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7.30 19:37

새벽부터 동쪽의 포성을 듣고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인가 깜짝 놀라 병력을 이끌고 다부의 전선으로 달려갔던 나폴레옹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쪽의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엔 중앙부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이건 또 뭔가 싶어 말을 달렸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대노했습니다.  "어제 밤부터 베르나도트 저 허풍선이는 병신짓만 골라 하는구나 !"


다행히 그는 어제 밤 베르나도트 없이 열었던 작전 회의에서 베르나도트를 지원하기 위해 마세나의 병력을 좌익에서 중앙부로 이동시킨 바 있었습니다.  해가 밝아오는 상황에서, 그의 눈에 마세나의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보였고, 곧 이어 마세나의 눈처럼 하얀 색의 무개마차도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마세나는 베르나도트 못지 않게 돈 욕심 많고 터무니없이 부풀어오른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베르나도트와는 달리 군사적 자질은 자신에 버금가는 실력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마세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즉각 아더클라를 탈환하도록 했습니다.


마세나는 생-시르(Saint-Cyr)의 사단을 선두로 아더클라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이들의 공격에 대해 오스트리아군도 꽤 솜씨있게 대응했습니다.  슈투터하임(Stutterheim)의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마을 앞에 있던 도랑에 매복해 있다가 생-시르의 병사들이 지근거리에 근접하자 일제히 고개를 들고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그 정도의 반격에 흔들리지 않았고, 전투는 곧 아더클라 마을의 벽과 가옥을 끼고 골목마다 벌어지는 혼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에서 밀려났습니다.  




(아더클라 마을 안으로 쳐들어가는 생-시르 사단 휘하 제4 전열보병 연대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아더클라 외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아마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예측대로, 아더클라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는 그 마을을 비워놓고 있다가 반격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영광의 순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휘하 작센 병사들을 이 공격에 가담시켰습니다.  특히 막도날에게 빌려주었던,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던 뒤파(Dupas)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의 동쪽 측면울 공격하기 시작했으므로, 베르나도트는 기세를 타고 작센 병사들을 규합하여 기세 좋게 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이 아더클라를 관통하여 더 북쪽으로 뚫고 나가려하자, 아더클라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가르드의 예비 병력이 또 반격을 해온 것입니다.  게다가 이 반격에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알 대공이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사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에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까지 쳐들어오자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특히 베르나도트의 작센군은 어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사기가 형편없었는데, 이번에 또 이런 역경을 맞이하자 후퇴가 아니라 그야말로 무너져내려 우르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생-시르의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 마세나는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이 무척 난감했습니다.  몰리토르가 진격해야 할 길을 이 작센 패잔병들이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별로 인품이 좋지 않고 오만하고 몰인정했던 마세나는 이 하찮은 방애물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발포를 명했고, 어제 밤에 이어 백주대로에 아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작센군은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마르히펠트 평원을 가로질러 흩어졌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어지럽게 도주하던 작센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외곽까지 도망쳐왔고, 이들의 선두에는 베르나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라스도르프 외곽에서 이 몰골의 베르나도트와 딱 마주친 나폴레옹은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여 '이것이 네가 말하던 반석같은 지휘력이냐 !'라고 고함을 지르며 현장에서 그를 군단장의 보직에서 해임해버렸다고 합니다.  




(프랑스군 원수 복장의 베르나도트입니다.  원래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될 때 병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로 탐탁치 않은 작센인들로 구성된 제9 군단장으로 임명되고,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참모장인 베르티에가 자신의 군단의 출정 준비에 대해 이런저런 눈에 보이지 않는 방해를 한다는 느낌을 받자 전장에 나서기 전부터 보직을 사임하겠다고 나폴레옹에게 청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원치 않는 베르나도트를 부득부득 전장으로 끌고 나갔고, 결국은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 뒤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합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가 이렇게 마주쳤다는 이야기는 너무 극적이라서 100% 믿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설에 따르면 베르나도트가 먼저 사의를 표시했다고 합니다.  이 설에 따르면 이날 공격을 위해 자신의 군단 소속이었던 뒤파(Dupas) 장군의 프랑스 사단에게 자신의 공격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나, 뜻 밖에도 뒤파는 '황제로부터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직접 명령을 받았다'라며 거부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공격이 돈좌되고 많은 작센 병사들이 희생되자, 격분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을 만나자마자 '왜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사단을 마음대로 묶어 두었는가'를 따지며 이럴 바에야 사직하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정말 베르나도트가 정말 이날 현장에서 해임되어 귀국 조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끌던 제9 군단의 지휘권은 어떻게 되냐고요 ?  어차피 그의 제9 군단은 이미 다 녹아내려서 5천명 이하의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만 남아 있었으므로, 후임이고 뭐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이 몰리토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쓰고 있는 저 독특한 모자는 오스트리아군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등 대부분의 유럽 군대에서 척탄병들만이 쓸 수 있는 모자로서, 높이 솟은 모양에 털가죽이 달려 있었습니다.  당시 척탄병 부대는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냥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편성했는데, 키 큰 병사들이 그런 모자를 쓰면 더욱 덩치가 커보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더클라는 이렇게 생-시르가 탈환했다가 다시 잃었다가 오전 10시 경 다시 몰리토르가 재탈환하는 등 혈전의 현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카알 대공이 직접 이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프랑스군이 용감하고 숙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숫자에는 당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오 가까이 즈음해서는 혈전 끝에 결국 몰리토르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에게 밀려났고, 프랑스군은 중앙을 돌파당하는 일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오스트리아군은 루스바흐 언덕 위의 전선 전체에 걸쳐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여 언덕 아래에 있던 프랑스군을 강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지 위에서 내리 쏘는 포격은 확실히 프랑스군을 압도했습니다.  어차피 전장의 병사들은 언제든 대포밥이 될 수 있는 신세였으므로 그 정도의 포격에 흔들리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전선 중앙부가 관통당해 자신들의 등 뒤에 펼쳐진 평원 위로 작센군과 프랑스군 패잔병들이 우르르 도망치는 모습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전체 전선을 따라 말을 달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병사들을 진정시켜야 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재앙이 베르나도트가 마음대로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가장 약한 부대를 거느린 가장 못 믿을 부하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배치한 것은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또 아더클라가 나폴레옹에게 가장 중요한 위치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작전의 핵심은 다부가 공격 준비를 하던 동쪽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방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기가 공격할 생각만 했지 카알 대공이 먼저 치고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모든 작전이 엉망으로 꼬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무너지는 아더클라의 바로 동쪽 측면에는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 등의 군단이 대기 중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이 구멍만 틀어막으면 저 동쪽 끝에서 다부가 준비하던 나폴레옹의 진짜 주먹이 날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믿고 있었으므로 아직 패배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장의 주먹을 준비 중인 것은 오스트리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알 대공에게도 아더클라는 그저 견제구 또는 잽에 불과 했고, 그의 진짜 한방인 강력한 훅은 저 남서쪽 아스페른 쪽에서 날아들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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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7.27 01:24

영화 덩케르크 개봉 기념으로, 영화 보면서 궁금했던 점 몇가지 정리했습니다.  (주의 : 일부 약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1.  톰 하디의 스핏파이어 전투기에는 총알이 몇 발이나 들어 있었을까요 ?


어설프게 만든 전쟁 영화 또는 드라마의 특징이 총에 화수분 탄약이 들어 있는지 총알이 떨어지는 일 없이 아주 무한정 쏟아지는 것입니다.  톰 하디가 몰던 스핏파이어에는 몇 발의 총알이 들어 있었을까요 ?


스핏파이어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A wing 타입의 기체에는 0.303 구경 (7.7mm) 브라우닝 마크 2 기관총이 날개당 4정씩, 총 8정 장착되어 있었고, 정당 장탄수는 350발씩이었습니다.  이 브라우닝 마크 2 기관총은 초당 발사 속도가 약 7발 정도이므로, 톰 하디가 쏜 것처럼 약 2초씩 끊어서 쏜다면 총 50초, 즉 25번을 사격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영화 보면서 대충 세어보니 정말 25번 정도 쏘더군요.  놀란 감독 철저합니다.


우리나라 공군이 보유한 F-15 전투기의 경우 6개의 총신으로 구성된 20mm 개틀링 벌칸포가 장착되어 있는데, 총 장탄수는 940발입니다.  이 벌칸포는 초당 발사 속도가 약 100발이므로, 한번에 2초씩 끊어서 쏘면 대략 4~5번 사격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전투기 영화에서 여러번 드르륵 드르륵 긁어대는 것은 알고 보면 다 잘못된 설정인 셈입니다.






2.  왜 톰 하디는 영국군 지역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하지 않고 독일군 지역으로 날아가 불시착을 했을까요 ?


다음 URL은 양키들이 이 덩케르크 영화를 보고 서로 토론하는 레딧 쓰레드인데, 여기서도 왜 톰 하디가 낙하산으로 뛰어내리지 않고 굳이 불시착하여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택했는가에 대해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https://www.reddit.com/r/Dunkirk/comments/6ol611/spoilers_discussion_thread_dunkirk/


토론 초반에 세를 얻은 썰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1) 슈투카를 격추시킨 것에 대해 지상군이 환호를 올리는 상황에서,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지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2) 그냥 추락시킬 경우 독일군이 부서진 기체를 손에 넣어 군사 기밀인 전투기 정보를 넘겨주게 되므로, 확실히 소각처분하기 위해 불시착한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자신이 항공 관계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와 간단히 정리를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3) 고도가 너무 낮으면 낙하산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  왜 영국군 지역에 불시착하지 않았느냐고 ?  엔진이 멈춘 비행기는 약간만 선회해도 곧장 실속(stalling)하여 땅에 쳐박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1941년 6월,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몰다가 구름 속에서 아군기끼리 충돌하여 탈출해야 했던 John Gillespie Magee라는 조종사는 120m 상공에서 탈출했으나 낙하산이 펴지기 전에 땅에 떨어져 즉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  콜린스(톰 하디의 동료 조종사)는 왜 바다 위에 불시착을 선택했나요 ?


예나 지금이나, 추락하는 비행기에서의 낙하산 탈출(bailing out)은 매우 위험한 행위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전투기에는 조종석 밑에 로켓이 달린 자동 사출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습니다.  가장 흔한 사고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직후 자기 자신의 비행기의 꼬리 날개에 부딪히거나, 낙하산 줄이 꼬리 날개에 엉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사실상 죽음을 뜻했지요.  바다 위에서 낙하산을 펴는 것은 더욱 위험했습니다.  물 위에 떨어진 다음에 낙하산과 낙하산 줄에 엉키면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도 익사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체 상태가 양호하다면 조종사 개인적으로 바다 위에 불시착(ditching)하는 것을 택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4.  그렇다면 당시 영국 공군 조종사들은 '웬만하면 낙하산 펴지 말고 바다 위에 불시착하라'고 훈련 받았나요 ?


아닙니다.  특히 영화 속에 나오는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의 경우 공식 매뉴얼에서 "낙하산 탈출을 권고하며, 바다 위에 ditching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허용"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스핏파이어의 특성, 즉 ditching quality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Ditching quality가 나쁘다는 것은 물 위에 불시착하는 경우, 전투기가 기수를 바다 속으로 쳐박으며 물 속으로 급격히 가라앉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스핏파이어의 매뉴얼에는 불가피하여 ditching할 경우엔 반드시 물결(swell)을 따라 착륙할 것을 권고하며, 절대 파도가 밀려오는 방향으로 불시착을 시도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5.  콜린스는 왜 조종석 덮개 유리창(canopy)을 닫고 불시착했나요 ?  그렇게 덮개를 닫고 불시착하는 것이 당시의 표준 절차였나요 ?


역시 아닙니다.  역시 저 매뉴얼에는 불시착시에는 덮개를 열고 착륙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캐노피라고 불리는 덮개 유리는 (영화 속에서 콜린스가 겪었던 것처럼) 적탄이든 결빙이든 여러가지 이유로 걸림이 발생하여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런 경우 때문인지, 스핏파이어 조종석 옆에는 crowbar(흔히 빠루라고 부르는 쇠지렛대)가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기체에 화재가 발생한 경우에는 최후의 순간까지 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행 중에 캐노피를 열면 화염이 조종석 안으로 밀려들어올 가능성이 많았으니까요.  






6.  톰 하디는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었을 것이고, 대접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톰 하디처럼 전투기 조종사는 그나마 나았는데,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의 경우는 재수없으면 전쟁 포로가 아닌, 전범 또는 간첩으로 분류되어 SS(나찌 친위대)가 운영하는 별도의 수용소에 갇혀 취조와 고문, 심지어 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폭격기들의 공격 대상은 군대가 아니라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였거든요.  그래서 Terrorflieger (영어로는 terror flier), 즉 일종의 테러리스트로 분류되었습니다.   라마슨(Phil Lamason)이라는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군 조종사는 랭카스터 폭격기로 임무 수행 중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는데, SS에게 넘겨져 열악하고 잔인한 SS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라마슨을 포함한 약 168명의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 및 승무원 포로들은 결국 집단 처형될 운명이었는데, 그렇게 되기 직전 어떻게 사정을 전해들은 독일 공군이 '그런 짓을 용납할 수는 없다'라고 개입하여 간신히 일반 전쟁 포로 수용소로 옮겨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 육군도 그랬지만, 독일 공군도 SS라면 영 질색을 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레딧 쓰레드에 톰 하디가 포로 수용소에 간 뒤 탈출하는 속편 영화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리더군요.


He gets attacked in the POW camp while protecting a child - no ordinary child.. a child born in hell !

톰 하디는 포로 수용소에서 어떤 아이를 보호하다가 다구리를 맞게 되지 -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어... 지옥에서 태어난 아이였지 !







7.  영어로는 '덩커크'라고 읽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Dunkirk가 프랑스어로 '덩케르크'라고 읽히는 것인지요 ?


간단합니다.  Dunkirk는 영국인들이 이 도시를 가리키는 영어식 이름일 뿐이고, 원래 프랑스어로는 Dunquerque라고 쓰고 '됭께흐끄' 정도로 읽습니다.   일본섬 쓰시마를 한국어로는 대마도라고 표기하고 발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영국인들은 유럽 곳곳에 현지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 엇비슷한 발음의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 꽤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베네치아(Venezia)를 베니스(Venice)라고 부른다던가, 피렌체(Firenze)를 플로렌스(Florence)라고 부르는 것 등입니다.  


한국어로는 덩케르크라고 표기되는 이 작은 도시에는 네덜란드어 이름도 있는데 Duinkerke(됭케르커)라고 하고, 원래 뜻은 모래(dun) 교회(kerke)라는 뜻이랍니다.  실제로 이 도시는 원래 네덜란드 땅이었는데, 네덜란드가 통째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영국-프랑스-스페인-네덜란드 독립군 사이에서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17세기 후반에 영국왕 찰스 2세가 프랑스에게 이 도시를 32만 파운드에 매각하면서 지금처럼 프랑스 땅으로 굳어졌습니다.  지금도 이 도시는 프랑스어권 도시로는 세계 최북단에 있는 도시라고 합니다.






8.  구조되어 구축함에 승선한 병사들에게 주어진 홍차에는 우유와 설탕이 들어 있었을까요, 레몬이 들어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아무 것도 넣지 않은 straight tea였을까요 ?


알 수 없습니다만 우유와 설탕이 들어 있었을 확률이 훨~씬 큽니다.  지금은 좀더 다양해졌다고 합니다만 (저 영국 가 본 적 아직 없습니다), 당시 영국인들이 마시던 차는 대개 우유와 설탕이 든 것이었습니다.  


왜 영국인들이 녹차가 아닌 홍차를 마시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설이 있는데, (1) 홍차의 보존 기간이 좀더 길기 때문에 중국에서 느린 범선으로 실어나르던 차는 일부러 홍차를 골라 실었다는 것  (2) 영국인들은 커피나 코코아에 이미 설탕을 넣어 마시고 있었는데, 설탕을 넣어 마시기에는 녹차보다는 홍차가 좀더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는 것 등입니다.  아마 2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홍차에 우유를 넣는 것은 고대부터 중국과 거래하여 차를 마셔왔던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들도 흔히 차를 마시던 방법입니다.  심지어 버터를 넣기도 한답니다.  특히 원래 싸구려 독주인 진(gin)을 진탕 마셔 술주정뱅이의 나라로 유명했던 영국이 산업 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공장 노동자들에게 진과 맥주 대신 설탕과 우유를 넣은 차를 마시도록 유도했습니다.  원래 홍차는 전량 중국에서 직수입하던 고급품이었다가, 수입량이 늘어나고 특히 식민지 인도에서 차 플랜테이션이 성공하면서 일반 노동자들도 쉽게 마실 수 있게 된 기호품이었습니다.  노동자들도 그런 고급 기호품을 마시게 되어 기뻐했고, 공장주들은 이제 노동자들이 술을 적게 마셔 생산성이 늘어나니 좋았습니다.  특히 설탕과 우유를 넣은 차, 그리고 잼을 바른 빵 한조각은 고된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열량을 공급해주는 좋은 새참이었습니다.


따라서 영국군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홍차에도 당연히 설탕과 우유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지급된 인스턴트 홍차 분말 깡통인데, 차와 함께 설탕과 분유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진짜 찻잎이 든 깡통이 배급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병사들에게 홍차를 공급하느라, 1942년 영국은 유럽 대륙 전체에서 유통되던 홍차를 모조리 사들여 사재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Supermarine_Spitfire

https://www.reddit.com/r/Dunkirk/comments/6ol611/spoilers_discussion_thread_dunkirk/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accidents_and_incidents_involving_military_aircraft_(1940%E2%80%9344)

http://www.armchairgeneral.com/forums/showthread.php?t=77451

http://www.techsupportforum.com/forums/f36/survival-rate-of-shot-down-pilots-during-world-war-ii-366842.html

http://spitfireforums.com/index.php?action=printpage;topic=297.0

http://www.avialogs.com/index.php/en/aircraft/uk/supermarine/spitfire/ap-1565i-pilots-notes-for-spitfire-ixxi-xvi.html

https://en.wikipedia.org/wiki/Dunkirk

https://reprorations.com/Britain%20WW2/WW2-Britain%20page%202.htm

https://www.thevintagenews.com/2017/06/02/during-wwii-the-british-government-bought-the-worlds-entire-supply-of-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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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7.23 18:51

7월 6일 새벽, 카알 대공이 정한 공격 개시 시간을 제대로 지킨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카알 대공이 위치한 도이치-바그람 마을 인근에 있던 부대들도 제때에 작전 명령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1 군단도 벨가르드(Heinrich Joseph Johannes, Graf von Bellegarde) 백작의 지휘 하에 오전 3시부터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공격 목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아더클라(Aderklaa) 마을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의 이 날 공격의 진짜 펀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이었으나, 벨가르드 백작이 맡은 이 아더클라 공격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전체 전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이 곳을 빼앗는다면 프랑스군 전선이 두동강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도록 나폴레옹이 놔둘리가 없었으므로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고, 이 곳을 향하는 벨가르드 백작의 마음은 무척이나 비장했습니다.




(벨가르드 백작이십니다.  이 분 성씨는 누가 봐도 프랑스식인데, 그 이유는 이 분 가문이 사보이(Savoy) 귀족 출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 분은 작센 태생입니다만, 이렇게 독일에 정착한 프랑스식 성씨를 가진 분들은 자기 성을 프랑스식으로 읽는지 독일식으로 읽는지 궁금합니다.)




약속한 공격 개시 시간인 새벽 4시가 되자, 벨가르드 백작은 슈투터하임(Stutterheim) 소장의 지휘 하에 3개 보병 대대와 3개 기병 대대를 조심스럽게 아더클라로 진격시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선봉대는 아더클라 마을 주변에 구축된 토루 너머에서 언제라도 적군이 고개를 내밀고 일제 사격을 퍼부을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어둠 속을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벨가르드 백작의 귀에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천만뜻밖에도, 이 요충지가 텅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 마을로 선듯 진입하지 못하고 먼저 탐색조를 투입하여 이게 혹시 뭔가 함정이 아닌지 확인부터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마을이 비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군은 신이 나서 마을을 점령하고 제1 군단의 나머지 대대들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도 마을 바로 뒤 편에 자리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벨가르드 백작은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점령하는데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점령이 끝나자 이제 뭘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이때 그냥 진격하여 프랑스군 후방으로 돌파해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만, 벨가르드 백작은 역시 구시대의 인물로서 카알 대공의 전체 작전 방향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행동을 독단적으로 취하지 못하고 그냥 '일단 임무 완수'를 선언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그가 받은 명령서에는 일단 마을을 점령하면 예비 병력이 후방에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의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였으므로, 카알 대공은 벨가르드 백작의 공격도 이들과 보조를 같이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 명령은 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 밖의 횡재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경직성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프랑스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원래 이 곳을 지켜야 하지만 독단적으로 후퇴했던 베르나도트도 바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후퇴에는 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그의 변명대로 그가 맡은 제9 군단은 병력도 적고 훈련도도 떨어지는데다, 결정적으로 사기가 낮았습니다.  대부분이 작센인이었던 그의 병사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다니는 처지였으니 사기가 높다면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제밤의 패배는 충격이 컸고, 게다가 패배의 원인이 아군인 프랑스군에게 당한 총질 때문이었으니 사기는 더욱 바닥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뿔뿔히 흩어져 후방으로 도망친 병력들을 재규합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아더클라를 텅텅 비워두고 전체 군단을 다 뒤로 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베르나도트는 니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더클라가 너무 적진에 바싹 붙어 있는데다, 전체 프랑스 전열에서 아더클라만 너무 앞으로 튀어 나와 있기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위험 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위치를 비워놓았다가 적이 습격해올 경우 역습을 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물론 어이없는 변명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아더클라는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하는 식으로 벌어진 집게 모양의 오스트리아군 전선 안을 쐐기 모양으로 파고 들어간 프랑스군 중에서도, 쐐기의 뾰족한 끝 부분이 바로 아더클라였으니까요.  


당연히 아더클라를 잘 지키는 것이 전체 프랑스군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에 하필이면 베르나도트를 배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남겨진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곳에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배치한 것은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배치해야 하는 자리에 가장 믿을 수 없고 미운 털이 박힌 군단장을 배치한 셈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당시 현장에서 가장 약한 군단 중 하나였습니다.  총 3개 사단 중 뒤파(Dupas) 장군의 사단만 프랑스군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작센군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약 1만7천의 병력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필 뒤파 장군의 프랑스 사단은 막도날드 쪽으로 차출되어야 했으니, 베르나도트가 심통이 날 만도 했었지요.  그런 제9 군단을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곳에 배치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은 이번 기회에 베르나도트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더클라는 바그람 고지 언저리와 약 1km 조금 더 넘게 떨어진 곳으로서, 그 고지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의 중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는 위치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스트리아군의 큼지막한 대포알이 아더클라를 향해 빗발처럼 날아들테니, 그 중 하나가 베르나도트의 허리를 두동강 내지 말라는 법도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방어 진지를 무단 이탈하여 후방에서 대기한 것도 어쩌면 나폴레옹의 그런 속셈을 간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베르나도트도 아더클라 바로 1km 남서쪽의 어둠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텅 빈 마을로 좋다고 쏟아져 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공언한 대로, '이제야 말로 나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주마'라는 각오로 아더클라 탈환을 위한 역습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병력은 고작 6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으므로 감히 무작정 돌격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포격을 퍼붓기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26문의 꽤 강력한 포병대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바그람 고지 위에 방열된 중포를 이용해 베르나도트의 포병대와 포격 대결을 시작했는데, 구경에 있어서나 고지를 점유했다는 위치 선정에 있어서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포병대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작센 포병대의 26문의 대포 중 무려 15문이 직격탄을 맞고 포가가 부서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러는 사이 구조대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마세나의 제4 군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전날 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아더클라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신이 맡았던 프랑스군의 좌익, 그러니까 도나우 강변 쪽 아스페른 마을에는 부데(Boudet)의 1개 사단만 남겨둔 채였습니다.  마세나는 특이하게도 눈처럼 흰색의 무개마차(phaeton)를 타고 있었습니다.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마세나는 사고로 말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친 바 있었습니다.  걷는 것은 커녕 말도 못 탈 정도의 중상이었는데, 마세나는 후방으로 물러나는 대신 마차를 타고 현장 지휘를 하겠다는 기개를 보여주어 나폴레옹을 기쁘게 했었지요.  아무튼 이들은 아더클라 쪽에서 들려오는 맹렬한 포성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더욱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 왔습니다.  아더클라 인근에 이들이 도착한 것은 이제 해가 훤히 뜬 아침 7시 30분 정도였는데, 말 위에 올라탄 누군가가 마세나의 눈에 잘 띄는 흰색 마차를 알아보고 마세나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뜻 밖에도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그냥 뚜껑이 없는 무개마차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것은 파에톤이라는 형태의 마차이고 어떤 것은 로드스터이고, 뭐 아무튼 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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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7.16 22:27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맡고 있던 로젠베르크(Franz Seraph von Orsini-Rosenberg) 대공의 제4 군단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기만을 위한 미끼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지요.  그러나 미끼도 너무 작으면 큰 고기를 낚을 수 없는 법이었으므로 로젠베르크의 군단도 총 1만8천의 꽤 큰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저녁 무렵에 만신창이가 되어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의 전위대 6천, 그리고 노스티즈(Nostitz)의 기병대 3천이 합류해 있었으므로 총 2만7천의 강력한 군세였습니다.   




(로젠베르크는 당시 49세로서, 작위는 Reichsfürst 였습니다.  왕보다는 밑, 공작보다는 위인 대공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로젠베르크는 이들을 총 3개부대로 편성하여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을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1개 부대는 6개 대대로 작게 편성되어 프랑스군 수중에 있던 그로스호펜(Grosshofen) 마을을 공격하기로 했고, 무려 16개 대대로 강력하게 편성된 다른 1개 부대는 글린첸도르프(Glinzendorf)를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글린첸도르프로 향하는 부대에는 나중에 요한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음악사에 영원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라데츠키 백작(Joseph Radetzky von Radetz)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1개 부대는 모두 기병대로 되어 있었고 이들은 프랑스군의 우측으로 멀찍이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를 습격하기로 했습니다.  나름 굉장히 머리를 쓴 작전이었고, 전날 헛된 공격으로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프랑스군에게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로젠베르크의 공세에는 무려 60문의 대포가 딸려 있었으므로, 새벽 하늘에 엄청난 포성을 울려 나폴레옹의 시선을 잡아 끌게 되어 있었습니다.




(붉은색 원은 프랑스군이 주둔한 지역이고, 푸른색 원은 오스트리아군 주요 거점입니다.  푸른색 화살표가 로젠베르크의 공세 방향입니다.)



그러나 로젠베르크에게는 재수가 없게도, 그의 앞에 있던 부대는 바로 프랑스군 최고의 지장이라고 할 수 있던 다부(Davout)였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무려 3만2천의 보병과 6천2백의 기병, 그리고 무려 120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어서 프랑스군 최강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고, 로젠베르크의 공세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기습이라도 성공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다부는 전날의 야간 공격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고 나폴레옹의 의도와는 달리 일찌감치 공격을 걷어들인 바 있었지요.  덕분에 프랑스군은 별로 지치지도 않았고, 새벽에 오히려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을 하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로젠베르크는 공세에 나서면서 '절대 엄숙'을 지시했으나, 이 군단에는 반쯤은 민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방위군(Landwehr) 부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소음을 내며 행군을 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기습을 당해 무척 놀라긴 했으나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새벽 5시 경, 라데츠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선봉대가 그로스호펜을 습격하여 프랑스군을 밀어냈고, 이어서 글린첸도르프에도 오스트리군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과 1개 연대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그로스호펜은 곧장 오스트리아군 수중에 넘어갔으나, 다부는 당황하지 않고 곧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로스호펜에서 밀려난 프랑스군의 퓌토(Puthod) 장군이 그로스호펜을 탈환하기 위해 정면 공격을 하는 동안 구댕(Gudin) 장군의 강력한 사단이 그 측면을 들이쳤습니다.  프리앙 장군과 모랑 장군의 2개 사단이 주둔하고있던 글린첸도르프 마을은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잘 버텨주었고, 그루시(Grouchy) 장군과 몽브렁(Montbrun) 장군의 프랑스군 기병대는 측면을 돌아 레오폴즈도르프를 노리던 오스트리아군의 기병대를 오히려 다시 우회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로젠베르크와 다부가 새벽에 혈투를 벌이며 낸 포성과 총성은 새벽 하늘을 가로질러 라스도르프(Raasdorf)에서 이른 아침식사 중이던 나폴레옹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다부가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먼저 공격을 시작했을리도 없으니, 그쪽에서 포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 도착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이었지요.  당시 프레스부르크에 웅크리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는 고작 1만3천 정도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이 좀 부풀려 보고를 했는지, 나폴레옹은 요한 대공의 군세를 약 3만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병력의 우위를 지키고 있는 마당에 적에게 3만이 더 가세한다는 것은 악몽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예비 기병대로부터 낭수티(Nansouty)와 아리기(Arrighi) 장군의 중장 기병대를 다부 쪽으로 파견했고, 이어서 황실 근위대까지 그쪽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마저 끝낼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낭수티 장군의 기병대 중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마 포병대가 로젠베르크 군단에게 첫 포탄을 발사할 때 즈음에는 이미 나폴레옹도 현장에 도착하여 다부와 함께 반격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기습을 해온 오스트리아군 측이었습니다.  작전 상황을 면밀히 보고 있던 카알 대공은 어차피 프랑스군의 시선을 동쪽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쪽 전선에서 더 얻을 것이 없다고 보고는 로젠베르크에게 후퇴를 명했습니다.  말이 후퇴이지 한창 열을 올리며 싸우고 있는 적으로부터 등을 보이고 후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하는 순간이 바로 이렇게 어느 한쪽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순간이었거든요.  이 때 병력 통제가 안 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후퇴를 기술적으로 잘 해내는 것은 뛰어난 지휘관과 잘 훈련되고 기강이 잡힌 병사들만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은 이것을 해냈습니다.  순식간에 전위대에서 후위대로 임무가 바뀐 라데츠키 장군의 부대는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이 원래 출발선이었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퇴각할 때까지 추격하는 프랑스군을 잘 억눌렀고, 결국 아침 6시가 되어 후퇴가 완료될 때까지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1천1백명 정도로 심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말년의 라데츠키입니다.  그는 원래 보헤미아, 즉 체코의 귀족이었습니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그의 이름으로 헌정한 것은 그가 이탈리아 독립 전쟁 당시 1848년 쿠스토자(Custoza) 전투에서 이탈리아 독립군을 격파한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 즉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맥없이 후퇴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걱정한 것은 그가 의도했던 기습이 이 새벽의 전투로 인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다부의 공격이 그의 주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잃어보린 기습 효과를 어느 정도 벌충하기 위해 다부에게 일부 병력을 더 동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후방으로부터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덕분에 다부의 공격은 더 지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다부에게 이렇게 감놔라 배놔라 참견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의 가슴을 정말로 철렁하게 만드는 사건이 전선 중앙부 아더클라(Aderklaa)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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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7.09 22:54

몇 달 전에 토르 3, 라그나로크(Thor Ragnarok)의 티저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었습니다.


https://youtu.be/v7MGUNV8MxU




무척 재미있어 보이는 이 티저 영상의 배경 음악은 1970년대의 헤비메탈 그룹인 레드 제펠린(Led Zeppelin)의 히트곡인 '이민자의 노래'(Immigrant Song)입니다.  이민자라고 하니까 뭔가 애달프고 핍박받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데, 요즘 구미 선진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이민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멋진 노래가 묘사하는 이민자 역시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바로 바이킹에 대한 노래이거든요.  저 토르 3 티저 영상을 만든 프로듀서가 정말 기가 막히게 영화와 잘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낸 것이지요.


Ah-ah, ah!

Ah-ah, ah!


We come from the land of the ice and snow

우린 얼음과 눈의 땅에서 왔다네

From the midnight sun, where the hot springs flow

한밤에도 해가 떠있고 뜨거운 샘물이 흐르는 땅이지

The hammer of the gods

신들의 망치가

Will drive our ships to new lands

우리의 배를 새로운 땅으로 밀어내

To fight the horde, and sing and cry

적의 대군과 싸우고 이렇게 노래하며 외치게 만들지

Valhalla, I am coming!

발할라여, 내가 간다 !


On we sweep with threshing oar

우리는 힘차게 노를 젔네

Our only goal will be the western shore

유일한 목적지는 서쪽의 해안 뿐 !


Ah-ah, ah!

Ah-ah, ah!


We come from the land of the ice and snow

우린 얼음과 눈의 땅에서 왔다네

From the midnight sun, where the hot springs flow

한밤에도 해가 떠있고 뜨거운 샘물이 흐르는 땅이지


How soft your fields so green

너희의 초록빛 평야는 정말 부드럽구나

Can whisper tales of gore

선혈이 낭자한 이야기를 속삭여주마

Of how we calmed the tides of war

우리가 어떻게 전쟁의 물결을 잠재웠는지 말이야 

We are your overlords

우리가 너희의 주인이다


On we sweep with threshing oar

우리는 힘차게 노를 젔네

Our only goal will be the western shore

유일한 목적지는 서쪽의 해안 뿐 !


So now you'd better stop and rebuild all your ruins

그러니 너희는 이제 저항을 멈추고 너희의 폐허를 다시 짓는게 낫노라

For peace and trust can win the day despite of all your losing

너희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신의가 세상을 지배할테니


Ooh-ooh, ooh-ooh, ooh-ooh

Ooh-ooh, ooh-ooh, ooh-ooh



(레드 제펠린.  70년대 이런 음악을 듣던 사람들이 지금의 60~70대 노인이 되었습니다.)



인상적인 이 노래 가사 중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How soft your fields so green'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가사에서도 암시되듯이, 아마도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에 살던 바이킹들이 굳이 거친 바다와 험한 싸움을 무릅쓰고 다른 나라를 침략한 이유 중 하나는 자기네들 땅이 그다지 살기 좋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8세기 말엽부터 약 300년 동안 맹위를 떨치던 바이킹의 침략 활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당시 스칸디나비아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세력이 침략 행위를 주도했다고도 하고, 토지가 척박하여 팽창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해외 침탈로 인해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경제에 여유가 생기자 그로 인해 인구가 늘어난 것이지, 인구가 늘어나서 침략이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재미있는 설 중 하나는 바이킹이 해외 침략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나 영국이 일찍부터 해외 식민지를 개척한 것이 모두 장자 상속제(primogeniture)와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모든 것을 다 상속받고 차남이나 삼남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했던 차남 삼남들이 목숨을 걸고 해외로 강도질을 나섰다는 것이지요.  미국 역사가 슬로안(Sloan)은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소극적이었던 이유가 프랑스는 장자 상속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이킹의 침략 행위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확실한 것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도 그랬고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에서도 그랬고, 심지어 저 멀리 러시아에서도 그랬듯이, 바이킹들은 따뜻한 땅에 정착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환영받지 못한 이민자 바이킹들의 정착 성공 지역)



바이킹들이 초록빛으로 뒤덮힌 부드러운 대지를 찾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난 이유는 누가 생각해도 간단할 것 같습니다.  따뜻한 곳이 좀더 농사 짓기에 좋기 때문이었지요.  흔히 바이킹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릴 때, 커다란 멧돼지 통구이에 넘치는 벌꿀술과 맥주 등 아주 풍요로운 식탁을 생각합니다.  우락부락한 전사들이 보리죽을 먹는 모습을 그리면 너무 초라해보일테니까 그렇게 고기를 먹는 것으로 묘사했겠지요.  그러나 스칸디나비아가 돼지 먹이를 풍부하게 생산하는 땅도 아니니, 돼지고기는 축제 때나 먹는 특식일 뿐 바이킹들이 365일 먹는 주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연 바이킹들은 평소에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요 ?  일년의 절반이 얼음과 눈, 그리고 하루 종일 어둠으로 뒤덮힌 나라에서는 대체 무슨 농사를 지었을까요 ?




(노르웨이의 얼음과 눈으로 덮힌... 농촌입니다.)



아시다시피 덴마크나 스웨덴, 노르웨이가 1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 덮힌 곳은 아닙니다.  거기서도 여름은 따뜻하고 사람들 반팔 입습니다.  따라서 농사도 활발히 지었는데, 그래도 역시 춥고 척박한 땅이다보니 밀 농사는 어려웠고 주로 보리와 호밀, 귀리를 재배했습니다.  그러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꿈꾸던 하얀 밀빵은 먹기 어려웠겠지요.  이런 거친 곡식으로는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까요 ?  스코틀랜드 사람들처럼 죽을 끓여 먹었을까요 ?  아마 그런 죽도 먹었을 것입니다.  특히 바이킹들은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통구이 바베큐가 아니라 주로 고기를 채소와 함께 삶은 스튜를 즐겨 먹었다고 하니까, 죽도 잘 먹었을 것 같습니다.  죽이든 스튜든 대표적인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서, 적은 재료로 여러 사람들이 먹기에 딱 좋은 음식이었지요.  그러나 바이킹도 분명히 빵을 만들어 먹었고, 그 특유의 척박한 환경에 따라 나름대로의 개성있는 소박한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출장을 가서 뭔가 교육을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교외에 있는 Xerox Document University라는 시설에서 이루어진 이 교육 과정에는 미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 온 직원들 약 20여명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숙식을 다 이 시설에서 제공했습니다.  카페테리아 형태의 식당은 음식의 질이 꽤 훌륭했습니다.  그 때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같이 교육을 받던 덴마크 청년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하고 키가 비슷했으니 덴마크인치고는 꽤 작은 키였던 그 청년은 무척 지적인 이미지였는데, 아침식사를 같은 테이블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그런 사적인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기억이 안 남는데, 그 청년은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난 귀국하면 지금 같이 사는 그녀에게 청혼할 거야'라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 금발머리 청년의 표정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그때 그 청년이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뭔가 크래커 비슷한 것이었는데, 색깔과 재질이 보통의 크래커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뭔가 밀겨 같은 것이 촘촘히 박힌 얇은 사각형의 과자 같은 모양이었는데, 그 친구는 거기에 버터를 발라 먹더군요.  저는 (실은 요즘도 그렇습니다만) 그런 부페식 공짜 식당에 가면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입에 쑤셔 넣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달걀과 베이컨 등등을 잔뜩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와 이 맛있는 것을 놔두고 저런 걸 먹다니'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이상한 크래커 같은 음식을 다시 본 것이 거의 20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영어 원제 :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이라는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영화였지요.  잡지사 일을 하는 마이클 역으로 나온 다니엘 크레이그가 여주인공 리스베트와 한겨울 눈으로 덮힌 오두막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며 뭔가를 심각하게 의논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뭔가를 바삭하고 베어 무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것이 그 덴마크 청년이 먹던 그 크래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찾아 유튜브와 구글을 열심히 뒤져 보았으나 못 찾았습니다.  원작 소설 속에서도 그 아침식사에서 남자 주인공이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한 묘사는 없더군요.  그러나 그 크래커 같은 빵이 확실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나중에 웹을 뒤져보니, 그건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많이 먹는 크내커브로(knäckebröd, 덴마크어로는 knækbrød, 영어로는 crispbread)라는 빵이었습니다.  바이킹들이 문헌 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으므로 이 빵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만들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대략 기원 후 500년 경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답니다.  그러니 바이킹들도 아마 항해시에는 이 빵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바삭바삭한 빵을 굽기 위해서는 오븐도 필요없고 평평한 돌이나 번철에서 그냥 귀리나 호밀 반죽을 굽기만 하면 되고, 또 수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한번 만들어 놓으면 수개월씩 보관할 수 있었으므로 바이킹들의 항해에 딱 좋았을 것입니다.


그 덴마크 청년이 몸소 보여준 것처럼, 이 크내커브로는 지금도 북부 유럽에서 꽤 먹는 음식입니다.  아마 스웨덴이라는 이국적인 특성을 보여주려고 그 밀레니엄 영화에서도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는 크내커브로를 먹는 장면을 굳이 보여준 것 같습니다.  사실 이건 맛이 있을 턱이 없는 음식이므로 전통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인식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건강과 전통의 관점에서 각광받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알고 보면 바이킹들도 레드 제펠린의 저 노래에 나온 것 같은 무적의 전사들이라기보다는 먹고 살기 힘들어 목숨을 걸고 부자집 담을 넘어야 했던 강도들 같은 존재였고, 크내커브로도 그런 절박한 이민자의 애환이 깃든 음식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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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7.02 22:02

7월 5일 밤 11시 경 첫날 전투가 초라하게 끝난 이후, 병사들은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때가 7월이라 낮에는 무척 더웠지만 의외로 밤은 무척 추웠고,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도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하루 종일 목숨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뒤 야영을 할 때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아무 것도 못 먹고 잠을 청해야 했으나, 이날은 좀 달랐을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참모장인 베르티에에게 병사들을 위해 60만병의 와인과 30만회 배급할 분량의 브랜디를 준비하도록 한 바 있을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으로부터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2일치의 식량과 브랜디가 들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모닥불 옆에서 (아마도 건빵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 식량과 브랜디를 들며 첫날의 혼한스러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습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장군님들은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저녁에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 다음날 새벽부터 해낼 생각이었습니다.  즉 중앙에서 우디노와 베르나도트, 막도날드가 견제 공격을 하는 동안 다부가 동쪽 끝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로부터 강력한 공세를 퍼부어 오스트리아 전선을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각 군단장들을 자신의 천막으로 소집하여 이런 계획을 알려주었고, 특히 가장 서쪽에 배치된 마세나의 제4 군단은 바그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요충지인 아더클라(Aderklaa) 마을 근처로, 즉 원래 위치보다 훨씬 더 중앙부 쪽으로 이동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루스바흐와 비삼베르크의 두 고지대를 양날개로 삼은 오스트리아군의 의도대로 양측 날개를 다 상대할 필요는 없으며, 다부가 오스트리아군의 왼쪽 날개를 부러뜨리면 오른쪽 날개,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오스트리아군은 제풀에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마세나의 제4 군단을 거기서 놀려둘 이유가 없으니 중앙부의 견제 공격에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로바우섬과의 연결 고리인 아스페른(Aspern) 마을을 텅 비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아스페른에는 마세나 휘하 중 부데(Budet)의 사단을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바그람에서의 7월 5일 밤 ~ 7월 6일 새벽 사이의 나폴레옹의 작전 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 심야 회의에 불참한 주요 군단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대부분이 작센 병사들로 구성된 그의 제9 군단은 원래부터 사기가 높지는 않았는데, 바그람 야간 공격에 참여했다가 흰색 군복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고 양측에서 총질을 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흩어진 부대들을 다시 모으느라 나폴레옹의 소환에도 응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휘하 3개 사단 중 뒤파 사단을 막도날드에게 빌려줘야 했었고 바그람에서 큰 신체적, 심리적 타격을 받은 덕분에 그의 제9 군단은 군단이라는 이름이 초라할 정도로 고작 6천명 정도로 크게 줄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큰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그날 밤, 그의 군단이 지켜야 할 위치는 바로 아더클라였습니다.  이 곳은 전체 전선의 중심지인 도이치-바그람 마을 바로 아래 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스트리아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평평한 저지대인 마르히펠트에서 주변 수 km 이내에서는 유일하게 유리한 방어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나폴레옹에게 삐져 있었던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오스트리아군 중앙부에서 지척거리에 있는 요충지를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지키라는 명령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하기로는 자신의 제9 군단만 너무 오스트리아군에 바싹 붙어 있고 주변에는 자신을 지원해줄 우군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군이 만약 반격해온다면 그의 제9 군단은 전멸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미 마세나의 제4 군단을 아더클라 바로 남쪽으로 이동시켜 베르나도트를 지원해주도록 지시했었지요.  베르나도트는 바로 전에 열린 심야 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도트는 자기 딴에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기로 한 것이지요.  그의 자기 합리화는 대략 이랬습니다.  "남쪽으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해온다면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은 자기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일탈행동은 몇 시간 뒤 전체 프랑스군 전선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한편, 루스바흐 고원 위쪽에서도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몇 시간 전의 전투를 직접 현장 지휘하느라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몹시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보니, 그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의외로 잘 싸워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낮에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노르드만 장군의 전위대가 사상자 6천이라는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야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으니 첫날 전투는 사실상 그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용기백배하여 오히려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합니다.  이건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병력 수가 더 적었고, 그에 비해 지켜야 할 전선은 훨씬 길었습니다.  반원형 전선의 외곽을 점거한 오스트리아군이 약 18km에 걸쳐 흩어져 있는 동안, 반원형 내곽에서 대치 중인 프랑스군의 전선은 약 10km로 훨씬 더 짧았습니다.  이런 경우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이 고지를 점거하고 있다보니 결정적으로 유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적진 관측이었지요.


위에서 7월 5일 밤~6일 새벽이 여름치고는 유난히 추워서 양측 병사들이 모두 모닥불을 피웠다고 했지요.  그 넓은 벌판에 양측 거의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모닥불을 피우고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꽤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확실히 더 유리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루스바흐(Russbach) 고원 지대 위에서 나폴레옹보다 10m라는 높이를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모닥불을 통해서라도 프랑스군의 배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프랑스군은 동쪽, 즉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쪽이 더 강해 보였고, 우익 쪽은 도나우 강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있어서인지 확실히 약해보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알 대공도 결국 나폴레옹과 동일한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적의 좌익을 치고 들어가 중앙부로 돌돌 말아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선제 공격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군의 길게 늘어진 포진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프랑스군의 좌익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으므로 프랑스군 좌익의 후방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카알 대공이 서쪽, 즉 프랑스군의 좌익을 치기로 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의 존재였습니다.



(파란색 화살표가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7월 6일 아침의 프랑스군 공격 방향이었고, 붉은색 화살표가 카알 대공이 생각했던 같은 시각 오스트리아군 공격 방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강을 건너기 직전이던 7월 4일 아침, 카알 대공은 이제 곧 결전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동쪽의 프레스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속히 이쪽으로 달려와 내 좌익에 합류하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 있었습니다.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로서, 약 50km, 짐이 없다면 걸어서 약 10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행군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겠고 또 포병대와 보급품 마차 등의 치중대를 끌고 오는데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강행군을 한다면 약 15시간이면 주파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요한 대공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긴박한 메시지를 소지한 전령은 쾌마를 타고 달렸으므로 4~5 시간이면 충분히 프레스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한 대공은 무려 23시간 뒤인 7월 5일 새벽에야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라도 준비를 했다면 늦어도 7월 5일 낮 12시에는 행군을 시작하여 7월 6일 새벽 3시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소식이 없더라도 당장 1시간 뒤, 아무리 늦어도 새벽 녘에는 도착을 알리는 전령이 나타날 수 있었지요.  카알 대공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는 동안 반대편이 동쪽에서 요한 대공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프랑스군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순간이 될 것이었습니다.   



(이론 상으로는 약 50km의 거리를 10시간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지치지 않고 또 등에 묵직한 총과 배낭을 짊어지지 않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또 길도 좋아야 하고요.  군대에서는 그런 점을 고려하여 1시간에 4km, 하루 8시간 32km를 정상적인 행군거리로 간주합니다.  물론 전투 상황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도 있습니다.)



작전은 완벽했습니다.  문제는 전날 나폴레옹의 어설픈 야간 공격이 그랬듯이 긴 전선 전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였지요.  카알 대공은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보다 앞서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일제 공격 시간을 새벽 4시로 명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게 늘어져 있던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거리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선의 길이가 너무 길었으므로 카알 대공은 모든 군단장들을 소환해 놓고 대면한 상태로 작전 회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정 내용을 명령서로 적어 각지에 주둔한 군단장들에게 전령편으로 보냈는데, 거리도 멀고 야간이었던지라 이 명령서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에는 늦어도 밤 1시까지는 명령서가 도착해야 했으나, 무려 2시간이나 늦은 새벽 3시에야 도착했습니다.  1시간 안에 자고 있던 군단 병력을 깨워 전투 준비를 갖춘 뒤 공격 개시 지점까지 행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이런 강행군에 익숙한 프랑스군이 아니라 느려터진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아마 제때 명령서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3시간만에 준비와 행군을 끝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지요.  이들은 결국 날이 훤하게 밝은 뒤인 아침 7시 반이 넘어서야 공격 개시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견제 공격을 수행하게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좌익, 즉 로젠베르크(Rosenberg)의 제4 군단은 제 시간에 명령서를 받아 들었고, 제 시간인 새벽 4시에 공격 개시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역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려던 프랑스군 최강을 자랑하는 다부의 제3 군단이 공격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7월 6일 새벽, 양측의 전투는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시작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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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7.01 11:32

이 글은 뉴욕 타임즈의 아래 기사 중 일부를 번역하고 사진을 옮긴 옛날 글인데, 주말 오전에 읽기 좋을 것 같아 다시 올립니다.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4/10/08/magazine/eaters-all-over.html?_r=3



1.  일본 도쿄, 사키


사키가 처음으로 나또를 먹었을 때는 이 여자애가 생후 7개월 되었을 때였는데, 먹자마자 토했다.  엄마인 아사까는 아마 냄새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냄새는 마치 깡통제 고양이 사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츰 이 끈적끈적한 발효콩은 사키의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고, 전통적인 일본식 아침식사에 빠지지 않는 일부가 되었다.  다른 메뉴는 흰쌀밥, 미소된장국, 간장과 청주로 요리한 으깬 호박, 오이 장아찌 (사키가 제일 싫어하는 반찬), 계란말이, 그리고 연어구이이다.




2.  터키 이스탄불, 도가


도가 앞에 펼쳐진 화려한 토요일 아침식사에는 카이막(꿀과 엉긴 크림)을 얹은 토스트, 그린/블랙 올리브, 수쿡이라는 이름의 매운 소시지, 삶은 달걀, 타히니(참깨를 갈은 것)를 얹은 뻑뻑한 포도 시럽 (페크메즈), 양/염소/젖소 우유로 만든 여러가지 종류의 치즈, 모과잼과 블랙베리 잼, 패스트리와 빵, 토마토, 오이, 흰 무와 여러가지 신선 채소, 구운 고추로 만든 페이스트인 kahvaltilik biber salcasi, 그리고 디저트로는 헤이즐넛으로 향을 낸 할바(halvah) 과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우유와 오렌지 쥬스도 있다.  확실히 평일날 아침식사보다는 화려한 편인데, 이 가족은 여러가지를 먹는 터키식 아침식사 전통을 따르고 있다.





3.  프랑스 파리, 나타나엘


나타나엘이 아빠집에 묵을 때의 평일날 아침식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준비해주는데, 항상 키위 한개, 타르틴 (빵위에 고기나 치즈, 채소를 얹은 것), 바게트에 버터와 잼을 바른 것, 그리고 우유와 시리얼, 갓 짠 오렌지 쥬스이다.  나타나엘은 크레페와 코코아를 더 좋아하고, 많은 프랑스 꼬마애들이 이걸 더 좋아하지만 아빠인 세드릭은 건강을 더 생각하는 편이다.  주말에는 크롸상을 먹고, 빠띠쉐인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열정 그대로, 자기가 만든 디저트를 먹는다.





4.  말라위 치텟제, 에밀리


에밀리는 할머니 에텔과 함께 말라위의 수도인 릴롱궤 외곽에 사는데, 할머니가 다른집 파출부를 하기 때문에 이 아홉 식구는 6시 이전에 일어나 아침을 먹는다.  에밀리의 아침식사는 팔라라고 불리는 콩가루와 너트가루를 섞은 밀가루 죽과, 밀가루/양파/양파/고추 반죽 튀김, 그리고 삶은 감자와 호박, 그리고 꽃과 설탕으로 만든 검붉은 색의 쥬스를 마신다.  에밀리는 운이 좋은 편이고, 다른 말라위 어린이들은 영양 실조 상태인 경우가 많다.  가끔은 아침에 에밀리도 설탕을 넣은 홍차를 마신다.





5.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비르타


비르타의 귀리죽은 hafragrautur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아이슬란드의 기본 아침식사이다.  이 귀리죽은 물 또는 우유로 끓이는데, 종종 갈색설탕, 메이플시럽, 버터, 과일, 그리고 신 우유인 surmjolk를 곁들인다.  비르타는 또 lysi라고 부르는, 대구 간 기름을 마신다.  아이슬란드의 긴 겨울에는 햇빛이 부족하여 비타민 D가 부족하기 쉬운데, 이 대구 간 기름에는 비타민 D가 풍부하다.  비르타의 엄마인 스바나는 4명의 아이들에게 생후 6개월부터 이것을 마시게 했는데, 지금은 모두들 불평없이 잘 마신다.  아이슬란드의 많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이 lysi를 아침마다 마시게 한다.





6.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비브


비브에게 아침식사는 우유와 함께, 버터를 바르고 (가장 중요한) 달콤한 스프링클을 뿌린 빵이다.  이 스프링클은 초콜렛, 바닐라, 과일 등 다양한 맛과 크고 작은 다양한 사이즈로 나온다.  정부가 운영하는 관광 관련 사이트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는 매일 75만 조각의 빵이 hagelslag (싸락눈 폭풍)이라고 불리는 초콜렛 스프링클과 함께 소비된다고 한다.  비브는 특히 vruchtenhagel (과일 싸락눈)이라는 이름의 여러가지 혼합맛 스프링클을 좋아한다.





7.  브라질 상 파울루, 아리시아와 하킴


아리시아의 분홍색 컵에는 초콜렛 우유가 담겨 있지만, 동생인 하킴의 컵에는 라떼 커피가 들어있다.  많은 브라질 부모들에게 있어, 아이에게 커피를 주는 것은 문화적 전통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커피가 비타민과 항산화물질이 풍부하며, 우유와 섞어 아침식사로 주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중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아빠인 헤지날도도 하킴이 그걸 마시고 나면 더 들뜨는 것 같긴 하다고 인정하지만, 적당히 마시면 괜찮다 소아과 의사도 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빵과 버터와 함께 햄과 치즈도 먹는다.





8.  말라위 치텟제, 필립과 셀린


필립과 그의 쌍동이 여동생인 셀린은 chikondamoyo라는 달콤한 옥수수빵 비슷한 케익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이건 할머니인 도로시가 알루미늄 냄비로 만든 것이다.  이 쌍동이는 아침식사로 그것과 함께 삶은 감자와 설탕을 넣은 홍차도 든다.





9.  일본 토쿄, 코끼


코끼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미국식 아침식사를 더 선호했을 것이다.  가끔은 엄마 후미가 시리얼과 도우넛도 주지만, 엄마는 아이들이 일본식 식사에 더 익숙하기를 바란다.  이 식사에는 간장과 참깨를 넣어 멸치와 함께 볶은 풋고추, 뜨거운 밥에 비빈 간장을 넣고 비빈 날계란, 그리고 연근과 우엉, 당근을 참기름과 간장, 정종으로 조린 반찬, 미소 된장국, 포도, 배 한조각, 우유가 포함되어 있다.





10.  터키 이스탄불, 오이쿠


4학년인 오이쿠의 아침식사의 중심은 갈색 빵이다.  여기에 그린/블랙 올리브와 누텔라 잼, 토마토, 삶은 달걀, 딸기잼과 꿀에 절인 버터, 여러가지 종류의 터키 치즈가 덧붙여진다. 





11.  브라질 상 파울루, 티아고


티아고는 초콜렛 우유를 좋아하고 또 일어나자마자 그걸 달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미 엄마가 직장에 나간 뒤이고 빨리 일어나 유치원에 가야하는 평일날 아침 7시에는 기분이 좋지 않다.  시리얼이 제일 좋아하는 아침식사인데, 여기에 바나나 케익과, 브라질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은 달콤한 빵인 bisnaguinha를 requeijão라는 부드러운 크림 치즈와 함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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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