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2017.01.16 00:10

세비야에는 알카사르 궁전과 세비야 대성당 외에도 특히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명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김태희 광장입니다.  현지인들은 그 광장을 에스파냐 광장(Plaza de España)라고 부르더군요.  





(왜 에스파냐 광장이 김태희 광장으로 더 유명한지 모르시는 분은... 그 젊음이 부럽습니다 !) 




이 광장은 스페인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1929년 스페인어권 이베리아-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진, 비교적 현대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명소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 같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 광장에는 양쪽에 2개의 탑이 있는데, 이 탑들의 높이가 세비야 대성당의 유명한 종탑 히랄다(Giralda)와 맞먹을 정도로 높게 설계되자 세비야 전체가 들고 일어나 난리를 피웠다는 것 정도입니다.  결과적으로 히랄다의 높이는 약 100m 넘는 것에 비해, 이 두 탑의 높이는 약 70m 정도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종탑 히랄다입니다.  Giralda는 풍항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슬람 모스크에 딸린 첨탑 미나렛(minaret)이었던 이 종탑은 독특하게도 종탑 꼭대기로 올라가는 통로가 계단이 아니라 그냥 경사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에 이 곳을 지배하던 무어인들은 그 꼭대기에 올라갈 때 말을 타고 올라갔다는 믿거나말거나 전설이 있습니다.)





(이건 히랄다 종탑에 올라가 내려다 본 세비야 풍경입니다.  아래에 보이는 것은 세비야 대성당과 그 뒤뜰입니다.  저 배경에 길쭉한 현대적 건물 보이십니까 ?  무슨 건물인지는 못 알아봤는데, 아무튼 저렇게 삐죽 솟은 건물이 있으니 확실히 도시 경관을 확 해치더군요.  아마 저 건물 지은 사업가는 '불합리한 규제 때문에 세비야 경제가 망한다'라며 협박한 끝에 저 건축 허가를 받아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설마 모 반도국가처럼 모종의 불법적 뒷거래를...???)




이 광장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가 없는 대신, 이 광장의 반원형 벽면에 있는 총 48개의 각 지방을 대표하는 알코브(alcove, 벽면으로 움푹 들어간 조그만 공간)에는 해당 지방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 타일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것은 신대륙 탐험을, 어떤 것은 이슬람으로부터 스페인을 되찾은 레콩키스타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대한 투쟁을 그린 것은 5개였습니다.  하엔(Jaen)의 바일렌(Bailen) 전투, 카디즈(Cadiz)의 1812년 헌법 제정, 마드리드(Madrid)의 도스 데 마요 (Dos de Mayo) 봉기, 폰테베드라(Pontevedra) 전투, 그리고 헤로나(Gerona)의 항복입니다.






(에스파냐 광장의 모습들입니다.  맨 마지막 사진에 제가 언급한 48개의 알코브들과 그 벽면의 타일화가 보입니다.)





(위에서부터 하엔, 마드리드, 카디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다호스의 벽화입니다.  제 블로그를 계속 보셨던 분들은 하엔, 마드리드, 카디즈의 그림들은 다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의 바다호스의 벽화는 보시다시피 나폴레옹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레콩키스타에 관련된 것입니다.)



바일렌 전투, 카디즈의 헌법 제정, 그리고 도스 데 마요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다룬 바가 있으고 또 폰테베드라 전투는 너무 규모가 작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고, 헤로나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여기서 묘사된 사건은 1808년~1809년에 3차례에 걸친 헤로나의 포위전과 결국 헤로나의 스페인 수비대가 1809년 12월 항복한 일입니다.  보통 승전을 그리는데, 굳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한 이 전투를 그린 것은 이 항전이 그만큼 의미있는 것이라는 반증이겠지요.  





(헤로나의 항복, 1809년이라는 제목이 보입니다.  보기 추한 제 그림자가 보이는군요.  모든 사진은 애국 기업 LG의 V20으로 찍었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좌 강탈에 나섭니다.  마침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서 왕위 양도를 받아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웠습니다.  무능한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에 못지 않게 너절했던 아들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 바욘으로 유인한 뒤 체포해서, 두둑한 연금과 안락한 궁전을 제공하니 국민이야 어떻게 되건말건 쉽게 왕위 이양에 동의해버린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고, 스페인 귀족들과 국민들에게는 근대적인 헌법에 따른 통치와 경제적 번영, 국가적 영광을 약속했습니다.  


1808년 바르셀로나의 요새인 몬주익(Montjuïc) 요새를 지키고 있던 알바레스(Mariano Álvarez de Castro) 장군은 프랑스군이 요새를 점령하려들자 그에 맞서 싸우려 했으나, 그의 상관은 요새를 프랑스군에게 넘겨주라는 명확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왕 자신이 나라 전체를 팔아먹은 판국에 무의미한 저항은 포기하라는 것이 그 상관의 생각이었겠지요.  알바레스는 군인이었으니,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만약 거기에 저항했다면 알바레스는 정당한 군 통수권자에 의한 명령을 거부한 반란군이 되어 처벌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와 가장 가까운 지방인 카탈루냐의 주도인 바르셀로나가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버렸습니다.





(몬주익 언덕에서 내려다본 바르셀로나 항구입니다.  Montjuïc을 스페인어식으로 읽으면 아마 몬트후익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불어의 영향을 받은 카탈란어로는 몬주익이라고 읽습니다.  "유태인 산"이라는 뜻이지요.  아마 이슬람 시절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나 봅니다.  바르셀로나의 요새 이름이 몬주익입니다만, 헷갈리게도 헤로나의 요새 이름도 몬주익입니다.)




그러나 카탈루냐 사람들도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마드리드에서 도스 데 마요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에 대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카탈루냐에서도 활발한 반프랑스 게릴라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 쪽에 가장 가까운 대도시였던 바르셀로나조차도 당장 프랑스 본국과의 연락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새로 병력을 파견하여 바르셀로나와 프랑스 본국과의 교통로를 뚫기로 합니다.  그 타겟이 프랑스 국경과 바르셀로나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였던 헤로나(카탈란어로는 Gerona, 스페인어로는 Girona)였습니다.  아일랜드인들로 구성된 350명의 정규군과 자원 민병대 약 1600명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수비대는 1,2차에 걸친 프랑스군의 공격을 집요하게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으로서도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헤로나를 굴복시키지 못하면 바르셀로나도 포기해야 했고, 바르셀로나를 포기한다면 스페인 정복 전체를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프랑스군은 생시르(Laurent de Gouvion Saint-Cyr) 장군의 지휘 하에 1만8천의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세번째 포위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에 대항하는 6천도 안 되는 민병대 위주의 빈약한 헤로나 수비대의 지휘관은 그 사이 반란군에 가담했던 알바레스(Mariano Álvarez de Castro)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인 포위전이 시작되기 직전, '누구든 항복이나 협상 이야기를 꺼내는 자는 처형한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였습니다.




(이 분이 알바레스 장군이십니다.)




1809년 5월부터 시작된 포위전에서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헤로나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무려 2만 발의 폭발탄과 6만발의 대포알(roundshot)을 쏘아댔고, 3개월 만인 8월에는 헤로나의 요새인 몬주익(Montjuïc)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바레스는 바르셀로나 때처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새를 빼앗긴 뒤에도 길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참호를 파며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4개월을 더 버틴 뒤, 전염병과 기아, 전투로 헤로나 시내의 사망자가 민간인 포함 1만을 넘어선 뒤, 자신도 병에 걸려 지휘가 불가능해지자 알바레스는 지휘권을 부하에게 넘겼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수비군은 즉각 항복 협상을 시작했고, 연인원 총 3만5천의 병력을 동원했다가 전염병으로 인해 자신들도 1만5천의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도 더 이상의 약탈을 금하는 조건으로 항복 협상을 체결했습니다.  1809년 12월, 포위전 시작 7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헤로나 포위전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알바레스 장군이 좀더... 이마가 넓게 그려졌네요.  실제로는 대머리셨나 봅니다.)




지휘관이었던 알바레스에 대한 프랑스군의 조치는 가혹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를 스페인군 대 프랑스군의 정규전으로 보지 않았고, 정당하고 적법한 스페인의 군주 조제프 국왕에 대한 무장 반란으로 보았습니다.  그 지휘관인 알바레스는 반란군의 수괴이자 법에 의한 통치에 대한 배신자였지요.  당시 전쟁에서 항복한 적장은 일종의 손님으로서 예우를 갖춰 대접해야 했는데, 알바레스는 당시 중병을 앓는 몸이었지만 일개 범죄자로 취급되어 재판을 위해 프랑스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달 만에 죽었습니다.  스페인 측에서는 그의 죽음이 프랑스 측의 독살이라고 주장했고, 프랑스 측에서는 단순 병사라고 주장했지요.  


실제로 당시의 정당한 국제 협약과 스페인 법에 따르면, 스페인의 적법한 국왕은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였습니다.  그에 저항했던 알바레스는 범죄자이자 반란군, 폭도가 맞는 것이었지요.  아마 알바레스가 그냥 당시의 적법한 국왕인 조제프를 섬겼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그런대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던 마드리드의 도스 데 마요 사건에서도, 프랑스군이 마드리드 시민들을 학살하던 그 순간 마드리드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대부분의 스페인 정규군은 동맹군인 프랑스군이 적법한 명령에 따라 폭도들을 척살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딱 한 부대, 즉 몬텔레온 (Monteleón) 병영에 주둔하고 있던 포병 부대가 다오이스(Luis Daoíz de Torres)와 벨라르데(Pedro Velarde y Santillán)라는 두 열혈 대위의 지휘 하에 시민군과 함께 프랑스군에 대항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프랑스군에게 곧 제압되었고, 두 열혈 대위는 전투 중 폭도 중의 일부로 사살되고 말았지요.  기록에서 찾아보지는 못했으나, 그 대위들의 가족들도 범죄자의 가족으로서 무척 험한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드리드에서 질서를 유지하려는 프랑스군의 정당한 치안 활동에 반기를 들고 몬텔레온 병영에서 폭도들과 합류하여 반항한 폭도들의 괴수, 벨라르드 대위입니다.  물론 오늘날 스페인에 가서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특히 국가와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을 때 그를 바로 잡기 위해 현행법을 어겨가며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판단입니다.  확실한 것은 어느 나라든지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어렵게 산다는 것은 공통적인 일인가 봅니다.  그러나 그런 값진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스페인의 정체성과 긍지는 없었겠지요.  1929년 박람회를 위해 에스파냐 광장을 만들 때 각 지방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을 고를 때,  스페인에는 화려하고 영광스러웠던 역사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48개의 지역 중 무려 5개 지역이 반-나폴레옹 항쟁을 선정한 것을 보면 그들의 희생에 대해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 분명합니다.


저같은 겁장이는 사회적으로 옮은 일을 한답시고 법을 어길 용기를 내기 어렵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특히 제 어린 아들에게는 그런 어려운 일을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제 아들을 포함한 다음 세대가 그런 어려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 사회를 제대로 만들어 놓고 싶습니다.  부디, 곧 있을 대선에서 여러분들이 올바른 대한민국을 위해 꼭 심사숙고 뒤 후회없는 한표를 행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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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1.08 21:15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알함브라 궁전이었는데, 실제로 본 알함브라는 그 기대치를 100%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알함브라는 약 700년 간 이슬람의 통치를 받았던 스페인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인데, 그 이름은 아랍어인 알-함라(Al-Ḥamra), 영어로 직역하면 The Red 정도로 번역됩니다.  이 궁전은 그냥 연한 황갈색이고, 주변 토양이 붉기는 하지만 이름의 기원은 이 요새를 약 9세기 경 이 장소에 맨 처음 세운 아랍 족장의 별명이 알-함라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알함브라는 10년 20년 사이에 지어진 하나의 건물이 아니고, 여러 채의 궁전과 요새, 정원이 수세기에 9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어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더 좋은 다른 글들이 많을 것이니, 여기서는 두어 가지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랍식 궁전에 분수와 오렌지 나무가 많은 것은, 이슬람 믿음에 '천국에는 샘과 미녀와 과실이 열리는 나무들이 있다'라는 말 때문에 그렇답니다.  정말 지상에 만들어 놓은 낙원이지요.)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슬람 통치 기간인 8세기~15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아랍인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정복자는 소수였고, 피지배인인 기존 스페인 주민들은 여전히 그대로 살고 있었지요.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고, 또 그대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은 세금만 내면 정복민들이 무슨 종교를 가지든 용납해주는, 꽤 너그러운 종교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슬람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면세 혜택을 줄이기 위해 개종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뜻 밖의 혜택을 받은 일파가 바로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원수들'이라는 인식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신봉하던 유럽 사회에서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었는데, 이슬람이 장악한 스페인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비야나 그라나다 등 이슬람 주요 거점 도시를 가면 꼭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거리가 있고, 세고비아 같은 도시는 유태인들 덕분에 흥하다가 기독교 세력이 다시 세고비아를 탈환한 뒤 유태인 사회가 붕괴되면서 도시 전체가 경제적 활력을 잃기도 했습니다.





(알함브라는 이렇게 정원, 요새, 아랍 궁전, 카톨릭 수도원, 그리고 르네상스식으로 새로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 등이 어우러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그 중의 꽃은 물론 아랍식 궁전인 나스르 궁전입니다.)




정복자 아랍인들이 계속 본국인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활발히 내왕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래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원정을 보냈던 아랍 왕조도 본국에서의 정변으로 교체되었고,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도 얼마가지 않아 독자적 왕국을 세우고 칼리프를 선언하면서 오히려 모로코 본국과는 경쟁 관계에 접어 들었습니다.  스페인의 코르도바 왕조의 왕족들도 자신들의 고향이 아라비아나 북아프리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간 스페인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자신들의 고향을 스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왕조에 충성하던 이슬람 교인들도 다 아랍 혈통은 아니었고, 그 중 상당수는 스페인 혈통의 이슬람인이었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이 700년 넘게, 반올림해서 천년간 스페인을 지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슬람 세력끼리의 전쟁도 많았고,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전쟁도 많았으며, 이슬람과 기독교가 합세하여 다른 이슬람 또는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일도 많았습니다.  가령 스페인의 전설적 영웅 엘 시드(El Cid)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기독교 왕을 위해 싸우다가 정치적으로 불리해지자 사라고사의 이슬람 왕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이슬람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용병이 될 정도였지요.  


기독교 세력이 진행한 스페인 재정복 전쟁, 즉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이슬람 세력의 분열 덕분에 확실한 성과를 차곡차곡 쌓았고, 13세기가 되면 어느덧 남부 그라나다 왕국을 빼고는 이베리아 반도는 대부분 기독교 세력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정복된 영토에서 차출할 수 있는 병력과 자원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라나다 왕국, 정확하게는 그라나다 토후국(Emirate of Granada)의 운명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남쪽에 찌그러진 그라나다 왕국에게, 저렇게 커다란 키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1482년부터 10년 간 이어진 그라나다 전쟁의 결과, 이슬람 에미르(Emir)인 무함마드 12세(Muhammad XII)는 알함브라 궁전을 포함한 그라나다 왕국 전체를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에게 넘기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걸린 67개 항복 조건 중 주요 내용은, 이슬람 교인들은 계속 그 종교와 사유 재산을 유지할 수 있고, 기존의 법과 질서에 따른 보호를 받게 되며, 또 원할 경우 10%의 통행세를 내면 재산을 모두 가지고 북아프리카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도, 강요에 의해 다시 기독교로 개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무함마드 12세 등 왕족들에게는 그라나다 바로 남쪽의 네바다 산맥 너머 지중해 인근 지역에 적절한 영지가 주어져 거기서 살게 되었지요.





(무함마드 12세가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에게 항복하는 장면입니다.  배경에 알함브라 궁전이 보입니다.)




무함마드 12세는 최후까지 항전할 용기는 없었던 망한 나라의 군주로서 용기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확실히 대단한 여장부였던 모양입니다.  원래 당시 항복할 때의 의례적 절차에 따르면, 패자는 승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항복하는 도시의 열쇠를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 12세의 어머니가 '절대 그런 치욕만은 참을 수 없다'라고 강경하게 버틴 덕분에 무함마드 12세는 그냥 열쇠만 바치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레온(Leon)의 주교가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로 내려옵니다.  또 당시 현장에는 인도로의 서쪽 항해 계획에 대해 승인을 받으려 이사벨라 여왕을 쫓아다니던 콜럼부스도 있었다고 합니다.  


알함브라의 항복에 얽힌 이야기 그 다음은 전설입니다.  무함마드 12세가 그에게 배정된 영지로 식솔들과 함께 그라나다 남쪽으로 넘어가는 어느 고개 정상에 이르자, 무함마드 12세는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두번 다시 못 볼, 그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그렇게 그의 눈에 들어온 궁전과 그라나다 시의 애틋한 모습에 그는 끝내 탄식을 뱉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장부이던 그의 어머니가, 요즘 같으면 남녀 성차별이라고 지탄받을 그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네가 남자답게 지키지 못한 것을 돌아다 보며 이젠 여자처럼 우는거냐 ?"







무함마드 12세가 이렇게 알함브라를 돌아본 고갯길은 Suspiro del Moro (무어인의 탄식)이라는 로맨틱한 이름이 붙였졌습니다.  이번에 알함브라에 갈 때, 일부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며 그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냥 도로 위의 한 표지판만 있더군요.  차를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고갯길에서 일부러 천천히 차를 몰며 바라다 보았지만 시야에 알함브라가 분명히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아쉽더군요.






이 무함마드 12세는 한동안 네바다 산맥 남쪽에서 살다가, 결국 당시 모로코를 통치하던 마라니드 왕조에게 탄원한 뒤 모로코로 넘어가 지금도 관광도시로 유명한 페스(Fes)에서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약 100년 뒤, 그의 자손을 페스에서 만난 어떤 스페인 여행가는 그 자손들은 빈곤 속에 살고 있더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쓸쓸한 전설 속에 탈환된 알함브라 궁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나 세비야의 알카사르 등 이슬람 궁전들을 접한 스페인 군주들은 이슬람 건축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은 이슬람 양식으로 자신의 궁정을 장식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발전된 이슬람 양식을 무데하르(Mudéjar) 양식이라고 합니다.  원래 무데하르는 아랍어로 '길들여진'이라는 뜻인데, 이슬람 축출 이후로도 스페인에 남아 이슬람 신앙을 유지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 매력에 흠뻑 빠진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궁전이 되었고, 그들은 아랍 양식을 살리면서도 일부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보수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 벽에 '알라 외에 승자는 없다' 등 근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볼 때 불온한 글귀가 벽면에 새겨진 방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그대로 놓아두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아랍어를 읽을 수 없었으니 상관없을 수도 있었겠네요.  콜럼버스가 마침내 신대륙으로의 항해를 승인 받은 것도 알함브라 궁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데하르 양식이 발전한 것은 대항해 시대로 스페인에 금은이 쏟아져 들어올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스페인의 국운이 점점 몰락하면서, 옛 이슬람 왕궁들은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고, 알함브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는 폐허가 되어 그 아름다운 파티오(patio, 건물로 둘러싸인 안마당)들에는 온갖 쓰레기더미가 가득 쌓이게 되었고, 노숙자들의 쉼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알함브라의 벽 아래에서의 판당고' 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작가는 나폴레옹 직속의 지도 제작가이자 화가인 바클레르-달브 Bacler d’Albe 입니다.  아마 달브가 이때는 세바스티아니의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나 봅니다.)




그런 알함브라가 다시 빛을 본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덕분이었습니다.  1810년 1월 28일, 본격적으로 스페인을 침공하던 프랑스군 중 일부는 마침내 그라나다 시까지 몰아닥쳤고, 그라나다 시는 2년간 프랑스군 점령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프랑스군 부대를 지휘하던 것은 오라스 세바스티아니(Horace Sebastiani) 장군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원래 오스만 투르크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꽤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외교관으로서는 능력있는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군 지휘관으로서는 영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교양있는 외교관에 가까웠던 이 사람이 그라나다에 온 것이 알함브라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점령군 지휘관이 아니었지만, 황폐화되어있던 알함브라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대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알함브라를 프랑스군 사령부로 삼고 내부를 청소했으며, 알함브라의 일부인 알카사바(Alcazaba) 요새를 보수했습니다.  그렇다고 세바스티아니가 문화재를 보존하려는 문화 애호가만은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를 군사 요새화하기 위해 일부 건물을 부수고 개조하기도 했으니까요.  게다가 알함브라 내에 자리잡고 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convento de San Francisco)은 그 내부 장식물은 물론 청동으로 된 종들까지 모두 징발당하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알함브라 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나스르 궁전(Palacios Nazaries)은 완전히 보수되어 말끔히 청소가 되어, 다시 그 분수에는 물이 흘렀고 정원에는 꽃이 심겨졌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이 근 200년 만에 다시 아름다움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에 좋은 일만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1812년 9월, 전세 악화로 프랑스군이 그라나다에서 철수하게 되자, 이들은 방어 진지를 고스란히 스페인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면서 알함브라의 일부 탑을 폭파한 것입니다.  바로 다음날 그라나다에 진입한 스페인군은 알함브라 궁전 내의 감옥에 갇혔던 스페인 포로들을 석방했고, 대신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 병사들을 쳐넣었습니다.  이 스페인군의 지휘관인 바예스테로스(Francisco Ballesteros) 장군은 이 프랑스군 포로들에게 노역을 시켜 프랑스군이 폭파한 잔해를 치우게 했습니다.  이후 알함브라는 과거 스페인의 황금 시대를 상기시키는 역사적 현장으로 관심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인과응보였는지 역사의 블랙 유머인지 모르겠으나, 징발당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의 종들은 1818년 프랑스군으로부터 노획했던 24파운드짜리 대포를 녹여서 새로 주조되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를 훼손했다고 비난하지만, 19세기에 알함브라를 여행하며 그 존재와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던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은 프랑스군 덕분에 알함브라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썼던 것입니다.





(포도주의 탑 Torre del vino 꼭대기에서 바라본 네바다 산맥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터도 아주 좋더군요.  부동산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정말 아름다왔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은 아닙니다.  오른쪽의 창문이 많은 유럽식 건물은 후세에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입니다.  나머지 왼쪽에서 중앙,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긴 건물이 나스르 궁전입니다.)



Source :  http://revistadehistoria.es/la-alhambra-tras-la-ocupacion-napoleonica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XII_of_Granada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Granada_(1491)

https://en.wikipedia.org/wiki/Alhambra

https://en.wikipedia.org/wiki/Granada_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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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
잡상2017.01.08 14:13

저는 건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이번에 처음 본 카사 바트요와 카사 미야 등 가우디가 지은 작품에서도 뭔가 해괴하다는 느낌 외에는 사실 별로 받은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가족) 성당, 특히 그 내부를 보니 정말 대단하다 멋있다 굉장하다라는 느낌이 확 들었습니다.  원래 카톨릭 성당이라는 건물은, 과거 기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농민들에게 경외감을 불어넣고, 또 문맹인 사람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알려주기 위해 많은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하지요.  이번에 느낀 건데, 제가 그런 웅장한 종교적 상징에 약한가 봅니다.  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부분이, 가우디 사후에 지어진 서쪽 벽면인 고난의 문(Passion Façade) 쪽이었습니다.  이유는 거기에 큰 S자 모양으로 배치된 예수의 고난 이야기 조각상들 때문입니다.






(Passion Facade 입니다.  특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 상에서, 십자가가 그냥 건축용 H빔으로 되어 있는 것과, 예수가 완전 나체로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 말이 많으며, 교내의 토론 결과에 따라 이는 나중에 고쳐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래 부분, 골고다 언덕 길에서의 베로니카 성녀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은 바로 가우디의 옆 얼굴입니다.)





여기에는 최후의 만찬부터 예수에게 키스하는 유다, 예수를 3번 부정하는 베드로며, 심지어 예수의 옷을 놓고 도박을 하는 로마 병사들의 모습까지 나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빌라도의 심판 부분입니다.  특이하게도, 거기엔 한 장면에 빌라도가 두 번 나옵니다.  한번은 죄가 없어 보이는 예수의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빌라도가 고민하는 모습이고, 다음에는 빌라도가 등을 돌리고 손을 씻는 모습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분들도 아마 빌라도가 손을 씻는 장면의 의미를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바로 책임 회피입니다.


http://nocr.net/index.php?document_srl=25614&mid=koreasy 에서 보시지요.



27:23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그러자 사람들은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27:24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을 떠다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 너희가 알아서 해라.” 





여기서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종교 재판인 산헤드린 회의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하고도 헤롯 왕에게 끌고 갔다가 다시 굳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은 당시 사형 집행 권한이 오직 로마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쥔 문명국이었던 로마가 각 지방 속주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도 로마 제국 내 그 속주민들의 최소한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즉,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는, 만약 예수에게 죄가 없다면 그의 목숨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떼로 몰려와 '자신들의 종교를 모독한 예수를 처형해달라'고 난동을 부리자,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예수를 위해 굳이 말썽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중대한 직무 유기이고, 괜히 손을 씻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런 책임을 지기 싫었다면, 총독 자리를 맡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처럼 평소 온갖 권력의 특혜를 다 누려놓고 정작 중요한 문제가 생기자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책임이 없습니다'라는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 회피와 거짓 증언이 난무할 때, 저렇게 빌라도가 뒤돌아서서 손을 씻는 모습의 조각을 보니, 제게 더욱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아마, 가우디의 뜻을 이어 고난의 문 조각을 담당한 수비락스(Josep Maria Subirachs)가 굳이 빌라도를 두 번 출연시킨 것도 그런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문제의 장면은 사실 4대 복음서에 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주로 해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쓰던 헬라어(그리스어)로 쓰인 마태복음에서는 기독교와 로마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유대 지방에 있는 근본주의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저 윗 구절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경향이 좀 지나치게 드러납니다.



27:25 사람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지겠습니다.” 



이건 제가 어릴 적 성경을 읽으면서도 '세상에 어떤 부모가 그 저주를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들까지 가져가겠다고 맹세를 한단 말인가, 믿기 어렵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유대민족은 '예수님을 살해한 민족'이라는 저주를 받으며 2천년 동안 유럽에서 갖은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성서도 사람이 쓴 것이고, 당연히 그 작가에 따라 어떤 의도가 들어갔다고 해석하면 이야기가 쉬운데, '성경은 한글자한글자 하나님의 신비한 힘을 받아 씌여진 것이므로 단 한글자도 잘못된 것이 없다'라고 믿는다면, 여전히 유대인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저주받은 운명을 지고 있는 것이 됩니다.  제가 신심이 약해서 그렇겠습니다만, 저는 수긍하기가 어렵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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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s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