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2017.04.23 21:43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프랑스군에게나 오스트리아군에게나 전례없이 길고도 치열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양측은 거의 48시간 동안 잠도 거의 먹지도 못 자고 죽을 힘을 다해 행군하거나 싸웠지요.  5월 22일 오후 5시 이후 이 대규모 살륙전이 서서히 잦아든 것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양측의 상황은 이틀 전과 사실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아스페른에서는 마세나의 제4 군단이 힐러와 벨가르드의 2개 군단을 상대로 치열하게 저항하면서도 조금씩 후퇴하며, 결국 이때 즈음엔 아스페른이 오스트리아군의 손아귀로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세나의 군단은 여전히 맹렬하게 저항할 병력과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힐러와 벨가르드의 군단들은 이제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마세나의 후퇴는 무질서한 패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오스트리아군은 그 뒤를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마세나의 제4 군단 잔여 병력은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고 아스페른 외곽에서 로바우섬으로의 철수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대편의 에슬링은 여전히 프랑스군의 손에 있었습니다.  비록 에슬링 전체가 포격과 화재로 쑥대밭이 된 상태였지만, 프랑스군은 적어도 이 곳에서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랍의 근위대에게 축출된 이후, 두번 다시 에슬링을 상대로 반격을 꾀하지 못했습니다.  중앙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우월한 포병 전력을 내세워 프랑스군을 계속 두들겼고, 이는 란을 비롯한 많은 프랑스군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포병 화력은 장거리에서 적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주기에는 너무 약한 편이었고,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이틀전 전투 시작 이전과 비슷한 전선으로 되돌아온 셈이 되었지요.  그 많은 희생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


해가 지자, 카알 대공은 애써 손에 넣은 아스페른에 수비대를 남겨놓고는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먼 곳으로 후퇴시킨 것은 아니었고, 최소한 이 날 전투는 여기서 끝이 난 것 같으니, 프랑스 포병의 포격 사정권 밖으로 최소한 보병과 기병은 물러나게 한 것입니다.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을 볼 필요는 없고, 혹시 다음날 또 치열한 전투가 있을지도 모르니 병사들을 먹이고 재워 재충전시키는 것이 더 급하다고 본 것이지요.  오스트리아군은 마르쉐펠트의 벌판으로 철수한 뒤, 그 자리에 털썩 무너져 쓰러졌습니다.  정말 길고도 힘든 전투였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로바우섬으로 질서있는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도나우 강 좌안의 교두보에는 이미 든든한 토루를 쌓아 방어 진지를 구축해 두었는데, 이 곳에는 여전히 일부 병력을 남겨 지키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로바우 섬에서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강변까지 쫓아나와 밤새도록 대포알(roundshot)과 폭발탄(bomb, shell)을 쏘아댔다면, 로바우섬에 빽빽히 집결한 프랑스군은 꽤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조잡한 포병 화력으로는 프랑스군을 궤멸시키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밤새도록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라는 공포심을 프랑스군에게 안겨주어, 심리적으로는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전투를 위한 체력 보충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카알 대공은 그런 집요함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카알 대공의 그런 결정은 이틀 동안, 특히 5월 22일 당일날 카알 대공 자신이 기진맥진할 정도로 싸웠다는 점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오스트리아군 최고 지휘관인 왕족들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지휘관 타이틀만을 쥐고 더 멀리 후방 안전한 텐트에서 펜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카알 대공도 전에는 비슷했지만 이 날은 달랐습니다.  5월 22일 란이 직접 이끈 중앙 공격에 오스트리아군 전선이 돌파당할 위기에 처하자, 카알 대공은 패주하는 병사들을 가로 막고 돌려세우는 등, 자신의 몸을 적탄에 노출시켜가며 현장 지휘에 앞장 섰습니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군의 맹장 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카알 대공의 이런 헌신적인 지휘의 공이 컸습니다.  5월 22일의 지휘는 카알 대공의 인생 지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만큼 카알 대공 자신도 기진맥진할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부하들이 얼마나 지친 상태인지 공감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의 카알 대공입니다.  이 양반의 인생 전투라고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이틀 간의 전투 내내, 안전한 로바우 섬이나 강변 등 후방에서 지휘했습니다.  근위병 쿠아녜(Coignet)의 수기에 따르면, 5월 22일 아침 나폴레옹이 강변에서 전투 현장으로 이동하려 할 때, 그가 타고 있던 말이 적의 대포알에 맞아 쓰러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때 쿠아녜를 비롯한 근위대 병사들이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으신다면 우리 근위대는 한발짝도 전진하지 않겠다'라고 나폴레옹의 후퇴를 강요했기 때문에 나폴레옹도 어쩔 수 없이 후방으로 물러났다고는 합니다만... 글쎄요.  확실한 것은 1796년 북부 이탈리아 아르콜레(Arcole) 다리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며 싸우던 나폴레옹은 1809년 도나우 강변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1796년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입니다.  저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자기가 깃발을 들고 앞장 서서 다리 위로 돌격한 것처럼 저런 그림을 그리게 했지만, 정작 저 장면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그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그의 부하 오쥬로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병력을 물린 덕분에, 더 이상의 퇴로가 끊긴 로바우 섬의 프랑스군은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로바우 섬 여기저기에 가득찬 부상병들도 아무 치료를 못 받았고 후송도 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부상 없이 살아남은 병력들도 아무런 보급품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벽 1시가 되어 더 이상 소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폴레옹은 쪽배를 타고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남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건너갔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된 오스트리아 장교 1명을 함께 쪽배에 태워 후송시키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의문이 드는 것은 그의 절친 란조차도 깨끗한 물 한모금 없이 담요 한장 덮지 못하고 로바우 섬에 방치된 상태였는데, 적군 장교에게는 그런 인도주의적 아량을 베풀었다는 점이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패전 속에서도 '인도주의자 나폴레옹'이라는 허명을 얻을 선전거리를 만드려는 계략이 아닌가 의심도 듭니다만, 캄캄한 밤 수많은 병사들과 부상병들이 뒤엉킨 상황에서 부상을 입은 란을 금방 찾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로바우 섬에는 비축된 식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르보의 수기에 따르면 그날 밤 많은 병사들은 로바우 섬 여기저기에 많이 있던 죽은 군마의 고기를 잘라내어 흉갑 기병의 갑옷을 냄비 삼고 화약을 소금 삼아 삶아 먹었다고 합니다.  화약을 고기에 넣는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하고 건강에 해로울 것 같긴 합니다만, 어차피 당시 화약은 황과 숯, 그리고 질산칼륨으로 되어 있었고 질산칼륨 덕분에 화약은 짠 맛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 당시 머스켓 소총 장전 방식은 병사들의 입 안에 화약이 항상 조금씩 들어갈 수 밖에 없었으니 병사들은 화약으로 짠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1815년 대포알 구멍이 뚫린 프랑스 흉갑기병의 가슴받이 갑옷이라고 구글에 나옵니다만... 진짜 그런 물건치고는 너무 상태가 좋네요.)




(흑색화약은 75%의 초석과 15%의 숯, 그리고 10%의 유황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석은 영어로 saltpeter라고 하지요.  짠맛이 난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맛을 본 적은 없습니다.)


5월 23일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트들을 이용한 부상자들의 소개가 시작되었고, 다리를 절단한 란도 이때서야 도나우 남안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끊어진 다리는 하루 뒤인 24일에야 다시 연결되었지만, 많은 병사들은 결국 로바우 섬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제대로 공격하겠다고 결심하여 즉각 그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로바우 섬 이곳저곳에 보루와 포대를 설치하여 군사 요새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준비하는 동안에라도 카알 대공이 강변으로 대포들을 끌고 와 로바우 섬에서 무쇠와 화약의 화려한 불꽃놀이를 벌였다면 어땠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오스트리아군의 재정비가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은 도나우 강 좌안으로의 재도강 준비를 방해받지 않고 착실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는 분명히 오스트리아군의 승리였습니다.  왜 카알 대공이 이 값진 승리를 100% 활용하여 22일 밤 프랑스군을 더 몰아 붙이지 않았는지, 또 왜 23일~24일에 로바우 섬에 포격이라도 가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마치 승리가 간절하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볼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카알 대공의 후속 작전이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이틀간의 전투가 너무나 치열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피해가 너무 컸고 또 병사들이 너무나 지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어지간한 전투에서 패배한 측의 (포로를 제외한) 전상자 비율은 총병력 대비 10~15% 정도가 상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어차피 전쟁이라는 것은 왕가끼리의 영토와 세수를 위한 비즈니스의 연장일 뿐, 뭐 불구대천 원수지간끼리의 너죽고나살자식의 살육전은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싸우다 전세가 불리하면 물러나는 것이 상식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포로가 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총병력의 20% 넘는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 비율이 무려 23%였습니다.  사상자 비율로만 본다면 아마 참담한 완패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장교들과 병사들의 충격은 말할 나위 없이 컸을 것이고, 그런 참극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본 카알 대공도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이 더 공격하지 않은 것은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기 때문이라고 보시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전례없이 승패가 뚜렷하게 드러났던 아우스테를리츠,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사상자 비율입니다.  여기서 전상자 비율 계산할 때 포로는 제외했습니다.)


이긴 오스트리아군의 피해가 그 정도였는데, 진 프랑스군의 피해는 더욱 컸을 것입니다.  전투 후 전상자 숫자에 대해서, 오스트리아군은 비교적 상세히 포로를 합해 23,340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애매모호한 표현만 쓰며 정확한 전상자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만, 대개 오스트리아군과 비슷한 2만3천 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어떻게 보면 더 적은 병력을 동원했는데 적과 비슷한 수의 사상자를 냈으니, 프랑스군이 더 효율적으로 싸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자 비율 측면에서 보면 무려 35%에 달했습니다.  함께 전장으로 나간 전우 3명 중 1명이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가히 부대 단위로서의 기능을 잃을 정도의 대참패였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사상자 비율입니다.  이긴 측이나 진 측이나 예전에 비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측이나 패배한 측이나 왜 이렇게 큰 인명 피해가 났는가에 대해서 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사실 명백하고 단순합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승리를 가져온 나폴레옹 전술의 요체는 기동전이었습니다.  적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동력을 이용하여 병력의 이동과 집결을 자유자재로 펼쳤고, 그를 통해 전체적인 병력은 적보다 더 적을지라도, 정작 전투 현장에서는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던 것이 그 승리의 비결이었지요.  그러나 다리가 끊긴 도나우 강변에서는 그런 전술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더 적은 병력으로 무리하게 정면 중앙 돌파를 노렸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일방적인 전투가 아닌 치열한 살육전이 벌어졌고, 결국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흔히 전장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야말로 천재에 가까운 인간이었으나, 그도 인간인지라 나이가 들면서 명민함이 떨어지고, 또 관록이 쌓이고 신분이 높아지면서 교만함이 커진 것이 이런 참극을 불러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돋보인 전투는 4월에 벌어진 란츠후트 기동전이 마지막이었고, 이후 1812년 러시아 원정때까지 나폴레옹의 지휘는 평범한 물량전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1809년 4월 19일 이후에 벌어진 란츠후트 기동전입니다.  베르티에의 실수로 인해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나폴레옹은 도착하자마자 현란한 풋워크를 통해 단번에 뒤집고 카알 대공으로 하여금 대대적 후퇴를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전투가 1813년 이전까지는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보여준 거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양측의 피해가 커진 원인은 또 있습니다.  아마 1805년의 오스트리아군이라면 아스페른-에슬링 두번째 날, 란이 직접 지휘한 프랑스군 생-일레르 사단의 공격에 중앙을 돌파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평범한 정면 공격이라도 큰 전과를 거둘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잠깐 동안은 거의 돌파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순간까지 갔지만) 결국 버티어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이를 카알 대공의 개인적 용기와 리더쉽에 의한 승리라고 떠벌였지만, 수천 수만명의 병사들이 뒤엉키는 전장터에서 개인 하나가 발휘하는 용기는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이 버티어낸 것은 오스트리아 병사 개개인이 1805년 패전 이후 카알 대공의 대대적 군 개편에 의해 많이 바뀐 상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의 오스트리아군은 일부 상비군 외에는 필요할 때마다 징집되어 동원되는 군대였고, 따라서 당시 전장에서 요구되는 복잡한 대형 변환 등이나 개인 전술 등에 숙련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전국민 개병제에 의해 징집되는 상비군 형태였으므로 훨씬 더 많은 훈련을 받고 또 많은 전쟁으로 인해 숙련된 군대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군 개혁은 합스부르크 세습 영토(즉 헝가리나 세르비아 등을 제외한 독일계 영토)에서의 전면적 징집제 실시 및 군단 제도의 도입 등 프랑스군을 거의 그대로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비록 귀족들로 구성된 지휘부까지 갈아치우지는 못했으나, 병사들 하나하나의 자질 면이나 오스트리아군 전체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 있었습니다.  과거 오스트리아 사병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해 관계에 따라 북부 이탈리아나 발칸 반도, 네덜란드나 체코 등에서 프랑스군과 싸울 때, 대체 자기들이 왜 이런 이역 만리에서 싸우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폴레옹에 맞서 마르쉐펠트에 펼쳐진 병사들은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프랑스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4년 전 비엔나를 점령할 때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를 톡톡히 털어가는 것을 본 뒤인지라, 여기서 또 그런 피해와 굴욕을 입어서는 안된다는 동기 부여가 된 상태였지요.  나폴레옹은 이번 전투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이 더 이상 프랑스군의 밥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 자체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을 시작하며, 나폴레옹은 '내 군대가 이렇게 잘 정비되고 수가 많았던 적이 없다'라고 스스로 자랑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이 더 이상 예전의 오스트리아군이 아닌 것처럼 프랑스군도 더 이상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의 프랑스군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는 불로뉴(Boulogne) 병영에서 집중 훈련을 받은 영국 방면군을 모체로 하는 대부대로서, 그야말로 정예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들을 끊임없이 전장으로 끌고 다니며 소비하다, 결국 1807년 동프로이센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바 있었습니다.  따라서 1809년 도나우 강변에 도착한 이들은 더 이상 다년간의 전투로 다져진 고참병들이 아니라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신병들이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또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동원된 나폴레옹 휘하 부대 중에는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뷔르템베르크나 바이에른 등 많은 독일 소국들의 군대와 북부 이탈리아군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강제로 동원된 동맹군들이 과거의 그랑 다르메처럼 열정적으로 싸워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라이플 소총을 든 바이에른 유격병입니다.  이런 병사들은 특히 1812년 러시아로 떠나면서 대체 왜 자기가 머나먼 러시아에 가서 러시아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섞여, 결국 나폴레옹은 모두가 인정하는 나폴레옹 개인의 첫 패배가 이곳 아스페른-에슬링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적 신화를 자랑하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첫 패배 소식은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알고 보면 나폴레옹은 이미 이곳저곳에서 많이 패배한 바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아일라우 전투도 사실상 나폴레옹의 개인적 패배였고, 과거 1797년 만토바 구원 작전에서 알빈치(József Alvinczi von Borberek)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패배한 적도 있었고, 시리아 아크레에서의 패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패배들은 황제가 되기 전의 일이거나, 저 머나먼 동유럽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트럼프 못지 않게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는 조작질에 익숙한 선동가였으므로 아일라우 전투 같은 것은 '베니히센이 물러났으므로 나의 승리'라는 식으로 포장을 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수도 빈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진 이 대규모 전투의 승부는 도저히 숨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체면을 구긴 나폴레옹은 '최전선에서 먼저 물러간 것은 카알 대공이다, 그러므로 나의 승리다'라든가 '내가 진 것은 도나우 강에게 진 것이다, 오스트리아군 따위에게 진 것이 아니다' 라는 식의 발언을 하며 성질을 부렸습니다.  대체 이겼다는 것인지 졌다는 것인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 스스로도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에게 졌다'라고 한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합니다.  나폴레옹이 과거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것은 운을 바라고 도박을 벌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우수한 지휘관들이 통솔하는 잘 훈련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치밀한 지리 연구와 엄밀한 행군 속도 계산에 의해 병참과 병력 이동 계획을 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809년 5월 22일 아침, 그는 이미 여러번 끊어진 바 있는 로바우 섬 남단의 위태로운 부교가 언제든 또 끊어질 확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자만심과 내가 펼치는 작전인데 뭔가 당연히 행운이 따르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부교는 또 끊어졌고, 나폴레옹은 그 댓가를 란의 목숨과 패배로 치루어야 했습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5에서 악당 솔로몬 레인이 이단 헌트(톰 크루즈)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지요.


Ethan Hunt is a gambler. And one day his luck will run out.  (이단 헌트는 갬블러야.  언젠가는 그의 운빨도 끝나게 되어 있어.)




나폴레옹은 톰 크루즈와는 달리 갬블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갬블링을 했고, 그러자마자 운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었습니다.


분명 이 전투는 카알 대공의 승리였고 나폴레옹의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아닌 전쟁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이 의미있는 승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나폴레옹은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번 전투를 시작할 때 프랑스군의 도강을 중간에 격파하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작전을 쓰지 않고 나폴레옹의 군대가 도강을 다 마친 뒤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벌이려 했던 것은 이유가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당시의 국가적 역량으로 볼 때, 프랑스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격차는 너무나 뚜렷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도강 중간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나폴레옹에게 작은 패배를 안겨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럴 경우 나폴레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더 많은 준비를 해서 다시 전투를 벌이려 할 것이 틀림없으며, 그럴 경우 무의미한 희생만 치를 뿐 오스트리아에게는 승산이 없다고 카알 대공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카알 대공의 목표는 나폴레옹에게 한방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이기지 못할 전쟁이라면 애초에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유리했는데, 카알 대공의 생각에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승리할 유일한 방법은 나폴레옹이 패배를 인정할 만한 정정당당한 전투를 벌여, 어떻게든 거기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로바우 섬 남단의 부교가 끊어지는 순간,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지게 되었지만 핑계거리를 찾았던 것이고, 카알 대공이 원하던 후회없는 정정당당한 전투는 날아가 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카알 대공의 그런 생각은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패배를 도나우 강 탓으로 돌렸고, 그에게는 구겨진 그의 체면을 세워줄 승리가 간절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다시 바그람에서 마주 서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프랑스의 역량이 오스트리아를 압도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다리부터 튼튼히...)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obscurebattles.blogspot.kr/2016/05/aspern-essling-18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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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4.16 23:46

랍의 신참 근위대가 에슬링에서 철수하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거부하고 분전하여 에슬링을 탈환한 덕분에, 오후 5시 경부터 전투는 육박전에서 포격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대포에서도 폭발탄을 일부 쓰기는 했으나, 도화선에 의한 폭발탄이라 불발탄도 많았고, 또 흑색화약을 쟁여넣은 당시 폭발탄(shell 또는 bomb)은 요즘 수류탄 정도의 폭발력 밖에 없었으므로 심각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포탄은 글자 그대로 대포알(roundshot)이었고, 이것들은 속까지 쇳덩어리로 꽉 찬 것이라 병사들이 이런 것에 목숨을 잃으려면 직격을 당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포탄 종류들입니다.  Chain-shot이나 bar-shot 등은 주로 해군에서 쓰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고폭약을 잔뜩 탑재하여 엄청난 위력의 파편과 화염을 뿌리는 포탄에 비하면 별 것 아닌 대포알이었지만, 당시 병사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장교들의 지휘 하에 촘촘한 대오를 이루고 서 있는데, 어디선가 쐐액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낫이 날아와 바로 옆에 서 있는 친구를 순식간에 피떡으로 만들며 저 뒤로 낚아채가는 것 같았으니까요.  당시 전투에서 부교를 지키고 있던 근위대 소속 쿠아녜(Coignet)라는 이름의 병사의 수기에도 당시의 대포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병사들이 3열 횡대로 서 있었는지, 한발의 대포알에 병사들이 3명씩 나가 떨어졌다고 쿠아녜는 적고 있지요.  무엇보다 대포알들이 주는 공포의 본질은, 그것들이 확실한 죽음을 가져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쿠아녜의 수기에는 그런 두려움에 대해 허세를 부리며 겁나지 않는다는 듯이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 받는 근위대 병사들의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쿠아녜의 수기는 '쿠아녜 대위의 노트'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쿠아녜는 원래 문맹의 농장 일꾼으로 자라났다가 군에 입대한 뒤 글을 배우고 부사관을 거쳐 장교로 승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쓴 수기는 철자나 문법 등이 많이 틀려서, 현대 프랑스인이 봐도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다소 읽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란에게 그런 대포알의 공포가 직접 찾아든 것은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은 저녁 무렵, 그런 대포알들만 휙휙 날아다닐 뿐 전투 자체는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였습니다.  한숨 돌릴 상황이 되자, 그는 가까운 친구였던 푸제(Pierre-Charles Pouzet) 장군과 함께 서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푸제는 란이 이제 막 소위 나부랭이가 되어 군복도 제대로 못 갖춰 입은 혁명군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던 남부 프랑스 미랄(Miral) 시절부터 함께 복무하던 선임 부사관 출신의 연장자였습니다.  그는 그 시절부터 란에게 존경받고 또 란의 사람됨을 알아봐준 오랜 친구였지요.  그런 전도유망한 후배를 둔 덕분에 푸제는 장군까지 승진했고, 평상시에도 란은 고민되는 일이 있을 경우 이 옛친구와 상의를 하곤 했습니다.  푸조의 머리통이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3파운드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것은, 그가 란과 불과 2~3m 거리를 두고 서서 이야기하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옛친구의 피와 뇌 조각은 란의 몸에도 튀었습니다. 




(이건 나폴레옹 시대보다 수십년 앞선, 7년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4-파운드 포의 모습입니다.  같은 4-파운드 포라도 장포신이 있고 단포신이 있었는데, 그 크기와 포탄의 크기는 저 그림에 포함된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림 소스는 http://crogges7ywarmies.blogspot.kr/2012/01/7yw-artillery-scale-drawings-part-2.html 입니다.)




란은 정말 많은 전투에서 온갖 끔찍한 광경을 실컷 본 바 있는 역전의 용사였으므로 피나 처참한 시체를 본다고 겁을 먹을 사람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초 전까지 자기와 이야기 중이던 소중한 친구가 바로 눈 앞에서 머리없는 시체가 되어버리는 광경은 란마저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무척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근처에 쓰러진 통나무로 가서 앉았고,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앉아있었습니다.


당시 포병에게 가장 좋지 않은 환경은 비가 와서 질퍽해진 진흙밭이었습니다.  젖은 진흙땅은 포병 특성상 무거운 대포와 탄약차를 이동시키기에도 불리했지만, 적군에게 주는 2차 피해도 최소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 포탄은 원시적인 도화선을 붙인 폭발탄과 속까지 쇳덩어리로 된 대포알이었는데, 두 탄종 모두에게 진흙은 최악이었습니다.  폭발탄이 진흙밭에 떨어지는 경우 도화선이 진흙에 파묻히면서 불발탄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포알의 경우, 설령 거리 계산이 잘못 되어 적군의 대오보다 훨씬 앞에 포탄이 떨어져도, 굳은 대지라면 포탄이 물수제비처럼 통통 튀며 그대로 적의 대오를 덮쳤습니다.  그런 경우 탄속이 크게 저하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적군의 다리나 허리를 박살내는데 필요한 운동 에너지는 아직 충분했습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이유 중 하나로, 포병을 중시했던 나폴레옹이 당장 전투를 시작하지 않고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젖은 땅이 마르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5월 22일 저녁, 아스페른-에슬링 전투가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그 순간, 아스페른과 에슬링 사이의 대지는 말라 있어서 대포알이 튀어다니기에 딱 좋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버나드 콘월(Bernard Cornwell)의 소설 'Sharpe' 시리즈 중 한편에 이런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 멀리서 한참 동안 그렇게 대지 위를 튕기며 날아온 프랑스군의 작은 대포알 하나가 눈에 띄게 느린 속도로 통통 튀어오자, 어린 북치기 소년병 하나가 다리를 뻗어 멈춰 세우려고 하다가 그만 발목이 날아가버리지요.  소년병이 고통과 놀라움에 쓰러져 엉엉 울자, 나이든 부사관이 뛰어와 '그런 포탄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라며 야단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를 그린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박격포탄이 하늘 위로 흔들흔들 날아오는 모습을 독일군 병사들이 보고 있다가 날아오는 방향이 이쪽이다 싶으면 얼른 도망쳐 피하는 장면이 묘사된 것을 보면,  나폴레옹 시대의 포탄 중에서 그렇게 힘을 다한 것들은 통통 튕기며 날아오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5월 22일 저녁, 푸조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것과 같은 오스트리아군의 3파운드 포 하나가 에슬링 남서쪽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 방향에서 발사되었습니다.  이 작은 대포알이 애초에 노렸던 목표물이 무엇인지는 알 방법이 없으나, 아마도 에슬링 외곽에 있던 프랑스군 병사들을 노렸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포탄은 너무 높게 조준이 되었는지, 목표물을 맞추지 못하고 에슬링을 지나 1km 이상을 날아서 도나우 강변의 평탄한 평원을 통통 튀며 가로질렀습니다.  대지 위를 한번 튕길 때마다 포탄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그 운동 에너지가 거의 소진되어 얼마 못가 땅 위에 그냥 떨어져 멈출 때 즈음, 이 포탄은 마침내 거물급 목표물을 찾았습니다.





(저 위에 프랑스군 4-파운드 포의 크기 그림을 올려놓았습니다만, 오스트리아군의 3-파운드 포 및 그 포탄은 얼마나 더 작았는지 이 그림을 보고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역시 그림 소스는 http://crogges7ywarmies.blogspot.kr/2012/01/7yw-artillery-scale-drawings-part-2.html  입니다.)




란은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이 포탄이 날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저주받은 3파운드짜리 포탄은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란의 두 다리가 교차하는 무릎 부분을 정통으로 때렸습니다.  운동 에너지가 거의 소진된 상태에서 맞은 포탄인지라 다리가 절단되지는 않았으나 앉아있던 란을 쓰러뜨리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깜짝 놀란 부관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는데, 란은 아직 부상의 심각함을 모르고 자신을 일으켜 달라고 부관들에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란의 왼쪽 무릎 윗부분은 심각한 부상을 입어 너덜너덜해진 상황이었고, 오른쪽 다리도 꽤 심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도저히 일어설 상황이 아니었지요.  당황한 부관들은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구해오고 푸조 장군의 시체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겨와 그것으로 임시 들것을 만들어 란을 강변의 야전 진료소로 데려갔습니다.  란은 그 와중에도 푸조 장군의 시체에서 망토를 벗겨온 것이 불길하다며 몹시 언짢아 했다고 합니다.


부교 앞에는 프랑스군 수석 외과의사인 라리(Dominique Jean Larrey)가 다른 군의관들과 함께 부상병들의 팔다리를 마구 잘라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실려온 이 거물을 보고, 라리는 동료 의사들을 불러 모아 즉석 의료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라리는 나폴레옹의 최측근이자 자신과도 친구 사이인 란의 다리를 다른 일반 병사들처럼 마구 잘라낼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일부 의사들은 상처를 본 뒤 양쪽 다리를 다 잘라내는 것이 안전하다고 주장했으나, 라리는 왼쪽 다리만 잘라내도 될 것 같다고 주장했고, 마침내 다른 동료들의 동의를 받아냈습니다.  문제는 아무도 집도를 하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태가 위중한 심각한 부상이라, 생존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다들 속으로 판단했던 것이지요.  결국 라리 본인도 내키지 않는 손을 익숙하게 놀려 1분 30초만에 왼쪽 다리를 절단해냈습니다.  란은 절단 수술 후 로바우 섬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라리입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앰뷸런스를 전장에서 운용한 사람으로도 유명하고, 워털루에서 웰링턴 공작이 그의 앰뷸런스를 향해서는 대포를 쏘지 말라고 지시하여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워털루 전투 이후 몰래 프랑스 국경을 넘어 도주하려 했으나, 프로이센군에게 체포되어 즉결 처형될 위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1813년 프로이센군 블뤼허 원수의 아들을 구해주고 치료해준 인연 덕분에 블뤼허 원수에게 특별 사면되어 식사 대접과 함께 여비까지 지급받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집필 활동만 했으나 나폴레옹 사후 다시 의료계로 복귀해서 명성을 누리며 잘 살았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역시 의사입니다.  이과생 여러분,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 가세요.)




로바우 섬에서는 나폴레옹이 다른 원수들과 회의를 마무리하던 중에 란의 부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란에게 달려갔고, 그는 란 옆의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란의 손을 잡았고, 란의 피가 나폴레옹의 바지를 적시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두 오랜 친구 사이의 만남은 아마 상당히 감동적인 장면이었을텐데, 정작 말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란이 부상과 수술의 쇼크로 인해 긴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란의 옆에 무릎 꿇은 나폴레옹입니다.  실제 환경은 저것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고 합니다.)




5월 22일 밤 ~ 23일 아침까지, 로바우 섬에서 란은 원수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치료와 간호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써놓으니 마치 뭔가 대단하고 숭고한 일 같습니다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전투가 패배로 끝나게 된 이유가 나폴레옹이 지나치게 쾌속 진격을 강조하다보니 다부의 병력이 로바우 섬으로 건너오기도 전에 부교가 끊어진 것이었지요.  승리에 필요한 병력조차 못 건너올 상황이었으니, 부상병들을 위한 기본적인 보급품도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란이나 일개 졸병이나 모두 공평하게 치료는 커녕 깨끗한 식수조차 얻지 못하고 밤새도록 고통과 갈증, 추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5월 날씨답게 낮에는 상당히 더운 편이었으나 밤이 되자 담요도 없이는 매우 쌀쌀하게 기온이 내려가 담요 없이는 밤을 보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란은 보트 편으로 도나우 강 우안 쪽으로 후송되었습니다.  란의 부관들 대부분은 쾌적한 비엔나로 돌아가 전장의 먼지를 털어내고 크고 작은 부상의 치료를 받았으나, 란은 로바우 섬 건너편인 카이저에버스도르프의 어느 양조업자의 집 2층을 병상을 꾸몄습니다.  이는 계속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하는 나폴레옹의 사령부와, 거기 있는 나폴레옹의 수석 외과의인 라리 곁에 란을 두고 보살피려는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이 배려는 결국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양조업자의 집은 지대가 낮고 습기찬 곳이었고, 바로 옆에 마굿간도 붙어 있어서 말똥 냄새가 퀴퀴한 곳이었습니다.  결코 환자에게 좋은 공간이 아니었지요. 


이곳에서 란은 매일 나폴레옹과 라리의 방문을 받으며 집중 간병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양조업자의 집 주변은 충성스러운 그의 척탄병 부하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장사진을 이루었고, 여러 고위 장교들과 친구들이 병문안차 그의 병상을 찾았습니다.  란은 나폴레옹에게 어서 빨리 회복하여 군에 복귀하겠다고 했고, 친구들에게는 향후에는 마차를 타고서 부하들의 돌격을 지휘하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비엔나에는 프랑크(Franck) 박사라는 의족 전문 의사가 있었는데, 란은 어쩌면 그 사람이 만들어준 의족을 달고 걷거나 말을 탈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부하들에게 란의 상태는 희망적이며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치기어린 군인의 허세에 불과했습니다.  란도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양조업자 집에 온지 2~3일이 지나자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당시 부상자에 대한 의료 기술은 기본적으로 고대 로마 시대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즉, 화살촉이나 총알 등 이물질을 수술로 뽑아내고 심하게 망가진 팔다리를 잘라낸 뒤, 부상병의 몸이 세균 감염과 싸워 이기길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당시엔 혈관 봉합 수술 기술도 없었고 세균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몰랐으므로 수술 도구를 끓는 물이나 알코올로 소독하지도 않았으니, 간단한 수술도 결국 괴저(gangrene) 또는 패혈증(blood poisoning)으로 인한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란의 생명을 빼앗아 간 것은 패혈증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열이 발생하자, 당시로서는 매우 비싼 약재였던 남미산 기나수 껍질(cinchona bark)로 만든 약, 즉 키니네(quinene)를 투약하는 등 나름 애를 쓰기는 했으나, 키니네는 말라리아로 인한 고열에나 효과가 있었을 뿐 패혈증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기나수 껍질입니다.  당시 영국이 대륙봉쇄정책을 펼치던 프랑스에 대해 유일하게 금수품목으로 정해놓은 것이 바로 목화솜과 이 기나수 껍질일 정도로, 전략 군수품에 해당하는 귀한 물자였습니다.)




란이 나폴레옹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같은 말에 대한 논란은 바로 이 며칠 중 하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책의 형태로 남겨진 것은 가시쿠르(Cadet de Gassicourt)라는 군종 약사가 남긴 회고록에서였는데,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도 참전했던 이 약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란은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과감한 직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부인과 아이들을 돌봐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겠네.  내가 자네를 위해 싸우다 죽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자네의 체면 때문에라도 내 가족을 보살피는 것이 자네의 의무일테니까 말일세.  지금 내가 하는 비판때문에 자네가 내 가족을 홀대할 까봐 두렵지도 않네.  자넨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어.  그것 때문에 자네는 절친을 잃고 있네.  그래도 자네는 변하지 않겠지.  자네의 만족할 줄 모르는 야망이 결국 자네를 망칠거야.  자넨 그럴 필요가 있지도 않은데, 신경도 별로 쓰지 않고 후회도 없이 자네를 위해 일하는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자네의 그런 배은망덕이 자넬 존중하는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걸세.  자네 주변에 남은 것은 아첨꾼들 뿐이야.  자네 친구들 중에는 진실을 말하려는 자가 하나도 없다네.  결국 자네는 배신당해 버림받을걸세.  서둘러 이 전쟁을 끝내게.  그게 자네 부하 장군들의 바람이고, 자네 백성들의 바람이야.  그러면 자네의 권력이 더 강해지지는 않겠지만, 더 사랑받는 군주가 될걸세.  내 이런 말들을 용서하게.  이건 자네를 정말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까."


가시쿠르의 회고록은 부르봉 왕가의 복위 뒤에 나온 것이니, 어쩌면 부르봉 왕가의 입맛에 맞춰주기 위해 일부러 나폴레옹의 명예를 실추하는 내용을 집어넣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란과 함께 하며 그의 병구완을 했던 그의 부관 마르보의 회고록에 따르면 란이 나폴레옹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그의 상체를 부축했던 것이 바로 자기인데, 란이 그런 말을 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노발대발하며 다 거짓말이라고, 란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충성스러웠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실제로 란이 저런 말을 했다고 해도 나폴레옹은 그 충언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걸 끝까지 숨겼을 것입니다.


란은 마지막 며칠 동안은 거의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고통에 시달리다, 부상을 입은지 9일만인 5월 31일 새벽 5시 45분 경 사망했습니다.  란이 사경을 헤매전 며칠 동안에도 나폴레옹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매일 란을 찾았습니다.  5월 30일 저녁, 나폴레옹은 라리로부터 이제 란은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상심하여 다시 란의 병상을 찾았으나, 란은 혼수 상태였으므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나폴레옹은 아침식사를 들기도 전에 다시 란의 곁을 찾았으나, 이미 란은 새벽에 사망한 뒤였습니다. 


그 양조업자의 집을 둘러싼 척탄병들의 통곡이나 란의 친구들의 상심을 묘사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무척 아끼는 것처럼 말했고 또 실제로도 그런 편이었지만, 정작 전장에서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느냐 승리를 거두느냐의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경우 언제나 서슴지 않고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켰습니다.  그의 부하 원수들은 나폴레옹을 평가할 때 '무척 유능한 사람이었으나 병력의 보존에는 관심이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였지요.  그런 그에게도 란의 상실은 매우 심각한 타격이었습니다.  냉혈한 나폴레옹도 란의 죽음을 알게 된 뒤 사령부로 돌아와 아침식탁에 앉아서는 이렇게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모든 일은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나는구나 !"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obscurebattles.blogspot.kr/2016/05/aspern-essling-1809.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how-history-is-written-marechal-lannes-last-words-to-napoleon/

https://www.gutenberg.org/files/20483/20483-h/20483-h.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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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4.09 18:08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위기에서 건져낸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로서, 그는 투박한 독일 사투리가 들어간 프랑스어를 쓰는 알사스(Alsace) 출신이었고, 그가 그 위기의 순간에서 프랑스군을 하드캐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덕분이었습니다.


장 랍(Jean Rapp)은 알사스 지방 콜마르(Colmar) 시의 시청 수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카톨릭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소수라고 할 수 있는 독실한 프로테스탄트로서, 그의 아들이 장차 제대로 교육을 받고 목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장 랍은 용기와 열정으로 가득찬 전형적인 군인 체질이었던지라,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17살이 되자 프랑스 기병대에 사병으로 자원 입대해버렸습니다.  그의 군대 생활은 그야말로 피투성이었습니다.  입대한지 5년 만인 1793년 처음으로 검상과 총상을 입은 이후 군 생활 내내 25번의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랍의 고향인 콜마르 시에 세워진 그의 동상입니다.  여기에는 'Ma parole est sacrée'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나의 약속은 신성한 것이다' 라는 뜻으로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힘과 용기를 통해 사병에서 부사관으로, 부사관에서 장교로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그로 인해 터진 전쟁 덕분이었지요.  그러던 그에게 출세길을 열어준 것은 바로 드제(Louis Desaix) 장군이었습니다.  독일 전선에서 드제의 눈에 띈 그는 드제의 참모진으로 발탁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위로 승진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이집트까지 드제를 따라 갔었고,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여기서 마멜룩 부대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먼저 귀국한 이후 드제와 함께 뒤늦게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귀국한 그는, 드제와 함께 마렝고 전투에도 참전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동아줄인 드제 장군의 전사라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랍의 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마렝고에서의 드제를 은혜를 잊지 않았고, 드제와 관련된 인물들을 대거 자신의 심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랍도 그렇게 나폴레옹의 참모진이 될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부인인 조세핀의 눈에도 들게 되어 나폴레옹의 궁정에서 더욱 입지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의 인연을 살려 프랑스군에 마멜룩 기병대를 창설하는 일을 주도했었는데, 1805년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그는 나폴레옹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그 마멜룩 기병대를 이끌고 러시아군과 싸워 승리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부러진 검과 (또 부상을 입어) 피를 철철 흘리는 머리를 한 채 나폴레옹에게 포로로 잡은 볼콘스키(Repnin-Volkonsky) 대공을 데리고 가 승리를 보고했는데, 그 장면은 제라르(Gerard)의 아우스테를리츠 전쟁화를 통해 역사의 한 장면으로 영원히 남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랍에게 돈이 충분했다면 아마 이 그림을 구매하여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왼쪽의 흰 제복을 입은 사람이 볼콘스키  대공이고, 오른쪽의 모자를 쓰지 않은 인물이 랍입니다.  랍의 오른손목에 끈으로 묶어놓은 군도가 부러진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5월 22일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끊어진 부교 앞에서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이, 남은 예비 병력 전부인 신참 근위대 2개 대대를 이끌고 갈 지휘관으로 랍을 고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 이때 나폴레옹이 내린 명령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그는 무통 장군이 지휘하는 근위대 5개 대대가 오스트리아군과의 접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여, 그 5개 대대를 무사히 부교 쪽으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기병 장교로 살며 이미 몸에 수많은 생선가시 모양의 흉터를 훈장처럼 붙이고 다니던 랍을 그런 소극적 구출 작전을 수행할 지휘관으로 고른 것은 나폴레옹의 실수였습니다.  


랍은 무통 장군이 로젠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에슬링 마을에 도착할 때, 이미 무통 장군의 근위대를 구출해 무사히 후퇴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남자답지 못한 구출 및 후퇴 명령을 정면으로 위배하여 도착하자마자 휘하 병력을 전개하여 치열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랍과 무통의 병력은 신참 근위대 7개 대대로서, 프랑스군의 정예 중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부대였습니다.  비록 패배를 눈 앞에 둔 상황이고, 무통 장군이 받은 명령도 부데 사단의 구출이라는 소극적인 것이라서 부대의 사기가 높은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피끓는 랍이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로 맹렬한 공격을 지시하자 상황이 확 바뀌었습니다.  근위대는 왜 자신들이 프랑스군의 꽃이라고 불리는지 당당히 증명을 해보였습니다.  그들은 로젠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을 마구 밀어붙였고, 그 기세에 오스트리아군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도 어이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공격하던 랍이 당황할 정도였지요.




(랍의 초상화입니다.  그는 의리의 사내답게 나폴레옹의 이혼 시에도 자신과 친했던 조세핀 편을 들었고, 급기야 핑계를 대고 나폴레옹과 마리-루이즈의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나폴레옹의 신임을 잃게 되지요.  그럼에도 그는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했고 백일천하 때에도 나폴레옹 편에 서는 등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물론 근위대는 정예부대였고 또 랍은 용맹무쌍한 지휘관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오스트리아군을 쉽게 꺾을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알고보면 랍이 이끈 근위대 공격은 그야말로 '나귀의 등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그 전날 아침부터 고된 행군과 치열한 전투로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군도 궁지에 몰린 상태였지만, 도무지 붕괴되지 않는 프랑스군의 저항 때문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던 것은 오스트리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몰려온 무통 장군의 근위대에 대해 그나마 잘 싸워준 것이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다고 무통의 부대와 싸우는 것도 죽을 맛이었는데 전혀 새로운 사기를 뽐내는 근위대가 추가로 덤벼들자 마침내 오스트리아군도 우르르 무너진 것이었지요.


정말 승리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준다더니, 정말 그랬습니다.  이렇게 뜻 밖에 에슬링을 재탈환하게 되자, 중앙의 란을 압박하던 오스트리아군도 주춤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좌우의 아스페른과 에슬링이 프랑스군 손에 있는 이상, 중앙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가면 측면이 프랑스군에게 노출되어 큰 곤경에 빠질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중앙이나 아스페른에서나, 오스트리아군도 지치고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알 대공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보병을 물리고 포병을 앞세우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로써 프랑스군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쉴사이 없이 날아드는 오스트리아군의 크고 작은 대포알에 프랑스군이 두세명씩 피떡이 되어 날아가버리긴 했지만, 이들은 대오를 유지한 채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부교의 수리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나폴레옹은 잃어서는 안될 것을 잃게 됩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obscurebattles.blogspot.kr/2016/05/aspern-essling-1809.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_Rapp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people_rap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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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나폴레옹의 시대2017.04.02 21:19

군인의 목표는 승리와 전진이며, 이는 이룩하기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바로 패배 수습과 질서있는 후퇴입니다.  나폴레옹도 '모든 문제는 승리하면 다 저절로 해결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패배할 경우 없던 문제까지 수없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5월 22일 11시, 부교가 수리 불가 상태까지 붕괴된 것이 확인되자, 나폴레옹은 공세에 나섰던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합니다.  그 명령에 의해 가장 곤란해진 것은 바로 란의 제2 군단이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은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습니다.  그들은 벌판으로 진격하지 않고 아스페른 마을 안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일단 현 상황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란의 제2 군단은 중앙 전선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장 깊숙히 진격해 들어갔었지요.  이제 그들은 진격한 거리만큼을 다시 되돌아가야 했는데, 적에게 등을 보인 채로 허허벌판을 행군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의 뒤는 도나우강이 가로 막고 있었으므로, 이 후퇴 과정에서 대오가 무너지면 뒤를 쫓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글자 그대로 대학살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란에게는 천만다행스럽게도,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은 그다지 거세지 않았습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카알 대공이 파악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린데다,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은 주로 포병에 의한 무자비한 포격에 의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에 거세게 시작되었던 란의 공격에 의해 오스트리아군 중앙부가 거의 붕괴된 상태였던지라, 카알 대공이 프랑스군의 후퇴를 깨닫고 추격을 할 때도 현장에 있던 호헨촐레른의 보병들을 이용하지 못하고 그의 친위 척탄병 부대를 불러와야 했으므로 추격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틈을 이용해 란의 제2 군단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일단 아침에 출발했던 밭두렁 뒤로 물러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후퇴 과정에서 말에서 내려 자신의 발로 보병들과 함께 걸으며, 호시탐탐 프랑스 보병 연대들의 붕괴를 꾀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했습니다.  란은 침착하게 웃으며 휘하 병사들에게, 9년전 마렝고 전투에서도 자신들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쫓기는 신세였지만 해질녘 최후의 승자는 프랑스군이었다면서 겁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중앙부와 에슬링을 방어해야 했던 란은 먼저 휘하 제2 군단의 대부분을 로바우 섬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부교 쪽으로 보낸 뒤, 지휘관을 잃은 생-일레르 사단 하나만 이끌고 아스페른과 에슬링 사이를 연결하는 밭고랑을 끼고 방어선을 쳤습니다.  위태위태한 부교 하나를 통해 로바우 섬으로 철수해야 하는 전체 프랑스군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아스페른과 에슬링으로 연결되는 전선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스페른은 마세나가 아침부터 틀어쥐고 있었고, 에슬링은 계속 부데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프랑스군을 도나우 강의 물결에 쳐박으려는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좌익인 아스페른의 마세나는 프랑스군 내 제2인자다운 강인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역시 2대1의 수적 열세를 안고 싸웠는데도 오스트리아군에게 별로 밀리지 않은 것은 그의 개인적인 열정과 투지가 보여준 결과였습니다.  그 전날의 일이긴 합니다만, 최근 징집된 어린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들이 유혈이 낭자한 살육전을 보고 겁에 질려 있다는 보고를 받자, 그는 벌컥 화를 내며 그 특유의 니스(Nice) 사투리로 '그럼 걔들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깃발을 보여줘라'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아군이 밀리는 현장에 귀신처럼 나타나 위험을 무릅쓰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 참된 현장 지휘관이란 어떤 것인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아스페른은 비록 조금씩 오스트리아군에게 점령되는 부분들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저녁 때까지도 프랑스군은 아스페른의 일부나마 끈질기게 붙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의 지휘를 받지 않고도 전쟁 자체를 지휘할 만한 역량이 있는 인물로서, 나폴레옹 휘하의 1.5인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왕국 소속이었던 니스의 어느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상선의 심부름꾼으로서 남미까지 항해를 하는 등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백일천하 때 그는 부르봉 왕가와 나폴레옹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림은 1799년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의 마세나의 모습입니다.)




에슬링에 대한 공격도 치열했습니다만, 거기를 지키는 부데 사단의 방언는 더욱 치열했습니다.  부데와 그의 병사들은 에슬링 마을의 서쪽 끝부분에 있던 거대한 곡물 창고를 주방어선으로 삼고 맹렬히 저항했습니다.  에슬링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로젠베르크가 이끌었는데, 그는 다스프레(Constantine D'Aspre) 장군의 헝가리 척탄병 4개 대대 (사실상 1개 사단)을 투입하여 5번이나 반복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기진맥진하고 수가 줄어든 부데 사단은 이를 5번 모두 격퇴해버렸습니다.  마지막에는 헝가리 척탄병들이 공격 명령을 거부할 정도였지요.  결국 로젠베르크는 휘하 군단 전체를 동원해야 했는데, 이 공격에서도 에슬링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부데 사단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사단 하나가 군단 전체를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에슬링 마을 건물들은 하나 둘씩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넘어 갔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최후의 방어 거점이던 곡물 창고쪽으로 점점 밀리게 되었습니다.


오후 2시가 넘자 중앙부에서도 오스트리아군의 맹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대포알을 신나게 날려보낸 뒤, 압도적인 수의 보병 대오를 파도처럼 흘려보냈습니다.  이를 맞이하는 란은 병력의 열세는 물론이고 탄약까지 충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시작부터 열세였던 그의 포병대는 이미 포병들의 사망과 부상으로 와해된 상태였고, 어차피 탄약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는 아스페른-에슬링을 연결하는 밭두렁 뒤에서 침착하게 기다리다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뒤에 갑자기 일제 사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오스트리아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했습니다.  그의 뒤 머지 않은 곳에는 나폴레옹 본인이 근위대 병력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란의 병사들은 나폴레옹 버프 효과를 보고 있었지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아마도 나폴레옹 근위대가 일렬로 늘어서서 지키고 있는 교두보 뒤로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후퇴하고 있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은 페르낭 코르몽 Fernand Cormon이라는 화가가 그린 것인데, 이 분은 1845년 생으로서 이 그림은 실제 전투 이후 거의 70년이 지난 1878년에 그려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라는 인간은 자신이 패전한 전투에 대해 그림을 발주할 정도로 팩트를 존중하는 위인은 아니었지요.)




에슬링 마을이 거의 다 함락되고, 부데 사단의 잔여 병력이 마침내 곡물 창고 안에서 포위된 채로 농성 중인 상황이라는 보고가 들어오던 오후 3시 쯤, 엎친데 덮친 격의 보고가 날아들었습니다.  도나우 강 좌안과 로바우 섬을 연결해주던 짧은 부교까지도 무너졌다는 보고였습니다.  이젠 마세나와 란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퇴로까지도 끊긴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침착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별의별 경험을 다 겪어본 백전 노장이었으니까요.  그는 로바우 섬으로의 퇴로를 연결해줄 다리 수리는 부교병들에게 맡겼으므로 신경쓰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에슬링이었습니다.  지금 프랑스군이 버티고 있는 것은 부교의 교두보를 좌우에서 지켜주는 아스페른과 에슬링이라는 두 방어 거점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질 경우, 부교의 교두보 지점도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므로 자연스럽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에슬링이 무너진다면 부교가 돌다리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프랑스군은 전멸의 위기에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조르쥬 무통 장군입니다.  이 분은 그렇게 눈에 띄는 전공을 세운 적은 없었고,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도 대단한 공을 세웠다고 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다음 해인 1810년 이 양반을 로바우 백작(comte de Lobau)으로 봉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끝까지 나폴레옹에게 충성했고, 백일천하 때도 나폴레옹 편에 섰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에슬링 구원에 우선 순위를 두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에슬링을 내준다고 하더라도, 그 쪽 방면의 병력이 질서있는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그는 보통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두는 예비대인 친위대 중 5개 대대를 무통(Georges Mouton) 장군의 지휘 하에 에슬링으로 급파했습니다.  친위대 중 남은 것은 2개 대대 뿐이었으므로 이는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5개 대대라고 해봐야, 당시의 편제상으로 보면 1개 사단이 조금 넘는 병력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통 장군의 공격은 훨씬 수적으로 우세한 로젠베르크 군단에게 막혀 실패로 돌아갔고, 부데 사단은 곡물 창고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부데 사단의 구출은 고사하고, 이젠 무통 장군이 이끄는 친위대 대부분까지 로젠베르크와의 교전에 붙잡혀 철수가 어렵게 된 셈이었으니, 나폴레옹의 모험은 실패로 끝난 셈이었습니다.





(루이-프랑수와 르죈 대령입니다.  르죈이라고 하면 '화가 아니던가'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는데, 맞습니다.  이 분은 화가이자 군인이었고, 나폴레옹의 후원한 많은 전쟁화 중 여러개가 이 양반 작품입니다.)





(르죈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피라미드 전투입니다.  나중에 런던 피카딜리의 Egyptian Hall에서 이 작품을 포함한 그의 전쟁화 몇 편을 전시할 때 그림을 좀더 자세히 보고자하는 사람들이 하도 몰려들어 그림 보호를 위해 접근 제한 레일을 그림 앞에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 나폴레옹에게 남은 것은 정말 친위대 2개 대대 뿐이었습니다.  이마저도 에슬링에 투입한다면 중앙부의 오스트리아군과 부교 사이에는 정말 탄약도 힘도 병력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란의 생-일레르 사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겁에 질린 채 철수해온 란의 제2 군단 잔여 병력 중 아직 로바우 섬으로 건너가지 못한 일부 병력 뿐이지요.  나폴레옹은 란에게 르죈(Louis-François Lejeune) 대령을 보내 병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를 묻게 했습니다.  르죈이 란을 찾아냈을 때, 란은 휘하 병사들과 함께 아직도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밭고랑 뒤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약 500명 가량의 병사들 뿐이었는데, 나폴레옹의 말을 전하는 르죈에게 란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내게 남은 병력은 자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네.  그리고 버틸 수 있는 것은 그 최후의 1인이 쓰러질 때까지니까, 가서 황제께 그렇게 전하게."


르죈의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은 란을 믿었나 봅니다.  그는 참모들 중 랍(Jean Rapp) 장군에게 남은 2개 대대의 친위대를 맡기며 에슬링에 가서 거기 묶인 부데 사단과 무통 장군의 친위대를 빼내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남은 패잔병들과 함께 그야말로 도나우 강변 좁은 돌출부에 옹기종기 몰린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중의 일이긴 합니다만, 전투가 종료된 이후 카알 대공은 프란츠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생애 처음으로 전투에서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발버둥쳤다'라고 썼는데, 최소한 이때의 상황에서는 카알 대공의 과장된 보고도 그렇게 틀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그의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aspernessling/

https://en.wikipedia.org/wiki/Louis-Fran%C3%A7ois_Leje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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