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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테르니히7

휴전 (11) - 나폴레옹 대폭발 6월 27일 드레스덴으로 메테르니히를 불러 면담을 한 나폴레옹이 무려 무려 9시간이 넘는 이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뭔가 할 말이 많긴 많았을 것 같은데 정말 아무도 배석시키지 않고 1대1로만 면담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대화를 명확하게 기록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폴레옹도 메테르니히도 각각 회고록을 남겼습니다만, 당대의 모든 회고록이 그렇듯이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써놓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두 사람도 9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시시콜콜 녹취록을 적어 놓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로 많은 정보를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메테르니히가 그 회담이 있었던 날 밤 자신의 주군인 프란.. 2023. 9. 11.
휴전 (10) - 메테르니히, 드레스덴을 향하다 영국은 여기저기 돈을 뿌려대며 연합군 진영 내에서 영국의 입지를 다지려고 노력했으나, 역시 당장 전쟁 당사자들에게는 돈보다는 총칼이 더 소중한 법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6월 중순, 라이헨바흐(Reichenbach) 조약으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6월 하순, 메테르니히는 드레스덴에서 만나자는 나폴레옹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 초대에 응해 드레스덴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폴레옹과의 회담에서 제시할 조건들에 대해 러시아 및 프로이센 측과 최종 합의를 보기 위해 라이헨바흐의 연합군 진영에 들렀습니다. 여기서 라인 연방 해체나 프로이센의 영토 회복 등에 대한 요구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메테르니히의 4개 요구 조건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메테르니히의 조건이 그대로 통과되었습니다. 대신 만약 나폴레옹이 .. 2023. 9. 4.
휴전 (8) - 대(大)외교관 메테르니히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1813년 춘계 작전을 벌이면서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애걸복걸할 때, 오스트리아는 짐짓 점잖은 척 하면서 뒷짐을 지고 있으면서 기묘한 요구를 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평화 협상을 할 때는 반드시 오스트리아의 중재를 통해서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칼리쉬 조약을 맺고 반(反)나폴레옹 전쟁을 시작할 때 양국은 절대 개별적으로 나폴레옹과 협상을 벌이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라는 제3국을 중재국으로 두는 것은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에 동의한 바 있었습니다. 이건 당대의 외교계의 거물이었던 메테르니히의 절묘한 한수였습니다. 그가 그런 독특한 요구를 관철시킨 것은 그가 프랑스 못지 않게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정.. 2023. 8. 21.
휴전 (7) - 메테르니히의 조건 아직 정식 휴전 조약이 맺어지기 전인 6월 3일부터 나흘 동안, 러시아 외교관 네셀로더(Karl Robert Reichsgraf von Nesselrode-Ehreshoven)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란츠 1세(Franz I)와 메테르니히,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와 일련의 회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이 인물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연합군 사령부로 되돌아간 네셀로더는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오스트리아가 참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고 전달했습니다. 그 조건이란 나폴레옹과 연합군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먼저 나폴레옹에게 다음 조건들을 제시하며 종전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 2023. 8. 14.
휴전 (6) -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훗날인 1814년, 나폴레옹이 폐위되고 아직 엘바 섬에 있을 무렵, 러시아군의 랑제론은 프랑스 파리에서 베르티에를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르티에는 이 때의 휴전협정에 대해 '그 휴전협정은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었다, 나폴레옹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다, 1812년 이후 나폴레옹은 결코 자신들과 함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싸우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나폴레옹이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휴전협정을 맺은 것은 나폴레옹 혼자의 결정이었고 그로 인한 결과는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나폴레옹이 휴전을 제의할 때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고 그건 베르티에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휴전협정이 .. 2023. 8. 7.
가짜 뉴스, 전쟁을 일으키다 - 1810년 12월 31일 짜르의 칙령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 2019. 1. 28.
상남자와 그의 여자 - 바그라티온과 예카테리나 * 러시아와 프랑스의 대표 상남자와 그들의 여자 이야기를 각각 1편씩 재업 합니다. (표트르 바그라티온 장군입니다. 약간 매부리 코인데요 ?) 프랑스의 상남자라면 저는 단연 장 란(Jean Lannes)을 뽑습니다만, 러시아에도 상남자로 불릴 만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그라티온 장군입니다. 동향 사람인 스탈린이 나중에 히틀러에 대한 대반격 작전 이름을 바로 이 장군의 이름으로 붙였었지요.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정식 명칭은 Prince Pyotr Ivanovich Bagration, 즉 바그라티온 왕자였습니다. 왕자라니, 바그라티온이 로마노프 왕가의 아들이었나요 ?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prince라는 명칭은 왕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공작(duke)보다는 더 높으나 왕(king)보다는 더 낮은 직위를.. 2018.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