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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갑기병3

1813년 프랑스에는 말이 몇 마리나 있었나? 나폴레옹은 새로 편성한 20만의 군대를 마인 방면군(Armée du Main)이라고 명명했고, 외젠의 지휘 하에 있던 기존 그랑다르메의 잔존부대를 엘베 방면군(Armée de l'Elbe)이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이 군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에는 나름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방면군 이름을 정할 때는 그 군대가 작전을 펼칠 지역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는 언제나 공격 위주였기 때문에 따라서 OO방면군이라는 것이 편성될 때는 아직 그 지역을 점령하기 전인 상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덕분에 일부 방면군은 그 이름이 붙은 지역을 끝내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포르투갈 방면군(Armée du Portugal)이겠지요. (제가 포르투갈 방면군이라고 번역했지만, 저 초상화 속.. 2022. 5. 16.
보로디노 전투 (11) - 기병대 영광의 순간 역사상 기병대가 요새를 점령한 일은 흔치 않습니다. 말이 성벽을 뛰어 넘을 수는 없으니까요. 제 정신을 가진 기병대 지휘관이라면 성벽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기병대가 라에프스키 보루를 향해 돌격을 시작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도 그랬고 바그람(Wagram) 전투에서도 그랬습니다만, 위기가 닥치거나 전황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기병대를 냅다 적진에 집어던지곤 했습니다. 이때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최전선의 원수들이 차례로 전령을 보내 근위대를 투입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거부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그냥 알아서 어떻게든 이기라고 독촉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나름대로 다 계획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기병대.. 2020. 10. 5.
아스페른-에슬링 에필로그 - 더 간절한 쪽이 승리한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프랑스군에게나 오스트리아군에게나 전례없이 길고도 치열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양측은 거의 48시간 동안 잠도 거의 먹지도 못 자고 죽을 힘을 다해 행군하거나 싸웠지요. 5월 22일 오후 5시 이후 이 대규모 살륙전이 서서히 잦아든 것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양측의 상황은 이틀 전과 사실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아스페른에서는 마세나의 제4 군단이 힐러와 벨가르드의 2개 군단을 상대로 치열하게 저항하면서도 조금씩 후퇴하며, 결국 이때 즈음엔 아스페른이 오스트리아군의 손아귀로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세나의 군단은 여전히 맹렬하게 저항할 병력과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힐러와 벨가르드의 군단들은 이제.. 2017.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