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구4

무기와 장난감 - 나폴레옹과 프랑스 공군 이야기 (마지막편) 기구 중대가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지 1년 후인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설 때 그의 함대에는 이 기구 중대가 필요한 장비와 함께 탑승해 있었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주르당이나 오슈 등이 다 꺼렸던 기구 중대를 특별히 싣고 갔던 것일까요 ? 군사 천재인 그는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정보 병기로서의 기구의 특성을 대번에 알아본 것이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기구 중대를 데려간 것은 이들을 선전용 심리전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끌고 출발한 13척의 전함, 7척의 프리깃함, 그리고 300척 이상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대함대에는 수병들 외에도 보병 3만, 기병 2천8백, 야포 60문과 공성포 40문, 그리고 공병 2개 중대가 탑승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무척이나 독특.. 2018. 4. 29.
참패와 재기 - 나폴레옹과 프랑스 공군 이야기 (제3편) 프랑스 기구 중대의 역사적 시작이 주르당과 함께였던 것처럼, 그 몰락의 시작에도 주르당이 있었습니다. (주르당 원수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주르당 법 덕분인데, 그게 또 몹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무능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안이었습니다. 즉, 그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참패를 겪고 그 책임을 진답시고 군에서 물러난 뒤, 정계에 입문하여 만든 법이 바로 주르당 법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주르당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가 얻은 명성은 프랑스 징병제 법안인 주르당 법(Loi Jourdan de 1798)에 의한 것일 뿐이며, 정작 그가 독일 전선에서 활약할 때 자주 참패를 겪었다고 했지요. 1795년, 프랑스 기구 제1 중대는 주르당이 사령관으로 있던 상브레-뮤즈(Sambre-et-Meuse) 방면군에 배속되었습니.. 2018. 4. 22.
엇갈린 평가 - 나폴레옹과 프랑스 공군 이야기 (제2편) 주르당의 어설픈 라임으로 조롱 받으며 파리로 돌아온 쿠텔을 맞이한 것은 서슬퍼런 국민공회 공안위원회(le Comite de salut public)였습니다. 그렇다고 공안위원회가 쿠텔을 단두대로 보낸 것은 아니었고, 정반대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공안위원회는 당시 국내외 반혁명세력과의 투쟁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으므로, 과학을 통해 구시대의 적을 무찌른다고 하면 뭐든 해줄 기세였습니다. 샤또 드 뫼동(Chateau de Meudon)에서 몇 차례의 기구 기술에 대한 테스트가 이루어진 뒤, 공안위원회는 아예 세계 최초의 공군 무기창인 항공 개발 센터(le centre de developpement aerostatique)를 창설했습니다. 여기서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하고.. 2018. 4. 15.
혁명의 날개 - 나폴레옹과 프랑스 공군 이야기 (1편) 탈라베라 전투에서 빅토르의 복장을 터뜨린 주르당 원수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르당 원수의 몇 안되는 빛나는 승리 중 하나인 1794년 플뢰뤼스(Fleurus) 전투에 대해서도 언급했지요. 플뢰뤼스 전투 그 자체는 별 의미도 재미도 없는 전투입니다만, 이 전투는 군사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세계 최초로 공군이 활약한 전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왜 다른 나라들보다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공군이 탄생했을까요 ? 그 효과는 어땠을까요 ? 무엇보다, 왜 불세출의 군사 천재 나폴레옹은 이런 과학 병기를 활용하지 않았을까요 ? 계몽사상이 싹튼 나라 프랑스에서는 과학자들도 많았고 일찍부터 이런저런 과학 실험들이 많이 수행되었습니다. 열기구 및 수소 기구도 그런 활동 중 하나였습니다. 혁명 전인 1783.. 2018.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