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5.28 23:55

사칠레 전투의 패배를 수습하며 의기소침 해있던 외젠에게 공화국 시절의 낡은 군복을 입고 나타난 장군은 그 군복만큼이나 이름도 독특했습니다.  막도날드(Étienne Jacques Joseph Alexandre MacDonald)라는 이름이었거든요.  스당(Sedan) 출신으로 엄연한 프랑스인인 이 사람이 누가 봐도 스코틀랜드 계통의 이름을 가지게 된 사연은 간단했습니다.  그 가문은 실제로 스코틀랜드 서쪽 섬인 사우쓰 우이스트(South Uist)가 원래 고향으로서, 퇴출된 영국 및 스코틀랜드 연합 왕국의 카톨릭 왕 제임스 2세를 추종하는 집안이었습니다.  박해받는 그런 집안이 같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로 망명한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막도날드의 초상입니다.  그로 Gros의 작품입니다.)




그가 굳이 공화국 시절의 군복을 입고 나타난 것에도 그의 가문 내역처럼 사연이 있었습니다.  막도날드는 원래 뒤무리에(Charles François Dumouriez) 및 피슈그뤼(Jean-Charles Pichegru) 장군 밑에서 복무한 군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뒤무리에는 도중에 오스트리아 측으로 망명했고, 피슈그뤼는 반혁명 활동을 펼치다 투옥되어 암살된 사람입니다.  나폴레옹과는 줄을 댈 기회가 없었지요.  그러다 마침내 나폴레옹과 연을 맺을 기회가 왔습니다.  1797년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배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나폴레옹이 그 지역을 싹쓸이하여 오스트리아와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맺은 뒤 파리로 돌아간 뒤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로마 점령이나 나폴리 왕국 점령 등 뒤치닥거리스러운 임무만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의 군 경력에서 결정적인 기회가 또 온 것은 1799년의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한 것입니다.  중부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막도날드는 3만6천의 병력을 이끌고 불과 2만2천의 병력을 가진 수보로프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북진했으나, 트레비아(Trebbia)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주베르(Barthélemy Catherine Joubert)나 마세나 같은 명장들도 이때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연전연패하는 바람에 이 패배의 치욕이 좀 희석되었다는 점이었지요.  아무튼 막도날드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계속 이탈리아 방면군에서 경력을 쌓았고, 나름 이탈리아 전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와 친하게 지냈다는 점입니다.  나폴레옹의 최대 정적이었던 모로가 투옥된 뒤 1804년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난 뒤, 막도날드도 모로파로 몰려 아무런 지휘권은 커녕 공직조차 맡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그가 가진 군복은 1804년 이전, 즉 나폴레옹이 황위에 오르기 이전의 공화국 시절의 낡은 군복 뿐이었던 것입니다.  


1809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외젠에게 '전쟁 발발시 일단 피아베 강 서쪽으로 후퇴하라'는 편지 외에도 쓸만한 야전 지휘관을 보내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조세핀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특출날 것이 없었던 약관의 외젠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쓸만한 야전 지휘관은 다 자신의 그랑 다르메에서 한자리씩을 하고 있었으므로 따로 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발탁된 것이 실업자로 있던 막도날드였습니다.  막도날드는 어쨌거나 방면군 하나를 통째로 지휘해본 경험이 있는 고위 장교였고, 또 마침 이탈리아 방면의 전문가였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이 꺼려했던 것은 모로였지 막도날드 따위가 아니었고, 또 이제 황제 5년차로서 더 이상 그와 정치적인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기피 인물이었다는 점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막도날드의 참여는 외젠의 이탈리아군의 사기를 높여주는 효과를 냈습니다.  외젠은 휘하에 있는 3개 군단 중 가장 강력한 군단을 막도날드에게 맡겼는데, 막도날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근면성실을 바탕으로 한 지휘력으로 군단 편성과 병사들 사기 진작에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외젠의 이탈리아군은 사기가 계속 오르고 있었습니다.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전면적인 퇴각 중이었거든요.  요한 대공은 어차피 병력도 부족한 마당에 본국으로부터 '이탈리아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본진이 털리고 있으니 빨리 돌아와 네 형을 도우라'는 급보를 받고 열심히 퇴각 중이었습니다.  그 뒤를 쫓는 외젠도 마냥 여유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그의 임무는 이탈리아 왕국 방어가 아니라,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 본진과 합류하려는 요한 대공을 요격하여 어떻게든 그쪽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던 것이지요.  요한에게나 외젠에게나 성패의 제1 요건은 결국 스피드였습니다.


도둑과 경찰이 추격전을 벌일 때는 도망치는 쪽이 유리한 경우가 많습니다만, 수만 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군대끼리 추격전을 벌일 때는 대부분 도망치는 쪽보다 추격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군대가 진격할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후퇴할 때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이 생기므로, 도망치는 쪽의 발걸음이 더 느린 경우가 많거든요.  가령 부상병들의 처리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진격할 때는 그냥 부상병을 후방에 버려두고 가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후퇴할 때는 부상병을 두고 간다는 것은 곧장 포로가 된다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데려가자니 행군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지요.  결정적으로, 강과 같은 장애물을 건너느라 지체할 수 밖에 없을 때, 뒷덜미를 잡히기 딱 좋았습니다.  


막 후퇴가 시작된 4월말, 가장 먼저 만난 큰 강인 아디제(Adige) 강가에서 당장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벌어진 칼디에로(Caldiero)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후위대는 이탈리아군 선발대를 효과적으로 뿌리치고 도강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결국 요한 대공은 피아베(Piave) 강 근처에서 다시 따라잡히고 맙니다.  5월 8일의 일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이 이 선까지 후퇴하라고 지시했던 피아베 강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스트리아군은 강을 건넌 뒤 다리를 다 태워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나 현지 지리에 밝은 쪽은 당연히 이탈리아군 쪽이었습니다.  외젠은 다리 없이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여러 곳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외젠은 오스트리아군 본진은 이미 꽤 멀리까지 도망쳤고 강 건너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은 소수의 후위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칼디에로 전투에서 지나치게 서두르다 오스트리아군을 놓친 바 있던 외젠은 이번에는 병력을 다 모은 뒤 대규모로 강을 건너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이 외젠을 승리자로 만들어 줍니다.


외젠이 파악한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요한 대공의 본진도 강가에서 불과 4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요한 대공 입장에서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쫓기며 빈까지 갈 수는 없다고 보고, 이 곳에서 외젠에게 크게 한방 먹이고 가겠다는 계획이었거든요.  오스트리아군은 약 2만8천, 이탈리아군은 약 4만4천으로 외젠의 이탈리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습니다만, 변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피아베 강이었지요.


외젠의 계획은 먼저 드세 백작(Comte Dessaix, Joseph Marie, 마렝고의 드제 Desaix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이 이끄는 강력한 전위대가 여울목을 건너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면, 막도날드의 군단부터 시작해서 병력을 투입할 생각이었습니다.  동시에 다른 여울목을 통해서 기병 사단들을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훗날 워털루의 그루시 맞습니다) 지휘 하에 투입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위치를 파악해둔 다른 여러 여울목을 통해서도 다른 군단들도 투입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침 7시부터 드세 휘하의 전위대 5천이 거센 물살을 헤치고 어렵게 강을 건너자마자,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군도를 휘두르며 그들을 반겼습니다.  드세는 당황하지 않고 교과서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전위대를 2개의 커다란 방진(square)로 만들어 적 기병에 대항했지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도 결코 아마추어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보병들이 방진을 만들자, 정말 교과서처럼 오스트리아군에서는 포병대가 나섰습니다.  


당시 병종간의 천적 관계는 대충 이랬습니다.  보병끼리 싸울 때는 넓게 횡대로 펼쳐진 진형이 좋았습니다.  소총의 일제 투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고, 또 적 포격으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펼쳐진 횡대는 군도를 뽑아든 기병들의 돌격에 완전 취약했습니다.  기병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보병들은 3열 또는 4열로 밀집하여 직사각형의 방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말은 빽뺵히 늘어선 총검 대오를 결코 뚫을 수 없었거든요.  그러나 이런 보병 밀집 방진은 또 포병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감이었습니다.  대포알 한방에 6~7명이 한꺼번에 나가 떨어지니까요.


이렇게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이탈리아 보병들을 위협하여 방진을 만들자마자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나선 것은 정말 기가 막힌 기-포병의 콜라보레이션이었지요.  밀집된 이탈리아 보병들은 곧 불을 뿜은 오스트리아 대포에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드세는 이번에는 당황하여 외젠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외젠은 도강 순서를 급히 변경하여 포병대를 급파, 드세의 전위대를 지원했습니다.  전투는 곧 포병끼리의 치열한 포격전으로 전개되었고, 드세는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세의 안도도 잠시였습니다.  이탈리아군 포병들은 너무 급히 여울목을 건너느라 탄약을 별로 못 가져왔던 것입니다.  결국 포탄이 떨어진 포대들은 하나둘씩 슬그머니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의 순간, 다른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넌 이탈리아 기병대가 오스트리아 포병대를 덮쳤습니다.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기병대들도 다시 일제히 뛰어나왔고, 곧 혼전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이탈리아 기병대의 완승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기병들은 그 지휘관까지 전사해버렸고, 전체 24문의 대포 중 14문이 이탈리아군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러는 사이 막도날드의 군단이 꾸준히 강을 건넜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의 도나우 강 부교를 끊어 놓은 것이 궁극적으로는 평년보다 일찍 시작된 검은 숲의 눈 녹은 물에 의한 수위 증가였듯이, 여기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피아베 강은 이날 하루 중 꾸준히 유속과 수위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너다 물살에 떠내려가 결국 익사하는 병사들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오후 3시 경이 되자 물살이 너무 거세져, 결국 외젠은 여울목을 통한 도강을 중단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관없었습니다.  이미 정오 무렵, 막도날드는 휘하 군단 병력의 약 3/4 정도를 건너게 한 뒤였거든요.  요한 대공은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이탈리아군의 공격이 거세게 나오자 당황했는지 휘하 병력을 시원시원하게 투입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사이, 막도날드는 포병들의 맹렬한 포격을 시작으로 정석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도 뒤늦게나마 예비대인 정예 척탄병 여단을 투입하며 반격했으나 이미 전세는 이탈리아군 측으로 완전히 기운 뒤였습니다.  전체적인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으나, 오후 1시 경에 이미 전투의 절정은 지난 상태가 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은 그나마 진형을 유지한 채 전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약 14%의 사상률인 약 1200의 사상자와 약 2700의 포로 및 행방불명자를 내며 대패했으나, 완전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젠의 패기에 질린 요한이 초심과는 달리 소극적인 공세를 펼쳤던 덕분에 패배 이후에도 나름 수습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후로는 요한 대공은 감히 외젠의 추격에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속 후퇴만 했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칠레에 이르러서는 휘하 2개 군단을 둘로 나누어 원래의 각각의 근거지로 되돌려 보냅니다.  즉, 제9 군단은 원래 카르니올라(Carniola, 현재의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서 출발했었고, 제8 군단은 오스트리아 카린티아(Carinthia) 지방의 주도인 빌라흐(Villach)에서 편성된 부대였는데, 이들을 각각 류블랴나와 빌라흐로 나누어 보낸 것입니다.  


어쩌면 요한은 류블랴나를 지킬 병력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제9 군단을 그쪽으로 보낸 것인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그 뒤를 추격하는 외젠은 분산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며 아주 쉽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나폴레옹 쪽으로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요한과 외젠은 소규모의 전투를 계속 벌이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북진하여 결국 카알 대공과 나폴레옹에게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그람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막도날드의 지휘 하에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되고, 요한 대공의 병력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그람 전투 시리즈에서 보시겠습니다.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aldiero_(1809)

https://en.wikipedia.org/wiki/Jacques_MacDonal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rebbia_(1799)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Piave_River_(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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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5.21 19:11

여기서 잠시 시간을 약 2달 전으로 되돌려 1809년 4월 경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은 크게 3갈래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주력을 이끌고 바이에른을 침공하는 동안, 페르디난트 대공은 바르샤바 공국을 들이치고, 셋 중 가장 어렸던 요한 대공은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을 향했지요.  이 삼형제의 능력치는 정확하게 나이 순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장이었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사적 역량보다도 그 온후하고 공정한 성격을 기반으로 한 리더쉽으로 군의 신망을 얻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27세의 약관이었던 요한 대공이었습니다.




(요한 대공이 17살이던 1799년 그려진 그의 초상화입니다.)


요한 대공은 이 두 형에 비해 훨씬 더 굉장한,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전투 경험이 있었습니다.  상대는 프랑스의 명장이자 나폴레옹의 정적이었던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였고 오스트리아의 국운을 건 매우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비극적인 부분은 이 1800년 12월 호헨린덴(Hohenlinden) 전투의 처참한 패배자가 바로 요한 대공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이 전투는 처음에는 기세 좋게 프랑스군을 밀어붙였으나, 프랑스군의 유인에 말려 아무 대책없이 숲 속으로 뛰어들어간 요한 대공의 철부지 지휘 덕분에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그야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참패로 종결되었습니다.  이 전투 결과 2달 뒤 오스트리아는 1801년 2월 9일 굴욕적인 루네빌(Lunéville) 조약으로 제2차 대불동맹전쟁을 종결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대공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자였으므로 다시 이 중대한 침공 작전의 지휘관이 된 것입니다.




(모로 장군을 나폴레옹의 최대 라이벌로 만들어 준 회심의 쾌승, 호헨린덴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요한 대공이 포로가 되는 망신을 면한 것은 오직 그가 타고 있던 명마 덕분이었습니다.  덕분에 부하들을 다 팽개치고 정말 전속력으로 달아날 수 있었거든요.)



최소한 요한 대공에게 북부 이탈리아 전선을 맡긴 것은 나름 좋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토스카나 대공이었던 레오폴트 2세가 아직 황위에 오르기 전에 피렌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국어가 이탈리아어일 정도로 이탈리아 사정에 나름 훤했습니다.  또 그는 바로 4년 전 제3차 대불동맹전쟁 때 티롤 지방의 방어를 맡으며 개인적으로 티롤 지방민들과 유대감을 쌓은 바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탈리아 침공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티롤의 반란은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2명의 쥴라이 형제(Ignaz Gyulai, Albert Gyulai)가 이끄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왕국을 침공했습니다.  과연 이탈리아 왕국에서 그의 침공에 맞서 싸울 용사는 누구였을까요 ?





(이그나즈 쥴라이 장군입니다.  그와 그의 동생 알베르트 쥴라이는 헝가리 태생의 귀족들로서, 주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활약했었지요.)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입니다.  수도는 패션의 도시이자 롬바르디아의 주도였던 밀라노입니다.)



잠깐 잊으신 분들을 위해 상기시켜드리자면, 이탈리아 왕국(Royaume d'Italie)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결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뜯어낸 북부 이탈리아 영토로 만든 것으로서, 과거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 모데나 공국 및 로마 교황청의 영토 일부 및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왕국이니까 왕이 있을텐데 그게 누구냐고요 ?  누구겠습니까 ?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제국의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바빴습니다.  그는 파리를 가꾸고 마드리드와 비엔나를 때려부수느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인 밀라노에 머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대통령이 없을 때 써먹을 수 있는 부통령(vice-president)을 만들듯이, 나폴레옹은 자신을 대신하여 왕국을 통치할 부왕(vice-roi, 영어로는 viceroy)을 임명해 두었습니다.  바로 조세핀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붓아들인 외젠(Eugène de Beauharnais)이었습니다.  





(외젠이 19살이던 1800년에 그려진 그의 초상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탈모인 연합에 가입할 징조가...)




1809년 당시 그의 나이는 약관 28세로서, 요한 대공보다 겨우 1살 많은 젊은이였습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황궁에서 호의호식하며 밥만 축내던 요한 대공에 비하면 나폴레옹을 따라 다니며 훨씬 더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습니다.  확실히 그랬습니다.  그는 시리아의 생-장-다크레 포위전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고, 마렝고 전투에서 통령 근위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하여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절반에 속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실전에 참여했던 것이 저 마렝고 전투였었고, 당시 계급은 기병 대위였으며, 지휘해본 최대 규모의 부대는 중대 단위였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군 생활을 나폴레옹의 하는 일 없는 참모로 보냈으며, 의붓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군 생활을 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이집트 시절에 아름다운 흑인 여자 노예를 정부로 사들여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시켜 데리고 다니며 주변 젊은 장교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몸에 받기도 했습니다만, 작전 지휘로 주변 장교들의 인정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의붓아들에 대해 염려가 되는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받고 1809년 1월 급히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외젠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 이탈리아 왕국의 방어 계획에 대해 자세한 지침을 보냈습니다.  이 일련의 편지들에서 나폴레옹이 지시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딱 2줄이었습니다.


1)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 미리 병력을 집결시켜 괜히 오스트리아를 먼저 도발하지 말라.

2) 만약 오스트리아가 침공해온다면 일단 피아베(Piave) 강 서쪽으로 후퇴한 뒤 병력을 충분히 집결시킨 뒤 반격하라.





(피아베 강의 위치입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어차피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은 자신이 상대하게 될 것이므로, 이탈리아 왕국을 향한 오스트리아의 곁가지 부대는 이 정도의 전략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외젠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방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4월 10일,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왕국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이렇게 일찍 오스트리아군이 침공을 개시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나폴레옹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외젠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준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외젠은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군을 증강하고 있긴 했습니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크게 이탈리아군과 프랑스군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사실 프랑스군도 거의 모조리 이탈리아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프랑스어를 쓰는 진짜 프랑스인 중 입대 연령이 되는 장정들은 모조리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e Armee)로 징집되는 형편이었거든요.  그러나 나폴레옹에 의해 최근 프랑스로 강제 합병된 과거 피에몬테와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에서 징집된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왕국에 주둔하는 프랑스군으로 복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외젠은 자신의 군대가 집결만 된다면 꽤 잘 싸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피아베 강 서쪽으로 꼴사납게 도망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일부 병력을 내보내 요한 대공의 진격을 잠시라도 지체시키도록 한 뒤, 6개 사단을 베네치아 인근 리벤자(Livenza) 강가의 사칠레(Sacile)에 모아 거기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기로 합니다.  그는 '국경 내로 침범해 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데는 하루면 충분하다'라고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빨간 위치 표시가 된 부분이 사칠레의 위치입니다.   요한 대공의 군대는 크게 북쪽의 빌라흐(Villach)와 동쪽의 류블랴나(Ljubljana)에서 각각 1개 군단씩이 쳐들어왔습니다.  류블랴나는 지금 슬로베니아의 수도입니다.)



그러나 자신감과 역량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외젠은 병력의 집결에는 꽤 신속함을 발휘해보였으나, 정찰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어설펐습니다.  그는 포르데노네(Pordenone)까지 진격해 온 오스트리아군은 약 2만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고, 사칠레에 집결시킨 6개 사단 3만7천이면 오스트리아군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한 대공 휘하에는 거의 4만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해 있었고, 요한 대공은 활발한 정찰을 통해 이탈리아군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외젠은 완전히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제 무덤에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리벤자 강과 논첼로 강 사이에서 벌어진 4월 16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은 병력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그 지휘관 외젠의 미숙한 지휘 하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외젠은 오스트리아군의 기병대가 자신의 것보다 우월한 것을 보고는 자기 딴에는 머리를 쓴답시고, 기병대가 활동하기 좋지 않은 논첼로 강변에 접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승부처로 삼고 그 쪽으로 병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느라 중앙 전선이 얇아질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메우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이 바로 그 얇아진 부분을 들이쳤습니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물러서야 했습니다.  그나마 외젠의 사단들이 물러나면서 방진을 구축한 채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며 질서정연하게 퇴각했기 때문에, 완전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외젠은 총병력 3만7천 중 3천의 사상자와 3천5백의 포로를 내며 큰 피해를 입었고, 요한 대공은 약 3천의 사상자와 5백의 포로를 냈습니다.  황제의 동생과 황제의 의붓아들의 1차전은 황제의 동생이 완승을 거둔 셈이었습니다.





(사칠레 전투의 상황도입니다.)




그러나 요한 대공도 대단한 지휘관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라면 이렇게 잡은 승기를 어떻게든 살려내 적을 무자비하게 추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상자 비율 10%도 안되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별로 치열하지도 않았던 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재정비한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는 이탈리아군을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외젠은 애초에 나폴레옹이 지시한 대로 피아베 강 서쪽 너머 저 멀리 후퇴하여 나폴레옹이 소싯적 수없이 넘나든 아디제(Adige) 강까지 후퇴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탈리아 왕국 곳곳에서 모여드는 병력을 모았습니다.  4월 28일, 마침내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디제 강에 면한 베로나(Verona) 근처까지 왔을 때, 이미 외젠은 6만의 병력을 모으고 강력한 수비 진영을 갖춘 뒤였습니다.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곳저곳 점령지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티롤의 반란군에게도 지원군을 보내주느라 더 줄어든 형편이었지요.  불과 10일 만의 전세 역전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애초에 외젠이 나폴레옹의 지시대로 싸우지 않고 후퇴했더라면 훨씬 더 쉽게 요한 대공을 물리칠 수 있다는 이야기로도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베로나의 위치입니다.  그 옆에 보이는 삼각형의 호수는 가르다 호수로서, 나폴레옹이 1796년 그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바 있지요.)



한편, 나폴레옹은 그렇잖아도 바쁜 와중에 외젠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섣부른 전투를 벌였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의 왕이던 그의 매제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로 외젠을 교체해버리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만, 그 편지가 베로나로 날아들 때 이미 외젠은 거기 없었습니다.  그는 아디제 강을 다시 건너 요한 대공의 뒤를 추격 중이었습니다.  이미 병력의 우열이 뒤집힌데다, 바이에른 전선에서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통해 카알 대공의 본진을 완전히 패주시켰다는 소식이 요한 대공에게도 날아든 것입니다.  요한 대공은 전속력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 나폴레옹을 막는데 일조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젠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요한 대공의 군대를 어떻게든 붙잡아 격파해야 나폴레옹을 돕는 길이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볼 때, 외젠이나 요한이나 이 북부 이탈리아는 어떻게 되든 중요치 않았고 어느 쪽이 최대한의 병력을 이끌고 더 빨리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에게 합류하느냐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외젠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나, 여전히 이탈리아군이 제 몫을 다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사칠레 전투에서 외젠과 요한이 주거니받거니하며 보여준 삽질을 볼 때, 아무리 상황이 유리해도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다면 설령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애꿎은 병사들만 희생될 뿐 전쟁의 승패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에 만들어진, 낡은 공화국 시절의 군복을 입은 40대 초반의 장군 하나가 외젠의 진영에 합류합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시절부터 종군했던 나이든 고참 병사들은 그 군복을 보고 크게 반가와 했으나,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 했던 젊은 장교들은 그의 군복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이 장군은 누구였을까요 ?



Source :  With Napoleon's Guns by Colonel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Eug%C3%A8ne_de_Beauharnai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acile

https://en.wikipedia.org/wiki/Ign%C3%A1c_Gyulay

https://en.wikipedia.org/wiki/Iron_Crown_of_Lombardy

https://en.wikipedia.org/wiki/Piave_(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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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2017.05.14 23:24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분명히 나폴레옹 같은 괴물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전투가 끝난 다음날부터 무려 36시간 동안 아무런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나선 그에게는 어지간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패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인 5월 23일 아침부터 나폴레옹은 이미 이 처참한 패배를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된 선전 도구인 육군 회보(Le 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실릴 전투 결과에 대해, '공격해 온 오스트리아군은 원래 위치로 되돌아 가야 했고, 프랑스군이 전장의 지배자로 남았다'라고 뻔뻔스럽게 구술했습니다.  100%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진실과는 거리가 꽤 먼 선언문이었지요.


휘하 장군들은 아예 비엔나로 철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극심한 피해를 입은 군단들을 재정비하고 패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단칼에 이를 거부했습니다.  일단 철수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이 비엔나로 철수하면 카알 대공이 병력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를 것이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비엔나에 집착하지 않고 아예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길 것을 두려워 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프랑스군은 둑이 무너지듯 프랑스-독일의 경계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까지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도 오스트리아군에서는 그렇게 프랑스군의 후방을 끊는 작전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보헤미아(체코)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점 때문에 기각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무슨 생각을 하건 나폴레옹은 철수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답게 식량과 탄약 등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어 프랑스군은 여유있게 재정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빈과 린츠의 위치입니다.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기 전에 카알 대공이 프랑스군 후방을 끊을 목적으로 이미 린츠 점령 작전을 시도한 바 있었지요.  물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빛나는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군은 당연히 큰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행복과 기쁨만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카알 대공의 참모들은 이런 승리를 거두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투 이전과 동일한 상태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알 대공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대해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던 그는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깔끔하지 않은 승리를 분석해볼 수록 프랑스군과 또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오스트리아군의 수적 우세가 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격멸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카알 대공은 이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나폴레옹과의 평화 협상을 벌이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견해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변변한 동맹도 없이 감히 혼자서 나폴레옹에게 도전한 것은 혼자 힘으로도 나폴레옹을 때려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일단 자신이 불을 당기기만 하면 프랑스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바이에른과 작센, 뷔르템베르크 및 프로이센의 독일 민족이 대거 봉기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로는 굳은 동맹인 러시아도 내심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견제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일단 나폴레옹이 첫 패배를 겪게 된다면 반-나폴레옹 연합전선에 러시아도 뛰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요.  당시 오스트리아의 변변한 동맹국이라고는 저 멀리 떨어진 섬나라 영국 하나였는데, 영국은 네덜란드나 북부 독일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켜 프랑스의 뒤통수를 때려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는 모두 한낱 꿈에 불과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기대대로 반-프랑스의 깃발 하에 봉기한 것은 저 티롤 산골짜기 촌놈들 뿐이었습니다.  이 산골짜기 촌사람들은 놀랍게도 잘 싸워 르페브르의 제7 군단을 묶어두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주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바이에른이나 작센은 여전히 나폴레옹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그의 깃발 아래 오스트리아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던 프로이센은 드디어 찾아온 복수 기회 앞에서 움찔움찔 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원래부터 좀 덜 떨어진 편이었던 프로이센 왕 빌헬름 3세는 여전히 기가 죽어 있었지만, 그의 각료들은 모두 이런 기회를 그대로 흘려보내서는 안되며 당장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심지어 프로이센이 거부하기 힘든 제안까지 던졌습니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편에서 참전해준다면 과거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폴란드 바르샤바 공국을 프로이센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빌헬름 3세는 오스트리아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힘이 아직 건재한데다, 설령 오스트리아가 이긴다고 해도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가 기세등등해질텐데, 그건 독일권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라이벌 관계에 있던 프로이센이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상륙이요 ?  언제나 그렇지만 영국은 세치 혓바닥과 기니 금화만 뿌려댈 뿐, 자신들이 피를 흘릴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나마 이번 전쟁에서는 그 알량한 기니 금화조차 충분히 뿌리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간곡히 요청한 추가적 전쟁 보조금 지급조차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라인 연방의 지도입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새로 만들어진 프랑스의 위성국가 베스트팔렌 왕국입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계 주민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의 기대가 완전히 헛된 망상만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학수고대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듯 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으로부터 빼앗은 땅과 이런저런 독일계 소공국들을 모아 만든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에서는 그 허수아비 왕이자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Jerome)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베스트팔렌에서도 병력이 대거 징집되어 나폴레옹군의 후방 지원을 위해 파병되자, 무력의 공백 상황에서 반-나폴레옹 정서가 심각하게 무르익었습니다.  이런 위태위태한 상황에 불을 지른 것은 뜻 밖에도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 정규 경기병 연대였습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소위로 참전했던 쉴(Ferdinand von Schill) 소령은 당시 베를린에서 경기병 연대 하나의 지휘관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쉴 소령은 제4차 동맹전쟁의 패배 이후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나 그나이제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 등의 개혁론자들과 함께 프로이센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혁 운동이 빌헬름 3세에 의해 불법화되자, 아예 애국적 무장 봉기에 나선 것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5월 초 부대 기동 훈련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경기병 연대를 통째로 끌고 베스트팔렌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소규모 베스트팔렌 수비군을 간단히 제압하고 오히려 현지 주민들로부터 자원병을 추가 모집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보복을 두려워한 빌헬름 3세가 기대와는 달리 쉴 소령과 그의 경기병 연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자 기가 죽었고, 프랑스에 충성하는 네덜란드군과 덴마크군이 쳐들어오자 속절없이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쉴 소령의 반란군은 5월 말 결국 항구 도시인 스트랄순트(Stralsund)에서 패배했고, 쉴 소령도 전사해버렸습니다.   




(그가 전사한 스트랄순트에 건립되어 있는 쉴 소령의 동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희망은 뜻하지 않은 패배에 나폴레옹이 시무룩해진 이 순간에 재빨리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청하는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판단했습니다.  이건 아마 옳은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카알 대공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체면을 완전히 구긴 상태에서 누군가와 화평을 맺을 그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화평할 생각이 전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평을 원하지 않는 중요 인사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카알 대공의 형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 프란츠 1세였습니다.  


(이건 23년 후인 1832년 그려진 프란츠 1세의 모습입니다.  그는 시민 계급의 혁명으로 끓어오르던 19세기 초 유럽에서 개혁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반동 군주로 꼽힙니다.)


황제 프란츠 1세에게 있어 카알 대공은 밥만 축내는 여러 동생들 중 믿을 만한 능력을 갖춘 유일한 형제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의 인기를 갉아먹는 잠재적 경쟁자였습니다.  일찌기 조카 프란츠 1세의 교육을 맡았던 전임 황제 요제프 2세(Joseph II)는 어린 프란츠 1세에 대해 '자기 한몸 보존이 무엇보다 소중한, 전형적인 마마 보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본성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지, 프란츠 1세에게 있어 나폴레옹 못지 않게 견제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그는 카알 대공을 오스트리아 전군의 원수(generalissimus)로 임명해놓고도, 카알 대공을 젖히고 그 참모장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내리는 등 카알 대공의 군내 입지를 끊임없이 흔들었습니다.  


프란츠 1세의 입장은 단순 명료했습니다.  나폴레옹과 화평할 생각을 하지말고 싸워 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다 거기서 죽만 쑤던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가 거기서 물러나 카알 대공과 합류하고, 또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도 돌아오면,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에게 맞설 충분한 병력을 갖추게 되는데 왜 화평을 하냐는 것이었지요.  게다가 프로이센에게 바르샤바 공국을 양보하겠다는 등의 굉장한 제안까지 해놓았으므로, 결국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것이 프란츠 1세의 여전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카알 대공의 다소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매파 장군들은 카알 대공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프란츠 1세의 그런 강경한 입장에 적극 호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가뜩이나 비관적이었던 카알 대공의 기분을 오히려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유일하게 제 정신 박힌 사람이었던 그는 오스트리아 궁정과 군 수뇌부를 휩쓸고 있던 과도한 자아도취와 근거없는 자신감에 자신까지 휩쓸린다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그람 전투를 앞두고 있던 6월 말, 그의 삼촌인 테쉔(Teschen) 공작 알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쓸 정도로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전투를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저는 프랑스군에게 크게 한방 먹여줄 생각입니다.  그러나 왕조를 위태롭게 할 만한 모험은 전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최소화할 생각입니다."


원래 싸움은 기 싸움이 절반이라고 하는데,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의 2차전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카알이 절반은 지고 들어가는 경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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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5.10 20:54

전에 EBS에서 해주는 영화를 봤는데, 독특하게도 18세기 덴마크 왕실을 배경을 한 시대극이었습니다.  제목은 로열 어페어 (A Royal Affair. 덴마크 어로는 En kongelig affære)   그래서 왕실 치정극인가 싶었지요.  주인공은 007 카지노 로열에서 악당으로 나왔던 메즈 미켈슨이라고 덴마크 사람이더군요.   알고보니까 이 영화 자체가 덴마크 영화였습니다.   왕비, 즉 여주인공은 제이슨 본 최종편에서 젊고 똑똑한 CIA 사이버전 전문가로 나왔던 알리시아 비칸더(Alicia Vikander)였습니다.  

이 영화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가감없이 그대로 따라 갑니다.  영국의 공주이자, 나중에 나폴레옹 전쟁을 치루어낸 조지 3세의 여동생인 캐롤라인 마틸다 (Caroline Matilda) 가 15세의 나이에 덴마크로 시집을 가서 크리스티안 7세 (Christian VII )의 여왕이 됩니다.  당시 크리스티안 7세도 결혼하던 1766년 1월에야 즉위를 한, 17살의 미성년 왕이었지요.  그런데 이 크리스티안 7세는 정신병이 좀 있어서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와이프인 캐롤라인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곤 했지요.  




(이 양반이 크리스티안 7세...  저는 이 장면은 영화에서 못 봤습니다만, 이렇게 보니까 잘 생겼는데요 ?)



알고 보면 크리스티안 7세와 캐롤라인은 서로 사촌지간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의 어머니인 루이즈는 캐롤라인의 이모였거든요.  당시 덴마크 뿐만이 아니라 영국 왕 조지 3세 본인도 정신병을 앓았는데, 이런 병력은 거듭되는 근친혼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긴 합니다.  아무튼 어린 캐롤라인은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 사정에 무척 상심이 컸고 인생의 낙도 없었습니다.




(오른쪽에 서있는 여자가 영국 공주 시절의 캐롤라인 공주입니다.  지긋지긋한 외모 지상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여쭙습니다만... 누가 더 예쁜가요 ?  암만 봐도 왼쪽에 앉은 동생 루이자 공주가 훨씬 더 미인인데요 ?  불행히도 병약했던 루이자 공주는 불과 15세의 나이로 병사했습니다.)



이런 덴마크 왕실에 프로이센 출신의 의사 하나가 들어옵니다.  크리스티안 7세가 외국을 순방할 때 그를 모실 주치의를 채용했다가 마음에 들었는지 1769년 1월에 귀국할 때도 데려온 것이지요.  이 의사의 이름은 요한 스트루엔제 (Johann Friedrich Struensee), 왕비보다 14살 연상인 32세의 독신남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의사라는 직업은 글자 그대로 기술직종으로서, 귀족들에게는 하인 정도에 해당하는 위치였습니다.  이 양반은 지식을 쌓은 시민층답게, 당시 유럽 시민 사회에서 떠오르던 계몽사상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스트루엔자와 캐롤라인 왕비의 건전했던 한때)


도도한 영국 공주이자 쓸쓸한 덴마크 왕비였던 캐롤라인은 바보 남편이 총애하던 이 무뚝뚝한 독일인 의사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트루엔제는 크리스티안에게 왕비를 저렇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충언하는 등 국왕과 왕비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노력했고, 귀족들이 장악한 왕실에서 외로운 생활에 지친 왕비도 조금씩 이 총명하고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외국인 의사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둘은 1770년 봄 즈음에는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가 됩니다.




(실제 스트루엔제의 초상화입니다.  매즈 미켈슨도 미남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양반에 비하면 매력남.)



캐롤라인 왕비와 스트루엔제는 낙후된 덴마크 사회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화 중반에 이런 장면이 나오지요.  왕비와 스트루엔제가 아직 연인으로 발전되기 전에, 시골길을 따라 말을 달리다가 울타리에 묶인 채 참혹하게 고문받다 죽은 어떤 농부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스트루엔제는 놀라는 왕비에게 덴마크의 법규상 지주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든지 불경죄를 저지른 농노를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다고 말해주지요.





(불안한 삼각관계...  국왕은 별 애정도 없는 왕비보다는 스트루엔제를 훨씬 더 총애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왕비는 스트루엔제에게 '네가 국왕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을 이용하라'고 조언하지요.  실제로 스트루엔제는 국왕 크리스티안에게 '전하가 훌륭한 업적을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라며 이런저런 사소한 개혁 조치를 권고하지요.  당시 덴마크의 실권은 귀족들의 연합체인 국무회의에 있었고, 왔다갔다 하는 정신병으로 인해 철없는 아이 또는 저능아 취급을 받던 국왕은 회의석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은 스트루엔제에게 등을 떠밀려 떨리는 목소리로 '귀족들이 비용을 부담하여 코펜하겐 거리의 인분 등 오물을 청소하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자' 라고 주장을 하고, 귀족들은 '저 병신이 왕 노릇하고 싶은 모양이다' 라고 코웃음을 치며 그 법안을 통과시켜 줍니다.




(영화 내내 크리스티안 7세는 미치광이보다는 주로 약간 천진난만한 저능아스럽게 나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국왕과 스트루엔제는 점점 더 개혁적인 법안들을 하나씩 둘씩 통과시킵니다.  처음에는 멍청이 왕의 장난 정도로 여겼던 귀족들은 이런 법안들이 점점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갉아 먹자, 그 뒤에 스트루엔제가 있음을 마침내 파악하고, 외국인인 그를 원로 회의실에서 내치려 합니다.  하지만 이때 국왕이 용기를 내어 그를 제지하고 국무회의를 해산시킨 뒤, 스트루엔제에게 사실상 권력을 맡겨 버립니다.  사실 제대로 된 정권 이양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요.  이것이 1770년 9월 15일의 일이었고, 이때부터 약 16개월 동안 덴마크 역사상 "스트루엔제의 시대"라고 불리는 기간이 시작됩니다.





(이제 그의 독무대가 시작된다)



스트루엔제는 제대로 된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이 장악한 국무회나 각 부서 장관직을 빼앗아야 한다고 판단하고는 이들 모두를 해직해버립니다.  그리고는 온갖 개혁 법안들을 공표하기 시작합니다.  권력을 잃기까지 약 2년 동안 그가 만들어 공표한 법안은 무려 1069개로서, 하루에 3개 꼴이었습니다.   법안 내용은 사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가령 고문의 금지, 강제 노역제의 폐지, 언론 검열 폐지, 공직 및 세제에 있어서 귀족 특권의 폐지,  노예제의 폐지, 뇌물의 금지 및 형사 처벌, 농부들에게의 농토 할양, 곡물가 안정을 위한 국가 곡물 창고의 도입 등등이었지요.  이런 조치들은 유럽 사회 전역의 지식인들로부터 찬사를 이끌어 냈습니다.  스트루엔제와 왕비가 국왕에게 올라오는 이런저런 서류들을 처리하다가 그 유명한 볼테르로부터 덴마크의 선진 정치에 대해 '북방의 태양'이라며 찬사하는 편지를 받고는 서로 감격하여 말을 못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국왕에게 정치 참여를 독려하는 스트루엔제)



문제는 귀족들이었습니다.  이런 법안들은 간단히 말해서 귀족들의 부와 권력을 제한하고 빼앗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었거든요.  당시 귀족들에게는 (당시에는 아직 그런 단어조차 없었겠습니다만) 완전 빨갱이 수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반격을 준비합니다.  이미 스트루엔제와 왕비의 스캔달은 궁정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거든요.  왕비가 외국에서 들어온 독일 의사 나부랭이와 붙어먹는다 ?  이건 독일에 대한 국민 감정이 나쁘던 덴마크 국민들에게 아주 잘 먹히는 재료였습니다.  영화 속에는 이렇게 반격 준비를 하던 귀족 하나가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역설적이게도, 스트루엔제를 공격할 아주 좋은 무기를 스트루엔제 본인이 우리들에게 쥐여주었습니다.  바로 검열의 폐지입니다."




(쉴드를 쳐주려고 해도, 뭐 불륜은 불륜이쟎아요 ?)



귀족들은 사람을 풀어 스트루엔제와 왕비의 스캔달을 외설스럽고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비아냥거리는 출판물과 인형극의 형태로 민간에 퍼뜨립니다.  또한 스트루엔제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공격하며, '어디서 굴러먹던 독일놈이 기어들어와 아름다운 덴마크의 관습법을 다 훼손하고 있다'며 덴마크의 국민 감정에 호소합니다.   스트루엔제와 그의 동지들은 검열을 다시 부활시킬 수도 없고 해서 속수무책으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어쨌거나 스트루엔제와 왕비의 스캔달은 사실로서, 왕비가 낳은 딸인 아우구스타 (Louise Augusta) 공주는 스트루엔자의 딸임을 모두가, 심지어 국왕 크리스티안까지도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또 역사적으로도 스트루엔제의 개혁은 무척 어설픈 면이 꽤 많았습니다.  가령 스트루엔제 본인 자신도 덴마크 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그가 귀족들을 내쫓고 임명한 자신의 심복들도 덴마크 현지 사정은 물론, 자신들이 수립해 갈 계몽주의 사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이때 역사적으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영화 속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국왕이 보여준 갈등 연기가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처음에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스트루엔제가 (비록 별 관심은 없었지만) 자신의 왕비와 놀아났다는 소문에 분노한 왕은 소란을 피우다가 스트루엔제 본인에게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사실 여부를 묻는데,  스트루엔제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크리스티안 국왕도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의심은 의심을 낳아, 궁정 식솔들이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광기가 도져 '여기 이 프로이센 왕 (스트루엔제를 지칭)이 공주의 아빠이다' 라고 소리를 지르는 등 추태를 부리지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이렇게 미쳐 날뛰는 크리스티안을 스트루엔제가 끌어앉고 '내가 실은 거짓말을 했다, 내 딸이 맞다' 라고 고백하자 크리스티안은 반쯤 흐느끼며 '그냥 우리 이렇게 지내자' 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때 국왕이 보여준 모습은 병신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애절한 면이 있는 것이, 아주 좋은 연기였다고 생각해요.


스트루엔제가 벌였던 여러가지 사회 사업, 가령 고아원의 설립이나 빈민 구제 등은 당연히 많은 돈을 필요로 했는데, 그는 귀족들에게 이런 비용을 부담시키다가 결국에는 '어차피 전쟁도 없는데'라며 상비군을 축소하면서까지 예산을 확보합니다.  이런 조치들은 사실 그의 빈약한 정권을 지지해줄 모든 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습니다.  귀족파였던 태왕후 (크리스티안의 어머니)는 이런 점을 이용해, 왕실 경비대장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여 '반 스트루엔제' 폭동을 궁 내부로까지 끌어들이며 스트루엔제를 압박했습니다. 





(박사모 애국지사들이 몰려와서 외국 불륜남은 물러가라고 시위하는데, 왕궁 경비병은 대장의 지시로 문을 열어주고...)



스트루엔제가 덴마크에 처음 왔을 때 그와 매우 친했던 귀족 하나가 이제 정권을 손에 쥔 스트루엔제에게 자신의 빚을 변제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를 스트루엔제가 거절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는데, 귀족들은 그를 부추겨 스트루엔제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누명을 씌우는데 성공합니다.  심약한 국왕 크리스티안은 한밤중에 자신의 침실로 쳐들어와 스트루엔제의 체포 명령서에 서명하라는 귀족들에게 끝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귀족들의 호통 속에 억지로 그의 체포 명령서에 서명을 하게 되지요.  그는 결국 다시 국무회의에서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거기 흑인 꼬마 시종하고나 노시오' 라는 조롱을 귀족들로부터 듣는 신세가 됩니다.


스트루엔제와 그의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립니다.  왕비 캐롤라이나도 공범으로 함께 체포되어 외딴 곳으로 유배됩니다.  스트루엔제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귀족 하나는 스트루엔제가 갇힌 감방에 직접 들어와  스트루엔제가 고문 당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그에게 '이젠 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고문이 합법화 되었다' 며 비아냥거리지요. 


오랫동안 고문에 시달린 스트루엔제가 뻗어있는 감방에 성직자 한명이 들어서자 '또 고문하러 왔구나' 라고 생각한 스트루엔제가 겁에 질려 비굴하게 감방 구석에 웅크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연기도 참 좋았어요.  스트루엔제를 안중근 같은 영웅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육체적 고통에 굴복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했거든요.  스트루엔제의 아버지는 원래 목사였는데, 그의 아버지를 잘 안다는 이 성직자는 '모든 것을 시인하면 목숨은 살려주기로 했다'며 그에게 '왕비와의 불륜 및 반역 모의'를 시인하라고 설득하고, 스트루엔제는 결국 그에 동의합니다.  





(매에는 장사가 없지요.  또 굶는데도 장사 없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스트루엔제는 깨끗한 셔츠 차림으로, 그의 개혁 동지였던 브란트와 함께 형장으로 가는 마차를 타고 갑니다.  함께 처형 직전에 사면 받기로 되어 있던 브란트는 '대체 왜 이렇게 형 집행 직전에야 사면을 해주는 것인지' 라며 투덜거리고 스트루엔제는 '그것이 덴마크의 전통이라는군' 이라고 설명하지요.  같은 시각, 크리스티안도 귀족들과 히히덕거리며 '내가 마지막 순간에 그를 사면해주면 스트루엔제가 무척 놀라면서 기뻐하겠지 ?' 라며 즐거워 합니다.   하지만 같은 마차를 타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라던 그 성직자가 십자가를 매만지며 안 좋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스트루엔제는 '처형 직전 사면'이라는 것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챕니다.  그러나 브란트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국왕의 명령은 안 통하는 세상이었거든요.




(나는 너희들 편이다.... 나는 너희들 편이다 !)



먼저 가벼운 마음으로 마차 밖으로 나가 높이 쌓아올린 단두대 (프랑스 식 길로틴이 아니라, 집행인이 큰 도끼를 든 구식 단두대)로 올라갔던 브란트가 먼저 처형된 후, 스트루엔제도 마차 밖으로 끌려나갑니다.  그가 나가니 단두대 주변을 둘러싼 덴마크 농민들이 그를 향해 돌과 채소 부스러기 등을 던지며 그를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공포와 수치심, 배신감 등에 몸을 떨며 스트루엔제가 군중들에게 '나는 너희들 편이다, 나는 너희들 편이다'라고 외쳐보지만, 군중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브란트의 피에 젖은 단두대 계단에서 떨리는 무릎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면서 군중들을 더 즐겁게 해준 뒤, 결국 목이 잘립니다.


영화는 왕비가 이제 10대 청소년이 된 그녀의 자녀인 프레데릭 왕자와 아우구스타 공주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는 것을 배경을 끝이 납니다.  영화 속에서는 프레데릭 왕자와 아우구스타 공주가 왕비를 찾아가는 듯이 표현했습니다만, 사실 영화 속에서도 끝내 이들이 왕비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캐롤라인 왕비는 스트루엔제가 처형된지 3년 후인 1775년 유배지에서 열병으로 사망했거든요.  그러니까 왕비가 그녀의 자녀들에게 쓴 편지는 역사적으로는 실제하지 않는 문서입니다.  아무튼 영화 속 그 편지에서, 왕비는 자신과 스트루엔제가 저지른 불륜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그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개혁을 위해 가졌던 열정과 꿈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자막을 통해서, 결국 프레데릭 왕자가 쿠데타로 귀족들로부터 정권을 되찾고, 스트루엔제와 캐롤라인 왕비가 만들었던 개혁 법안들을 다시 부활시켰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리면서 조용히 끝납니다.





(프레데릭 6세입니다.  스트루엔제가 그의 어린 시절 훈육을 맡았지요. 이 양반이 덴마크 최초로 백신을 맞은 아기였는데, 그것 역시 스트루엔제가 놓아준 것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프레데릭 왕자는 아직 16살이던 1784년, 아직 정신병으로 투병 중이던 크리스티안 7세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감행, 당시 섭정이던 그의 숙부와 할머니로 대표되는 귀족 연합체로부터 정권을 되찾고 섭정이 됩니다.  심약한 국왕이던 크리스티안 7세는 1808년에 5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때까지는 섭정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는 프레데릭 6세 국왕으로서 덴마크를 다스리지요.  그러니까 1801년의 제1차 코펜하겐 전투, 그리고 1807년 제2차 코펜하겐 전투 모두 이 왕자가 사실상의 국왕으로써 영국군과 싸웠던 것이지요.  그가 코펜하겐 성벽에서 넬슨의 영국 함대와 혈전을 벌이던 자국 해군을 응원하던 모습은 "중립도 힘이 있어야 한다 - 발트해의 포성" 편 http://blog.daum.net/nasica/6862508 을 참조하세요.




(아마 당시 왕세자의 눈에 들어왔을, 코펜하겐 시내에서 본 당시 전투 모습입니다.  포연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아도 아무튼 왕세자를 포함한 코펜하겐 시민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프레데릭 왕자는 스트루엔제조차 없애지 못했던 농노제를 1788년 마침내 폐지하는 등 진보사상으로 덴마크를 당대 제1의 계몽국가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의 폭풍 속에서, 전혀 의도치 않게 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측에 붙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원래 덴마크 영토이던 노르웨이를 상실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전후 덴마크 경제가 침체되자,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 계몽 사상에 영향에 받은 법안을 다시 폐지하는 등 반동적인 정치를 펴기도 했으나, 다시 경제가 살아나면서 다시 진보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등 진보와 보수를 오가는 통치를 했지요.


이 영화를 보고 주연 배우라든가 역사적 배경에 대해 관심이 생겨 이런저런 블로그들도 많이 살펴 보았는데, 많은 분들이 '그래서 진보든 보수든 도덕성부터 닦아야 한다' 라든가 '결국 이거 로맨스 영화인지 뭔지 헷갈린다' 라든가 식으로, 왕실의 불륜 비극 로맨스 영화 정도로 보시는 분들이 많은 것에 놀랐습니다.   그때 이 영화를 와이프하고 같이 봤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와이프가 한마디 하더군요.  "그러게 둘이서 불륜만 안했어도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지" 라고요.  그래서 저도 한마디 했지요.  "불륜 안 했으면 저 개혁 성공했을 것 같아 ?"  





(스트루엔제 : "우리 둘의 개인적인 사랑 불륜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개혁은 성공했었을까요 ?" )



스트루엔제의 개혁은 유부녀와 놀아나는 불륜남의 빨갱이 짓에 불과했고, 결국 귀족들이 잘 살아야 일반 서민들도 조금이나마 떨어지는 국물이라도 받아먹으며 연명할 수 있다는 당연한 명제를 거부하는 미치광이 짓이었을까요 ?  스트루엔제가 '난 너희들 편이다'라고 외쳤던 상대인 덴마크 국민들 대다수는 스트루엔제에게 등을 돌렸지요.  스트루엔제가 목이 잘리면서 그런 개혁은 후퇴하는 것이었을까요 ?  글쎄요.  원래 역사의 진보는 한번에 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진보 측 인사 몇몇의 과오가 진보의 행진을 막지도 못하고요.  전에 인용했던 에밀 졸라의 명언처럼,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즉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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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5.09 00:06

마크롱이 프랑스 최연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크롱이 소속된 정당의 이름은 En Mache ! (앙 마르슈) 라고 합니다.  이는 '행진 중인', '전진 앞으로' 정도의 뜻입니다.   마크롱이 이 정당 이름을 어디서 따온 것인지 조금 구글링 해보았는데, 특별히 무엇에서 따왔다는 정보는 못 찾았습니다.  저는 이 이름을 보고 생각나는 문장이 있었어요.  저는 불어 실력이 고딩 때 2년 정도 배운 게 전부인데, 그래도 인상 깊었거든요.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진실은 전진 중이며 누구도 그것을 멈출 수 없다.


이는 에밀 졸라(Émile Zola)가 그 유명한 드레퓌스(Dreyfus) 사건 당시 한 말입니다.  아래 글은 예전 국정원 댓글 사건과 그에 따른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 사건을 보고 울컥해서 썼던 글인데, 마크롱 대통령 당선을 기념하여 다시 올립니다.  우리나라 현상황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발생한 독일 스파이 사건이며, 이는 프랑스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제3 공화국은 혼란 속에서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870년 보불 전쟁에서의 뼈아픈 참패와 1871년 파리 코뮌 사건으로 인한 쓰라린 기억들, 그리고 특히 1894년 카르노 (Carnot) 대통령이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프랑스 국민들은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정권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새로 구성된 정부는 군부와 카톨릭 등 우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군부 세력은 아직 나폴레옹 3세 시절의 귀족적인 전통 속에서 살고 있었고, 평민들로 구성된 무능한 공화국 정부를 내심 무시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아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상류층 출신 군 장교들은 대부분 나폴레옹 1세가 1802년 창건한 생 시르 사관학교 (E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실력파 폴리테니크 사관학교 (École polytechnique) 출신들과의 경쟁으로 인해 신경이 거슬리던 상황이었습니다. 

 



(현대의 생-시르 사관학교.  샤를 드 골도 여기 출신입니다.)

 

시절이 어수선하고 살기가 팍팍하면 보통 사람들은 누구 탓할 사람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때 타겟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유태인이었습니다.  반유태주의자인 드루몽 (Édouard Drumont)이 1886년에 출판한 '유태인들의 프랑스'라는 책은 무려 15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는 공전의 대 히트를 기록했고, 주요 언론들도 모두 유태인들이 프랑스 사회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언론의 중심에는 드루몽이 이끄는 '자유 언론' (La Libre Parole) 이라는 신문이 있었습니다만, 그 외에도 많은 신문들이 이런 반유태주의에 공공연히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정부와 카톨릭 교회는 내심 부추기고 있었지요.  누군가 증오할 대상을 던져주면, 정부와 교회 등 사회 지도층에 대한 불만은 상대적으로 더 줄어들고, 또 국민들이 보수화되는 것을 촉진시키게 되었거든요.




 

(드루몽과 그의 신문입니다.  제목은 "반역자 유죄 선고를 받다!"  물론 여기서는 드레퓌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밑에 씌인 A BAS LES JUIFS는 Down with the Jews, 즉 유태인들을 타도하라 뭐 그런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 현재 저런 매체를 운영하는 저런 사람들 꽤 있습니다.)

 

그러던 1894년 9월 26일, 프랑스 첩보부를 위해 일하던 독일 대사관 내 청소부 하녀가 쓰레기 통에서 6조각으로 찢겨진 편지 한장을 프랑스 첩보부에 보내 옵니다.  그 내용은 프랑스 육군 참모 본부의 기밀 문서 목록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매우 유명해져서 보통 bordereau (보드로, "명세서")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군부를 긴장시킵니다.  참모 본부 안의 누군가가 프랑스 기밀 문서들을 독일에게 팔아넘기고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요.  그들은 즉각 간첩 색출에 나섭니다.  다만, 단서라고는 이 "명세서" 한 장 뿐이었는데, 워낙 상부의 간첩 색출에 대한 압박이 심했으므로, 이들은 되든대로 억측을 섞어가며 무리한 추정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그 결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라고 하는 포병 대위였습니다. 

 



 (이 문서가 그 유명한 '명세서' 즉 bodereau 입니다.  필기체라서 저는 거의 못 알아 보겠네요.)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용의자로 지목된 이유는 다소 어이가 없는데, 일단 기밀 문서 목록으로 보아 그 간첩은 아마도 포병 장교일 것이라고 판단이 내려졌고 (나중에 밝혀진 실제 범인 에스테라지 Esterhazy 소령은 보병 장교였습니다), 또 독일하고 친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원래 독일어 계통인데다 최근의 보불 전쟁의 패배로 인해 독일에 빼앗긴 지역인) 알사스 (Alsace) 출신일 것이다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헝가리 출신이었지요) 라는 조건에 들어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최근 참모 본부에 배속된 유일한 유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필체는 그 '명세서'의 필체와는 다소 달랐습니다. 





(이 양반이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입니다.  이 양반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증거가 필요했던 참모부는 드레퓌스를 체포하여 자백을 강요했지만 드레퓌스가 결백을 주장하자, 그의 자택에도 압수 수색을 하면서 그 부인에게도 '남편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라며 협박했습니다.  결국 별의별 수단을 다 썼으나 증거를 찾을 수 없자,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가 모든 증거를 다 없애버렸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다' 라는 희한한 이론과 함께, '드레퓌스의 필체가 명세서의 필체와 다소 다른 것은 교활한 드레퓌스가 일부러 방첩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필체를 쓴 것' 이라는 설명과 함께 비공개 재판을 실시했습니다.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당연히 공개 재판을 요구했으나, 군부는 이 재판이 공개 재판으로 열릴 경우 '독일과 전쟁이 벌어져 국가의 안보가 위태롭게 된다'는 명분으로 끝내 비공개 재판을 실시했습니다.  사실 재판이 비공개일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군부가 내놓은 증거물 파일이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은 군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군부는 '프랑스의 안보가 바로 이 재판에 달려있다.  프랑스 군부를 믿지 않고 저 유태인 간첩의 변명을 믿겠다는 말인가 ?' 라는 호소로 배심원들을 압박했습니다.  이 압박을 좀더 강하게 하기 위해, 군부는 원래 비밀리에 처리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떠들던 드레퓌스의 체포와 재판에 대해 슬쩍 '자유 언론' (La Libre Parole)에 정보를 흘립니다.  당연히 자유 언론의 주필인 반유태주의자 드루몽은 온갖 나팔을 불어대며 이 사건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했습니다. 

 

"거 봐라, 유태인들은 뒤통수를 치는 놈들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  이런 위험천만한 작자들이 프랑스 정부와 군대 요직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  이번 기회에 이들을 몰아내자 !"

 




(1894년의 1차 재판입니다.  물론 군법회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법원의 배심원들이 워낙 빈약한 증거 때문에 유죄 선고에 대해 망설이자, 프랑스 군부에서는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이 "D"라는 이니셜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장교를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하지만 그 증거물을 보자는 변호인단의 요구는 '국가 보안상의 이유'로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프랑스 령 적도 기아나(Guyana)의 '악마의 섬'이라는 곳으로 이송되고 맙니다.  항소를 제기했지만 재판부에 의해 '이유없다'며 기각되고 말았지요.  그리고 프랑스 대중은 '유태인 = 뒤통수'라는 것만을 기억했고 드레퓌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차츰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강등식은 나폴레옹이 졸업한 파리의 Ecole Militaire에서 벌어졌습니다.  생도들이 도열한 가운데, 차렷자세로 선 그의 제복에서 금단추를 하나씩 거칠게 다 뜯어내고, 그의 계급장도 뜯어낸 뒤, 그의 칼을 빼앗아 부러뜨려 그 앞에 내동댕이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때 드레퓌스는 차렷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으나 분노와 수치로 부들부들 몸이 떨리는 것이 모두에게 명백히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레퓌스가 기아나로 끌려간지 1년이 훨씬 넘은 뒤인 1896년 3월, 또 다른 기밀 편지가 독일 대사관으로 가던 중에 프랑스 첩보부에게 입수됩니다.  그리고 그 필적이 드레퓌스를 유죄로 만든 그 '명세서'의 필적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당시 방첩 부대의 책임자였던 피카르 (Georges Picquart) 중령이 이 사건을 수사하던 중, 결국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은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피카르는 이 사실을 프랑스 참모본부장인 봐드프르 (Raoul Le Mouton de Boisdeffre) 장군에게 알렸습니다.  이제 드레퓌스는 누명을 벗고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





(잊혀질 뻔한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되살린 장본인이자 프랑스 육군의 양심인 피카르 중령입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온갖 곤경에 처합니다만, 결국 군에 복직되어 장군까지, 또 최종적으로 전쟁성 장관으로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봐드프르 장군 및 프랑스 군 수뇌부에게 '알고보니 우리가 2년전 실수를 저질렀네요'라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군 수뇌부에게 국가 안보보다는 자신들의 체면과 이익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피카르 중령은 방첩 부대에서 해직되어 일반 연대 지휘관으로 보직 변경되었습니다.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1년 뒤에야 '그냥 건강상의 이유로' 조용히 제대하도록 했습니다.  오히려 드레퓌스 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던 뒤 파티 (Armand du Paty de Clam) 소령이 그를 따로 만나 '반드시 너를 보호해줄테니 입다물고 얌전히 있으라'는 약속과 당부를 할 정도였습니다.




 

(드레퓌스를 체포한 장본인인 뒤 파티 소령)

 

상황은 드레퓌스에게 점점 더 안 좋게 돌아갔습니다.  그는 외딴 열대 섬에서 이미 고생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탈출이 염려된다며 밤에는 감방에서 쇠고랑을 차는 곤욕을 더 하게 되었습니다.  또 참모본부에서는 보수파 신문들에게 슬쩍슬쩍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흘렸고, 그런 신문들에서는 그런 사실들을 보도하며 '역시 믿지 못할 유태인놈들'을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절대 기밀이라던 그 '명세서'의 카피본까지 신문에 그대로 보도될 정도였고, 신문에서는 이것만 보더라도 (사실 뭐 볼 것이 없었는데) 드레퓌스가 명백한 반역자라고 떠들어댔습니다.

 

하지만 드레퓌스의 가족들과 그 변호사는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돕는 지식인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대의 대문호인 에밀 졸라를 1897년 말 경에 찾아갑니다.  에밀 졸라가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와 차별이 위대한 프랑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글을 썼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졸라조차도 처음에는 드레퓌스의 무죄에 대해 무척이나 의심했다고 합니다.  그도 접하는 것이 주로 그런 신문들과 여론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드레퓌스의 변호인들이 보여준 명백한 증거들에 의해 졸라도 결국 드레퓌스 구명 운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드디어 졸라 등장.  괜찮아, 졸라님이 다 해결해 주실거야, 그럴거야, 그럴거야.....?)

 

사실 졸라로서는 드레퓌스 구명 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없고, 또 여태까지 쌓아놓은 문학적 업적과 명성을 다 허물어뜨릴 수 있는 모험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워낙 애국주의와 반유태주의가 기세등등한 분위기였거든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까지 진실이 은폐되고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는 것을 보고 참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섰던 것입니다.  그는 피가로 (Le Figaro) 지를 통해 드레퓌스 구명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898년 1월, 드디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항소심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진실이 이길 수 있었을까요 ?  어림없는 소리였지요.  프랑스 군부는 이번 재판에 대해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무려 3명의 필적 전문가가 나와 '명세서'의 필적은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이 아니라고 증언을 할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에스테라지 소령에 대한 기소조차 필요없다는 의견이었으나, 오히려 그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서 그에 대한 군법 회의가 열렸고, 바로 그 다음날 만장일치로 그를 무죄 방면하는 쇼우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이 그렇게 얌전히 끝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대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피카르 중령에 대해 손을 봐주어야 했지요.   그는 '군 기밀 문서를 민간인에게 유출'시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몽 발레리앙 (Mont-Valérien) 군 교도소에 수감시켰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한 기밀 문서가 우익 신문에게 계속 유출된 것에 대한 수사나 추궁은 전혀 없었지요.





(나는 규탄한다 !)

 

에스타르지 소령이 무죄방면된 다음날인 1월 13일, 훗날 제1차 대전 때 호랑이로 불리게 되는 클레망소(Clemanceau)가 출판하던 오로르 (L'Aurore, 오로라) 지의 제1면에 졸라의 기고문이 실립니다.  엄청나게 큰 활자로 찍힌 제목은 바로 J'accuse !  원래 졸라는 '프랑스 대통령께 보내는 편지'라고 제목을 지으려 했으나, 클레망소가 그것을 좀더 자극적이고 함축적인 J'accuse !로 바꾸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에서 졸라는 강한 언사로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함과 명백한 증거들을 나열하고, 프랑스 정부가 이런 반유태주의에 대해 방관하고 있는 것을 규탄했습니다.  이 기사의 반향은 엄청났습니다.  에밀 졸라의 열정어린 문장을 보고 프랑스 인들의 양심이 살아났느냐고요 ?

 

천만에 콩떡이었습니다.  그동안 보수 언론과 종교계에 의해 철저히 세뇌된 반유태주의가 오히려 더 폭발했습니다.  파리와 프랑스령 알제리 등에서는 '이런 괘씸한 유태놈들과 그 추종자들(이하 종유세력)이 감히 위대한 프랑스를 모욕해 ?' 라며 폭동이 일어나 유태인들의 가게가 불에 타고 사람이 다쳤습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읽어보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라며 드레퓌스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 속도는 느리고 활동은 조용했습니다.  당장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었고, 특히 졸라에 의해 거짓말장이가 되어 버린 그 세 명의 필적 감정 전문가들이 따로 졸라를 고소했습니다.  불과 1달 정도 후에, 졸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법정 최고형인 1년 징역에 3천 프랑의 벌금형에 처해졌습니다.  졸라는 항소를 했고, 결국 항소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데, 졸라는 유죄 판결이 나기 직전에 비밀리에 영국 런던으로 도주했습니다. 





(재판장에서 나가는 졸라를 비난하며 달려드는 박사모 보수측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졸라의 도주는 보수층의 승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주요 언론에서는 '거봐라, 자기가 유죄라는 것을 아니까 야반도주한 거 아니겠냐' 라며 더욱 큰 소리로 졸라를 비난했지요.  특히 주데 (Ernest Judet)가 발행하는 "Le Petit Journal"이라는 신문에서는 졸라의 개인적인 내용, 즉 원래 이탈리아 계였던 그의 아버지가 1830년 대에 프랑스 외인부대의 건설 공사 관련하여 뇌물을 받았다가 결국 쫓겨났다는, 졸라조차도 모르고 있던 가정사까지 들춰내가며 졸라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비방에 열을 올렸습니다.  한마디로 '그런 아버지니까 저런 아들이 나왔지'라는 비아냥이었지요.  졸라는 많은 팬을 잃었고, 이전에 받았던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박탈당했으며, 또한 금전적으로도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의 도주에 대해 정부는 그의 재산을 압수하여 헐값에 공매에 붙이는 보복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출판된 졸라를 비난하는 그림입니다.  돼지 졸라가 프랑스 지도에 '국제적 똥'을 칠하고 있습니다.  좌우측 상단의 큰 글씨는 '혐오의 박물관' '돼지들의 왕'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진실은 승리하는 법입니다.  졸라는 1897년 11월에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즉 "진실은 행진하고 있고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는 없다"라고 쓴 바 있었고, 그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1898년 한해 거의 전 프랑스가 드레퓌스 반대파와 드레퓌스 옹호파로 나뉘어 토론과 논쟁, 심지어 결투 (권총으로 하는 진짜 결투)를 벌였고,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이 썼다는 'D' 이니셜 어쩌고 하는 편지를 위조했던 수사 담당자 앙리 중령 (Hubert-Joseph Henry)은 결국 '그 편지는 자기가 위조해낸 것'이라고 자백하고는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면도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par Emile Zola


 

이후로도 진실 규명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1899년 좀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지방인 렌느(Rennes)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다시 한번 드레퓌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때 에스테라지 소령은 이미 외국으로 도망친지 오래 뒤였지요.  하지만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유죄인 드레퓌스를 국민 화합을 위해 사면'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지요.  드레퓌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패배를 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단 유죄를 인정한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많은 진보파에서는 그가 그 사면을 거부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는 진보파 인사들은 매일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먹고 포근한 침대에서 자는 사람들이었으나, 당사자인 드레퓌스는 벌써 6년째 적도의 끔찍한 섬에서 쇠고랑을 차고 중노동을 하는 신세였습니다.  더 이상의 육체적 고통을 이기기 힘들었던 그는 그 사면을 받아들입니다.  그가 완전히 누명을 벗은 것은 1906년이나 되어서였습니다.  한편, 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1899년의 재심에서도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선언하는 프랑스 군사법원) 

 

당대 유럽 제일의 문호이자 대단히 유명한 인사였던 졸라는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그는 1902년 9월 29일, 자택에서 자다가 어이없게도 일산화탄소 중독 (흔히 말하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이미 드레퓌스 사건으로 군부와 교회 등 우파로부터 많은 암살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검사 결과 그의 침실 굴뚝이 매우 부적절하게 막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 굴뚝을 그렇게 막았는지에 대해서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수십년 뒤, 어떤 지붕 공사기술자가 '정치적 이유로 졸라의 굴뚝을 내가 막았다'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진실이야 모르지요.  어쨌거나 우파는 그의 죽음에 대해 신이 났습니다.  가령 로슈로프 (Henri Rochefort)는 신문 기고를 통해 '드레퓌스가 진짜 간첩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졸라가 죄책감에 자살을 한 것'이라며 선전에 열을 올렸지요.





(물론 이 위대한 지성인의 죽음을 안타까와 하며 모인 조문객도 수천명에 달했습니다.  그림은 그의 장례식 모습입니다.)


아까 잠깐 언급한, 이탈리아 대사관 편지를 위조했다가 자살한 앙리 중령의 죽음은 우파에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  처음에는 드루몽 등 우파는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럼 정말 드레퓌스가 무죄냐' 라고 당혹해했으나, 곧 '자기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바쳐 조국의 안보를 지키려 했던 영웅'으로 포장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위조가 국가 안보를 위해 수행한 성스러운 작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의 유가족을 위해 우파에서는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펼쳤는데 무려 13만 프랑이 모금되었다고 합니다. 




(앙리 중령이 조작해서 법원에 증거물로 제출한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의 편지입니다.  조작이건 은폐건 모두 조국의 안보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라는 거지요.)

 

프랑스가 위대한 것은 1908년 6월 4일, 처음에는 몽마르트 묘지에 묻혔던 그의 시신을 조국을 빛낸 위인들을 모시는 장소인 팡테옹으로 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도 '뭐가 어찌 되었건 드레퓌스는 간첩이고 유태놈들은 뒤통수치는 놈들이다'라며 이를 갈던 우파들이 군부나 종교계에 많았으나, 결국 프랑스 대중의 합의된 의지는 '진실을 위해 노력하여 프랑스의 명예를 드높인 지성인'으로서 졸라를 기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수치입니다.  아마 드레퓌스가 그대로 기아나에서 죽어 잊혀졌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구린 구석이 드러나더라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프랑스 지성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졸라와 그의 동료들은 보여주었고, 비록 때늦은 감은 있으나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팡테옹에 이장함으로써 그에 대한 예의를 표했습니다.   제가 프랑스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Zola au Pantheon !   졸라를 팡테옹으로 !)

 

팡테옹을 나서면서 중앙의 군상 조각상을 유심히 보다보니, 국민공회 (La Convention Nationale)라는 글씨 위에 흐린 색으로 다른 글자도 씌여 있더군요.

 

"VIVRE LIBRE OU MOURIR"





(다시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이에요.)

 

제가 비록 고딩 때 잠깐 배우다 만 불어지만 금방 알아보겠더군요.  "Live free or die", 그러니까 "자유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글귀였습니다.  에밀 졸라의 무덤을 보고 나오면서 그 글귀를 보니까 마음이 찡하더군요.   프랑스 인들은 이렇게 많은 투쟁과 희생,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200년에 걸쳐 민주주의를 이룩했는데, 우리는 미국에 의해 너무 쉽게 민주주의를 선물받아서 그 소중함을 잘 모르고, 또 그래서 민주주의의 뿌리가 얕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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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5.06 17:58

제가 직접 만들어본 최초의 원두커피는 회사 들어와서 본 종이필터로 거르게 되어 있는(drip brewing) 커피메이커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원두커피가 인스턴트 커피보다 훨씬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미국인들이 마시는 커피는 마치 숭늉처럼 묽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아메리카노를 마셔본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건 확실히 여태까지 마시던 커피와는 달랐습니다.  이걸 마셔보니 전에 마시던 드립 원두 커피의 맛이 형편없게 느껴졌습니다.  전에 존 그리셤의 법정 쓰릴러를 읽다가 변호사가 증인을 만나러 들린 싸구려 식당에서 'bad coffee'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맛이 어떤 맛인지 마치 알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그 이후로는 (아마 제가 배때지에 기름기가 껴서 그런지도 모르겠는데) 인스턴트 커피나 드립 원두 커피는 거의 마실 일이 없었습니다.  최근에 마셔본 덧치 커피는 또 다른 맛이더군요.





(바로 이런 커피메이커...  이런 전기 드립 커피메이커가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라고 합니다.  2000년대까지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많은 회사 사무실에서는 이런 것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차에 비해 커피는 볶고 빻고 가는 것도 성가신 일이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내리느냐 하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고 또 힘든 과정입니다.  제가 즐겨 읽는 나폴레옹 시대 영국 해군의 모험담인 Aubrey - Maturin 시리즈의 주인공 잭 오브리와 스티븐 머투어린은 커피를 매우 즐기는 캐릭터입니다.  이들이 커피를 볶거나 갈거나 마시는 장면은 제법 자주 나오는데 비해, 커피를 내리는(brew) 장면은 딱 한군데에 나옵니다.  볶은 커피 콩을 갈아서 고운 천 위에 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내리는 방식으로 나오더군요.  그러니 드립 원두 커피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커피 만드는 방법은 나라와 시대별로 매우 달라서,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1930년대까지만 해도 커피 콩 갈은 것을 직접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이 미국에서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인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강'(BIG TWO-HEARTED RIVER) 중에, 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주인공 닉이 캠핑에서 커피를 끓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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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은 큰 못을 하나 더 나무에 박고 물이 가득찬 양동이를 거기에 걸었다.  그는 커피 포트를 거기에 담가 절반 정도 물을 채우고 나무조각을 불판 아래의 불에 좀더 집어 넣은 뒤, 그 위에 커피 포트를 올려 놓았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커피를 만들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는 홉킨스와 커피 만드는 방법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것은 기억이 났지만, 결국 어느 쪽 방법을 택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커피가 끓어 오르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러자 비로소 그게 홉킨스의 방식이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는 한때 모든 면에 있어서 홉킨스와 논쟁을 벌이곤 했다.


(중략)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커피가 끓어올랐다.  뚜껑이 들리더니 커피와 커피찌끼가 포트 옆으로 흘러내렸다.  닉은 커피 포트를 불판에서 꺼내 들었다.  그건 홉킨스를 위한 승리였다.  그는 통조림 살구를 덜어먹던 컵에 설탕을 넣고는 커피를 좀 따른 뒤 식기를 기다렸다.  커피를 따르기엔 너무 뜨거워서 그는 커피 포트 손잡이를 쥐기 위해 모자를 써야 했다.  그는 커피가 포트 안에서 우려지기를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첫 잔은 아니었다.  그건 제대로 된 홉킨스 방식이어야 했고, 홉킨스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하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는 닉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진지한 사람이었다.  


(중략)


닉은 커피를 마셨다.  홉킨스 방식에 따른 커피였다.  맛을 보니 썼다.  닉은 웃었다.  그건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훌륭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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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묘사된 것처럼 간 커피 콩을 직접 물에 넣고 끓이는 방식을 카우보이 커피라고 하는데, 이는 주로 미국이나 중동에서 유행하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헤밍웨이 소설 속에서 결말이 나와 있듯이, 커피 콩을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은 맛이 쓸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커피 특유의 향을 담은 기름 성분은 섭씨 96도에서 커피 콩으로부터 추출되는데, 이건 물의 끓는 점에서 아슬아슬하게 낮은 온도입니다.  문제는 물이 끓는 점 100도에 이르게 되면 커피 콩에서는 그 향유 뿐만이 아니라 쓴 맛을 내는 산 성분까지 추출이 된다는 점이지요.  




(퍼콜레이터입니다.  저도 90년대 후반 회사 사무실에서 저런 거 썼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잭 오브리처럼 뜨거운 물을 간 커피 콩 위에 뿌리는 식의 커피를 즐겨 마셨나 봅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일손이 너무 많이 갔으므로, 퍼콜레이터(percolator, 여과식 커피 포트)라는 독특한 형태의 커피 포트가 만들어졌는데, 최초의 퍼콜레이터는 영국 군인이자 군인인 럼포드 백작(Count Rumford, Sir Benjamin Thompson)이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10년~1814년 사이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대적인 방식, 즉 커피 포트 가운데에 끓는 물을 뿜어 올리는 금속 관이 내장된 형태의 퍼콜레이터는 1819년 로랑(Laurens)이라는 파리 사람이 만들었고, 이 발명품은 여러 단계를 거쳐 1889년 미국에서 굿리치(Hanson Goodrich)라는 이름의 농부가 특허를 받았습니다.  이 퍼콜레이터는 나중에 전기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대용량화되었고, 1970년대까지 미국의 대형 식당 등에서는 그런 전기 퍼콜레이터를 이용해서 드립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간편한 종이 필터를 이용하는 가정용 전기 드립 커피 메이커가 도입되면서 퍼콜레이터의 인기가 급격히 내려갔다고 합니다.




(이 화면은 1970년에 General Foods에서 내놓은 Max-Pax 커피 카트리지의 TV 광고입니다.  Max-Pax는 도넛 모양의 필터 속에 그라운드 커피를 일정량 포장한 것으로서, 이걸 퍼콜레이터 안에 넣으면 커피가 만들어지는 형태의 제품입니다.  그라운드 커피 찌꺼기를 긁어낼 필요가 없으니 매우 편리했지요.  그러나 불과 6년 후인 1976년에 전기 드립 커피 메이커에 밀려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전체 광고 영상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E7m8JJ_7jw  )





(저희 집에서 소비하는 일리 캡슐 커피입니다.  플라스틱 캡슐이 지구를 더럽히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저 아름다운 알루미늄 깡통을 버릴 때마다 정말 아깝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일리(Illy) 커피 캡슐 머신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십니다.  편리하고 빠르고 게다가 맛도 아주 훌륭한데, 단지 제가 커피를 마실 때마다 낭비되는 이 플라스틱 캡슐 포장들을 보면 지구에게 미안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TV에서 방영되는 알 파치노 -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갱 영화 'Heat'를 보다보니, 평범한 형사 반장인 알 파치노의 작은 집 주방에도 캡슐 커피 머신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이 영화는 1995년 작인데, 이미 당시 미국에서는 캡슐 커피가 일반적이었나 봅니다.  최초의 캡슐 커피는 스위스 회사인 네슬레(Nestlé)에서 근무하던 스위스 엔지니어 에릭 파브르(Eric Favre)가 1976년에 최초로 발명하고 특허도 냈습니다.  그러나 흥행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가  약 10년 뒤에야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요.  





(남자의 영화, Heat)


캡슐 커피에서 만드는 커피는 한마디로 에스프레소(Espresso)입니다.  에스프레소는 끓는 물과 고압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기 때문에 고형분까지 콜로이드(colloid, 현탁액)의 형태로 일부 뽑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에스프레소 잔의 바닥에는 일부 찌꺼기가 남고 또 그 콜로이드가 크레마(crema)로 잔 위에 뜨게 되는 것이지요.  이 크레마는 오직 에스프레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크레마가 없는 커피는 왠지 맛없게 느껴지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이 크레마는 지방 성분 위주이다보니, 콜레스테롤 함유량이 높아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합니다.





(저 크레마는 에스프레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프레소는 커피를 뽑아내는데 필요한 고압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기구가 필요하므로, 그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입니다.  1884년에 모리온도(Angelo Moriondo)라는 이탈리아인이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에 대한 특허를 냈는데, 그 이후 20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는 1950년대에야 에스프레소의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고 하고, 미국에 본격적으로 에스프레소가 활성화된 것은 스타벅스 제2의 창업자인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가 1980년대 밀라노 출장 중에 에스프레소 바를 보고 미국 스타벅스 매장에 도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미국인들 입맛은 에스프레소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 물이나 우유를 탄 아메리카노나 라떼 같은 것이 많이 팔렸지요.


지금 세계는 이 캡슐 커피 또는 별다방 콩다방 등에서 파는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가 대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정작 전세계 통계치를 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커피의 형태는 바로... 인스턴트 커피입니다.  그것도 고급 커피에 계속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라운드 커피나 원두 형태로 판매되는 커피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말을 들으시면 '인도나 중국 등 아시아 신흥국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커피를 안 마시던 그쪽 나라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그렇게 되나 보다'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것도 사실이긴 한데, 우아한 유럽인들도 인스턴트 커피를 의외로 많이 마십니다.  특이한 것은 호주인데, 호주는 아시아보다 오히려 더 인스턴트 커피 비율이 더 큽니다.  유럽 내에서도 특이한 것은 또 영국입니다.  영국은 아시아 국가들처럼 인스턴트 커피를 절대적으로 더 많이 마십니다.  영국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즐겨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오랫동안 미군이 주둔했던 관계로, 그때 미군들이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에 익숙해졌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 못지 않게 미군이 오래 주둔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인스턴트 커피가 그렇게까지 유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설명에 쉽게 납득이 가진 않습니다.




(무섭게 성장하는 인스턴트 커피 시장입니다.  중국 및 인도의 성장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맞네요.)


정작 인스턴트 커피를 발명한 것은 프랑스인이었습니다.  흔히 일본계 미국인인 사토리 가토가 1901년 전미 박람회에서 발표한 것이 최초라고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1881년 알레(Alphonse Allais)라는 프랑스인이 이미 프랑스에서 특허를 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성공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인스턴트 커피도 유럽인 스위스에서 네스카페(Nescafé) 브랜드로 1938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미국의 인스턴트 커피 대명사인 맥스웰 하우스 인스턴트 커피(Maxwell House Instant Coffee)는 1945년에야 나왔는데, 이는 그 모기업인 제네럴 푸드(General Foods Corporation)가 1942년부터 미군에 납품하기 위한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맥스웰 하우스 인스턴트 커피의 TV 광고입니다.  바쁜 아침, 남편이 출근하기 전에 줄 커피가 마침 딱 떨어져 당황하는 주부의 모습이 핵심 포인트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토요일인가 일요일에, 월트 디즈니 만화 또는 영화가 했었습니다.  그날 나온 단막 TV용 영화는, 시골 깡촌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서 사는 어떤 꼬마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가난한 가족이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셔서, 결국 몸져 누우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가, 나름대로 다 컸다고 침대에 누운 할아버지에게 아침 식사를 차려 가져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토스트를 먹으려고 보니, 새카맣게 탄 거에요.  꼬마가 미안하다는 듯 조금 태웠다고 말합니다.  할아버지는 입맛을 다시더니 지금은 생각이 없다면서 그 토스트를 내려놓고, 커피만 마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꼬마가 또 미안하다는 듯이, '진짜 커피를 끓일 줄 몰라서 인스턴트 커피를 끓였다' 고 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그 커피를 조금 마셔 보고는 다시 내려놓으면서, 나중에 마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  그때 그 어린 나이에 제가 받은 충격은, 나름대로 컸습니다.  당시 제가 보던 모든 커피는 다 인스턴트 커피였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 시골의 가난한 할아버지조차도 '인스턴트 커피는 차라리 안마시고 만다'라고 하다니 !!! 




(세계 각 지역별 소비되는 커피 형태입니다.  진한 녹색이 인스턴트 커피입니다.)




(국가별로 신선원두를 더 소비하느냐 인스턴트 커피를 더 소비하느냐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언듯 보면 잘 사는 나라는 신선원두를, 못 사는 나라는 인스턴트 커피를 주로 소비하는 것 같지만, 영국과 호주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차를 많이 마시는 일본과 인도가 신선원두를 더 많이 선호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 이 나라들은 차를 하도 많이 마셔서 인스턴트 커피를 아예 마실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결국 원래 커피를 마시던 나라들은 신선 원두를 선호하는데 비해, 영국이나 호주, 그리고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처럼 차를 더 선호하던 나라들은 인스턴트 커피도 '뭐 나쁘지 않네'하며 잘 마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특이한 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보스턴 차 사건을 겪은 미국은 원래부터 커피를 더 선호하는 나라이긴 합니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모든 먹을 것을 빨리빨리 대충 간편하게 때우려는 미국인들이 정작 커피에 있어서만큼은 그 편하고 빠른 인스턴트 커피를 극혐한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현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는데, 누군가 따로 연구 좀 해줬으면 합니다.




(미국내 커피 브랜드 별 판매량입니다.  Keurig 커리그 라는 브랜드는 제게는 듣보잡인데 미국내 독보적인 1위네요.  어느 기계에서나 호환되는 K-cup이라는 캡슐 커피 시스템이 그 비결의 하나라고 합니다.  조지 클루니를 곁들인 네스프레소를 거느린 네스카페는 생각보다 너무 하위네요.)




원본 : 

https://en.wikipedia.org/wiki/Coffee_preparation

https://en.wikipedia.org/wiki/Instant_coffee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nk/wp/2014/07/14/almost-half-of-the-world-actually-prefers-instant-coffee/?utm_term=.11a5b8733d4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403544&cid=58364&categoryId=58364

https://en.wikipedia.org/wiki/Maxwell_House

https://en.wikipedia.org/wiki/Nespresso

https://en.wikipedia.org/wiki/Coffeemaker

https://en.wikipedia.org/wiki/Espresso

https://en.wikipedia.org/wiki/Espresso_machine

https://en.wikipedia.org/wiki/Starbu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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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