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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390

복덕방의 호구 - 조급한 나폴레옹 이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던 나폴레옹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은 알렉산드르와 평화 조약을 맺고 파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그러려고 모스크바까지 점령한 것인데, 러시아인들이 모스크바에 불까지 지르고 도망친 것을 보면 도저히 평화 조약을 맺으려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흥정은 해봐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쪽이 흥정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저쪽에 알려야 거래가 이루어질텐데, 그걸 저쪽에 알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부른 사람이 투톨민(Ivan Akinfevich Tutolmin)이라는 이름의 고아원장이었습니다. 투톨민은 원래 러시아군에서 장군까지 지내다가 퇴역한 노인이었는데, 모스크바 시내의 대형 고아원 원장직을 맡고 있었고, 원아들을 내버릴 수가 없어.. 2021. 1. 11.
상트 페체르부르그를 향하여 ? - 고민 속의 나폴레옹 모스크바로 돌아온 나폴레옹이 구상한 기본 방향은 다음 목표를 찾아 전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물은 바로 알렉산드르의 궁전이 있는 러시아의 공식 수도 상트 페체르부르그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랑다르메의 주력 군단들은 모스크바에 그대로 두고, 외젠의 제4 군단만 차출하여 상트 페체르부르그로 진격할 생각이었습니다. 주력 군단들을 모스크바에 주둔시키는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외젠의 군단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되었고, 둘째, 남쪽으로 후퇴한 쿠투조프의 러시아 야전군으로부터 모스크바를, 정확하게는 모스크바의 보급품 창고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상트 페체르부르그는 군사적 방비가 든든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군의 쓸만한 병력은 모두 쿠투조프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상트 페체르부르그와 나.. 2021. 1. 4.
Now what ? - 잿더미 속에서 나폴레옹이 위대한 군사 지도자가 된 이유는 대포를 기가 막히게 잘 쏘았기 때문도 아니었고, 전에 없던 신박한 보병 전술을 개발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승리를 위해 꺾어야 할 목표를 명확하게 선정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놀라운 집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적의 도시를 함락시키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고, 항상 적의 주력 부대를 신속하게 격파하는 것에 열을 올렸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목표는 적 주력 부대의 병사들을 많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전투 역량과 의지를 꺾는 것이었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 위험을 떠안고 막대한 희생을 치르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의 출세 계기였던 툴롱(Toulon) 포위전이었습니다. 1793년 툴롱.. 2020. 12. 28.
1812년 모스크바 대화재 (2) - 희극과 비극 9월 15일 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곳곳에서 방화에 의한 화재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시내 가옥의 2/3 정도가 빈 도시에서 병사들에 의해서든 부랑자들에 의해서든 약탈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약탈을 하다보면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만 시내 주택들의 상당수가 목재로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우려하면서 그가 이미 모스크바 주지사로 임명했던 모르티에 원수에게 불을 끄고 방화범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당황스럽게도 소방 펌프차를 한 대도 구할 수 없었던 병사들은 불을 끌 수는 없었지만 방화범들은 쉽게 잡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부랑자들인지 로스톱친의 부하들인지 정체는 불분명했지만, 이런 방화범들은 즉석에서 총살에 처해졌습니다. 나.. 2020. 12. 21.
1812 모스크바 대화재 (1) - 방화? 실화? 또는 필연 모스크바 주지사인 로스톱친은 러시아군이 나폴레옹을 간단히 무찌를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이미 여러번에 걸쳐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한다면 그들은 잿더미 이외에 아무 것도 손에 넣지 못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한 바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모스크바를 사수하겠다는 쿠투조프의 약속을 애초부터 로스톱친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9월 13일 저녁에 쿠투조프로부터 모스크바를 포기한다는 공식 통보를 받기 전부터, 로스톱친은 시내에 불을 지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소화 펌프를 모두 시내에서 철수시키고 인화물을 곡물과 의류, 가죽 등의 상품을 저장한 창고 주변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준비와 실행을 모스크바 경찰 국장인 보로넨코(Voronenko)에게 지시하면서,.. 2020. 12. 14.
텅빈 거리의 군악대 -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입성 그랑다르메 본대가 모스크바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포클로나이아(Poklonnaia) 언덕에 올라선 것은 다음날인 1812년 9월 14일 오후였습니다. 근위대 소속의 부르고뉴(Adrien Jean-Baptiste François Bourgogne) 하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언덕 정상에 오른 병사들은 모두 흥분하여 아직 고개 아래에 있는 동료들에게 "모스꾸, 모스꾸 (Moscou, 모스크바의 프랑스어 표기)"를 외쳤습니다. 그 소리에 모든 병사들은 서둘러 정상에 올라 저 멀리 모스크바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부르고뉴 하사는 이 순간, 여태까지 겪었던 모든 고난과 굶주림, 위험 등은 다 사라져버렸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병사들은 이제 저 곳에서 편안하게 겨울을 날 생각과, 모스크바의 세련된 여인들과 사랑(?)을 .. 2020. 12. 7.
모스크바 최후의 밤 - 1812년 9월 14일 새벽 9월 13일 밤 러시아군의 철수는 쿠투조프의 결정 이후 즉각 이루어졌습니다. 쿠투조프가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 저녁 8시였는데, 이미 밤 11시에는 러시아군 포병대가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부투를린(Dmitry Petrovich Buturlin)이라는 젊은 참모 장교의 기록에 따르면 이 후퇴를 하며 러시아군은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모두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을 흘리며 걸었다고 합니다. 바로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모스크바 사수를 외치던 군대가 시내를 가로질러 후퇴하는 모습을 보고 시민들도 복장이 터졌습니다. 어떤 시민들은 병사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어두운 밤거리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의외로 러시아군의 후퇴는 꽤 질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 2020. 11. 30.
"러시아는 장소가 아니라 군대다" - 모스크바 포기 9월 8일 잠에서 깬 러시아군은 어슬렁어슬렁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쿠투조프의 명령은 표면적으로는 좀더 방어에 용이한 6km 후방의 모자이스크(Mozhaisk)로 이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만, 곧 다시 모스크바 인근까지 후퇴한다는 명령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후퇴 행렬은 군율이 헝클어졌지만 의외로 탈영은 많지 않았습니다. 미타레프스키(Nikolai Mitarevski)라는 포병 장교의 기록에 이때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전날 전투 중에 그의 야포를 끄는 말들 중에 폭발탄 파편에 맞아 아래 턱이 부서져버린 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말은 출혈은 몰라도 곧 굶어죽을 것이 뻔했으므로 포가에서 풀어주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간 포병대에서 대포를 끄.. 2020. 11. 16.
보로디노 에필로그 (4) - 자기 모순 한편, 프랑스군의 피해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적게는 2만8천부터 많게는 4만까지 피해 추정치는 다양한데, 여기서는 대략 3만5천이라고 보겠습니다. 프랑스군의 전력을 대략 14만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5%의 피해였습니다. 거의 40%의 손실을 낸 러시아군에 비하면 훨씬 적은 편이었지만, 어지간한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나 내던 손실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의 피해를 4만5천이라고 가정하면 하루 아침에 양측이 무려 9만5천의 피해를 낸 셈이었습니다. 이는 당대 유럽 전사상 단 하루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였고, 이 기록은 제1차 세계대전 1916년 7월 1일 솜므(Somme) 전투 때까지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솜므 전투는 영불 연합군이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전투입니다. 약 140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2020. 11. 9.
보로디노 에필로그 (3) - 쿠투조프, 러시아를 구원하다 비아젬스키 대공의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군 대부분이 전설 속의 영웅 나폴레옹을 상대로 잘 싸웠다고 스스로 우쭐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젊은 장교들과 최전선에 서지 않았던 부대들의 병사들 상당수가 정말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러시아군은 괴멸상태였습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대략 3만8천에서 5만8천 정도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 병력을 12만으로 추정하고 약 4만5천의 병력이 전사나 부상으로 손실되었다고 가정하면 37.5%의 손실을 낸 셈입니다. 보통 당시 전투에서 승자의 손실률이 10%, 패자는 20%였던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참패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정말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던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손실률은 각각 14%와 2.. 2020. 11. 2.
보로디노 에필로그 (2) - 위풍당당 쿠투조프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이 끔찍했던 하루의 의미에 대해 곱씹으며 우울한 밤을 보내는 동안, 러시아군 진영의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별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며칠 동안 삽질을 하며 구축해놓은 방어선을 버리고 후퇴했고,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는 것을 쿠투조프부터 맨바닥의 농민병까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즉, 모두가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분위기는 '프랑스군이 승리했지만 러시아군이 패배한 것은 아니다'라는 역설적인 것이었습니다. 축구 약소국인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 감정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가 독일이나 브라질과 치열하게 싸운 결과 7대8로 아쉽게 졌다면 분위기가 침통하겠습니까 ? 러시아군의 분위기가 딱 그랬습니다. 전투 직전까지 쿠투조.. 2020. 10. 26.
보로디노 에필로그 (1) - 우울한 승자 전투가 끝난 어두운 보로디노 벌판은 그야말로 한 폭의 지옥도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온 들판에 말과 사람의 시체와 부서진 장비들이 가득했는데, 대부분의 사상자는 포격에 의해 발생했기 때문에 그 시체들의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창자가 빠져나온 채로 비틀거리며 자꾸 일어서려는 말, 두동강이 난 병사들, 머리가 없는 시신들... 아직 숨이 붙어있는 부상자들이 내는 비명 소리와 신음소리는 살아남은 병사들의 신경을 긁었습니다. 먹을 것도 가져오지 못한 군대에게 붕대와 의약품, 들것 등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심한 부상을 당한 병사들은 대부분 긴 고문에 의한 사형 선고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어떤 부상병들은 자기를 총으로 쏘아 죽여달라고 흐느끼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어떻게든 살겠다고 피를.. 2020.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