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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3

굶주림과 희생 - 토헤스 베드하스 공방전 후퇴하는 웰링턴의 뒤를 쫓아 리스본으로 달리던 마세나가 1810년 10월 14일 생각지도 못했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직접 육안으로 보고 그 규모에 경악하는 사이, 웰링턴이 사전에 프랑스군 후방에 미리 풀어놓았던 비밀 병기는 이미 작동을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기아였습니다. 애초에 웰링턴은 마세나와 피투성이가 되어 멱살을 쥐고 구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기본 전략은 리스본 북쪽의 황량한 험지에서 마세나의 진격을 틀어막고 마세나에게 굶어죽든지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웰링턴은 부사쿠 전투를 전후하여 계속 그 일대의 포르투갈 주민들을 방어선 이남으로 피난가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병력은 부족하지만 물자는 풍부하고 기동력은 느리지만 방어에는 탁.. 2018. 12. 10.
급할 수록 돌아가라 - 쿠임브라(Coimbra)의 함락 9월 27일 오전의 이 부사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500의 전사와 3600의 부상, 거기에 400에 가까운 실종자를 냈는데 비해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고작 전사 200에 부상 1000, 그리고 50의 실종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명백한 프랑스군의 참패였고, 그 원인은 마세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자신의 작전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에 대해 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우수한 지휘관은 패전의 충격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는 법이지요. 그는 실패의 원인이 생각보다 웰링턴의 방어선이 훨씬 더 길게 늘어져 있어서, 가파른 능선이라는 강력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습니다. 원인이 나오면 해법도 있기 마련이고, 해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훨씬 더 크게 우회하면 되.. 2018. 11. 26.
형제간의 전쟁 - 1810년 네덜란드 합병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추가적인 영토를 뜯어냅니다. 그러나 이때가 나폴레옹 제국이 최대 영토를 자랑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은 1810년에 오는데, 이때 나폴레옹이 우디노의 군단을 동원하여 추가로 타국을 정복했고 그 땅을 아예 프랑스 영토로 편입했거든요. 1810년은 비교적 조용한 한 해로 알려졌는데, 그런 한가한 시기에 나폴레옹의 먹이가 된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 바로 네덜란드였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침공할 때 당시 네덜란드의 국왕은 용감하게도 병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며 저항을 지시했는데, 그 국왕은 바로 나폴레옹이 아끼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였습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 이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왜 네덜란드 축구팀의.. 2018.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