서정연한 도강이 이루어졌습니다. 간헐적으로 다리 일부 구간이 무너지거나 엉성한 상판 통나무 사이에 말 다리가 끼어 부러지는 등의 사고가 발생하여 교통 체증도 일어났는데도 그랬습니다. 이런 질서는 나폴레옹의 존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욕을 먹.. 2021. 9. 27.
네덜란드의 희생과 헌신 - 베레지나 강의 다리 이른 아침 베레지나 서쪽 강변에서 러시아군이 물러가는 것을 확인하지마자, 나폴레옹은 자끄미노(Jean-François Jacqueminot) 중령에게 명하여, 엽기병이 일부 섞인 폴란드 창기병 1개 중대에게 각각 안장 뒤에 유격병(Voltigeur, 펄쩍 뛰는 사람이라는 뜻) 1명씩을 태우고 강을 건너도록 했습니다. 스투지엔카 마을 앞은 여울목이라서 베레지나 강의 수심은 최대 2m 미만이었고 말을 타고 건널 경우 허리춤의 탄약포를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강을 건넌 뒤 유격병들을 내려놓고 부채살처럼 퍼져 그 일대에 아직 남은 소수의 코삭 기병들을 쫓아냈습니다. 유격병들은 그 일대에 배치되어 사방을 경계했습니다. (자끄미노 중령입니다. 당시 25세에 불과했던 그가 중령 계급.. 2021. 9. 20.
싸구려 미끼의 가성비 - 11월 26일 새벽의 눈치 작전 우디노의 제2군단 소속 공병 750명이 오브리(Aubry) 장군 지휘 하에 이미 전날인 11월 24일부터 현장에 도착하여 다리를 놓을 목제 구조물, 그러니까 지주(支柱, strut)와 가대(trestle) 등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재료는 스투지엔카 마을의 농가들이었습니다. 공병들은 농가들의 기둥과 대들보 등을 해체하여 재료로 썼습니다. 11월 25일 낮부터는 에블레 장군 휘하의 전문 부교병 400명이 도착하여 작업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네덜란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장비들, 즉 마차 6대 분량의 각종 공사 도구들과 2기의 이동식 풀무, 그리고 그 풀무에 사용할 연료인 석탄까지 마차 2대분을 가지고 왔습니다. 대체 이들은 어디서 이런 장비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이 장비들을 확.. 2021. 9. 13.
Against all odds - 베레지나 강변에서 팔렌(Pahlen) 장군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가 보리소프를 지키던 돔브로프스키의 폴란드군을 비교적 손쉽게 격퇴한 것은 저녁 때였는데, 그는 보리소프 시내를 정리한 뒤 병사들에게 숙사를 배정하여 쉬게 하고 자신도 기분 좋게 근사한 늦은 저녁 식사를 대령하게 하여 이제 막 한입 먹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난데없는 총성과 함께 함성소리가 들여왔고, 팔렌은 그 식사를 끝내 마치지 못했습니다. 바로 몇십분 전, 팔렌이 이끄는 압도적인 1만의 러시아군에게 밀려 퇴각했던 돔브로프스키의 폴란드 사단은 후퇴하다가 우디노의 제2군단 선봉으로 전진하던 마르보(Jean-Baptiste Antoine Marcelin Marbot) 대령의 제23 기병 연대를 마주쳤습니다. 연대라고는 해도 이들도 숫자가 대폭 줄어 .. 2021. 9. 6.
쿠투조프의 빅 픽처 - 베레지나(Berezina)를 향하여 네가 크라스니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던 11월 18일, 오르샤로 향하던 나폴레옹은 나름대로 생각도 많고 무척 바빴습니다. 오르샤는 단지 중간 경유지일 뿐, 그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던 안정적인 겨울 숙영지는 벨라루스의 수도인 민스크(Minsk)였습니다. 개전 초기 다부가 전광석화처럼 점령한 민스크는 도시 전체가 비교적 멀쩡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가깝다보니 스몰렌스크나 비텝스크와는 달리 보급품이 비교적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스크로 가기 위해서는 베레지나(Berezina) 강을 건너야 했는데, 베레지나 강을 건널 유일한 다리는 작은 마을인 보리소프(Borisov)에 있는 목제 다리 하나 뿐이었습니다. 보리소프 다리의 중요성을 파악한 나폴레옹은 오르샤를 향해 걷는 고된 길 위에서.. 2021. 8. 30.
나는 네(Ney), 프랑스의 원수다 ! - 크라스니(Krasny) 전투 (3) 나폴레옹이 다부와 합류하여 크라스니를 떠나던 11월 17일, 네는 받은 명령대로 스몰렌스크의 성채를 폭파하고 스몰렌스크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많은 부상병들을 스몰렌스크의 병원에 버려둔 채 떠나야 했으므로 결코 기분 좋은 출발은 아니었습니다. 네의 제3군단은 고작 6천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었는데, 스몰렌스크를 나서고 보니 그 뒤로는 1만이 훌쩍 넘어보이는 많은 낙오병들과 민간인들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인 11월 8일 오전, 길을 걷다보니 최근에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 분명한 흔적들이 도로 주변에 널려있었습니다. 오후가 되어 크라스니 근처에 도착하자, 아까의 흔적에서 짐작했듯이 러시아군이 길을 막고 도열해 있었습니다. 밀로라도비치가 이끄는 약 1만6천의 병력이었습니다. 밀로라도비치로서도 이번 싸움에서.. 2021. 8. 23.
네(Ney)를 바친다 - 크라스니(Krasny) 전투 (2) 나폴레옹은 흩어진 쪽이 지며, 지고 있는 측은 기다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정확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크라스니에서 기다리지 않고 밀로라도비치의 러시아군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그는 11월 17일 아침 근위대의 선두에 서서 크라스니 동쪽으로 진격했습니다. 스몰렌스크 대로의 남쪽에 늘어선 밀로라도비치의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이 저렇게 나오자 다소 당황했고, 압도적인 포병 전력으로 근위대를 강타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오랜만에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주변의 병사들이 포탄에 직격되는 바람에 피떡이 되어 뒤로 나가떨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침착하게 말을 몰았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은 부하 병사들 뿐만 아니라 적군에게도.. 2021. 8. 16.
외젠의 기묘한 모험 - 크라스니(Krasny) 전투 (1)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에서 4일간 머물며 뒤에서 따라오는 군단들이 집결하기를 기다린 뒤, 11월 13일 서쪽으로 후퇴를 재개했습니다. 이제는 군단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어든 쥐노와 포니아토프스키의 군단들을 먼저 출발시킨 그는 11월 14일 모르티에가 지휘하는 근위대와 함께 자신이 출발했으며, 그 다음날 외젠의 제4군단, 그 다음날은 다부의 제1군단, 마지막날엔 네의 군단이 출발하도록 했습니다. 이 결정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띄엄띄엄 분산하여 출발하는 것은 당연히 큰 취약점이 되었습니다. 11월 3일의 비아즈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허리를 잘리고 고전했던 것도 길게 늘어진 상태로 행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루 단위로 군단들이 하나씩 출발한 것은 여전히 나폴레.. 2021. 8. 9.
꿈의 도시 스몰렌스크 - 그리고 현실 11월 6일 급습해온 동장군의 위력 앞에서는 나폴레옹도 한낱 뚱뚱한 프랑스 아저씨에 불과했습니다. 여태까지 '러시아의 추위가 무시무시하다더니 프랑스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날씨 아닌가?' 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떠들었던 것도 어쩌면 러시아의 추위에는 정말 답이 없었고 또 정말 두려워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기 최면을 거는 행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런 입방정은 11월 6일 이후 즉각 고쳐졌고, 추위를 견디지 못한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회색 프록코트와 삼각모(tricorn)를 포기하고 두툼한 털로 안을 댄 폴란드식 초록색 외투와 군고구마 장수 같은 방한모를 뒤집어 써야 했습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걸어서 후퇴하는 나폴레옹을 그린 Vasily Vereshchagin라는.. 2021. 8. 2.
연애 편지와 엄마 - 포로들의 운명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이렇게 식량 부족과 추위로 부서져 내리면서 당연히 많은 낙오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글을 보시면서 낙오병이라는 단어는 많이 보셨지만 탈영병이라는 표현이 별로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랑다르메 중에서도 지배층에 속하는 프랑스군은 그렇다치고, 끌려온 것이나 다름 없는 독일군이나 네덜란드군, 이탈리아군 중에는 쫄쫄 굶다 못해 그냥 탈영해서 스스로 러시아군으로 넘어간 병사들이 많지 않았을까요 ?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러시아군이었고, 이렇게 포로가 된 이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아직 제네바 조약 같은 포로에 대한 국제 협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때였습니다만, 대신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귀족 내지는 .. 2021. 7.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