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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 개발 이야기 (7) - 영국에는 육군도 있다! 로열 네이비가 모든 주요 군함에 레이더를 달기로 결정한 것이 1939년 8월 10일. 전에 언급했듯이 항공모함들은 워낙 바빠서 레이더를 달 짬을 내지 못했으나, 막 진수된 HMS Illustrious (사진1, 39년 4월 진수, 2만8천톤, 30노트)를 비롯한 신형 항모들에게는 레이더를 당연히 장착했고, 기존 항모들에게도 시간이 나는 대로 레이더를 장착. 이러고나자 1939년 9월 3일 WW2가 터짐. 당시 로열 네이비는 HMS Illustrious를 포함한 신규 항모들의 비행갑판을 3인치 두께의 장갑판으로 입혔음. 이유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아군 함대를 향해 날아오는 적 폭격기들을 원거리에서 포착할 방법이 없으니 제때 막아낼 방법이 없었던 것. 그래서 일단 내습하는 폭격기들의 폭탄을 두꺼운 장갑.. 2022. 10. 27.
뤼첸 전투 (8) - 짜르가 지휘하는 포병대 베르트랑이 이끄는 제4 군단 전력의 절반인 약 9천은 제12 사단 소속으로서, 바로 이들이 선봉에 서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이끌고 있던 것은 모랑(Charles-Antoine Morand) 장군이었는데, 타우차에서 스타지들 마을 사이의 중간 정도 지점인 포블스(Pobles)까지 가자 그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이 있었습니다. 베르트랑이 서쪽 측면에서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트겐슈타인이 4개 마을의 전투 현장 대신 부랴부랴 이쪽에 펼쳐놓은 빈칭게로더의 러시아 예비 기병군단 약 1만으로서, 거기에는 골리친(Dmitry Vladimirovich Golitsyn) 장군이 지휘하는 흉갑기병대와 수십문의 기마포병대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다른 사단들이 3km 후방에 따라오고는 있었지만, 비교적 평탄한.. 2022. 10. 24.
레이더 개발 이야기 (6) - 왜 기함에는 안 달지? 1935년, 로열 에어포스의 레이더 개발 소식에 자극을 받아 시작한 주제에 '멍청한 공군놈들 ㅋㅋㅋ'이라며 공군 레이더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며 호기롭게 시작한 로열 네이비는 곧 문제에 봉착. 일단 브리튼 섬 전체를 루프트바페로부터 지켜야 하는 공군과, 우리 배만 지키면 되는 해군의 압박감이 같을 리가 없었음. 레이더 개발에 정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공군에 비해 로열 네이비 수뇌부의 레이더 개발 지원은 상대적으로 빈약. 해군 연구팀의 연구원은 정말 1명 뿐이었는데, 이들은 포츠머스에 있는 해군 기지 HM Barracks의 해병대 막사 옆 오두막 같은 것을 연구실로 받음. 곧 1명을 더 받기는 했으나, 2명이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음. 이 두 명의 팀은 근 10개월만에 오두막 연구소 안에서 .. 2022. 10. 20.
뤼첸 전투 (7) - 오타(?) 하나의 결과 프로이센 사람들이 '이제 예비대만 투입하면 이길 수 있다'라며 아우성칠 때 비트겐슈타인이 반대로 철수를 결심한 것은 물론 나폴레옹의 큰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그 큰 그림 때문에, 격전이 벌어지던 4개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타우차(Taucha) 마을에 강력한 프랑스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날아들었습니다. 바로 베르트랑의 제4 군단이었습니다. 원래 라이프치히로 향하던 프랑스군이 일제히 진격 방향으로 바꾸자 원래 후위 부대였던 제4 군단이 이제는 우익이 되어 연합군의 좌익의 측면을 노리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4개 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그로스쉐콜롭(Großschkorlopp) 마을에도 역시 강력한 프랑스군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날아들었습니다. 원래 북서.. 2022. 10. 17.
레이더 개발 이야기 (5) - 공군과는 달랐던 해군 로열 에어포스가 레이더라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로열 네이비는 곧장 독자적인 레이더 개발을 시작. 외부의 시각으로 보면 '로열 네이비가 자존심 때문에 공군이 개발해놓은 것을 쓰지 않고 독자 개발을 선택하여 아까운 예산을 2배로 낭비한다'라고 볼 수 있는 대목. 그러나 이건 공군과 해군이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법으로 싸우는 조직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 일단 공군 레이더는 부동산 가격이나 전기 요금 신경을 안쓰고 원하는 대로 자원을 펑펑 쓰는 물건. 전파의 파장 길이를 탐지하려는 항공기 날개폭에 맞추는 것이 좋다? 그럼 그에 맞춰 25m짜리 안테나를 쓰면 됨. 높은 곳에 설치하는 것이 좋다? 높은 탑을 만들면 됨. 레이더 하나에 350kW의 전력이 필요하다? 메가와트급 .. 2022. 10. 13.
뤼첸 전투 (6) - 나폴레옹의 속셈 볼콘스키 대공은 원래 게으른 쿠투조프를 감시하고 독촉하기 위해 짜르가 쿠투조프의 참모로 알박기를 해놓은 짜르의 심복으롯, 누구보다 짜르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짜르가 지금은 자제하고 있지만 나중에 승리가 확실해지면 짜르 본인이 직접 러시아 예비군단의 선두에 서서 나폴레옹에게 막타를 쳐서 승리의 주역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토르마소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예비군단의 선두 부대의 지휘관은 코노브니친(Petr Petrovich Konovnitsin)으로서, 원래 쿠투조프의 참모였다가 볼콘스키 대공에 의해 교체된 인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코노브니친은 볼콘스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코노브니친도 쿠투조프 못지.. 2022. 10. 10.
레이더 개발 이야기 (4) - 로열 네이비, 레이더에 눈을 뜨다 WW1 중 1916년 5월 말의 유틀란트 해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로열 네이비를 상대로는 역시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독일은 하늘에서 길을 찾음. 우월한 성능의 Gotha 폭격기를 이용해 1917년 6월 13일 백주 대낮에 런던을 폭격한 것. 당시 영공 방어를 담당하던 육군항공대의 비행단에서 총 92대의 전투기들이 날아올라 고타 폭격기들을 막으려 했으나 그 중 일부만 고타 폭격기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었을 뿐 대부분은 고타 폭격기에게 접근하지도 못함. 이 공습으로 런던에서는 총 162명의 사망자와 432명의 부상자가 발생. (런던을 대낮에 폭격한 독일 폭격기, Gotha G.IV.) 독일군의 고타 폭격기들은 전쟁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으나 영국의 군 편제는 바꿈. 이 폭격 사건에 충격을 받.. 2022. 10. 6.
뤼첸 전투 (5) - 뜻하지 않은 부자상봉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고 4개 마을로 달려가던 네의 제3 군단 휘하에는 총 5개 사단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연합군과 4개 마을 및 스타지들에서 교전 중이던 수암 사단과 지라르 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사단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네는 뛰어난 지휘관답게 무작정 4개 마을에 3개 사단 전체를 돌격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 중 마르샹(Marchand) 사단은 아이스도르프(Eisdorf)로 배치했고, 브레니에(Antoine François Brenier de Montmorand) 사단과 리카르(Étienne Pierre Sylvestre Ricard) 사단은 카야 마을 남쪽으로 진격시켰습니다. 그렇게 지시한 뒤 참모들과 함께 먼저 4개 마을로 달려간 네는 현장에 있던 수암 사단과 지라르 사단을 지휘하여 반격에 .. 2022. 10. 3.
레이더 개발 이야기 (3) - 컴퓨터가 없던 시절, 방공망의 두뇌 WW2 초기 영국공군 전투기 사령부는 제한된 수의 전투기 편대로 독일공군 폭격기를 막아내기 위해 레이더를 적극 활용. 그러나 당시의 기술적 제한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레이더 화면에 최초로 독일 폭격기가 포착된 이후 방위각과 거리, 고도를 계산하여 그걸 음성 전화로 전투기 사령부에 전달하고, 그걸 다시 적정 위치의 공군 편대에게 보내어 그 편대장이 해당 좌표를 무전기에서 들을 때까지는 최소 3분이 걸림. 당시 He-111 폭격기 최대 속도가 440km/h 였으니, 그냥 360km/h로 계산해도 3분이면 약 20km를 이동할 수 있는 거리. 그 정도면 아무리 눈이 좋은 조종사라고 해도 목표물을 놓치기 좋을 정도의 오차. (하인켈 (He-111) 폭격기) 따라서 레이더 관제소가 계속 그 폭격기를 추적하며 .. 2022. 9. 29.
뤼첸 전투 (4) - 바타이옹 카레(bataillon carré)란 무엇인가 비록 카야 마을로 내몰리기는 했지만, 원래 수암 사단의 병력 수가 프로이센군 2개 여단에 비해 크게 열세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지에 몰린 것은 수암 사단 대부분이 신병으로 이루어져 경험이 부족한데다 프로이센군이 2개 방향에서 공격해왔고, 결정적으로 포병 전력에서 크게 열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수암 사단의 포병대는 전투 초기에 프로이센 포병대와의 대결에서 밀려 파괴되었으므로 프로이센 포병들은 프랑스 보병들에게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정적으로 우월했던 포병 전력을 4개 마을 안쪽으로 전개시켰다면 수암 사단은 거기서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 지휘부는 노장 블뤼허부터가 그저 용감할 뿐 엉성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처음 그로스괴르쉔 마을을 공격할 때 적극 활용.. 2022. 9. 26.
레이더 개발 이야기 (2) - 어려움과 극복 솔까말 난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아무튼 Wilkins는 강렬한 반사파를 얻기 위해서는 폭격기 날개폭에 맞춰 약 25m 장파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 실제로는 꼭 그렇지는 않았으나, 파장이 cm 단위인 단파를 얻기 위해서는 고주파를 생성해야 했지만 어차피 당시 전자 소재 기술로는 그런 고주파 생성이 어려웠으므로 장파를 써야 했음. 문제는 수신 효율이 좋으려면 안테나의 길이는 파장 길이의 1/4이 제일 좋았다는 점. 그러니 25m 장파를 위해서는 안테나 길이가 6m가 넘었고, 대지로부터의 반사파 간섭을 피하려고 높은 곳에 여러 개를 매달아야 하다보니 엄청난 송전탑 같은 레이더 타워를 세워야 했음. 특히 수신 안테나는 금속 소재로부터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목재로만 만들었음. 그런데 수신 안테나는 특히나 높이가.. 2022. 9. 22.
뤼첸 전투 (3) - 불안한 시작, 소극적인 전개 원래 비트겐슈타인의 기본적인 작전은 나폴레옹의 주력부대가 뤼첸을 지나 라이프치히 쪽으로 충분히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가, 프랑스군 우익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당연히 프랑스군 주력부대가 저 멀리 지나간 뒤에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탁 트인 평야지대인 라이프치히 일대에서 정찰을 해보니, 저 멀리 프랑스군 주력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행군해가는 것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기병대들이 잡아온 프랑스군 포로들을 취조해보아도, 5월 2일 아침에 나폴레옹의 사령부도 뤼첸을 떠나 라이프치히로 출발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4개 마을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군기 빠진 후위부대 2천여명임을 참모 뮐링 대령 본인이 직접 정찰을 해보고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 2022. 9. 19.