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sica의 뜻은 ?



'맘마미아'라는 영화는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팝 그룹 아바(ABBA)의 대표곡들을 모아서, 뮤지컬로 제작한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 가사의 내용과 영화 줄거리를 정말 잘도 끼워맞췄구나라고 감탄을 했었습니다.


아바는 70~80년대 초까지 활동했던 그룹이라서, 저는 중학교 정도 때 주로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형편없습니다만) 그때 영어 실력으로는 가사는 거의 들을 수가 없었지요.  저는 중학생 때 생각하기를, '나중에 대학가면 이런 노래 가사도 다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영어 실력이 좋아지겠지' 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OTL)


최근에 본 그 '맘마미아'라는 영화 때문에, 문득 생각이 나서 아바의 히트송 CD를 찾아서 퇴근 시간에 들어보았어요.  지금 들어도 노래가 다 좋더군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영화 속에서 왠만한 노래들은 거의 다 나왔는데, 아바의 대표적인 명곡 중 하나인 '페르난도 (Fernando)'가 빠졌더군요.  그 생각을 하면서 '페르난도'의 가사를 유심히 듣다 보니, 그 가사가 예전에 제가 영어 실력이 더 나빴을 때 막연히 생각했던 그런 종류의 가사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냥 페르난도라는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낸 여자가 '사랑은 깨어졌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뭐 그런 내용의 가사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좀 나아진 영어 실력으로도 100% 다 알아듣지는 못해서,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가사 내용이 이랬습니다.




"Fernando"


Can you hear the drums Fernando?

북소리가 들리니, 페르난도 ?


I remember long ago another starry night like this

지금처럼 별이 빛나던 오래전 밤이 생각나는군.


In the firelight Fernando

불빛 속에서 페르난도 자네는


You were humming to yourself and softly strumming your guitar

부드럽게 기타를 튕기며 나지막히 콧노래를 불렀지


I could hear the distant drums

내겐 머나먼 북소리가 들려왔어


And sounds of bugle calls were coming from afar

집합 나팔 소리도 멀리서 들려왔었지


 


They were closer now Fernando

이제 그들이 더 가까이 온 것 같았어, 페르난도


Every hour every minute seemed to last eternally

매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었지


I was so afraid Fernando

난 정말 무서웠어, 페르난도


We were young and full of life and none of us prepared to die

우리는 모두 젊음과 희망으로 가득찬 나이였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지 


And I'm not ashamed to say

이런 고백한다고 부끄럽지는 않아


The roar of guns and cannons almost made me cry

그때 총과 대포 소리에 겁에 질린 난 울기 직전이었어


 


There was something in the air that night

그날 밤 분위기에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지


The stars were bright, Fernando

별은 정말 밝게 빛났어, 페르난도


They were shining there for you and me

자네와 나를 위해 빛나고 있었지


For liberty, Fernando

그리고 자유를 위해서도, 페르난도


Though we never thought that we could lose

우리가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There's no regret

후회는 없어


If I had to do the same again

또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I would, my friend, Fernando

친구, 난 다시 싸울 거야, 페르난도


 


Now we're old and grey Fernando

이제 우리는 노인이 되었네 페르난도


And since many years I haven't seen a rifle in your hand

자네가 손에 총을 쥔 것을 본 것도 한참 전의 일이야


Can you hear the drums Fernando?

북소리가 들리니, 페르난도 ?


Do you still recall the fateful night we crossed the Rio Grande?

우리가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넜던, 그 불길했던 밤이 생각나니 ?


I can see it in your eyes

난 자네 눈빛에서 아직도 읽을 수 있어


How proud you were to fight for freedom in this land

자네가 이 땅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어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지 말일세



후렴


 

(노래와 동영상을 듣고 싶으신 분은  https://youtu.be/dQsjAbZDx-4  클릭)


 


이건 전쟁에 대한 노래더군요.  오래 전의 전쟁에 참전했던 친구들이, 패배했던 전투의 기억을 상기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런 댄스 그룹이 전쟁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




이 노래의 배경이 된 전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   친구의 이름이 페르난도라는 것과, 저 리오 그란데 강이라는 지명을 보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멕시코와 미국간에 있었던 전쟁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 가사를 보면, 주인공과 그의 친구 페르난도는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넜던 모양이군요 ?  리오 그란데 강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선이고, 지금도 수많은 밀입국자들이 밤에 몰래 건너는 강입니다.  저 가사를 보면 멕시코군이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북진했던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지요 ?  과연 그랬을까요 ?


아시다시피, 원래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유타, 아리조나, 텍사스 등 미국 남서부 지방 대부분의 땅은 미국 땅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팽창하면서 무력으로 빼앗은 땅이지요.  그 전에는 누구의 땅이었을까요 ?  글쎄요, 임자가 없는 땅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멕시코 땅으로 인정되었습니다.


1846년부터, 미국은 캘리포니아 일대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탐험' 명목 하에 군사적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또 상당수의 미국 민간인들도 캘리포니아의 자연 조건에 이끌려 이주를 해왔습니다.  사실 그 지방 일대에는 광활한 면적에 비해 인구 밀도 자체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멕시코가 무력으로 지킬 수 있는 땅은 아니었지요.


아무튼 미국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선은 리오 그란데 강'이라고 주장하며, 1846년 당시 멕시코 영토이던 텍사스의 리오 그란데 강 북쪽에 Fort Texas라는 요새를 구축하기에 이릅니다.   이 요새를 아리스타(Arista) 장군의 멕시코군이 포위하면서 충돌이 시작됩니다.  미국은 재커리 테일러(Zackery Taylor) 장군이 기병과 포병을 이끌고 포트 텍사스를 구원하러 나섰고, 아리스타 장군의 멕시코군도 기다리지 않고 그를 요격하려 북진합니다.  





(이 전투는 Resaca de la Palma 전투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멕시코군은 미군의 상대가 되질 못했습니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한 멕시코군은 미군의 추격을 받으며 어지러이 흩어져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남쪽으로 후퇴합니다.  이렇게 허겁지겁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많은 멕시코 병사들이 익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 노래 가사 중에, "우리가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넜던 그 불길했던 밤" 이라는 구절이 설명이 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전투는 그림에 나온 것과 같은 양상을 보였습니다...)





전체적인 전쟁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습니까 ?  전쟁의 시작이 되는 이 전투만 봐도 아실 수 있듯이, 멕시코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수도인 멕시코시티까지 점령당한 뒤, 결국 미국이 원하던 대로 현재의 미국-멕시코 국경이 정해집니다.  이 전쟁과 또 그보다 2년 전의 텍사스 독립 전쟁을 통해서, 멕시코는 전체 영토의 2/3를 잃는 치욕을 당합니다.  멕시코가 패배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멕시코 정부의 분열과 전쟁 한가운데 벌어진 쿠데타 등 멕시코 자체적인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 1846~1848년 전쟁으로 멕시코가 빼앗긴 땅.  그 옆의 텍사스는 2년전에 이미 빼앗겼지요.)




하지만 이렇게 대략적인 전쟁 결과를 보고 나면, 저 ABBA의 노래 가사 중에 전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I can see it in your eyes

난 자네 눈빛에서 아직도 읽을 수 있어


How proud you were to fight for freedom in this land

자네가 이 땅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어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지 말일세




대체 저 전쟁의 어느 부분이 '자유를 위한 싸움'이었을까요 ?  왜 페르난도는 이렇게 굴욕 뿐이었던 전쟁에 참전했던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일까요 ?


애초에 멕시코 땅이던 캘리포니아에 미국인들이 몰려와 살기 시작할 때, 멕시코 정부는 이들에게 2가지를 강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카톨릭으로 개종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노예제 금지'였습니다.  첫 부분은 다소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두 번째는 바로 이 전쟁의 핵심이었습니다.





(Fort Texas에서의 포위전... 왼쪽의 팻말은 사실 Death or Victory가 아니라, "노예가 아니면 죽음"을 입니다.)




당시 미국은 이미 북부의 공업주의자들과, 남부의 농업주의자들로 서서히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부의 농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필요했는데, 바로 새로운 토지와 노예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정당 중 민주당(Democrats)은 남부의 노예 농장주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휘그당(Whigs)은 미국의 발전은 영토의 확장보다는 산업의 내실을 다져야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었으며, 무엇보다 노예제도에 반대해습니다.  그리고, 당시 멕시코 전쟁을 일으킨 포크(James Polk) 대통령은 바로 민주당 출신이었습니다.





(이런 노예들로 캘리포니아를 가득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American Dream !)




간단히 말하면, 미국은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네바다 등의 광활한 영토를 새로 획득하여, 여기에 새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끌고 와서 노예 농장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멕시코인들은 그에 반발한 것이었고요.  실제로 이 분쟁 지역에는 멕시코인들이 그렇게 많이 살고 있지는 않았는데, 이들은 미국의 점령에 반발하여, 전쟁 중 역시 소수였던 점령군에게 저항하는 무장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대다수의 멕시코인들은 이런 전쟁의 배경을 알고 싸웠을까요 ?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쟁 중 미군 중에도 약 10% 정도의 탈영병이 나왔습니다만, 사실 미군은 그 이전의 평화 시기에도 탈영률이 약 14%일 정도였기 때문에, 탈영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멕시코군은 탈영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미국이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팽창주의에 젖어 있었던 것에 비해, 멕시코인들은 상당히 소박하게 살았던 모양입니다.   많은 멕시코 병사들은 자신의 마을과 농토에서 곧장 징집죈 농민들로서, 머나먼 캘리포니아가 노예 농장이 되건 관광지가 되건 사실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탈영률이 미군에 비하면 훨씬 많았습니다.  가령 미군이 가장 고전했던 전투인 부에나 비스타(Buena Vista) 전투의 경우를 보면, 멕시코의 산타 아나(Santa Anna) 장군이 출발할 때는 2만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별로 길지도 않은 행군 끝에 전투를 벌이려고 보니 남은 1만 5천명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영웅인지 간웅인지 독재자에 배신자인지... 산타 아나 장군)




그런 와중에, 정말 자유의 땅인 캘리포니아가 노예 농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끝까지 미군에게 저항했다면, 그거야 말로 정말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노래 가사대로, 비록 졌더라도,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다시 싸울 만한 일이지요.


당시 미국에서도 이 전쟁의 부당성에 반대하고 나섰던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주로 휘그당 정치인들로서, 그 중 하나가 바로 젊은 시절의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링컨은 분쟁 대상이었던 영토가 이미 수세기 동안 멕시코의 땅이었던 곳이라면서, 미국인들에게는 이미 넓은 영토가 있으며, 더 많은 땅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이 전쟁에 분명히 반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 영토로 새로 편입된 캘리포니아나 네바다 주에 대해서, 휘그당원들은 '새로 편입된 영토에서는 노예제를 금지한다'라는 법안을 만들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세종대왕, 에브럼즈 링컨)




링컨 뿐만이 아닙니다.  훗날 남북 전쟁에서 북군 사령관을 지냈고 훗날 미국 대통령까지 된 율리시즈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도 젊은 시절 이 전쟁에 참전했었는데, 그는 회고록에서 '이 전쟁이야 말로 부당함의 극치로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전형적인 유럽 군주국들의 전쟁과 같은 것이었다'며, '남북 전쟁은 사실 이 전쟁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미국의 전횡에 대한 일종의 천벌'이라고 썼습니다.





(1861년, 준장이던 Ulysses S. Grant)




그 뿐만 아닙니다.  유명한 미국의 문필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도 이 전쟁에 강력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장군도 정치가도 아닌 그로서는 전쟁에 반대할 만한 별다른 수단이 없었지요.  그래서 그는 노예제를 위한 전쟁에 쓰이게 될 세금을 낼 수 없다며 세금을 내지 않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그의 친척이 세금을 대납해주어 풀려났다고 합니다.)  그는 결국 이 전쟁에 대한 역겨움의 표시로서, 유명한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Henry David Thoreau, 제가 학교 다닐 때 영문학과 여학생들이 많이 들고 다니던 Walden이라는 책의 저자입니다.)




이 전쟁이 있은지 약 130년 뒤에, 스웨덴의 팝 그룹이 'Fernando'라는 노래를 미국에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미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과연 미국인들은 이 노래에 담긴 역사를 알고 이 노래에 열광했을까요 ?  Google에서 ABBA, Fernando, Mexican-American War를 넣고 검색해보면, 글쎄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에 얽힌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원래 Fernando는 스웨덴 솔로 활동 시절 프리다가 부른 히트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ABBA는 이런 가사의 노래를 만들었을까요 ?  글쎄요, 그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Frida (검은 머리 여자)가 스웨덴에서 싱글로 활동할 때 불렀던 곡을 다시 만든 것으로서, 원래 스웨덴어로 된 노래 가사는, 제가 영어를 잘 몰랐던 시절에 가졌던 느낌 그대로, Fernando라는 연인과 헤어진 다음의 심경을 노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노래 가사를 이렇게 의미심장한 것으로 바꾸었는지는, ABBA 만이 알고 있겠지요.   참고로, Fernando라는 이름은 '용기를 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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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슬리의 영국군이 도우루 강 남안에서 강을 건널 방법을 못 찾고 당황하는 동안, 술트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5월 10일 도우루 강 남쪽에 있는 그리조(Grijó)라는 작은 마을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트는 비교적 여유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요 ?


그는 나름대로 안전조치를 취해놓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가 위치한 도우루 강 하구는 꽤 넓고 깊어서 사람이나 말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술트는 도우루 강 인근의 모든 바지선과 보트, 조각배들을 모조리 압류하여 북쪽 강변에 끌어다 놓은 상태였습니다.  영국군에게 날개 혹은 지느러미가 없는 이상, 도우루 강을 건너 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만 술트는 영국 해군을 걱정했습니다.  제해권은 영국에게 있으니, 당장 30km 밖 수평선 너머에 영국 프리깃함들이 호위하는 수송선들이 잔뜩 대기 중일 수도 있었습니다.  술트는 웰슬리가 선박을 이용하여 포르투 북쪽 해안 어딘가에 기습 상륙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트는 도우루 강 하구의 산토 조아오 다 포스(S. Joao da Foz) 요새에 수비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습니다.  술트는 전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며, 따라서 이젠 후퇴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정확히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짐을 싸고 있었고 이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강남에 영국군이 나타난 5월 10일 다음날인 5월 11일, 술트는 이미 짐마차와 포병대를 메르메(Julien Augustin Joseph Mermet) 장군의 1개 사단과 함께 스페인으로 후퇴시켰습니다.




(메르메 장군입니다. 원래 귀족의 아들이었고, 오슈(Hoche) 장군 밑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는 네 원수가 나폴레옹 편에 서서 군을 지휘하라고 종용했으나 그 명령을 거부하고 부르봉 왕가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강 남안에 2만이 넘는 영국군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배들을 모조리 북안에 끌어놓았다는 것만 믿고 강변에 경계 병력을 전혀 세워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일인데, 술트처럼 수많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이 이런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주민들이 프랑스군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지요.  어쩌면 그는 일부 영국군이 건너온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보트로 수십 명씩 넘어올 수 밖에 없으므로, 프랑스군이 뒤늦게 그를 알게 되더라도 신속하게 전개하여 아직 수백 명 수준일 영국군을 잽싸게 포위하고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정작 영국군은 강변에 도착한지 하루가 지나도록 정말 아무 것도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술트의 생각대로 영국군에겐 강을 건널 방법이 전혀 없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100%라는 것은 없습니다.  5월 12일 아침,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강변을 수색 중이던 워터스(John Waters) 대령에게 웬 포르투갈 이발사 하나가 다가 왔습니다.  워터스 대령은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해보니 그 이발사는 포르토 시내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프랑스군의 침공과 약탈을 피해 피난 나왔다가, 강 남쪽에 영국군이 왔다는 것을 알고 2~3인용 낚시배 하나를 저어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낚시배 하나로는 병력을 실어나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발사에겐 결정적인 소식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지 않는 강 북안에 와인 수송용 바지(barge)선 몇 척이 있는 곳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발사와 함께 워터스 대령은 그 조각배를 타고 강 북안으로 넘어갔고 실제로 바지선들과 그걸 지키고 있던 현지 주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워터스 대령과 이발사는 마침 현장에 있던 신부의 도움을 받아 그 주민들을 설득, 그 바지선들을 끌고 남안으로 끌고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을 실어날랐을 도우루 강의 와인 수송용 바지선입니다.  저 정도면 한번에 30~40명은 실어나를 수 있겠네요.  바지(barge)선이란 강이나 호수 등 파도가 잔잔한 곳에서 사용되는 평저선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돛대나 엔진이 없어 자력으로 항행하지 못하고 다른 배에게 끌려다니는 배를 말하지만 자력 항해를 하는 평저선도 바지선이라고 부릅니다.)




때는 해가 훤히 뜬 대낮이었습니다.  이들이 약 45m 정도 되는 도우루 강을 가로질러 바지선들을 끌고 가는 모습은 양쪽 강변에서 훤히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배들이 남쪽 강변에 모인 영국군들을 잔뜩 싣고 북안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강북의 프랑스군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영국군 1개 중대가 재빨리 강을 건넜고 강변에 있던 수도원 건물을 점령하고는 돌로 된 벽 뒤와 지붕, 창문 등에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프랑스군도 영국군이 도강 중이라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달려왔을 때는 이미 1개 대대 전체가 수도원에 위치를 잡은 상태였습니다.


아침 11시 30분, 헐레벌떡 달려온 프랑스군의 지휘관은 막시밀리앙 포이(Maximilien Foy)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술트에게 전갈을 보낸 뒤 급한 대로 3개 대대의 보병을 이끌고 달려왔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3대1의 수적 우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튼튼한 돌담이 둘러쳐진 수도원은 막강한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이 비록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미숙한 군대라고는 하지만, 막강 프랑스군에 비해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영국군은 기동성이나 전술적 유연성, 병사들의 자율성이나 인내심, 동기 부여 등 모든 면에서 있어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비해 떨어지는 군대였습니다.  보통 직업 군인인 모병제 군대가 강제로 끌려온 병사들로 이루어진 징병제 군대보다 전투력이 우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그 지휘관인 웰슬리조차 '술 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녀석들'(the scum of the earth, enlisted for drink)이라고 부를 정도로 형편없는 자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민간 사회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입대한 빈민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군에 잉글랜드 출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잉글랜드인들과 그 왕 조지 3세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아일랜드인들이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1/3은 독일인들과 스코틀랜드인으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1/3 정도만 잉글랜드인이었으나 그마저도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사회 최하층민들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사회 지배 계급이었던 장교들은 자기 부대의 병사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당근으로는 럼주를, 채찍으로는 사람 등가죽을 홀랑 벗겨놓는 무지막지한 진짜 채찍질을 휘둘러 병사들을 통제했습니다.  그런 군대에게 다양한 전술을 이해시키고 자율성 및 전술적 유연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비해 우월한 것이 있었습니다.  돈이 많다보니 전체 유럽 군대 중에서 가장 많은 실탄 사격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탄약 뿐만 아니라 머스켓 소총의 부싯돌(flint)을 아끼기 위해 사격 훈련을 할 때 실탄은 커녕 공이치기에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끼워넣고 장탄 및 격발 훈련을 하는 것이 예삿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어지간한 2선 부대들도 실탄 사격 훈련만큼은 상당히 많이 할 수 있었고, 장교들도 병사들에게 다른 것은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그저 빨리 장전해서 빨리 쏘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어차피 저 신뢰할 수 없는 병사들에게 명중률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군 병사들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전투가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실제로 포이 장군의 프랑스군이 수도원을 향해 돌격을 해보니, 빗발처럼 날아드는 영국군 머스켓 소총 세례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포이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많은 사상자만 남기고 프랑스군은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여기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국군은 계속 바지선을 통해 수십 명씩 증원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잘못 하면 스페인으로의 후퇴길이 막힐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3개 대대를 더 끌고 와서 다시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때 즈음 해서는 영국군도 2개 대대가 더 넘어와 3개 대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번에도 무의미한 희생만 낸 채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꽃중년이 막시밀리앙 포이 장군입니다.  그는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사관학교 출신의 몇 안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쥐노의 제1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고, 웰슬리와 싸운 비메이로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번 포르투 전투에서도 웰슬리와 싸워 또 부상을 입었지요.  나중에 술트의 제3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는데, 웰링턴과 싸운 부사코 전투에서 또 부상을 입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 편에 서서 웰링턴과 싸운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거기서도 부상을 당했고, 그게 평생 입은 15회의 부상 중 마지막 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젠 술트도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바삐 움직였습니다.  그는 강변 다른 곳에 모아놓은 바지선들을 지키기 위해 배치했던 부대까지 불러 들여 황급히 영국군을 상대하게 했는데. 이것이 더 나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영국군이 쳐들어온 것을 알게 된 포르투 주민들이, 프랑스군이 물러가자마자 바지선들을 몰고 강남으로 넘어와 영국군을 실어나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술트는 정신을 차렸는지 비로소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과감히 결행합니다.  수도원에 쳐박혀 시시각각 증원되는 영국군을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북동쪽 스페인 방향으로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영국군은 총 2만에 가까운 병력으로서 시시각각 증원되고 있는데, 이미 어제부터 철수를 시작했던 프랑스군은 포르투 시내에 고작 1만2천 정도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미련을 두지 않고 철수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포르투 전투 상황도입니다.  저 멀리 동쪽에 머레이 장군의 사단 약 3천이 아빈타스 쪽에서 강을 건넌 것을 보실 수 있는데, 머레이 장군은 자신의 병력만으로는 후퇴하는 술트의 군단을 막아서기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는지 술트의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웰슬리도 술트 못지 않은 명석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술트가 택할 길은 후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그의 목표를 술트를 단순히 포르투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술트 군단의 격멸로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웰슬리는 미리 약 1만 규모의 영국군과 포르투갈군을 베레스포드(William Carr Beresford, 1st Viscount Beresford) 장군 지휘 하에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훨씬 더 동쪽의 도우루 강 상류로 보내 거기서 도하한 뒤 프랑스군의 퇴로를 끊도록 해놓았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도 추격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확실히 프랑스군에 비해 너무나 느렸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는 결국 술트의 군단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술트는 이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600명의 사상자와 무려 1500명의 포로를 내며 도망치듯 후퇴했습니다.  영국군의 피해는 고작 100여명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이렇게 체면이고 뭐고 아랑곳 하지 않고 서둘러 후퇴한 덕분에 프랑스군은 베레스포드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봉쇄에 걸리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 산악지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신 술트는 58문의 대포 전체와 군용 금고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부상자들도 포기해야 했지요.  산악지대로 들어갈 때는 짐마차는 모두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이때의 사건을 소재로 한 버나드 콘월(Bernard Cornwell)의 소설 Sharpe's Havoc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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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들에게는 배낭과 잡낭에서 식량과 탄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어떤 장교들은 검열을 실시하여 이번 원정에서 병사들이 얻은 약탈물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부대가 산 위로 올라가는 길 가에 은제 포크와 나이프, 촛대, 접시 등이 버려졌다.  대포와 마차, 탄약 수송차 등을 끌던 말과 황소, 노새는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두 사살했다.  짐승들은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걸을 수 없는 부상자들은 짐마차 속에 그대로 남겨졌는데, 곧 그들을 찾아와 복수를 시도할 포르투갈 민간인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 최소한의 시도는 해볼 수 있도록 머스켓 소총도 주어졌다.  술트는 군자금 금고, 즉 은화가 가득한 11개의 커다란 통을 길 가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병사들이 한줌씩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여자들은 치마를 펼쳐 한웅큼 은화를 퍼담고는 병사들과 함께 걸어갔다.  용기병과 경기병, 엽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걸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황량한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고, 그 뒤로는 와인과 포트 와인, 교회에서 약탈한 황금 십자가와 북부 포르투갈의 대저택에서 훔친 오래된 그림들이 실린 짐마차들이 버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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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술트와 프랑스군의 고생과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점령지역인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험난한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했는데, 곳곳에서 험한 협곡과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허술한 다리들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산악 지대는 포르투갈 민병대인 오르데난사(Ordenança)들이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까마득한 계곡 위에 걸린 좁고 허술한 다리 너머를 한줌의 포르투갈 민병대가 지키고 있다면 아무리 프랑스군이 대군이라고 해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의 발이 묶인 사이, 느리긴 해도 나름대로 서둘러 웰슬리의 영국군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술트와 그의 군단은 결국 이렇게 포르투갈 산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술트 군단 전체가 전멸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용감무쌍한 한 남자 덕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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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몇 언론에서 '주한미군에게 난연(flame-resistant) 군복을 지급할 계획이며, 이는 한국에서 곧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라는 취지의 보도를 했습니다.




http://www.segye.com/newsView/20180202004289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09&news_seq_no=3448676


"주한미군사령부가 불에 잘 타지 않는 '난연전투복'을 주한미군 전원에게 지급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관련 업체에 주문한 것으로 1일 알려졌습니다. 난연 전투복은 미군이 2006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병을 폭발 화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주한미군의 이번 결정은 유사시 한반도에서 무력충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전 준비에 나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옵니다."


반면 '민중의 소리'라는 매체에서 아래와 같은 반박 보도를 내기도 했고, 헤랄드경제 인터넷판에서도 같은 취지의 보도를 했습니다.  


http://www.vop.co.kr/A00001250287.html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80202000531


"주한미군 관계자는 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주한미군사령부가 불에 잘 타지 않는 난연(難燃·Flame Resistant) 전투복을 주한미군 전원에게 지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는 보도와 관련해 “(직업군인인) 미군에게 지급한다는 자체가 틀린 명백한 오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주한미군의 이번 결정은 유사시 한반도에서 무력충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전 준비에 나선 것이라는 관측을 낳고 있다”는 내용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자주 군복을 교체한다”면서 “모두 미군(개인)이 자체 구매하는 것이고, 주한미군이 독립해서 특수복을 지급하는 계획은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어느 쪽 보도가 맞는 말일까요 ?   만약 이것이 미군의 북침 작전 조짐이라면, 주한미군 측에서야 작전 보안상 당연히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한미군 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민중의 소리 기사 중에서, “(직업군인인) 미군에게 지급한다는 자체가 틀린 명백한 오보”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건 미군 군복의 구매 절차에 대해 잘 모르는 기자가 낸 오보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자랑은 결코 아니지만) 저는 약 25년 전에 카투사로 복무를 했습니다.  그때 매우 신기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가, 미군은 군복을 '지급'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내고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군 기지마다 '군복 상점'이 있고, 미군들은 거기서 군복과 군화, 군모 등을 돈을 주고 삽니다.  세상에, 군복을 돈 주고 사입어야 한다니 !  무슨 놈의 군대가 이렇단 말입니까 ??


그런데 의외로, 병사들이 자기 돈으로 군복을 사입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꽤 보편적인 일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병사들에게 군대가 일괄적으로 군복을 '지급'하는 것은 오히려 더 특별한 경우입니다.  우리나라는 징병제니까, 당연히 수건과 비누부터 시작해서 군복과 헬멧, 총기류는 물론 하루 세끼와 숙소까지 모두 군이 지급합니다.  그러나 미군은 모병된 직업 군인들입니다.  이들은 충분한 급여를 받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돈을 내고 군으로부터 구입하는 것입니다.  사실 군복 뿐만 아니라, 군 식당(dining facility 혹은 DFAC, 혹은 그냥 mess hall)에서 주는 식사에 대해서도 급여 공제의 형태로 별도로 돈을 냅니다.  물론 미군조차도 군인 급여라는 것은 결코 넉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군들에게는 군복을 사기 위한 수당(annual stipend for the purchase of uniforms and accessories)이 별도로 지급됩니다.   그럼 병영 막사에 대해서도 월세를 내냐고요 ?  제가 군 시절 미군하고 뭐 아주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라서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역시 급여에서 공제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매우 싼 가격이겠지요.  가족이 있는 경우 군 막사가 아니라 기지 밖 민간 숙소에서 지내는 미군도 꽤 많은데, 그런 경우에는 급여에서 막사 월세가 공제되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그 민간 숙소의 월세는 병사 개인 돈으로 지불해야겠지요.  


설마 그럼 M4 라이플 같은 개인 화기류도 자기 돈으로 구매하는 것이냐 라고 놀라시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군화와 군모(soft cap), 군복류는 피복류로서, 일종의 소모품이자 개인 소유물로 처리됩니다만, 총기는 물론 헬멧과 배낭, 탄띠 등은 소모품이 아니라 전투용 장비로 취급되고 군의 소유물을 병사들이 대여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려면 병사가 한 기지에서 다른 기지로 전출 가는 상황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경우 병사는 군복과 여별의 군화 등을 더플백에 넣어서 가되, 헬멧과 배낭, 총기류는 기지에 반납하고 갑니다.  헬멧과 전투용 배낭은 군 장비이고, 군모와 더플백은 개인 소유물인 셈이지요.





저 위 '민중의 소리' 기사에서 “(직업군인인) 미군에게 지급한다는 자체가 틀린 명백한 오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미군 당국이 병사들 개개인에게 군복을 지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소리이지요. 


그런데, 사실 그게 또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2001년부터 2014년까지의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및 평정 작전을 Operation Enduring Freedom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참전한 병력들에게는 저 위 세계일보 기사에서처럼 난연성 군복(Flame-resistant Army Combat Uniform, FRACU)을 지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마 공짜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일부 금액이 참전 병사들의 급여에서 공제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실전 투입에 따른 이런저런 추가 수당이 훨씬 많았을테니 별 티는 나지 않았겠지요.  참고로, 군모부터 전투복, 군화와 양말까지를 다 사려면 병사 개인은 대략 100달러 정도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주한미군 병사들에게 저 난연성 군복이 지급될 것이라는 뉴스가 반드시 오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미군 내에 정보원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저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오보라기보다는, 오해가 빚은 기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구글링을 해보시면 쉽게 공감하실 것입니다.  즉, 아래 미육군 신규 군복 교체 관련 공고와 기사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armyg1.army.mil/hr/uniform/docs/FRACU.pdf

https://www.armytimes.com/news/your-army/2015/06/01/camo-update-new-acus-hit-store-shelves-july-1/

http://www.hcdmag.com/ar-670-1/combat-uniform-ensemble/



요약하면, 미육군은 2015년부터 군복(Army Combat Uniform, ACU)을 작전용 위장복(Operational Camouflage Pattern, OCP)으로 교체하고 있습니다.  이건 일괄적으로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기지내 군복 상점에 배포되는 군복이 신상으로 바뀐다는 것 뿐입니다.  병사들은 기존 군복이 낡고 헤어져 새 군복을 살 때, 새로운 OCP 디자인의 ACU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ACU 교체 계획은 2019년까지, 무려 4년에 걸쳐 진행됩니다.  기존에 만들어 비축해놓은 기존 UCP(Universal Camouflage Pattern) 디자인의 ACU가 다 소진될 때까지 넉넉한 시간을 주는 것이지요.  이 기간 동안에는 새 군복과 예전 군복을 혼용해서 입는 것이 허용됩니다.  물론 2019년 이후에는 기존 UCP 디자인의 ACU를 입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윗 사진이 UCP이고 아랫 사진이 신규 OCP입니다.  뭐 민간인의 눈엔 둘다 그냥 군복일 뿐이지요.)




이 새 군복 프로그램과 난연성 군복은 무슨 상관일까요 ?  미군도 예전부터 난연성 군복, 즉 FRACU를 입었던 것은 아닙니다.  미군에게 난연성 군복이 지급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Operation Enduring Freedom 중이던 2010년부터였습니다.  그런데 그 효과가 좋았다고 생각되었는지, 불연성 면직과 나일론, 아라미드 섬유로 만들어진 FRACU를 이번 새로운 군복 프로그램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ACU와 난연성 FRACU가 군복 상점에서 시판됩니다.  또, 아프가니스탄 등지로부터 재배치되는 병사들에게, 현장에서 입던 FRACU를 새로 배치받은 기지에서도 평상 근무복으로 입을 수 있도록 허가하는 조치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난연 전투복 Flame-Resistant Army Combat Uniform, FRACU 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난연성 군복인 FRACU가 군복 상점에 배포되는 것은 미군이 2015년~2019년 사이에 진행 중인 새로운 군복 교체 프로그램의 일부일 뿐입니다.  주한 미군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전세계에 주둔한 모든 미군 기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올림픽 끝나면 전쟁 난다는 것은 근거없는 괴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FRACU가 일반 ACU보다는 비쌀 것이고, 따라서 병사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FRACU보다는 일반 ACU를 사려고 할 것 같습니다.  혹시 병사들에게 적어도 1벌의 FRACU를 갖추라는 강제 규정이 함께 내려졌는지 찾아보았으나, 그런 기사는 인터넷에는 뜨지 않네요.  글쎄요, 굳이 별도의 강제 지시가 없더라도, 전투시 자신의 생존에 대한 문제니까 더 비싸더라도 자발적으로 FRACU를 구매하는 병사들이 많을지도 모르지요.  





사족 1.   

미군은 돈을 내고 군복을 사입는다면, 카투사는 어떻게 하냐고요 ?  카투사도 같은 미군 군복 상점에 가서 군복을 삽니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1년에 한번인가 2년에 한번인가, 카투사 병사들에게도 거기서 군복류를 살 수 있는 일종의 포인트가 주어지고, 그 포인트를 현금처럼 사용하여 필요한 군복을 살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포인트로는 야전 상의 한벌 사기에도 불충분한 금액이었고, 그냥 군복 바지와 상의 정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족 2.  

망나니 미군 병사들이 군복 살 돈으로 술을 마셔버리고 그냥 낡은 군복을 입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될까요 ?  실제로 그런 케이스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런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낡은 군복을 입는다면, 평상 근무시 부사관에게 지적을 받을 것이고, 특히 1년에 한번 정도 있는 장비 검열 때 반드시 지적을 받게 됩니다.  직업 군인이니 그렇게 지적을 받는 것은 근무 평점에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니, 돈 몇 푼 아끼려고 무리하게 낡은 군복만 입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족 3.  

헬멧과 소총, 배낭 등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부대 소유 장비로서 전출시 반납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혹시 사용 중에 헬멧이나 배낭 등을 파손시키는 경우 병사 개인이 돈으로 변상해야 할까요 ?  제가 알기로는 변상해야 합니다.  그런 장비를 지급/반납하는 창고(이름이 기억나지 않네요)에서는 장비를 반납 받을 때 꼼꼼히 검사하여 파손된 부분이 없는지 조사하거든요.  물론 정당한 사유(fair wear & tear)인 경우에는 부대 지휘관이 승인하면 그에 대한 변제를 면제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마 소총도...??  제가 알기로는 총기 등의 무기류는 별도로 관리되며, fair wear & tear 이외의 파손이나 분실은 돈으로 변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군법회의감이라고...  그러니 군에 간 아들이 집에 전화를 걸어 'K2 소총을 망가뜨려 급히 돈이 필요하니 송금을 해달라'는 소리를 하면 그냥 매정하게 끊으시면 되겠습니다.


사족 4.  

역사적으로 군대가 군복을 지급하는 것이 더 드문 일이라고 했지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들은 갑옷과 방패, 창 등을 모두 개인 비용으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중세 영국에서 유사시 소집되는 농민병들도 무기와 장비를 자기 돈으로 마련해서 소집에 응해야 했고요.  제 기억으로는 어느 책에선가 그런 무기와 장비는 '따뜻한 누비옷과 철제 헬멧, 그리고 튼튼한 창 한 자루'라고 규정되었다고 읽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 시대 병사들은 자신의 비용으로 벙거지와 군복, 창 등을 마련해야 했다고 들었는데, 제가 그쪽으로는 잘 모르겠네요.


사족 5.  

제 블로그의 주제인 나폴레옹 시대는 어땠을까요 ?  모병제이던 당시 영국군은 최초 입대시 지급받는 군복류에 대해 모두 돈을 내야 했습니다.  물론 입대할 때 군복살 돈을 들고 입대해야 했던 것은 아니고, 급여에서 공제되었습니다.  심지어 전투에서 만약 머스켓 소총을 분실하거나 파손하면 그 비용도 급여에서 공제되었습니다.  물론 지휘관이 전투 상황상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인정해주면 면제를 받았지요.  징집제인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프랑스군은 직업 군인인 영국군의 약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았지만, 아무튼 급여를 받긴 받았거든요.  제가 전에 인용했던 당시 프랑스 징집병이던 쿠아녜의 회고록 중 아래 내용을 보시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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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진한 쿠아녜의 여단은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크레모나(Cremona)에 수비대로 주둔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쿠아녜는 난감한 일을 겪습니다.  수비대의 거처가 벼룩과 빈대가 들끓는 짚단을 쌓아놓은 곳이다보니, 이 해충에게 시달리던 쿠아녜는 군복 자켓에서 벼룩과 빈대를 없애겠다고 잿물을 만들어 자켓을 담궈놓습니다.  그러나 자켓이 너무 싸구려 원단으로 만든 것이었는지 아니면 잿물이 너무 강한 것이었는지, 안감만 남기고 자켓이 그냥 녹아버리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  당장 입을 옷이 없어진 쿠아녜는 글자를 아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고향 집의 아버지와 삼촌에게 편지를 각각 씁니다.  군복을 새로 살 돈을 조금만 보내달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늦게나마 착불 형식의 답장들이 왔고, 쿠아녜는 그 편지 2통 값으로 3프랑(약 3만7천원 정도)의 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글자를 아는 하사관에게 그 내용을 읽어달라고 하니, 아버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돈을 못보내겠다는 내용이었고, 삼촌은 세금을 방금 낸 상태가 돈이 한푼도 없다는 핑계로 역시 돈을 못보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쿠아녜는 크게 실망하고 삐져서, 두번 다시 아버지나 삼촌과는 편지를 주고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동료들에게 꿨던 우편비용 3프랑을 갚아야 했으므로, 1번에 15수(약 9천원 정도)의 가격으로 민치오 강변에서 동료들 보초 서는 것을 대신 서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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